인종대왕 - 생애 (11)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11월로 접어들면서 중종은 병이 갑자기 위중해졌다. 이에 효성이 지극한 인종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고 시선(視膳)과 시약(視藥)을 직접 하기도 하였다. 중종은 자신의 병이 쉽게 나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지 10월에 세종조에 문종에게 군국서무를 맡긴 것을 예로 들면서 세자로 하여금 군국의 서무를 참결(參決)하여 국정에 대한 일을 알도록 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은 세자의 직임은 문안과 시선 외에는 다시 할 일이 없다고 하고 중종이 아직 정사를 다스릴 수 있다 하여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불과 한달 사이에 중종의 병환은 더욱 악화되었고, 세자는 중종의 시중을 드느라 정사에 참여할 겨를도 없었다.

 어찌보면 덕망이나 학식으로써 모두에게 인정받은 인종이지만 실제로 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혀져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종이 즉위한 뒤 중국 사신이 보고 돌아갈 때 접반사(接伴使)에게 말한 내용은 그러한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즉,
 “당신의 임금은 성신(聖身)이요. 당신의 나라는 조그만 나라라 (성인 임금과) 서로 맞지 않으니 반드시 오랫동안 당신네의 임금이 되지 못할 것이오. 당신들은 실로 복이 없도다”
[<연려실기술> 권9 인종조 고사본말].라고 꼬집어 말했던 것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면서 중종은 오랜 근심 걱정 끝에 자주 병환이 났는데, 세자는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고 올렸고, 잠도 편히 자지 못하였다. 병환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위독하게 되어서는 옷을 벗은 적이 없고 음식을 들지 않으니, 수척한 형용은 보는 자로 하여금 안타깝게 하였다. 병환이 위독해지니, 조신(朝臣)을 나누어 보내어 종사(宗社) · 산천(山川) 에 두루 빌고, 바야흐로 겨울철인데도 목욕하고 분향하며 한데에 서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늘에 빌었는데 인명(人命)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내 중종은 11월 경술일 유시(酉時)에 환경전(歡慶殿) 소침(小寢)에서 승하하였고, 25년간 세자의 위에 있었던 인종이 즉위하게 된다. 인종은 11월 을묘일 창경궁(昌慶宮)에서 즉위하여 명정전(明政殿) 첨하에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하지만 중종이 훙서한 지 얼마 안되고 인종의 슬픔이 지나치므로 즉위례는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였다. 이에 종친 및 문 무 백관들은 모두 명정전의 동서쪽 뜰로 나아가고 통례가 태화문 밖에 나아가 나오시기를 청하였다. 시각은 이미 밤이라 캄캄하여 촛불을 밝히고 나오는데 태복(太僕)이 승여(乘輿)를 올렸으나 이를 물리치고는 타지 않고 간신히 걸어서 어좌(御座)의 옆에 이르러 차마 앉지 못하고 오랫동안 국궁(鞠躬)하고 서 있었다. 승지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자리에 오르신 뒤에라야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에 오르지 않으시니 예식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억지로 자리에 올라 앉았으나 오히려 불안한 자세였고 너무 애통하여 눈물이 비오듯이 떨어지자 좌우의 뜰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예식이 끝나자 상이 또 걸어서 여차에 들어가 면복(冕服)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

 인종은 이러한 슬픔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세종조에 자신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을 막고 또 사왕(嗣王)이 빨리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나친 거애를 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오히려 인종은 이미 온마음을 다해 그 애통함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는 결국 인종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결과를 불러왔다. 더불어 그 동안 닦아온 군왕의 도를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게 된다.
인종대왕 - 생애 (12)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인종이 즉위한 뒤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은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끊임없이 인종에게 신변보장을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문정왕후의 뜻에 대해 인종은 미안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인종에게 마음의 병을 일으켜 점점 병이 악화되었다.

