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대왕 - 생애 (8)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이 때 윤원형 등은 자신의 지위를 굳히고자 세자와 다시금 혼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명종 14년 세자의 나이 9살이 되면서 명종이 세자빈(世子嬪)을 간택하기 위해 중외의 공경 사대부들의 딸들을 7세에서 11세까지 해당부서로 하여금 빠짐없이 뽑아 아뢰도록 한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결과 명종 15년 7월에 이르러 전 참봉 황대임(黃大任)의 딸을 명하여 세자빈을 삼았는데 이는 윤원형의 의도가 짙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즉, 황대임은 안함(安쐦)의 매부이고 안함의 양자 안덕대(安德大)는 또 윤원형의 사위이다. 이렇게 혼인을 맺은 까닭에 윤원형이 힘껏 주장하여 정혼해서 훗날 권력을 잡으려고 황씨가 고질병이 있는 것까지 숨겼던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윤원형이 왜 세자빈 간택에 관여하려 하였고, 이에 대한 명종과 명종비의 입장이 어떠했는가를 밝혀주는 내용이다.  이는 훗날 사신이 <명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쓴 글이지만 매우 상세하게 저간의 사정을 밝혀주고 있다.

 “세자빈은 전 참봉 황대임의 딸이다. 황대임은 안함의 매부이고 함의 양자 안덕대는 곧 윤원형의 사위이다. 윤원형이 임금의 은총이 점점 쇠해지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하루아침에 승하(昇遐)하면 다시 더 의지할 세력이 없다고 여겨, 황대임 및 그와 친한 국복(國卜) 맹인 김영창(金永昌)과 함께 몰래 모의, 대임의 딸의 생년월일을 길한 사주(四柱)로 고치고, 또 반드시 황대임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라는 뜻을 은밀히 문정왕후에게 고해서 결정지었다. 상과 중전(中殿)은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았지만 자전(慈殿)의 분부에 눌려 할 수 없이 그대로 하였다. 세자는 국본(國本)이고 세자빈을 정하는 것은 대례(大禮)이다. 그런데 윤원 형이 사사로이 자기를 위하는 모의를 하여 군부를 위협 기어이 제 욕심을 이루었으니, 예부터 신하로서 이 같은 큰 죄를 짓고도 천벌을 받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명종실록> 권27 16년 정월 병자(15)]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빈으로 정해진 황씨가 이 후 자주 복통을 앓자 사람들의 의혹과 분노를 받았고, 윤원형을 적대하던 이양 등도 이를 계기로 윤원형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드디어 세자빈을 둘러싼 대립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어쨌든 세자빈 황씨의 건강은 명종에게 있어 해결해야 될 과제로 되었다. 명종은 16년 5월 계미(24)일에 마침내 삼공(三公) 즉, 상진(尙震) · 이준경(李浚慶) · 심통원(沈通源), 영부사(領府事) 윤원형 및 가례도감 제조(嘉禮都監提調)인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광원(曺光遠), 이조 판서 원계검(元繼儉)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인 판서 정유길(鄭惟吉), 참판 신희복(愼希復), 참의 송찬(宋贊) 등이 참여한 가운데 전교하여 세자빈을 낮추어 양제(良컻)로 삼고 다른 빈을 간택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두달 후인 7월 기유(21)일에 다시 호군(護軍) 윤옥(尹玉)의 딸로 세자빈(世子嬪)을 정하게 된다.

