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대왕 - 생애 (2)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선조는 왕좌에 올랐지만 왕자(王者)로서의 수업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자수업을 위한 조처가 뒤따랐다. 이준경(李浚慶) 등의 건의로 인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고, 선조 자신은 오로지 기대승(奇大升) · 이황 · 이이 · 이준경 등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왕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매일 경연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하기도 하였다. 선조는 이미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황에게 정성을 다하여 배우기를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이황은 글을 올려
①계통(繼統)을 중히 여겨 인자함과 효를 다할 것이며,
②간사한 말에 현혹되어 윗 분들과 사이가 멀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며,
③성학(聖學)을 가까이 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고,
④유학(儒學)을 중히 여기고 이단을 멀리할 것이며,
⑤대신들을 신임함으로써 눈과 귀를 밝게 할 것이며,
⑥자신을 스스로 닦고 반성할 것 등의 치도(治道)에 대한 여섯 가지 조항을 올렸으며 또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을 손수 써서 올렸다. 선조는 이것을 모두 병풍으로 만들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경계의 글로 삼았다. 1570년(선조 3) 8월 이황이 죽자 “이황이 남긴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도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집하여 간행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어 당해 유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조는 주로 자신의 왕자수업을 진행하면서 경연에서는 이이 · 기대승 · 김우옹(金宇춳) 등으로부터 두터운 가르침을 받았다.
 선조는 유자들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체현함을 보이고 있다. 경연 중에도
“오늘 추위가 심한데 나는 넓은 집 고운 모피(毛皮) 위에 있으니 어찌 견디지 못할까마는, 염려되는 것은 변방의 수졸(戍卒)들이 밤을 지새며 딱다기를 치는 것이다.”
라며 백성들을 생각하였다. 한번은 선조가 출행했을 때 군사 중에 어린아이가 있음을 보았다. 항상 마음을 백성에게 두고 있던 선조는
“저렇게 어린아이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속을 떠나고 싶지 않을 터인데 힘겨 운 군역을 어떻게 견디어 내겠는가. 나는 그 아이를 보고 나서 안스러운 마음이 들어 밤이 되어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영민하지도 못한 내가 외람되게도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와 같은 일이 있게 하였으니 더욱 한스럽다. 병조는 군사를 점열(點閱)하여 만약 연령이 차지 않은 자가 있으면 모두 돌려보냈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입역(入役)을 하도록 하라. 내가 차라리 수천 명의 병졸을 잃었으면 잃었지 차마 이러한 아이로 하여금 입 역하게는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선조가 항상 백성들을 생각하며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그런 평안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569년(선조 2) 명종의 삼년상이 끝나자, 아버지인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증하고, 자신보다 세 살 아래인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과 가례(嘉禮)를 올렸다. 또 1577년(선조 10)에는 자신의 할머니인 중종의 후궁 소용 안씨(昭容安氏)를 빈으로 추봉하고, 외할아버지인 정세호는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러면서 선조는 소용 안씨를 할머니라 부 르고, 덕흥대원군의 묘를 가묘(家廟)라 하여 그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이는 모두 가계와 정통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왕통을 굳건히 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는 적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또 자신이 특히 사랑하던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후 산고(産苦) 끝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선조는 1580년(선조 13) 2월 하원군이 보낸 역관의 딸을 후궁으로 받아들이고, 5월에는 정순희(鄭純禧) · 홍여겸(洪汝謙) · 민사준(閔士俊)의 딸을 숙의로 뽑아 후손을 기 대하였다.
선조대왕 - 생애 (3)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1573년(선조 6)에는 중종의 2남으로 숙의 홍씨 소생인 해안군(海安君)이 죽었다. 또 1575년(선조 8) 1월 2일에는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가 세상을 떠난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때 친어머니의 상을 당했고 또 인순왕후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선조에게 있어 인순왕후는 친어머니나 마찬가지였던 분이다. 선조는 항상 아침저녁으로 인순왕후와 인성왕후(仁聖王后) 두 분께 문안을 드리는 등 효성을 지극히 하였었다. 한데 그분들이 돌아가셨으니 선조의 슬픔은 크기만 하였다. 조정에서는 상(喪)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에 선조가 결연히 행하여 예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였다. 선조는 곡을 하다 피를 토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삼년상을 마치는 동안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다. 뒤이어 1577년(선조 9) 11월에는 인종의 부인인 인성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역시 선조는 삼년상을 치를 것을 결정하고, 장사를 지내고 제사를 받드는 것을 어김없이 예법대로 행하였다.