 6월로 접어들면서 인종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다. 그 동안 중종의 상을 치르고 자신의 건강도 나빠 제대로 정무를 볼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이 인종은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였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방된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고, 조광조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을 신원해 주었다. 중종의 상을 치르고 병환을 앓은 때를 뺀다면 사실 정사 를 돌볼 시간은 없었지만, 일단은 당시 사림들의 숙원이던 기묘사화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인종은 대신들에게 이에 대해
 “조광조 · 김정(金淨) · 기준(奇遵) 등을 복직시킬 일과 현량과를 복과시킬 일은 선왕 때의 일이므로 서서히 하려 했던 것인데 이제 병이 이와 같으니 불가불 광조 등을 위해서 모두 직첩을 주고 현량과도 또한 복과하여 줌이 옳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6월 무오일 사시(巳時)에 벼락이 쳤는데, 하필이면 경회루에 쳐 기둥 여덟개가 모두 부서지는 괴변이 발생하였고 나무 조각이 못위에 뜨고 불빛이 타오르는 듯하였다. 이 일은 왕실에 무언가 불미스런 일이 발생할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과연 이틀 후 경신(庚申)일이 되자 인종은 밤 삼경에 기절하였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다. 인종은 자신의 명이 끝날 것이라 여기고 빈청에 모인 영상 · 승지 · 사관 등에게 전교하여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에게 전위한다는 뜻을 밝혀 이를 정하였다. 인종의 죽음으로 명종이 즉위하게 되지만 이기(李틒)나 윤원형과 문정왕후에 의해 조정은 그 정체성을 잃게 된다. 더불어 죽어서도 인종은 군왕으로서의 의의를 갖지 못하고 만다. 즉, 이기가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다섯달이 못되어 장사지냈던 것이다. 또한 인종의 담제(쩘祭) 뒤로 권간들이 집권하여 인종이 해를 넘기지 못한 임금이라 하여 문소전(文昭殿)에 모시지 않고 연은전(延恩殿)에 제사지냈던 것은 모두 수렴청정을 행한 문 정왕후와 윤원형, 이기 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인종의 죽음 뒤 윤원형과 문정왕후, 이기 등은 윤임 등이 경원대군을 추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림군(桂林君) 유(瑠)를 추대하려 한다는 것으로 모함을 하여 인종의 외가, 처가 및 근신들을 정치적 보복과 함께 숙청하였다. 16세기를 넘으면서 발생한 외척과 문정왕후의 권력은 그렇게 명종의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인종의 덕과 효성, 그리고 은혜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말았으니, 그 정성이 헛될 뿐이었다. 유일(遺逸)의 현명한 선비와 이황이나 조식과 같은 이들이 그 뜻을 펴지 못한 것도 어쩌면 명종의 시대가 갖는 한계인지도 모르지만 왕실의 위엄이 그만큼 추락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인종의 훙서를 애도하는 마음은 단순히 인군(人君)에 대한 애도가 아니었다. 그의 능력과 그의 인품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한 데 대한 통곡일 수도 있었다. 중국 사신이 말한 내용이 그대로 맞아떨어졌으니 진정 성군을 맞을 기회를 모두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다음 인종의 묘지문에 보이는 글은 그러한 심상을 알게 해준다.
인종대왕 - 생애 (13)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왕이 동궁(東宮)에 계시던 20년 동안은 한가히 계실 때일지라도 측근의 신하가 한 번도 게을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성인의 학문을 독실히 믿어서 순일(純一)하고 또한 그치지 않으신 보람이 한 해가 못되는 사이에 나타난 것은 형용하여 말할 수 없으나, 명령에 나타난 것으로 말하면, 아버지의 신하를 갈지 않는다는 말씀이 체직(遞職)을 논계(論啓)할 때에 나오고, 반드시 어진 재상을 얻어야 한다는 분부가 복상(卜相)하는 날에 나타났다. 하늘의 재앙이 이변을 보이면 자신을 반성하고 직언(直言)을 구하시고, 백성의 힘이 고달프면 바치는 것을 덜고 조세를 줄이셨다.
 청백(淸白)을 포장(褒奬)하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리자 선비들이 격앙할 것을 생각하였고, 학교를 정비하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라는 분부가 여러 번 하유되어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바르게 할 줄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앞으로 그 정치의 보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겨우 한 해 동안의 될 만함을 시험하고 3년 동안의 성취를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인종은 이 해 10월 15일 갑진에 고양군(高陽郡)의 치소(治所) 남쪽에 있는 희릉(禧陵) 곁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안장(安葬)된다. 능은 그의 효성을 나타내기 위해 효릉(孝陵)이라 하였고 전(殿)은 영모(永慕)라 하고 시(諡)는 헌문 의무 장숙 흠효(獻文懿武章肅欽孝)라 하게 되며,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가 1577년(선조 10)에 세상을 떠나자 이들 부부를 같이 효릉에 모시었다.
명종대왕 - 생애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16세기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국내의 정치상황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어갔고, 재해와 가뭄 등도 잇따라 민심이 흉흉하였다. 중종이 승하한 뒤 만인의 기대를 모았던 인종이 즉위하자 점차 정국도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다. 사림들도 성리학적인 도학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음을 축하하였다. 그것은 무오 · 기묘사화 등으로 정치세력에서 물러났던 사림이 재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됨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실의 상황은 기대와 달리 흐르게 된다.