 그런데 세자는 이 후 건강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을 게을리하여 주위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세자가 죽던 해인 명종 18년 3월에 세자는 서연에서 예모를 크게 잃어, 싫어하고 게을리하는 태도가 많았을뿐만 아니라 행동거지와 담소 또한 때에 맞지 않았으며, 새로 배운 글을 읽지는 않고 바로 강의하는 요속(僚屬)들에게 물러가라고 재촉하므로 아무리 반 복하여 간절히 진달(進達)해도 듣지 않았다 한다. 명종은 이에 대해 보덕(輔德)과 필선(弼善)을 덕행과 학문이 있는 자를 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9월로 접어들면서 세자가 편찮아지자 명종은 그를 승정원으로 옮겨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세자는 주위의 관심과 병구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죽으니 이 때 그의 나이 열 셋에 불과했다. 자식인 세자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은 명종은 세자의 시호를 순회(順懷)로 정하였고, 장지는 도성안 북쪽의 경릉(敬陵) 안으로 정하였다.
명종대왕 - 생애 (9)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순회세자의 죽음으로 왕실은 다시 한번 술렁이게 된다. 명종 19년에 접어들면서도 인순왕후 심씨가 더 이상 자식을 갖지 못하고 있고 이때는 벌써 명종의 나이가 서른하나였다. 심씨는 명종보다 2살 위인 서른셋의 나이였다. 또한 여러 후궁(後宮)들에게서도 아들이 없으므로 종사를 잇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 첫번째 조치는 명종이 후궁을 더 두어 자식을 보는 방법이었고, 이에 따라 2월에 승정원에 전교하여 혼인을 금지한 집안의 양부(良婦)를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오게 하여 이들을 후궁으로 뽑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자식은 없었다.

 다음 조치로는 자신의 친혈육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려는 왕실쪽에서는 섣불리 접근하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즉 세자를 새롭게 정하자는 의논이 그것인데, 이는 신료들과 명종이 모두 합의해야 시행될 수 있는 안이었던 것이다. 같은 달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는 민기(閔箕)에 의해 건의되는 내용은 바로 이를 지적한 것이었다. 즉, 그는 나라에 세자(世子)가 없는데도 조정에서는 계획을 세우지 않음을 깊이 걱정하여, 종학(宗學)을 거듭 밝혀 종실(宗室)을 교양(敎養)할 것을 청하여 임금의 뜻을 감동시킬 것을 바랐으며 이에 의해 세자를 세우는 일에 관한 의논이 처음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논이 있은 뒤 세자빈을 자신의 편으로 세우는 일에 실패한 윤원형은 다시금 종실 가운데 세자를 뽑게 될 것이라 예견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게 된다.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종실에 대해 세밀하게 살폈고, 또 명종의 의중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를 유심히 살폈던 것이다.
 세자를 잃은 뒤 명종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명종은 자신의 병증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즉, `심기가 매우 편안하지 않으며 비위(脾胃)가 화(和)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한기와 열이 쉽게 일어나며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간간이 어지러움증과 곤히 조는 증세가 있고, 밤의 잠자리가 편안하기도 하고 편안치 못하기도 하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 당시의 일을 기록한 사관도 명종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즉,

