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 시대상 (3)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후원(後苑)에 응준방(鷹?坊)을 두고, 팔도의 매와 개 및 진귀한 새와 기괴한 짐승을 샅샅이 찾아 모두 가져오게 하였으며, 사나운 짐승을 생포하여 압송해 와서 우리에 길렀다. 선릉(宣陵) · 광릉(光陵) · 창릉(昌陵)에 수시로 가서 사냥하였다. 선성(先聖) · 선사(先師)의 위판(位版)을 처음에는 태평관(太平館)에 옮겼다가 얼마 뒤에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기고 또 서학(西學)에 옮겼다. 그리고 강당(講堂)과 사전(祠殿)은 흥청들이 음희(淫?)하는 장소로 변하였다. 사선(私船)을 빼앗아 경회루(慶會樓)에 끌어들여서 못 위에 연결하여 놓고, 그 위에 채색 무대를 만들어, 첫째 `만세(萬歲)\', 둘째는 `영충(迎忠)\', 셋째는 `진사(鎭邪)\'라 하였는데, 세 산이 높직이 치솟아 사치와 화려함이 극치에 달하였다. 궁전(宮殿)과 사우(寺宇)를 연이어 짓고 은은히 보이도록 온갖 기묘한 솜씨를 다 부려 화려한 채색이 눈부셨는데, 집을 짓는 데에 쓰인 물건은 모두 시인(市人)에게서 나왔다. 스스로 시를 짓기를,

 `씩씩한 기운 어린 선봉(仙峯)은 푸른 하늘에 치솟았고,
 신비한 자라 신령스런 학은 때맞추어 조화되었도다.
 뭇 영걸은 향연에 감동되어 충성스런 마음이 흡족하고,
 외로운 귀신은 유수(幽囚)되어 오장 육부가 타도다.
 안개 어린 누각의 단장한 자태 용가(龍駕)가 우뚝하고,
 구름 사다리의 가관(歌管), 봉루(鳳樓)는 아득하도다.
 머물러 완상하려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영원히 잘살도록 하기 위함이로다.\'

라 하였다. 또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세 산의 이름붙인 뜻을 시로 지어 편액(扁額)에 쓰게 하고 흥청(興淸)을 거느리고 한껏 향연하였다. 또 그네놀이를 벌여서 모두 여름이 지나기까지 철폐하지 않았다.
 도성(都城) 사방 1백 리 이내에는 금표(禁標)를 세워서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고, 금표 안에 들어오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논죄했다. 항상 단기(單騎)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치달리고 왕래하였으며 따로 응사군(鷹師軍) 1만여 명을 설치하여 사냥할 때는 항상 따라다니게 하였다. 저자도(楮子島) · 두모포(豆毛浦) · 제천정(濟川亭) · 장단(長湍)의 석벽(石壁), 장의(莊義)의 수각(水閣), 연서정(延曙亭) · 망원정(望遠亭) · 경회루(慶會樓) 후원(後苑) 등의 곳에서 항상 흥청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노닐며 향연하니, 당시 이를 일컬어 작은 거둥, 큰 거둥이라 하였다.