 문제는 중종 재위 후반기부터 표면화되는데 그 요인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암투와 갈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대윤과 소윤의 갈등, 그리고 윤원로 · 윤원형 형제간의 대립이 그것이라 하겠다. 인종의 즉위로 그의 외숙부인 윤임 등의 대윤이 득세하는 것 같았으나 문정왕후가 버티고 있어 윤원형 등 또한 등용되었다. 인종의 병약한 체질과 문정왕후에 대한 심적 갈등은 인종의 천명을 단축시켰고, 정국은 대윤으로부터 소윤으로, 소윤에서도 윤원형에게로 그 권력이 옮겨가게 되니 윤원형 등은 군주보다 그 권한을 더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명종조의 권력구성을 보게 되면, 문정왕후 · 윤원형 등 명종대왕(이하 명종이라 함)의 외척세력, 이량(李樑) 및 심씨 일가 등의 명종비의 친족세력으로 움직이게 된다.

 왕실내의 갈등은 중종말기에 이르게 되면서 매우 첨예하게 되었다. 그 계기는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을 낳으면서 시작된다. 이것이 1534년 5월 22일의 일이었다. 인종이 원손을 낳지 못하고,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성장해가면서 이들을 둘러싼 갈등은 부왕인 중종의 심적 갈등을 불러일으켰으며 나아가 외척세력 간의 대립을 가져왔다.
 왕권이 강화되어 절대군주권을 가졌을 때 신권은 왕권에 대해 관여할 수 없었으나, 중종반정이 이루어지면서 반정세력에 의해 추대된 중종으로서는 그 한계를 절실히 느껴야만 했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중종이 그 조정능력을 통해 권력의 균형을 가져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군주권과 외척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림세력의 제거만을 야기시켰다. 따라서 왕실 세력의 약화 및 사림세력의 후퇴, 외척 및 권신세력의 강화는 결국 외척정치의 폐단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중종 및 인종의 서거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왕실과 정치권의 관계는 명종의 즉위로 외척의 강성이라는 예상한 바대로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축으로는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있었던 것이다.


 생애

 명종의 휘는 환(?)이며, 자는 대양(對陽)으로 중종의 정비 소생으로서는 둘째 아들이다. 모비(母妃)는 문정왕후 윤씨로 그녀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의혜(懿惠) · 효순(孝順) · 경현(敬顯) · 인순(仁順) 공주와 명종이 그들이다. 명종의 외숙으로는 윤원로와 윤원형이 있다.