 “요사이 용안(龍顔)이 수척하여 아주 옛날의 얼굴이 아니며, 말씀이 느리고 약하여 역시 옛날의 소리가 아니다. 또 듣자니 상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함으로 해서 때때로 술을 지나치게 들어 몹시 취하여 실성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른다고 한다. 환관의 무리에게 성을 내어 혹 옥에 가두게 하기도 하고 혹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기도 했다가 곧 도로 풀어보내거나 곧바 로 불러 들이므로, 기쁘고 성내는 것이 무상(無常)하여 그 단서를 헤아릴 수 없다. 이는 진실로 세자가 죽어 국가에 근본이 없게 되었기에 걱정스럽고 답답하여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른 명종의 건강은 세자문제에 대한 접근을 더욱 재촉하게 된다. 당시 영의정 윤원형은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새로이 구축하여야 할 필요 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은 앞으로 정해질 세자를 자신과 아주 가까운 이로 만드는 것이었고 당시 정치적 연합을 위해 많이 쓰인 혼인을 통해 그 끈을 이으려고 하였다. 가장 물망에 오르는 이는 덕흥군(德興君) 초(?)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균(鈞)이었다. 윤원형은 장차 명종이 죽으면 사위로 삼은 하성군을 왕으로 세워 자신은 국구(國舅)가 되어 후일의 부귀를 보전하고 정적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덕흥군에게 혼약을 강청하였다. 이를 염려한 사림들은 사전에 막으려 윤원형의 죄명을 정해 주벌(誅罰)하려 했으나 오히려 귀척(貴戚)들에 의해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알 게된 명종은 드디어 윤원강(尹元岡)에게 대신이 종실과 혼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일렀고, 이에 따라 윤원형은 부득이하여 그 계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에게 이는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즉, 윤원형이 당초 우려했던 대로 명종의 관심은 그에게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지나친 독주는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 었고, 명종은 중전 심씨의 친척인 리량(李樑)을 정치적 후원세력으로 양성하였다. 리량은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5대손이고 국구(國舅) 심강(沈鋼)의 처남으로 인순왕후에게는 외숙이 된다. 윤원형과 리량의 대립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오게 되는데 낙일(落日)하는 측과 욱 일승천(旭日昇天)하는 측의 세대결이 명종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정왕후의 거취와 관련되는 것이었지만 문정왕후도 건강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윤원형의 권력기반은 명종보다는 바로 문정왕후에게 있었던 것이다.
명종대왕 - 생애 (10)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순회세자가 18년 9월에 별세한 뒤 1년여의 세월이 흐르면서 왕실은 새로운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을 맞이하였다. 명종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았고, 또 새로운 후사도 생기지 않아서 왕실과 조정은 침울한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월은 하루마다 바뀌었다.