 사직북동(社稷北洞)에서 흥인문(興仁門)까지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표를 세우고, 인왕점(仁王岾)에서 동쪽으로 타락산(퀮駱山)까지 크게 민정(民丁)을 징발하여 높직이 돌성[石城]을 쌓았다. 광주(廣州) · 양주(楊州) · 고양(高陽) · 양천(陽川) · 파주(坡州) 등의 읍을 혁파(革罷)하고 백성들을 모두 쫓아내어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살게 하고, 혜화(惠化) · 흥인(興仁) · 광희(光熙) · 창의(彰義) 등의 문을 폐쇄(閉鎖)해 버렸다. 또 나루터[津渡]를 금지하고 다만 육로와 교량만 통하게 하였으므로, 나그네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땔나무를 하기도 또한 어려웠다.
연산군 - 시대상 (4)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창덕궁(昌德宮) 후원에 높이가 1백여 척이나 되는 누대를 쌓고, 이름을 서총대(瑞?臺)라 하였다. 그 위는 1천여 인을 앉힐 만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못을 파고 그 곁에 정자를 지었다. 또 창덕궁 후원에서 경복궁 · 경회루까지 임시 건물 3천여 칸을 이어 짓고, 망원정 아래의 조수(潮水)를 끌어들여 창의(彰義)의 수각(水閣) 아래까지 파서 통하게 하려고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수도(水道)의 깊이 · 너비 · 고저(高低)를 측량하게 하고, 거기에 동원될 역부(役夫)의 수를 헤아려보니 50여만 명이나 되었는데 다음해에 역사를 시작하려다가 미처 성취하지 못하였다. 수리도감(修理都監) · 축성도감을 두고 삼공(三公)으로 도제조(都提調)를 삼았으며, 그 나머지 부제조(副提調) 및 낭관(郞官) · 감역관(監役官)이 2백여 원(員)이나 되었는데, 이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맡긴 결과 백성을 몹시 가혹하게 침탈하였다.

 축장군(築墻軍) · 축대군(築臺軍) · 착지군(鑿池軍) · 이궁 조성군(離宮造成軍) · 인양전 조성군(仁陽殿造成軍) · 작재군(斫材軍) · 유재군(流材軍) 따위를 일시에 아울러 징발하여 독촉해서 부역(赴役)하게 하니, 민간이 소란스러워 집에는 남은 장정이 없었고, 유랑하거나 피난하여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다. 부역은 과중하고 양식은 결핍하여 굶어 죽는 사람이 있었으니, 숭례문(崇禮門) 밖 노량(路梁) 사이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연산은 스스로 그 잘못을 알고 말하는 이가 있을까 두려워서, 경연(經筵)을 폐지하고 사간원(司諫院) · 홍문관(弘文館)을 혁파했으며, 지평(持平) 2원(員)을 감하였다. 무릇 상소(上疏) · 상언(上言) · 격고(擊鼓) 등의 일은 일체 모두 금지하였다. 형벌은 극히 참혹하여, 낙신(烙訊) · 촌참(寸斬) · 부관 참시(剖棺斬屍) · 쇄골표풍(碎骨飄風)을 상전(常典)으로 삼았다.

 내인을 핍박하는 말을 한 자는 촉상(屬上)이라 하고, 논계(論啓)에 관계되는 말을 한 자는 역명(逆命)한다 하면서 이리저리 얽어 죄를 만들어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또 따로 밀위청(密威廳)을 설치하고 항상 승지를 보내어 죄수를 국문하였는데, 포학하고 지독하여 억울하게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 이후의 일기사초(日記史草)에 만약 직언당론(直言?論)이 있으면, 모두 도려내고 삭제하게 했으며, 가장(家藏) 사초도 또한 거둬들이게 하였고, 또 인군의 과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겸대춘추(兼帶春秋)의 호칭을 모두 혁파하고 타관(他官)으로 교사관(校史官)이라 일컬어, 즉위 뒤의 『실록(實錄)』을 찬집(撰集)하게 하였다. 또 스스로 존숭(尊崇)하기를, `헌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 하고는 하례를 받고 대사령을 선포하였다. 예로부터 난폭한 임금이 비록 많았으나, 연산과 같이 심한 자는 아직 있지 않았다.”
중종대왕 - 생애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생애

 조선 왕조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대체로 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는 성종조로 보고 있다. 성종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 속에 유교적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구현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종대왕(이하 중종이라 함)은 성종의 치세 후반기에 태어나 폭압의 연산군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폭정이 거듭되던 연산군 12년(1506)에, 신하들에 의해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는 반정(反正)이 단행되고, 그들의 추대에 의해 중종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의 제 11대 국왕에 등극하였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반정의 명분에 걸맞게 패륜의 군왕을 왕자의 작호인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유배보내고, 폭정으로 인해 흐트러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향촌에 있으면서 유학을 연마하던 선비, 즉 사림(士林)을 널리 등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너진 유교적 이상정치를 부활시키고,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성리학적 윤리와 향촌자치를 고양하였다. 중종 시대의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림의 정치적 ·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여망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사림의 중용에 토대를 둔 중종의 왕도정치(王道政治)는 그러나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는 사림의 급진적 개혁 정책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공신 · 친인척 신료[勳戚臣僚]들과 마찰을 불러 급기야는 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후 중종의 집권 후반기는 그 후유증으로 훈척신료들의 전횡이 나타나는 등 정국의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지만, 무속 · 도교 등의 미신타파와 억불정책 그리고 백성에 대한 교화사업을 정력적으로 펼쳐 사회 전반적으로는 유교적 도덕 윤리가 정착되어 갔다.