명종대왕 - 생애 (2)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명종 역시 태어나서는 다른 왕자 및 공주군과 마찬가지로 궐밖에서 자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역시 민간의 생활을 겪어 그 고락을 알아야 한다는데 있었다. 한편으로는 왕자 · 공주와의 친분관계 내지는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왕실과 자신들의 입지를 연결시키려고 하는 배경도 작용하였다. 다만 세자나 대군 등 왕위계승에 있어 직접적 관련이 있는 신분은 종실 등에서 키웠는데, 후에 명종이 인종을 계승할 때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에서 옮겨오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종 34년 12월 중종은 사정전에서 친히 정사를 보았다. 이 때 명종에게 대군의 자를 써서 내리면서 대군이 7세가 되면 작위를 봉하는 관례에 따라 경원대군(慶原大君)으로 작호를 정하였다. 이듬해인 35년 경원대군은 여름을 넘기고 가을로 들어서면서 아동기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창진(瘡疹)을 앓았으나 다행히도 주위의 보살핌으로 무사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성장하는 경원대군은 모후인 문정왕후와 부왕 중종에게 많은 걱정을 안겨주었다. 당시 중종은 보령 53세였고, 문정왕후는 40세였다. 이러한 나이차는 문정왕후로 하여금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대군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로서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중종에게 대군에 대한 신변보호를 계속해서 주장하는 한편, 자신의 형제들인 윤원로 · 윤원형을 다시 정계로 끌어들였다.

 문정왕후가 정치적 위협을 느낀데에는 인종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세력으로부터 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인종의 가장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던 인종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김안로가 중종 32년에 사사되었다. 또 외숙인 윤임이 있었지만 그는 본래 무인출신인지라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음험하거나 모사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호탕한 전형적인 무인의 기질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문정왕후 등을 제거하고자하는 세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세자인 인종을 보호하고자하는 우려의 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게 되는데 윤원로는 오히려 이러한 기세를 역이용하여 이들이 대군과 중궁인 문정왕후를 폐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허언을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실제 당사자들인 세자와 경원대군으로 하여금 반대로 우애를 더욱 깊게 하였다.