 명종 19년에서 20년으로 접어들면서 조정은 다시 한차례의 혼란을 겪게 되는데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리량 등이 당여(黨與)를 심어 정국을 좌우하고, 임금을 속이며 사림을 모함하고 조정정사를 탁란(濁亂)한다는 죄목으로 리량(李樑) · 이감(李戡) · 김백균(金百鈞) · 고맹영(高孟英) · 강극성(姜克誠) · 이성헌(李成憲) 등 소위 `6간(奸)\'이 제거되었던 것이 다. 그리고 새롭게 부상한 세력으로 왕비 심씨의 형제인 심의겸과 아버지인 심연원 등 중전의 세력이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정국을 독단하는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명종의 의도도 있었고, 그 동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신분에 있던 윤원형의 세력이 서서히 퇴조하던 사정에도 그 이유는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결정적으로 파국으로 몰고간 것은 바로 문정왕후의 승하였다. 당시 명종은 순회세자의 죽음 뒤 건강이 계속 좋지 못하였는데, 20년 3월과 4월초에 걸치면서 모후인 문정왕후의 병수발을 위해 심신의 정성을 다하였으나 문정왕후가 4월 임신(6)일 사시(巳時)에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명종에게 있어 가장 의 지할 수 있는 분이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모후가 승하한 것이다. 그 동안 명종이 즉위한 이래 정사에 간여하여 한편으로는 왕실의 안정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을사사화 등 많은 정치적 파란이 그녀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다음의 기록은 그녀가 남긴 행적과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윤비(尹妃)는 천성이 엄의(嚴毅)하여 비록 상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하는 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蠱惑)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의 창고를 다 기울여 승 도(僧徒)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내수(內需)를 부유하게 하며 상벌(賞罰)이 참람하여 사람들을 타이르고 경계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기강이 문란하고 국세(國勢)가 무너져서 장차 구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명종 대왕이 전의 잘못을 깨달음에 힘입어 장차 크게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는데, 정령(政令)을 베푼지 오래지 않아서 문득 승하하니, 아, 슬픈 일이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관이 사론(史論)으로서 기록한 글이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여주(女主)로서 자임한 그녀가 남긴 정치사적 의미는 그녀의 죽음과 함께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사(喪事)는 일찍이 섭정(攝政)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대왕의 예로 장사토록 하였다.
명종대왕 - 생애 (11)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그러나 그 뒷수습은 명종에게 남게 된다. 문정왕후의 죽음은 명종뿐만 아니라 윤원형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바로 윤원형 자신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4개월 후 8월에 접어 들면서 윤원형 타도의 목소리는 높아지기 시작하였는데 대사헌 이탁(李鐸), 대사간 박순(朴淳) 등이 윤원형의 죄상을 26가지로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탄핵하였던 것이다. 윤원형 탄핵에 대한 여론이 중외에서 물끓듯 일자 명종은 일단 윤원형의 파직을 명함으로써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여론은 윤원형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하였다. 이에 벼슬을 빼앗고 향리(鄕里)로 내쫓도록 하였고,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에 대해서는 원 부인 김씨를 독살하였다는 것에 대한 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자살을 하였다. 첩 정난정의 자살은 의외로 윤원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1월 18일 그는 마침내 홧병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죽음은 명종에게 있어 혈연으로부터 오는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로써 명종은 명실상부하게 모후와 외척의 정치적 부담을 모두 벗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자신의 즉위와 직접적 관련이 있던 문정왕후나 윤원형 등이 죽음을 맞이하자 명종은 점차 그동안의 실정과 억울한 일이 있는 자들을 사면 복권하는 작업을 시행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노수신 · 유희춘 등 몇 사람이 귀양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명종은 왕실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8월에 접어들면서 명종은 그 동안 왕자 등이 물의를 빚는 일이 많아지고, 또 자신의 후사를 염려하면서 왕손의 교육을 생각하였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왕손들의 경우 관직에 나아갈 수 없고 또 관례상 학문을 닦고 사림들과 지나치게 교유하는 것이 막혀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생을 가까이 하거나 전장을 늘리거나 혹은 일반백성을 침해하거나 놀이를 즐기는 등의 탈선행위가 많아 이에 대한 탄원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할 때 왕손에 대해 정상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곧 왕손의 사부(師傅)를 선출하여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 대상이 된 인물들은 풍산도정(豊山都正) 종린(宗麟) · 하원군(河原君) 정(컳) · 전(前) 하릉군(河陵君) 인(?) · 하성군(河城君) 균(鈞)이었다. 하지만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살 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신들이 국본으로서 세자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매우 꺼림직한 문제였다. 그 당위성과 필연성을 인정하더라도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었고 명종은 그의 죽음이 이르렀을 때까지도 이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다시금 왕위계승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서른 셋의 나이가 된 명종은 모후 문정왕후와 아들 순회세자를 잃은 뒤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도 곁에서 자신에 대해 일일이 관여를 하던 문정왕후가 없자 오히려 그 허탈감은 더해졌고 이는 그대로 그의 건강으로 나타났다.
명종대왕 - 생애 (12)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명종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여러 가지 국정상의 일들과 자신이 관여하긴 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못한 일 등에 대한 재고를 하는 한편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자신의 세대에는 성공하지 못한 채 선조조로 넘어가게 되었다.

 22년 6월 명종의 나이 서른 넷이 되어 입지(立志)를 훨씬 넘었건만 건강은 그 뜻을 펼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신해(28)일 축시(丑時)에 경복궁 양심당(養心堂)에서 승하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후계는 평소 왕손을 교육시킬 때 눈여겨보고, 또 을축년에 세자를 정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을 때 대신들에 의해 가장 의망에 올랐던 하성군으로 정해지게 된다. 하지만 이때 도 명종 자신의 의중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 이를 전교한 일은 없었다. 명종 임종 당시 양심당의 소침에서 명종의 죽음을 병풍 뒤에서 지켜봐야 했던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의중이 하성군에게 있었으니 당연히 그로 하여금 잇게 하여야 할 것임을 밝혔고, 대신들도 이에 별 이의는 없었다. 따라서 명종은 자신의 친혈육으로 후사를 정하지 못하였고 서형제 덕흥군의 셋째아들로 당시 16살에 이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선조인 것이다.