 중종의 시대에 대외적으로는 경상도 해안 일대에서의 삼포왜란과 갑산 · 창성 등지 북방에서의 야인들의 내침 등 남 · 북쪽에서 크고 작은 외침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국방 정책으로 왜인들의 내왕을 금지시키거나 북쪽에는 의주산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하였으며, 무술을 가르치는 무학과를 설치하고 편조전 · 벽력포 등과 같은 무기를 제작하여 국방 력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또한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는 한편, 왜구 등 외침에 대비하여 비변사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중종의 집권 초반기 조광조 등 사림세력의 이상적 개혁정치는 집권 중반기에 일어난 기묘사화와, 사림의 실각 후 훈척세력간의 알력에 의한 정국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퇴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후대 국왕들이 본격적인 사림 정치를 여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6세기의 문을 연 중종은 요컨대 정치 · 사회 ·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부왕인 성종의 뒤를 이어 조선을 유교적 이상사회로 만들려는 노력이 돋보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어 태종 · 세종을 거치면서 왕조의 문물은 정비되었고, 제9대 성종에 이르러 그러한 작업이 1차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조선 왕조의 태평성세로 기록되는 이 시기에, 조선의 제11대 국왕 중종은 왕조가 개창된 지 97년 되는 해인 성종 19년(1488) 3월 5일,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왕의 이름은 역(쵞)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라 하였다.

중종대왕 - 생애 (2)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아버지 성종은 1469년 11월, 제8대 예종의 뒤를 이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수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었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두루 통하고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능하여 조선 왕조에서 세종 다음으로 훌륭하게 다스린 성군으로 이름이 높다. 성종은 재위 25년 25일만인 1494년 12월 24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성종은 생전에 중종의 친어머니인 정현왕후를 포함하여 세 분의 왕비와 많은 후궁 · 비빈을 두어 모두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었다. 왕조 사회에서 제왕의 자녀 수는 제왕 당대의 업적과 대체로 비례한다는 연구 결과를 입증하는 셈이다.

 성종에게는 일찍이 첫 왕비로서 1년 연상인 공혜왕후(恭惠王后)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있었다. 영의정 한명회의 둘째 딸로서, 성종의 숙모이자 예종비인 장순왕후의 아우였던 공혜왕후 한씨는 성종 5년(1474) 4월 15일 자식도 없이 1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성종은 대왕보다 12년 연상의 후궁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총애하였는데, 윤씨가 아들을 낳자 왕비로 책봉하여 제헌(齊獻)이라 옥책(玉冊)을 내리니 이 사람이 연산군의 생모인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죻)의 딸 함안(咸安) 윤씨이다.

 윤씨는 그러나 부덕(婦德)이 없고 질투심이 강하였다. 후궁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급기야는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세자의 어머니인 왕비에 대한 폐비론은 일부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수대비, 한 명회의 훈구 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세력이 가세하여 실현되어, 성종 10년(1479)에 윤씨를 폐비시켜 사가(私家)로 내쫓았다. 폐출된 지 3년 후인 성종 13년(1482) 당시 7세이던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을 때 조정에서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있었다.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는데, 이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사가 로 내려간 윤씨가 뉘우침이 없다고 하여 성종을 종용한 끝에 결국 사약을 받게 하였다.