 중종 33년에 중종이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한 것이나, 중종 38년 정월의 동궁 화재 사건 등은 그 갈등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중종은 장성한 세자와 아직 어린 경원대군의 사이에서 대군의 장래 안전을 걱정하게 된다. 더구나 세자에게 후사가 아직 없다는 것은 왕실의 내일을 더욱 혼란에 빠뜨릴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시의 실정을 기록하고 있는 <연려실기술>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이때 동궁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신민들의 큰 걱정이 되었다. 이에 원로가 요리조리 이간질을 꾸며서 밖으로는 세자를 바꿔 세운다는 소문을 만들어 길거리에 전파시키고, 안으로는 대군이 위태롭다는 말로써 왕비를 현혹시켰다. 이 말이 임금에게까지 들어가니, 임금도 또한 터무니 없는 뜬소문을 퍼뜨리는 간특한 꾀인줄 모르고 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어루만지 면서, `네가 공주로 태어났으면 무슨 보존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었으랴만 네가 대군으로 태어났으니 불행함이 심하도다\' 하고 눈물까지 흘렸다. 이리하여 점점 의심하는 마음이 쌓여지매 안팎에 모두 황황했었다.”
명종대왕 - 생애 (3)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중종의 어린 아들을 아끼는 마음이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적어도 군주로라면 그 한계를 뛰어넘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종의 애매모호한 적장자인 인종과 이모제인 경원대군에 대한 인식이 결국 왕위계승상의 갈등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각 정치세력이 인종과 명종을 둘러싸고 대립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이를 위해 당시 인종과 명종을 둘러싼 혼인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인종의 경우 외조부인 윤여필과 외숙인 윤임이 있으나 당시 윤여필은 이미 70줄에 이른 나이였으며, 다만 윤임이 세자의 외숙으로서 동궁의 보호를 자처하였지만 그 자신의 권력은 크지 않았다. 인종의 누이인 효혜공주의 경우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에게 하가(下嫁)하였는데 김희는 김안로(金安老)의 아들이다. 하지만 효혜공주가 1533년(중종 28)에 별세하고 또 김안로도 중종 32년에 사사된 뒤로 세자의 후원세력으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경원대군의 경우를 살펴보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문정왕후가 있었고, 다음으로 그녀의 형제들인 윤원로와 윤원형이 그를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대군의 누이들로서 의혜공주(懿惠公主)는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에게, 효순공주(孝順公主)는 능원군(綾原君) 구사안(具思顔)에게, 경현공주(敬顯公主)는 영천위(靈川尉) 신의(申훳)에게 시집을 갔고, 인순공주(仁順公主)는 일찍 죽었다. 이들은 부마로서 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대군의 후원세력으로 동원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윤원형은 그의 첩 난정(蘭貞)을 매개로 문정왕후와 계속 통하면서 이기(李틒) · 정순붕(鄭順朋) 등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넣어 인종 사후 곧바로 을사사화를 일으켜 반대파인 윤임 등과 대간 및 사림들, 그리고 윤원로 등을 숙청하였다. 명종은 또한 심연원(沈連源)의 아들 심강(沈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그녀가 바로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가 된다. 당시 심연원은 재상으 로서 다른 신료들이나 사림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은 아니었으며, 그는 을사사화 당시에도 나름대로 구하기 위해 마음을 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동궁인 인종과 경원대군을 둘러싼 인척관계를 놓고 볼 때 인종의 즉위 후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뒤따랐다면 조선중기의 역사는 달리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제(孝悌)\'를 생활의 신조로 삼은 인종에게서 그러한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물론 당시 학문의 성향이 <소학>의 내용을 생활 규범화하는 것이었기에 이는 더욱 그러하게 되었고 나 아가 왕실의 예법도 특수한 예법과 행동양식보다도 사대부의 생활양식이 더 요구된 면이 있었다. 군주로서 인종은 어찌보면 가장 성리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성향에 대해 가장 염려했던 것은 오히려 사림에 속하는 신료들이었다. 이언적과 같은 이가 동궁을 보호할 것을 요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명종대왕 - 생애 (4)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경원대군은 9살이던 중종 37년 11월에 유학(幼學) 심강(沈鋼)의 딸을 배필로 맞게 된다. 그런데 39년 12월에 경원대군은 창진이 심해졌고, 중종의 상이 이로 인해 중지되기도 하였다. 인종은 즉위하면서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을 매우 아꼈다. 사실 그들간에는 거의 20여 년이라는 나이차가 있었다. 인종도 자신의 후사가 생기지 않았고 또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관계로 세손이 생길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따라서 인종은 일찌감치 동생 경원대군을 후사로 내심 생각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성품상 계모인 문정왕후와 동생을 생각하여 자식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는 일설도 그래서 떠돌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럴 개연성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주위의 갈등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의 관계는 우애로 가득했으며, 인종은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러한 애틋한 정을 그대로 나타냈다. 즉, 인종은 훙서하기 전에 대신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후사를 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질병은 아마 장차 일어날 수 없을 듯하다. 내가 사자(嗣子)가 없고 선부왕의 적자는 오직 나와 경원군(慶原君) 두 사람뿐이다. 경원군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총예하고 숙성하니 후사를 맡길 만하다. 경 등은 함께 보좌하여 그를 세우라.”