 인순왕후 심씨는 선조가 보령 16살이기는 하지만 세자로 책봉되어 왕실수업이나 군주로서의 여러 가지 덕목 등을 배우지 못했고 또 명종의 상을 치러야 하는 점 등 때문에 다시금 수렴청정을 하였고, 그녀는 문정왕후와는 달리 선조 원년 2월에 수렴(垂簾)을 거둬 들였다. 그녀가 당시 남기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는 명종 즉위초의 상황과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

 “무진 2월에 푸르고 붉은 햇무리가 있고 흰 기운이 무지개처럼 해를 건너 질렀으므로 왕대비가 임금에게 정사를 돌려 보내고, 발을 걷고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여주(女主)가 정사에 참견하여서는, 비록 모든 일이 다 잘된다 하여도 큰 근본이 바르지 아니하였으니 다른 것은 보잘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다 잘할 수도 없는 것이라. 해의 변괴가 미망인의 정사 간 섭으로써 생긴 것이리라.\' 하였다.”[<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서른 넷의 나이에 승하한 명종과 마흔 넷의 나이로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서거한 인순왕후는 나란히 문정왕후의 능인 양주(楊州)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묻혔는데 그 능호는 강릉(康陵)이라 하였다. 현재는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명종대왕 - 시대상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시대상

 명종의 재위기간은 척신정치의 성립과 수렴청정체제라는 정치형태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물론 이 둘은 각각 문정왕후와 윤원형 및 리량(李樑)이라는 인물들을 축으로 긴밀한 관련성 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축으로 하여 명종 재위 기간동안의 정치유형을 시기별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먼저 명종 즉위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제가 시행되는 시기를 설정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실상 정치보복의 시대라고 할만큼 정치상의 참극이 벌어진 시기이다. 즉, 윤임 · 윤원로 일파를 처단하고, 또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도에 맞게 정치를 행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는 신료 및 사림들 역시 제거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와 함께 을사사화 당시 윤임이나 윤원로, 억울하게 희생된 인물들에 대해 동정적 입장을 보이거나 이들을 위해 탄원소를 올리는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색출과 처벌이 잇따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다. 이것은 1547년(명종 2)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 · 선전관 이노(李櫓)가 양재역에 붙었던 벽서 한 장을 올리면서 시작된 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여주(女主)가 위에서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틒) 등이 밑에서 농권(弄權)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8월 그믐.”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여주\'란 바로 문정왕후를 가리키고 있다. 본래 이러한 익명서의 경우 조정에서는 그 출처 정도만 밝힐 뿐 비록 부자간이라도 서로 전해주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치가 어지러우면 이러한 익명서나 벽서, 유언비어 등이 떠돌고, 이를 이용해 보려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법이다.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이 직접 이러한 일들을 만들어내거나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을 하도록 조장하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아주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나 민간에 떠도는 말일지라도 자신들의 이해에 관련시켜 사건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군주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시비를 가려야만 하는데 여기서 바로 군주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군주는 언로가 열려져 있지 않으면 왜곡된 정보에 노출되어 판단에 중대한 착오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군주된 자는 그러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깊게 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며, 장래 그러한 판단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친족들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 종사가 관련되기 때문에 그 무거움은 나라를 좌우 할 정 도가 된다.