 선조는 원래 번거롭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냥 등 오락을 즐겨하지 않았다. 특히 난을 맞아서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고, 옷은 항상 빨아서 입었으므로 비빈(妃嬪)과 궁인(宮人)들도 감히 사치스런 옷을 입지 못하였다. 이는 모두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려는 것이었다. 군량미 등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특히 농사를 중히 여겨 소의 도살을 금했고, 쌀 한 톨이라도 헛되이 버리지 못하게 하였다. 선조는 이에 대해 “이는 모두 농부들의 신고(辛苦)가 낱알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있는 것도 이미 만족스러운 것인데 더구나 감히 마구 없애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원래 책 읽기를 좋아했던 선조는 난리 중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날마다 신하들과 경전(經傳)을 강독하면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깊고 은밀한 뜻을 파헤쳤는데, 논한 것이 뛰어나 신하들이 감히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의약(醫藥) · 잡류(雜流)의 책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이단을 배척하여 유생(儒生)들에게는 장자(莊子) · 노자(老子) · 불교(佛敎)의 용어를 쓰지 못하도록 엄금하였다. 또 역사에 도 관심이 깊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석강에 진강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에 홍문관에서 <고려사절요>는 치도(治道)에 유익하지 않으니 한가할 때나 보라고 하니, “고려사(高麗史)는 바로 우리 나라의 역사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우리 나라의 역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성묘조(成廟朝)에도 이미 진강한 예가 있었다.”라며 우리 나라의 역사를 소중히 여겼 다. 선조는 만년에는 <주역(周易)>을 주로 탐독하였다.

 필체도 뛰어나 이여송이 선조의 글을 간절히 요구하였는데 선조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르기를 “내가 제독(提督)에 대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루가 된다고 해도 사양하지 않아야 될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형해(形骸)만 보존되어 있을 뿐 신혼(神魂)은 이미 떠나간 지 오래여서 붓을 휘둘러 글자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조그마한 기교로 남에게 자랑하고 싶지 않은 선조의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0년(선조 33) 6월 27일 중전인 의인왕후의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였다. 특히 중전과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 아픔이 더 했을 것이다. 중전의 죽음과 더불어 아들인 임해군 · 순화군과 종친들의 악행으로 선조는 더욱 근심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선조는 왕자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은 내가 임금 노릇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줄 아는가. 한 백성이라도 잘못 살면 모두가 다 나의 근심이다. 어찌 너희들처럼 마음대로 출입하며 매이지 않은 것만 하겠느냐. 나로 하여금 하성군의 녹을 받으며 아침 저녁으로 공궤나 하고, 마음에 근심하는 것이 없게 하였다면, 반드시 임금 노릇보다 즐거웠을 것이다.”라고 꾸짖었다. 하지만 왕자들은 여전히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끝내 살 인까지 저지르게 되니 아버지로서 아들의 죄를 벌해야만 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선조대왕 - 생애 (4)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선조는 구례(舊禮)의 복구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성균관 · 문묘 ·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전쟁으로 신주를 모시지 못한 순회세자(順懷世子)와 순회세자의 비인 덕빈(德嬪)의 신주를 봉안하고 묘소인 순창원(順昌園)을 축조하였다. 또 전대 임금들과 충현의 능과 묘를 각 도 감사에게 조사케 해 제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한편 중전이나 세자 및 세자빈의 의식에서의 복장 등에 관한 규정도 새로이 만들었다.

 전쟁을 치르며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새로이 갖추는 것도 선조가 해야 될 일이었다. 1602년(선조 35) 7월 13일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로운 중전[仁穆王后]으로 맞아들이고, 인성군 · 의창군 · 정혜옹주 등을 혼인시켰다. 또 행궁의 확장과 각 궁방의 보수를 명하였다. 아울러 <선원록>을 교정케 하고, <태종실록> 등에서 선왕의 어휘와 같은 경우 교정케 하였 다. 또 1607년(선조 40) 정월에는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을 사면시키고 선원록에 등재하게 한다.