 성종 13년 8월 16일에 윤씨가 마침내 사약을 받고 죽으니 그 때 윤씨 나이 38세였다. 세자 연산군 융은 자신의 어머니 윤씨가 폐출될 당시 4세였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인 세자 융을 혹독하게 대하고, 반면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소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사랑했다. 이런 성장배경 탓에 세자는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이었다. 결국 윤씨의 폐비와 사사는 이 후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화근이 되었다.
중종대왕 - 생애 (3)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제헌왕후 함안윤씨가 폐출된 이듬해인 성종 11년(1480) 11월에 성종은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을 세 번째의 왕비로 맞이하였는데, 이분이 바로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파평윤씨이다. 그녀는 성종보다 5년 연하로서 세조 8년(1462) 6월 26일에 출생하였다. 성종 4년(1473)에 12세에 입궁하여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졌는데, 성품이 총민하여 마음이 깨끗하고 항상 두루 삼갔기에 시할머니되는 정희왕후 윤씨는 늘 칭찬하여 말하기를,
“윤숙의로써 시험해 보면 궁녀는 마땅히 나이 어릴 때 뽑아야 한다. 그래야 가르침을 쉽게 익힐 수 있다.”
고 하였다. 19세로 왕비에 책봉되자 성종은
“아녀자로서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이제 어진 왕비를 얻었으니 내 마음이 평안하다.”
고 하였으며, 시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도
“궁중에 좋은 사람을 얻었으니 조석으로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하며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정현왕후 윤씨는 장녀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았으나 일찍 잃었고 성종 19년(1488) 3월 5일에 성종의 제 2남 진성대군 즉 중종을 낳았다.

 정현왕후는 친어머니가 폐출된 세자 연산군 융을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연산군은 봉보부인(奉保夫人) 즉 유모의 손에 자라면서 계모였던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랐으나 왕후를 잘 따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성종 25년(1494)에 남편인 성종이 승하하고 이복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자순대비(慈順大妃)에 봉해졌다. 그 뒤 연산군 12년(1506)에 반정이 일어나 친아들 진성대군이 새 임금으로 옹립될 때 대비로서 이를 허락하였다. 중종 25년(1530) 8월 22일에 중종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정침에서 69세로 승하한 윤씨는 정현(貞顯)의 시호를 받았으며 소의 흠숙(昭懿欽淑)의 휘호를 더 받았다.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에 성종과 각기 다른 언덕에 안장되었다. 신위는 종묘의 정전 제 5실에 배향되어 있다.

 중종의 친형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요절한 누나 신숙공주가 있다고 하였다. <정현왕후 선릉지>에 의하면, “정현왕후는 중종과 3공주를 낳았는데 3공주는 모두 요절하였다.”고 되어 있어, 신숙공주 외에 요절한 두 공주가 더 있었음이 확인된다. 중종의 이복 형제로는 두 번째 왕비이자 폐비인 함안윤씨 소생의 장남 연산군 이외에도 성종의 12명의 후궁 · 비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25명의 형제들이 있었다. 그들의 소생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후궁 숙의 하씨(淑儀河氏) 소생의 3남 계성군(桂城君) 순(恂), 제2후궁 귀인(貴人) 초계정씨(草溪鄭氏) 소생의 4남 안양군(安陽君) 항(쐪), 제3후궁 숙의(淑儀) 남양홍씨(南陽洪氏) 소생의 5남 완원군(完原君) 수(쉝), 6남 회산군(檜山君) 염(恬), 8남 견성군(甄城君) 돈(惇), 9남 익양군(益陽君) 회(懷), 11남 경명군(景明君) 침(?), 15남 운천군(雲川君) 인(썎)과 16남 양원군(楊原君) 희(憘)가 있다. 숙의 홍씨는 7왕자 외에도 혜숙 · 정순 · 정숙옹주 등 3옹주를 더 낳았다.