 종사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과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인 명종 초년에는 그 혼란과 숙청작업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봉성군(鳳城君) 완(췀)과 송인수(宋麟壽) 등이 사사되고 이언적(李彦迪) · 정자(鄭滋) 등은 아주 먼 변방으로 안치되었으며, 권벌(權쮫) · 백인걸(白仁傑) 등도 일정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형벌인 중도부 처(中途付處)의 형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조정에 올바른 도가 서지 않을 때 정치사가 얼마만큼이나 혼란에 빠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익명서와 고발사건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는 다시 1549년(명종 4) 4월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사사된 이약빙(李若氷)의 아들 이홍윤(李洪胤)이 아버지의 죽음을 원통히 여겨 분개의 말을 종종 했었는데 그 형 이홍남(李洪男)이 이를 고발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친 형제로서 이 정도에까지 이르렀으니 효우, 효제, 충효, 명분, 의리 등을 지행(知行)의 덕으로 삼은 유교의 도는 땅에 떨어진 것이라 하겠다.
명종대왕 - 시대상 (2)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명종 4년까지의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윤원형 · 이기 · 정순붕 등은 다른 정치세력을 제거하게 되었고 이제 본격적인 척신정치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윤원형 등이 중심이 된 척신세력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체제가 결합되어 운영되는 시기인데 이는 문정왕후가 수렴을 거두고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는 시점까지 지속되는 내용이다. 사실 문정왕후는 명종 8년 명종이 20살이 되던 해에 명종에게 귀정(歸政)함으로써 명종의 친정을 공식화하였다. 이는 성종 때의 관례로 보아도 시기적으로 타당성이 있었으며, 명종 스스로도 매일같이 경연을 열어 학문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아 정국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던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하겠다.

 “성상께서 굳이 사양하심은 비록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나, 자전께서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고 나이가 장성하여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귀정하신 것입니다. 신들 또한 자전의 분부가 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만일 굳이 아뢴다면 매우 구차하게 될 것입니다. 자전께서 비록 수렴청정을 거두신 뒤에라도 큰일은 자전께 여쭈어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선 자전으로 하여금 편안히 정신을 기르시게 함이 큰 효입니다.”[<명종실록> 권15 8년 7월 병진(12)]

 그러나 이렇게 비록 친정은 하였지만 위에서 언급된 “큰일은 자전께 여쭈어 처리한다.”는 내용은 그대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즉 문정왕후가 명종 20년에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문정왕후에 대해 사신(史臣)이 논하고 있는 글을 보면 그 실상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즉, 그녀는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명종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던 것이다. 명종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여 심열증(心熱症)을 얻기도 하였는데 모두 모후에 대한 갈등 때문이었다. 즉, 명종의 성품으로서는 모후의 의지에 반하는 정치를 뜻대로 펴는 것이 어려웠다 하겠다.