 이 때 왕실의 종실들은 나이 어린 경원대군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장성한 나이였다. 특히 당시 왕자군으로서 가장 인망이 높았던 이로는 계림군(桂林君) 유(瑠)가 있었다. 그는 장경왕후의 아버지인 윤여필의 외손이기도 하며 윤임과는 숙질관계였고, 성종의 아들인 계성군 (桂城君) 순(恂)의 양자로 습봉(襲封)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종과 비슷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려실기술>에서 말하는 그의 성품은 어릴 적부터 호사스런 생활을 하였으나 조금도 사냥이나 유흥 · 여색 같은데 마음을 쓴 일이 없으며, 서책을 저장하고 문필에 마음을 두어 여러 왕족 중에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 다. 뚜렷한 왕실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이러한 그의 명성은 오히려 그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고, 문정왕후 역시 마땅찮게 생각하고 있었던 차였다. 따라서 인종의 죽음과 함께 그는 윤원형이 만든 을사사화에 연루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외에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소생으로 두 아들이 있었는데 금원군(錦原君) 영과 봉성군(鳳城君) 완(췀)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각 도사(都事) 정승휴(鄭承休)의 딸과 정랑(正郞) 정유인(鄭惟仁)의 딸을 맞아들였다. 특히 봉성군은 총명하기로 당시 소문이 나 있었고, 윤임 등에 의해 그가 장차 인종의 후사로 추대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윤원로나 윤원형은 이러한 봉성군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고, 따라서 그의 제거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중종의 자식들 가운데 이렇게 인망이나 명망이 있을 경우 이는 매우 위험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들 자신은 가만 있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행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당시의 정국은 그렇게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혈통에 의해 군주권이 세습되는 왕조사회에 있어서도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였고, 이들이 제대로 합쳐져야만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즉, 천명을 받아야 비로소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이러한 데서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즉위하기까지의 노력은 결국 즉위 후의 필연성 곧 천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명종대왕 - 생애 (5)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사실 군주는 다변(多變)하면서도 종사와 왕실을 유지한다는 축으로서 정국을 운영해 가야한다. 가장 군주다운 군주는 덕만 있어도 안되고 지나치게 엄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독단으로 흘러서도 안되며, 지나치게 패도적이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염치나 명분, 충효, 인 · 의 · 예 · 지 · 신(仁義禮智信)이라는 논리가 군주에 있어서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군주는 수없이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또 그러면서도 하나의 몸체를 가지고 있어야만 만민의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본다면 명종의 경우 본인 스스로의 의지라기 보다 모후인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의 척신(戚臣) 등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는 점은 그의 재위기간 동안 군주권의 한계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는 우연적인 요소도 존재하였다. 즉,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승하하였다는 점과 그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점, 또 문정왕후에게 아들이 명종 하나였다는 점, 왕실 내에 그와 맞경쟁할 수 있는 대군이나 왕자군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비록 열두살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조선 13대 군주로서 그를 용좌에 앉혔던 것이다.

 왕위계승의 경우 부자지간이 아닌 형제간 혹은 반대로 조카를 숙부가 계승하였을 경우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명분상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즉 인종과 명종은 형제지간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부(父)와 자(子)라는 계서(階序)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문정왕후가 실 질적인 모후이지만 명분상은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 박씨가 당연히 모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왕실의 계승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순서에 있어 혼란을 피하는 방안이었고, 이것이 바로 왕실이 갖는 오례(五禮)적 질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종과 명종의 관계는 그 둘만의 관계가 아니었다. 이들을 둘러싼 제반 정치세력의 대립갈등이 첨예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적대적 관계는 결국 한 측의 몰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종 자신이 자의지(自意志)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사정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또 사실 사왕(嗣王)이 어릴 경우 국정의 운영을 보조할 수 있 는 제도가 있는데 수렴청정(垂簾聽政)과 원상제(院相制)가 그것이다. 특히 이러한 선례가 있어 참고되기도 하였다. 즉, 예종이 승하한 뒤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고, 한명회 등의 대신들이 원상이 되어 보좌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인종의 승하 뒤 국정의 공백을 메우고 정치 행정 등의 혼란 을 막기 위해 문정왕후와 대신들의 섭정이 제시된다.