 성종의 제 4후궁인 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7남 봉안군(鳳安君) 봉을, 제 5후궁 숙용(淑容) 청송심씨(靑松沈氏)는 10남 이성군(利城君) 관(慣)과 14남 영산군(寧山君) 전(힜) 그리고 경순 · 숙혜옹주 등 2남 2녀를 낳았다. 제6후궁 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12남 전성군(全城君) 변(쮶)을, 제7후궁 명빈(明嬪) 안동김씨(安東金氏)는 13남 무산군(茂山君) 종(悰)을, 제8후궁 숙의 김씨는 휘숙 · 경숙 · 휘정옹주 등 3옹주를, 제9후궁 귀인 엄씨(嚴氏)는 공신옹주를, 제10후궁 숙용 권씨(淑容權氏)는 경휘옹주를, 제11후궁 귀인 정씨는 정혜옹주를 두었으며, 제12후궁은 남빈 남씨(南嬪南氏)인데 자식이 없었다.
중종대왕 - 생애 (4)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성종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와 종실의 모든 일가를 때때로 내전으로 불러들여 술자리를 열어 집안 사람들[家人]의 예로 대하였다. 그러나 가법(家法)은 매우 엄하여 궁중을 엄숙하게 했고 여러 왕자 들에게는 어린 나이에도 바른 도리로 가르쳤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중종은 7세 때인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 1499년(연산군 5)에는 12세의 나이로 좌의정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과 가례를 올렸는데, 신씨는 중종보다 한 살이 많았다.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愼承善)의 아들로서, 연산군의 정비 거창신씨의 오빠였으므로 연산군의 처남이 된다. 그리하여 연산군의 비 신씨와 중종의 비 신씨는 친정에서는 고모와 조카 사이이고 시가에서는 동서 형제 사이가 된 셈이었다.

 1487년(성종 18) 정월 14일에 중종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왕비 신씨는 당시 진성대군이던 중종과 가례를 치른 후 부부인(府夫人)이 되었다. 왕자가 혼인을 하면 궁궐에서 나와 살아야 하는 왕가의 법도에 따라 중종은 그 이듬해 정월에 출궁하여 사저에 거처하였다. 사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왕이 되기 전까지 7년 동안은 궁궐밖 사저에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 연산군은 자신의 실정에 대한 직간(直諫)을 멀리하고 경연(經筵)과 대제학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회의 장소로 만들었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여기(女妓)들의 모임장소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채청 · 채홍사(採靑採紅使)를 보내어 미녀를 선발하였는데 이를 `운평(運平)\'이라 하고, 그 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興淸)\'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하게 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에 이들이 동원되면서부터 `흥청거리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연산군은 사냥을 위하여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하여 원성을 들었으며 이러한 학정을 비방하는 언문[한글] 투서 등이 있자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불태우는 등 언문 사용을 금지하고 사치와 연회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학정은 궁중[궁금]세력과 결탁하여 이루어졌으므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사림계열에서도 있었으나 먼저 훈구세력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연산군 12년(1506) 양화도 망원정에서의 유희 때 왕에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올린 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어 한거중이던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과 지중추부사 박 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의 폐출을 밀약하는 한편,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류순정(柳順汀)의 호응을 얻고, 또 연산군의 사랑을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문영, 전 수원부사 장정 등의 호응을 얻어 그 해 9월 연산군이 경기도 장단의 석벽(石壁)으로 유람하는 기회를 노려 거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행차가 중지되어 거사도 중지될 형세였는 데 이 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류빈(柳濱) · 이과(李顆) 등의 거사격문이 서울에 전하여지자 그 세를 막을 수 없어 예정대로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으고,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 · 수영 형제와 임사홍 등을 불러내어 격살하는데 성공하였다.
중종대왕 - 생애 (5)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정변이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윤대비를 경복궁에서 만나 허락을 얻어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 교동에 안치하는 동시에 이튿날인 9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에 중종은 19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11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으니 이 정변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한다.

 16세기 초에 일어난 정치사의 일대 변혁인 중종반정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종반정은 태조가 고려 왕조를 역성혁명으로 무너뜨린 뒤 출범시킨 조선 왕조에서 점차 강상론(綱常論)이 정치 · 사회사상 및 예(禮) · 신분질서(身分秩序)의 토대로 정착되어 가던 시기에, 신료 주도로 이루어진 왕위승계란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중종반정은 조선왕조 개창이래의 맏아들로 이어지는 왕위세습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는 신료들이 주체가 되어 올바른 것으로 되돌이킨다는 이른바 반정(反正)을 명분으로 표방하고, 자의로 행한 왕위교체였던 것이다.