 세번째 시기는 명종의 의지가 정국에 반영되는 명종 15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숙인 리량(李樑)의 등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사실 리량이 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에는 인순왕후의 친정세력이 아직은 미약했다는데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당시 조정에 있던 이로는 조부인 심연원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인 심강(沈鋼)은 관료로 진출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량 의 권력기반은 명종의 관심 정도였지 그다지 강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리량은 명종의 관심을 빌미로 당여를 확산시키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당여를 심고 임금을 속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실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종대왕 - 시대상 (3)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문정왕후의 승하와 윤원형의 죽음 뒤 본격적으로 정권의 핵심에 자리잡은 인순왕후의 친가를 들 수 있을 것이나 이 시기는 대체로 사림과 연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명종 재위 22년간 군주와 신료가 서로 그 뜻을 조화시켜 운영했던 시기는 21년과 22년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을 살펴볼 때 우리는 명종조 권력의 핵심은 역시 군주와 왕실에 있음을 역으로 추적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군주의 의지가 어디에 어느 시점에 반영되고 있는가가 바로 국정운영의 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고 왕실 특히 문정왕후 역시 그러한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종이 치세한 22년의 시간은 매우 복잡다난하였다. 왕실은 왕실나름대로, 정국(政局)은 정치세력간의 변화대로, 지방사회는 지방사회대로, 학문이나 불교 등도 나름대로 그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왕실과 정치였다. 이는 사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명종조의 시대상은 매우 다양하게 접근될 수 있다. 그만큼 변화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정치상에 있어서는 사화나 역모사건 등으로 얼룩져 있지만 당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을 보면 명종조는 결코 혼란의 시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주세붕(周世鵬) · 이언적(李彦迪)이나 이황(李滉) · 조식(曺植) · 기대승(奇大升) 등과 같은 명유(名儒)들이 활동하고 있고, 백운동서원과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는 것도 이 시기인 것이다. 그 리고 이들 서원은 지방사림 활동의 근거지가 됨과 동시에 학문발달의 근원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의 발달이 있은 반면 불교의 선교 양종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 동안 왕실 차원에서 약간의 보호만을 받고 있던 불교계가 명종조에 들어오면서 그 교세를 확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문정왕후의 후원이 가장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는데, 명종은 모후의 뜻을 받들어 양종의 선과(禪科)를 복원하고, 사찰에 대한 보호를 적극적으로 하였다. 또한 보우(普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불교의 교세는 더욱 확장되었으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불교계는 보우의 숙청과 유림의 반발로 다시 주춤해졌다. 그러나 이들은 훗날 임진왜란 당시 많은 승병들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초기의 열세를 어느정도는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종조에는 중종과 인종을 거치면서 양성된 학자들이 많은 역할을 하였는데 대개 이들은 사림이라고 불리웠다. 이들은 명종조에 많은 저서들을 편찬하였는데, 먼저 법전류로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인출(1551),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의 완성(1555), <대전원전(大典元典)> · <대전속전(大典續典)> · <대전속집(大典續集)>(1558)의 완성 등이 이루어 졌다. 다음으로 왕실과 관련하여서는 <국조보감유초(國朝寶鑑類抄)> 2권의 완성(1547), 속무정보감찬집청(續武定寶鑑撰集廳)을 설치하여(1547),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이 완성되며(1548), <국조보감속집(國朝寶鑑續集)>의 찬진(1553)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의서(醫書)와 구황서(救荒書)로 <황달서질치료방(黃疸栖疾治療方)>(1550)과 한글로 된 <구황촬요(救荒撮要)>(1554)의 저술이 있었고, 병서로서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반포(1555) · <총통식(銃筒式)>과 <화기서(火器書)>(1565)의 간행이 있었다.
명종대왕 - 시대상 (4)
제 13대조   이름(한글):명종대왕   이름(한자):明宗大王

그러나 지방사회나 국제관계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특히 명종 14년부터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던 도적 임꺽정(林巨正)은 당시 조정에서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그 세가 확대되기도 하여 민심을 더욱 어지럽혔다. 여기에 명종 10년에는 명종 2년에 있은 정미약조(丁未約條)로 일본과의 관계에 통제를 강화한 뒤 왜의 침입과 약탈이 잦아지는 가운데 을묘왜변이 발생하였고 일본과의 통상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 후 이러한 왜변은 없었지만 통상관계의 단절과 이어지는 임진왜란은 조선의 대비가 미흡하였다는 원인규명이 이루어지면서 명종조의 확실한 대비책이 없었다는 데까지 소급되기도 한다.

 명과의 관계는 계속 사대(事大)의 관계였으며 명종조에는 오랜 숙원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안이 해결되었다. 즉 조선초기부터 명에 요구했던 종계개정(宗系改正)이 해결된 것이다. 이는 국초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명에 무고(誣告)하여 태조를 역신(逆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고 한데 따라 <황명조훈(皇明祖訓)> 및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모두 그 말이 기록되었던 것에 대해 바로잡아줄 것을 청한 것을 말한다. 역대 군주들이 이에 대해 개정을 청하여 그 허락을 받기는 하였지만 고친 내용은 분명히 제시되지 않아 항상 이를 다시금 항소하여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명종 18년에 마침내 다음과 같은 황제의 회답을 받게 된다. 즉,