 1603년(선조 36) 10∼11월 대궐 내에 마마가 돌았는데, 이때 아들 · 딸 · 손자까지 잃는 아픔을 맞아야만 했다. 1607년(선조 40) 3월 18일에는 순화군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순화군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이 후 그 때의 자책감 때문인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남의 재산을 빼앗고, 무뢰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여러 가지 말썽을 부려 선조를 곤란하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자신보다 먼저 간 아들의 죽음은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1607년(선조 40) 10월 선조는 갑자기 쓰러졌다. 다행히 다시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이 때부터 선조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침으로 고생하였다. 사실 선조는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계속 감기와 소화불량 등을 앓아 왔었고, 특히 조금만 피곤하여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매일 침을 맞고 약을 먹어야만 했다. 선조는 속병이 있어 약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약을 먹는 것보다는 침맞는 것을 더 좋아했었다. 또 간간 이 온천수를 가져와 손과 발을 담그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선조의 명이 다한 것인지 더 이상 기운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인 1608년(선조 41) 정월 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해야 한다는 측과, 적자인 영창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측의 의견대립으로 조정이 시끄러웠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을 받은 광해군을 폐하고 계비인 인목왕후 소생을 세자로 책봉할 뜻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선조의 의향은 조정의 정치세력을 분열시킬 소지가 많았다. 적자인 영창과 세자인 광해군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선조는 임진왜란 때 막대한 공을 세운 광해군은 폐세자할 명분이 없었고 광해군의 추종세력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한 가운데 선조는 동궁에서 들여온 약밥을 먹고 체하였다. 별것이 아닌 것 같았는데 선조는 곧 행궁의 정전(正殿)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곧이어 중전이 옥새와 계자(啓字)를 세자인 광해군에게 전하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케 된다.

 능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안에 있는 목릉(穆陵)이며, 묘호(廟號)는 선종(宣宗)으로 하였다가 광해군 때 선조(宣祖)로 바꾸었다. 전은 영모전(永慕殿), 시호는 소경(昭敬)이다.
선조대왕 - 시대상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시대상

 선조는 2명의 비와 6명의 후궁에게서 14남 11녀를 얻었는데,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포함해 1남 1녀를, 공빈 김씨가 광해군과 임해군의 2남을, 인빈 김씨가 4남 5녀를, 순빈 김씨가 1남을, 정빈 민씨가 2남 3녀를, 정빈 홍씨가 1남 1녀를 , 온빈 한씨가 3남 1녀를 낳았다.
 선조의 아버지는 덕흥대원군(1530∼1559)으로 이름은 초(?), 자는 경패(景?)이며, 중종의 아들로 창빈(昌嬪) 안씨 소생이다. 1542년(중종 37) 정인지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원군 · 하릉군 · 하성군 등의 세 아들을 얻었으며, 30세에 병사하였다. 하성군이 선조로 등극한 후 1569년(선조 2) 덕흥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비는 의인왕후 박씨(1555∼1600)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선조보다 세 살 아래이다. 1569년(선조 2) 11월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몸이 약해 아이를 낳지는 못하였다. 1600년(선조 33) 6월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1590년(선조 23) 장성(章聖)의 존호를 받고, 사후에 의인 · 휘열(徽烈), 1610년(광해군 2) 정헌(貞憲)의 존호를 받았다. 후에 다시 경목(敬穆)이 추상되었다. 능은 목릉이며 선조와 함께 묻혀 있다.

 계비는 인목왕후 김씨(1584∼1632)인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의 딸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선조보다 32세 아래인데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3년(선조 36) 정명공주를 낳았고, 1606년(선조 39) 영창대군을 낳았다. 유영경 등이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목왕후는 폐비되어 1618(광해군 10) 서궁으로 유폐된다. 그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 다. 1632(인조 10)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글씨도 잘 쓰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만년에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는 그녀가 친필로 쓴 <보문경>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면서 소성(昭聖) · 정의(貞懿) · 명렬(明烈)의 존호를 받았다. 시호는 인목이며, 능은 목릉이다.

 공빈(恭嬪) 김씨는 사도시 첨정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산후병으로 1577년(선조 10)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성묘(成墓)이다.
 인빈(仁嬪) 김씨는 1553년(명종 8)에 태어나 1613년(광해군 5) 10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용녀(龍女)이며, 묘는 순강원(順康園)이다.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공빈이 죽은 후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하지만 다른 후궁들이 세자인 광해군에게 불경스럽게 대했을 때에도 유독 세자를 섬겼고, 이 때문에 자신의 소생인 정안군과 의창군이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될 수 있었다. 광해군은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 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 하였다. 이 때문인지 인빈 김씨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소생들은 모두 탈이 없었다.