 조선초기에 마련된 경연(經筵)과 대간(臺諫)의 제도는 유교주의적 통치원리의 양면성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경연은 왕과 왕실이 최우선적 질서체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었다. 이를 통해 군주는 신료의 군자 · 소인됨을 변별할 수 있어야 하고, 군주 자신도 군자의 도리를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따라서 왕조의 개창이래 하나의 통치 이념으로 받들어진 성리학적 질서를 군주 자신이 훼손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아닌 한, 신료들의 선택은 반정의 명분을 내세우고 군주를 교체하는 것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었다.

 왕조체제의 정치운영 및 권력관계에 있어 이것은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직(社稷)의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모색해 온 군주와, 한편으로 그 절대성을 용인하면서 신료층간의 계서조직인 관료제를 통해 권력관계의 일정부분을 차지해 온 신료들 사이에 새로운 긴장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료 주도의 반정으로 인해 군주권의 위상에는 상당한 변화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인해 조선 초기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모색하면서 아울러 왕권의 절대성을 지향하던 군(君) · 신(臣) 권력관계가 관료지배체제의 틀 속에서 상대화된 관계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재위 39년 되던 해인 1544년에 중종은 환후가 위중하여 그 해 11월 14일 세자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튿날 15일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39년, 보령 57세로 시호는 공희라 하였다. 능호는 정릉(靖陵)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원) 동쪽 건좌이다. 1545년(인종 1) 정월에 먼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 에 있는 희릉(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능)으로 모셨다가 1562년(명종 17) 9월 4일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명종 때 홍춘경이 지은 지문에 정릉으로 이장한 사적이 자세하게 씌어 있다.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중종과 기묘사화

 중종은 면류관이 미처 준비되지 않아 그 대신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먼저 경차관(敬差官)을 8도에 나누어 보내 교시를 반포하고 전왕을 강봉하여 연산군으로 삼아 교동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반정에 공을 세운 박원종 · 성희안 · 류순정 · 류자광(柳子光) · 신윤무 (辛允武) · 박영문(朴永文) · 장정(張珽) · 홍경주(洪景舟) · 심순경(沈順經) · 변수(邊脩) · 최한홍(崔漢洪) · 윤형로(尹衡老) · 조계상(曹繼商) · 류순(柳洵) · 김수동(金壽童) · 김감(金勘) 등을 공신으로 녹훈하였다.

 즉위 초에 중종은 연산군 시대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경연관(經筵官), 우림위(羽林衛)를 다시 두면서 4학(學)을 수리하며 흐트러진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홍문관의 월과(月課) · 춘추과시(春秋課試) · 사가독서(賜暇讀書) · 전경(專經) 등의 법을 엄중하게 시행 하고 8도에 어사를 보내 민정을 살피게 하였다. 진휼청을 설치하고 활인서를 다시 두는 등 조종조(祖宗朝)의 옛 법도를 복구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김공저(金公著) · 조광보(趙光輔) · 이과(李顆)의 옥사가 일어나고 박영문 · 유세웅에 대한 양사(兩司)의 논박이 있었다.

 중종은 연산군과는 달리 왕의 전제적 권한의 행사를 피하고 항상 유능한 유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 소장학자들이 크게 등용된 일이 이러한 태도에 연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조 역대 왕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중종도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치를 그대로 지속하였고, 특히 성리학을 숭상 · 장려하여 유교적 이상정치의 실현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유교적인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미신을 타파하고 일반 백성에게 유교적인 소양을 갖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상부상조를 정신으로 하는 향약(鄕約)을 8도에 시행하였고, 찬집청(撰集廳)을 두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적을 찬수,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다. 그 반면에 유교적인 것 이외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서는 탄압과 금지를 강화하였다. 그 예로 승과(僧科)의 폐지, 각 도 혁폐사사(革廢寺社)의 전지(田地)를 향교(鄕校)에 귀속, 사찰 중창(重創)의 엄금, <경국대전>의 도승(度僧) 조항 삭제, 사찰의 노비와 전지의 속공(屬公), 승려금단절목(僧侶禁斷節目)의 제정이라든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것 이외의 사찰 철훼 및 일시적이나마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한 일 등이다.