 물론 수렴청정을 할 경우 그 주체인물로 친 모후인 문정왕후와 인종비인 인성왕후 박씨가 있었으나 중국에서의 선례에서 보다 서열상 위에 있는 왕후가 청정(聽政)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 하여 문정왕후가 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실세가 작용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명종대왕 - 생애 (6)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다음으로 원상을 구성하는 인물들로 홍언필(洪彦弼) · 윤인경(尹仁鏡) · 류관(柳灌) · 이언적(李彦迪) · 권벌(權쮫) · 이기(李틒) · 정순붕(鄭順朋) · 임백령(林百齡) · 허자(許磁)가 있었는데 이들이 일률적으로 한 번에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정순붕이나 임백령, 허자 등은 나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매일 돌아가면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면서 왕의 기후나 왕실 및 국정의 일을 처리하였고, 어린 왕으로서도 이들 원로대신들을 의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상제는 명종 2년 2월 신묘(9)일에 조강(朝講)에서 원상 홍언필 등이 `중종의 상제(喪制)가 이미 끝났고 명종의 정사도 흠이 없으니 원상을 파해도 될 것\'이라는 상언(上言)에 따라 명종대의 원상제는 파하여지게 된다. 바로 명종이 친정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기구 등이 마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명종은 앞서도 살핀 바와 같이 세자로 책봉된 뒤 인종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대군으로서 봉하여져 있다가 인종의 유고 뒤 왕위계승자로 지명받아 종묘사직을 계승하였으며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열 둘이었다. 따라서 명종의 대군시절 군주로서 가져야 할 덕목이나 가치관 등에 대한 교육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원인으로는 사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대군 및 왕자들이 학문을 닦는 것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두어왔으며, 심지어는 생활에 대한 보장이 되어 있으므로 이름자나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만 알면 됐지 더 이상은 필요없는 것으로 왕실에서는 이해한 데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왕자들은 사냥이나 음주가무 등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여 종친부 등에서 이들에 대한 교육을 하거나 혹은 사부(師傅)를 두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즉 순수하게 학문을 닦으려는 왕자는 매우 드물었는데 공부를 하더라도 관직에 나아가거나 왕위계승자로 지명되기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덕과 인을 쌓고 학문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아 사림이나 대신들 사이에 인망이 있게 되면 오히려 사람을 모아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치적 탄압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 가장 가까운 예가 안평대군이 제거되는 과정이나 계림군(桂林君) 유(瑠) 및 봉성군(鳳城君) 완(췀)이다.

 명종은 위로 성종이나 중종이 경연 등을 통해 군주의 덕이나 인, 학문을 닦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먼저 경연의 장소를 충순당(忠順堂)으로 하여 효제(孝悌)를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담고 있는 <소학(小學)>에 대한 강습을 시작하도록 하였으며, 또 석강(夕講)과 야대(夜對)에서는 <효경(孝經)>을 강하게 된다. 그리고 즉위년 7월 경인(30)일에는 다음과 같이 원상인 영의정 윤인경, 좌의정 류관, 좌찬성 이언적이 경연사목(經筵事目)을 써서 아뢰었다. 즉,

 “졸곡 전에 영경연(領經筵)이 입시하면 상께서는 최복(衰服)을 입으시고 그 나머지의 진강(進講) 때는 포의(布衣) · 포관(布冠) · 마대(麻帶)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경연을 처음 여는 날과 1일 · 5일 · 11일 · 15일 · 21일 · 25일에는 영사(領事) 1명, 경연 당상 1명, 승지 1명, 대간 각 1명, 경연관 2명, 주서(注書) · 사관(史官) 각 1명이 입시하게 하고,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에는 승지 1명, 경연관 2명, 주서 · 사관 각 2명이 입시하게 하였습니다. 조강(朝講)에는 진강관(進講官)이 세 번 음독(音讀)하고 두 번 해석하면 상께서는 음독과 해석을 각기 두 번씩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전에 들어 가시어서는 음독 서른 번 과 해석 열 번을 하셔야 합니다. 주강에는 전하께서 앞서 공부한 것을 음독 한 번에 해석 한 번을 하신 뒤에 진강관이 음독과 해석을 각각 두 번씩 하면 상께서는 또 음독 네 번에 해석 한 번을 하셔야 합니다. 석 강에는 진강관이 음독 세 번에 해석 두 번을 하고 나면 상께서는 음독과 해석을 각각 두 번씩 하시며 내전에 들어 가서는 음독 서른 번과 해석 열 번을 하셔야 합니다. 다음날 조강에는 상께서 앞서 공부하신 것에 대해 음독과 해석을 각기 한 번씩 하시고 나면 진강관이 전처럼 진강하며, 다음날 석강에도 상께서는 앞서 공부하신 것에 대해 음독과 해석을 각각 한 번씩 하시고 나면 진강관이 전과 같이 진강하게 하였습니다.”