 정빈(靜嬪) 민씨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민사준(閔士俊)의 딸로 1567년(명종 22) 9월 29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11월 2일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1580년(선조 13) 5월 숙의에 선발되었다. 숙의 선발 때 성종의 외손이라 하여 숙의 선발에서 제외될 뻔했지만, 선조가 법에 금한 바 없다 하여 숙의로 선발되었다.
선조대왕 - 시대상 (2)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정빈(貞嬪) 홍씨는 홍여겸(洪汝謙)의 딸로 정빈 민씨와 함께 숙의에 뽑혀 궁궐에 들어오게 되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은 인목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06년(선조 39) 태어났다. 선조는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낳았고 영창대군을 무척 총애하였다. 이 후 선조는 세자로 책봉할 생각까지 하였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소북파의 유영경 등이 선조의 생각에 부응했다. 선조는 죽으면서 영창대군에게 선위하려 하였지만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이 후 7명의 서인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에 연루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된다.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과 나이가 겨우 여덟살밖에 안 된다며 용서해줄 것을 간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1614년(광해군 6) 9세의 나이로 강화도에서 살해된다.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임해군(臨海君)은 선조의 장남이며 공빈 김씨 소생으로 1575년(선조 8) 1월 2일 태어났다. 처음에는 진국(鎭國)이라 했으나 후에 진(콫)으로 이름을 고쳤다. 1585년(선조 18) 4월 허명(許銘)의 딸과 혼인하였다. 세자 책봉 당시 적자가 없었고, 그가 장남이었으므로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군왕의 기질이 없다고 하여 책봉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할 목적으로 함경도로 갔다가 반란군에게 억류되어 왜장 가토에게 넘겨졌다. 이 후 풀려나기는 했지만 포로로 잡혔다는 굴욕감에 사로잡혀 술로 세월을 보냈고, 1603년 사옹원 도제조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열 문제가 명나라에서 거론되었다. 이 때 임해군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하여 진도에 유배하였다가, 다시 강화도로 이배하였고 이듬해 죽음을 당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작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셋째 아들은 의안군(義安君)인데 인빈 김씨 소생이다. 1588년(선조 21) 2월 마마로 죽었다. 시호는 의회(懿懷)이다.
 신성군(信城君)은 넷째 아들로 역시 인빈 김씨 소생이다. 한성부 우윤 신립의 딸과 혼인하였다. 세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중 피난을 가다가 병사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하였다. 복성군(福城君)의 뒤를 이었으나 일찍 별세하였으므로 정원군의 셋째 아들 전(傳)이 평원군을 이었다.
 정원군(定遠君)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인빈 김씨 소생이다.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고 좌찬성 구사맹의 딸과 혼인하여 능양대군 · 능원대군 · 능창대군을 얻었다. 선조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인 능양대군도 그림을 잘 그린다 하여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인조반정으로 아들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많은 논란 끝에 다시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원종(元宗)이라 하였으며, 그의 부인은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공량(恭良)이며, 능은 장릉(章陵)으로 경기도 김포에 있다.

 순화군(順和君)은 여섯째 아들인데 순빈 김씨가 낳았다. 승지 증좌찬성 황혁(黃赫)의 딸과 혼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러 강원도에 파견되었다가 회령에서 임해군과 함께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 1601년(선조 34) 관직을 삭탈 당하고 안치되었다. 1607년(선조 40) 3월 18일 별세하였고, 선조가 다시 복직시키고 인성군(仁城君)의 2남 해안군 억 (億)을 후사로 삼았다. 시호는 희민(僖愍)이다.
선조대왕 - 시대상 (3)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일곱째 아들은 인성군(仁城君)인데 정빈 민씨 소생이다. 판서 증영의정 윤승길(尹承吉)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 인조반정 후 신원하여 주고 시호를 효민(孝愍)이라 하였다.
 여덟째 아들은 의창군(義昌君)인데 인빈 김씨 소생이다. 판서 증좌찬성(贈左贊成) 양천(陽川) 허씨의 딸과 혼인하였다.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아홉째 아들은 경창군(慶昌君)으로 정빈 홍씨 소생이다. 부사 증좌의정(府使贈左議政) 조명욱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번째 아들은 흥안군(興安君)인데 온빈 한씨 소생이다. 판서 한인급(韓仁及, 본관 淸州)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괄의 난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난이 실패하자 처형되었다.
 열한번째 아들은 경평군(慶平君)으로 역시 온빈 한씨 소생이다. 군수 증좌의정(郡守贈左議政) 최윤조(崔胤祖, 본관 朔寧)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두번째 아들은 인흥군(仁興君)으로 정빈 민씨 소생이다. 군수 증좌찬성 호성군(郡守贈左贊成壺城君) 송희업(宋熙業, 본관 여산)의 딸과 혼인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열세번째 아들은 영성군(寧城君)으로 온빈 한씨 소생이다. 증좌찬성(贈左贊成) 황이중(黃履中, 본관 昌原)의 딸과 혼인하였다.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정명공주(貞明公主)는 인목왕후 소생으로 1623년 태어나서 1603년 12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첫째 딸 정신옹주(貞愼翁主)는 인빈 김씨 소생으로 달성위(達成尉) 서경주(徐景켻)에게 하가 하였다.
 둘째 딸 정혜옹주(貞惠翁主) 역시 인빈 김씨 소생으로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본관 해평, 부친 영의정 尹昉)에게 하가하였다.
 셋째 딸 정숙옹주(貞淑翁主) 역시 인빈 김씨 소생인데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본관 平山, 부친 영의정 申欽)에게 하가하였다.
 넷째 딸 정인옹주(貞仁翁主)는 정빈 민씨 소생으로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본관 南陽, 부친 參判 洪湜)에게 하가하였다.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는 인빈 김씨 소생이며 금양위(金陽尉) 박미(본관 羅州, 부친 判書 東亮)에게 하가하였다.
 여섯째 딸 정휘옹주(貞徽翁主) 역시 인빈 김씨 소생이며, 전창위(全昌尉) 류정량(柳廷亮, 본관 全州, 부친 縣監 柳悅)에게 하가하였다.
 일곱째 딸 정선옹주(貞善翁主)는 정빈 민씨 소생으로,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 본관 安東, 부친 郡守 權信中)에게 하가하였다.
 여덟째 딸 정정옹주(貞正翁主)는 정빈 홍씨 소생이며, 진안위(晋安尉) 류적(柳힒, 본관 晉州, 부친 교리 류시행)에게 하가하였다.
 아홉째 딸 정근옹주(貞謹翁主)는 정빈 민씨 소생으로 일선위(一善尉) 김극빈(본관 善山, 부친 判書 金履元)에게 하가하였다.
 열번째 딸 정화옹주(貞和翁主)는 온빈 한씨 소생으로,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 本安東, 부친 同知 權益中)에게 하가하였다.
선조대왕 - 시대상 (4)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이처럼 왕자로서의 수업을 하여 1568년(선조 2년) 2월에는 친정에 임하게 된다. 친정에 임하면서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설치하였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한편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 윤관 등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李틒) · 윤원형 등을 삭훈(削勳)하였다. 선조의 이같은 정책으로 훈구세력은 힘을 잃게 되고 사림이 대거 중앙정계에 등장하게 되어 민심은 안정되고 조정은 평화를 되찾았다.