 그러나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등장한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들은 젊은 패기가 너무 앞서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을 강행하여 노장 훈구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런 중에 사림파의 신진들이 중종반정 때의 공신이 너무 많다고 거짓 공훈[僞勳]을 삭제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였으니, 자연히 훈신들의 반발을 빚기에 족하였다. 중종마저 그들의 도학(道學) 강론이 너무 길어 아침에 시작하면 해가 기울어서야 파하므로 몸이 피곤하고 싫증이 나 서 그들의 간언을 귓전에 흘려버렸다.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2)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 심정(沈貞) · 홍경주 등이 모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 때 홍경주의 딸이 후궁으로 있었는데 그의 딸 희빈 홍씨를 통해 중종의 귀에 참소가 들어가게 하였다. 그 참소의 내용은

 “온 나라 인심이 이미 조씨에게로 돌아갔으니 이제 공신을 삭제하자고 청하는 것은 점점 국가의 우익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연후에 오직 제마음대로 하고자 하고, 또 천과(薦科)를 베풀어서 그 성세(聲勢)를 올려서 구신들 중에 조금만 자기 의견과 다른 자는 모두 배척해 내쫓아서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므로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중종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밤낮으로 들리니 뜻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나무 열매의 감즙을 가지고 일부러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趙자가 되며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 4자를 금원에 있는 나뭇잎에 써서 벌레가 갉아 먹게 하였다. 그 갉아 먹고 남은 흔적이 마치 글자와 같이 된 후에 부참서(符讖書)처럼 만들어 이것을 따서 중종에게 올렸다. 이에 왕은 더욱 의혹을 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심정이 경빈 박씨의 문안비(問安婢)를 꾀어 `조씨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고 사람들이 모두 칭찬한다\'는 소문을 궁중에다 퍼뜨려 은근히 중종을 두렵게 만들었 다. 그렇게 한 뒤에 홍경주가 언서(諺書)를 가지고 밀지라 일컫고 불평을 가진 훈구파 재상들에게 시일을 정하여 모이게 하였다. 훈구파 재상들 중에서 이것이 모함인 줄 알고 관여하기 싫어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중추 안윤덕은 `능히 하지 못할 일\'이라 하였고, 권균은 지위가 낮다고 사양하였으며, 여성부원군 송일은 병이 있어 일어나지 못한다고 핑계하였다. 언문으로 쓴 밀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의 삭제를 청하는 것은(신하가 임금을 폐하지 못한다는) 강상(綱常)을 중히 하는 것이라 하여 먼저 공이 없이 공신에 참례한 자를 삭제한 연후에 겨우 20여 명의 이름을 남겨서 연산을 폐한 죄를 성토하고 보면 경들은 어육(魚肉)이 될 것이요, 그 다음에는 나에게 미칠 것이로다. 주초(走肖)의 무리가 간사하기가 왕망(王莽) · 동탁(董卓)과 같아서 온 나라의 인심을 얻어 가지고 백료의 우러러 보는 바가 되었으니, 하루 아침에 송 태조(宋太祖)에게 황포(黃袍)를 몸에 덮어 입히는 변이 있고 보면 비록 (그들이 임금되기를) 사양하고자 하나 아니할 수가 있으랴. 광조가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자고 청한 것도 처음에는 그 뜻이 인재를 얻으려 하는 줄 알았더니 지금 생각하면 반드시 저들의 우익을 심으려 했던 것이다. 이들을 잘라 없애려 하나 경의 사위 김명윤(金明胤)이 그 속에 있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이로다. 내 심복이 몇 사람이나 있는가. 광필(光弼)은 왕실에 마음을 둔 자이나 장곤(長坤)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은 자이다. 이제 소아배에게 붙었으니 가히 믿을 수가 없도다. 심정(沈貞)은 근래 비록 논박을 입었으나 재간이 있으니 가히 신임할 만하다. 내가 이들 [조광조 등]을 제거하려 한다는 뜻을 딴 사람에게 번거롭게 말하지 말고 남곤과 심정에게 묻는 것이 어떠한가. 용근(庸謹)과 한충(韓忠)과 세희(世熹)는 모두 무예가 있으니 가히 두려운지라, 조정이 이 무리들을 제거한다면 내가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저번에 경연 에서 기준(奇遵)이 말하기를, `광조 같은 자는 가히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 하였으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들에게서 나오는 터이니 반드시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가지고 있을 따름이로다. 명백하게 이들을 죄주고 싶으나 대간과 홍문관과 6조와 유생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면 내가 능히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니 어떻게 처 리할 줄을 몰라서 요즘에는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자리가 편안치 못하여 파리한 뼈가 드러났구나.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옛날에 용근이 거만하게 나를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니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나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3)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이에 1519년(중종 14)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여러 재상들이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궐문을 열고 닫으려면 승지에게 알려야 했으므로 열쇠를 정원(政院)에서 출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승지와 사관(史官)들이 모르게 일을 꾸미기 위해 신무문 열쇠만은 사약방(司촻房)에 있었기 때문에 신무문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 밤 2경이 되자 홍경주가 서계(書啓)를 올렸다.