명종대왕 - 생애 (7)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이와 같은 경연사목에 대해 명종은 거의 그대로 따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 후 25세가 되던 명종 13년까지 매년 1백회 이상의 경연을 시행하여 학문 수양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으며 이후는 건강이나 왜변 등으로 인해 그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이후 계속해서 명종은 <시경(詩經)> · <대학(大學)> · <중용(中庸)> · <논어(論語)> · <맹자(孟子)> · <대학연의(大學衍義)>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을 경연을 통하여 강하게 된다. 초반기에는 보양 및 덕성을 기르는 기초학문으로서 사서삼경을 강하고 심화되면 역사적 사실을 통해 군주의 도를 전해주고 있는 <대학연의>나 <자치통감강목>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사실 조선의 역대 군주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경연의 교육프로그램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명종의 재위기간이 쌓여가면서 왕실과 조정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명종 5년 겨울로 들어서면서는 왕실에 매우 기쁜 소식이 전해지게 되는데 인순왕후 심씨가 아기씨를 배태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순왕후는 모든 행동거지나 음식 그리고 태교를 조심스럽게 하였다. 심씨는 이듬해인 6년 5월 을묘일에 원자를 낳았다. 그리고는 채 1주일도 안되어 원자는 궐 밖으로 피우(避寓)시키게 된다. 원자는 이듬해 7월에 부왕인 명종으로부터 아명(兒名)으로써 곤령(줸齡)이라는 이름을 받고 곧 <선원록(璿源錄)>에 수록되었다.

 명종 10년 윤11월 원자의 나이가 5살이 되자 사간원 대사간 박민헌(朴民獻) 등이 차자를 올려 세자를 책봉할 것을 아뢰었다. 당시 원자에 대한 저간의 평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5살인데도 영명하고 슬기로움이 이미 나타났으니, 실로 종사(宗社)의 한없는 경사라고 칭할 정도였다. 다만 보양하는 도를 아직 거행하지 않고 책봉하는 예는 원자가 아직 강명하지 않으니 문제가 발생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4살때 보양하는 재상(宰相)을 뽑고 6살 되던 해에 책봉된 인종의 예를 따라 효인(孝仁)의 훈계와 예의의 가르침을 닦고 거행하며, 춘 방(春坊)의 설치와 옥책(玉冊)의 의식을 토론해야 한다고 청한 것이다. 일단 명종은 이러한 청에 대해 보양하는 도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원자가 아직 대역(大疫)을 치르지 않았으며 책봉하는 예는 옛 규례가 있으니 위에서 참작하여 하겠다라고 보류시켰고, 명종 12년 8월 사정전(思政殿)에서 원자의 나이 7살이 되자 세자책봉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 명단자(命名單子)에 `지(?)\'로 낙점되었지만 뒤에 다시 관례(冠禮)를 하면서 이름을 부(?), 자(字)를 중명(重明)이라 하게 된다.

 세자로 책봉되었다 함은 곧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한 것을 뜻한다. 따라서 차기 정권에 입각하려 하거나 혹은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세력들은 어떻게 하든 세자와 연결하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혈연적 관계면 더욱 좋고 아니더라도 세자사부로 들어간다면 최소한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먼저 이 해 6월 갑진에 세자사부가 정해지는데, 심연원은 겸세자부(兼世子傅)로, 안현(安玹)을 겸세자이사(兼世子貳師)로, 홍섬(洪暹)을 겸세자좌빈객(兼世子左賓客)으로, 김귀영(金貴榮)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이언충(李彦忠)을 필선(弼善)으로, 장사중(張士重)을 시강원설서로 삼았다. 7월 계축(2)일에도 또한 조언수(趙彦秀)를 예조참판 겸 세자좌부빈객으로, 홍천민(洪天民)을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노경린(盧景麟)을 세자시강원 사서로 삼았다. 이 밖에도 상진(尙震)을 세자부(世子傅)로, 원계검(元繼儉)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으로, 고경명(高敬命)을 세자시강원 사서로 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