 “짐은 특별히 그대의 아뢴 바를 윤허함과 동시에 사관(史館)에 선부(宣付)하여 회전(會典)의 구문(舊文)에 그대 조상의 진파(眞派)를 기재하되 잘못된 것을 수정하고 사실을 그대로 옮겨서 명백하기가 일성(日星)과 같게 하며 조정과 그대 나라가 모두 리자춘(李子春)에 게서 나오고 이인임(李仁任)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하노라.” 라고 하여 숙원이던 종계개정 논의가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명종의 생애와 시대상 속에는 왕권과 왕실 그리고 제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사실 명종에게 부여된 왕권은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권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속에서의 왕권으로, 왕은 검소하고 덕이 있으며, 학문에 충실한 도덕적 군자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두살이라는 즉위 때의 나이는 명종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그가 보고 듣고 익힌 것은 도덕주의적이며 효제(孝悌)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소학>을 통해 인륜을 배웠지만 오히려 군주로서 그가 냉엄하게 판단해야할 부분에 대해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 문정왕후라는 거대한 장벽은 그를 더욱 움추리게 하였던 것이다.

 군주는 군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의 각각의 역할이 있는 것인데 왕에게 신하가 행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은 왕실뿐만 아니라 조정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종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모든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군주가 군주다워야만 한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주의 지혜와 판단, 덕과 인은 바로 국가의 앞날을 방향짓고 운명짓기 때문인 것이다.
선조대왕 - 생애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생애

 선조대왕(이하 선조라 함)의 출생 당시는 대내적으로는 전국에 도적이 들끓고, 대외적으로는 외적의 힘이 강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외척세력에 의해 정권이 좌우되고 있었고, 이황(李滉) · 이이(李珥) 등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유학자가 있었지만 그들의 의견은 정국운영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전국이 통일되는 등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여진족 역시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왜란과 호란의 발발이 눈앞에 다가오는 풍운 속에서 선조는 즉위하게 되는 것이다.

 선조는 1552년(명종 7)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중종(中宗)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諱)는 균(鈞)이었는데 등극 후 순회세자를 쫓아 개명하여 연(혉)으로 바꾸었다. 어머니는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딸이다.
 선조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뛰어났다. 소년시절 선조에 대한 왕의 자질을 보여주는 일화로 <연려실기술>에 몇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명종이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써 보라 하니 여러 왕손들은 차례로 머리에 썼지만 선조는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갖다 놓으며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의 쓰는 것이오리까.”라고 하자, 명종이 기특히 여겨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 또 하루는 왕손들에게 글을 써 올리라 하니, 모두 시나 연구(聯句)를 쓰는데 선조만이 홀로 `충성과 효도는 본시 둘이 아니다\'(忠孝本無二致)라고 쓰니 명종이 더욱 기특히 여겼다고 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명종은 이때 아들인 순회세자를 잃어 후사가 없었으므로 이러한 자질과 품성을 갖춘 선조에게 왕위를 전해줄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한윤명(韓胤明) · 정지연(鄭芝衍) 등의 선생을 선택하여 선조에게 글을 배우게 하는 한편 자주 궁궐에 불러들여 학업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선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겸손함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것이 명종을 기 쁘게 하였던 것이다. 명종은 선조의 학문을 시험해 본 후에는 “덕흥은 참 복이 있는 사람이야.” 하며 선조의 재주에 감탄하곤 하였다.

 선조는 성장하면서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고 비록 세자로 책봉되지는 않았지만 명종의 사랑이 두터웠다. 병이 생기자 선조로 하여금 입시하여 약시중을 들게 하였으나 1567년(명종 22) 6월 명종은 후사를 결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1565년(명종 20) 병이 위독했을 때 하성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는 뜻을 중전인 인순왕후에게 밝힌 바 있었다. 따라서 인순왕후는 명종의 유지를 받들어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할 것을 명하게 된다. 이 때 선조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사양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거듭 간하자 영전에 울면서 하직을 고하고 대궐로 향하게 된다.

 1567년 7월 3일 16세의 나이로 선조는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즉위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왕의 행동이 단정하고 예법이 밝음을 보고 “동방에 참 주인이 나왔다.”고 감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