 “신 정광필 · 홍경주 · 김전(金詮) · 남곤 · 이장곤 · 고형산 · 홍숙(洪淑) · 심정 · 손주 · 방유녕 · 윤희인 · 김근사 · 성은 등이 보니, 조광조의 무리가 붕당을 지어 자기들에게 아부하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력으로 서로 어울리고 있고, 중요한 자리에 도사리고 앉아 임금을 속이고 사(私)를 부리어 기탄함이 없으며, 후진들을 꾀어 과격한 습관을 길러 젊은이로 어른을 누르고 천한 이로 귀한 이를 누르게 하옵니다. 이로써 국세를 기울어지게 하고 조정의 일을 날로 그릇되게 하오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는 분탄을 느끼고 있으나,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곁눈질을 하며 다니고 조심스러운 발로 서게 됩니다. 사세가 이러하오니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유사(有司)에 붙여 그 죄를 밝히고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빨리 명을 내려 홍문관과 승정원에 입직한 관원들을 잡아 가두도록 주청했는데 이 때야 비로소 정원에서 알게 되었다. 밤 삼경이 되자 정광필이 명을 받고 황급히 입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였다. 정광필은,
 “젊은 유생들이 시대에 맞고 안맞는 것도 생각지 않고 헛되이 옛일을 끌어다 지금에 시행하려 한 것 뿐입니다. 무슨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어 삼상(三相)과 함께 죄를 의논하게 해 주소서.”
라고 하면서 말끝마다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데, 중종은 마음이 정해진 뒤라 급히 일어나 안으로 들면서 조광조 등을 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아침 의금부도사 김전 · 이장곤 · 홍숙 등이 나와 앉아 조광조 · 김정(金淨) · 김식(金湜) · 김구(金絿) 등이 붕당을 지었다는 것과 윤자임(尹自任) · 박세희 · 박훈 · 기준 등이 조광조에게 부화했다는 일을 국문하였다. 그 때 조광조가 공초(供招)한 내용은,
 “신의 나이는 38세입니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 뿐입니다. 국가의 병통이 이의 근원에 있는 줄로 망령되이 생각하여 국맥을 무궁한 터전에 새롭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고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정광필과 안당(安쩪)이 조광조 등을 적극 변호하고 극진히 간했으나 중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이 임금의 마음인데, 저 사람들은 시종으로 오래 있었으니 내가 어찌 죄주고 싶겠는가. 과연 조정의 일로 보아 이렇게 죄주지 않으면 더욱 그르쳐질 것이므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