 1588년(선조 21)에는 그 동안 왕조의 숙원이었던 종계 개정을 이루었다. 이 때까지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명의 역사서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리자춘이 아닌 고려의 권신인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로 되어 있었다. 이에 왕실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명과 절충하여 종계 개정의 허락은 얻었으나, 실제로 고쳐지지는 않았었다. 선조는 즉위 후
“국계(國系)가 모함을 받은 지 2백여 년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편안히 천지 사이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의당 사신을 잘 가려 보내어 휼성(恤誠)을 다하여 진주하게 함으로써 기어이 밝혀야 한다.”
하고, 네 차례에 걸쳐 사신을 명에 보냈다. 선조는 사신을 보낼 때마다
“준청(准請)을 얻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밝히곤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는 드디 어 종계개정을 이루어 왕실의 권위를 세웠고 이 사실을 종묘에 알렸다. 신하들은 이를 경축하여 존호(尊號)를 올리려 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 거절하였지만 신하들의 계속되는 요구에 1590년(선조 23) 결국 `정륜 입극 성덕 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는 존호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1591(선조 24) 세자책봉문제로 당쟁은 더욱 극심해지게 된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는 아들이 없어 후궁 소생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만 했다. 서인의 거두 정철(鄭澈)은 적장자가 없으니 광해군으로 세자를 삼 아야 한다는 말을 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동인도 정철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과격파[北人]와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온건파[南人]로 다시 나뉘게 되었다.

 이처럼 조정이 혼란스러운 때에 변방 여진족들의 노략질이 극성스러워지게 된다. 1583년(선조 16)과 1587년(선조 20) 2회에 걸쳐서 이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여진족들이 침입하였다. 이로 인해 한 때 경원부가 함락되었다. 선조는 온성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을 시켜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기도 하였다.
 한편 남쪽에서는 일본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서 전국이 통일되었다. 통일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검지(檢地)를 통해 토지제도를 정비하고, 병농분리제에 따른 신분제를 확정한다. 그리고 금 · 은화를 주조하여 화폐유통의 혼란을 막았고, 중요 도시를 막부직속 통치 지역으로 삼아 영주[大名]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 나갔다.
선조대왕 - 시대상 (5)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1575년(선조 8) 대마도에서는 일본 본토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있음을 조선정부에 알려왔다. 전통적으로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므로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조선정부에서도 무엇인가 꺼림칙한 것이 있었으므로 1590년(선조 23) 4월 통신사를 보내 일본의 사정을 탐색하였다. 하지만 정사인 황윤길(黃允吉)과 부사인 김성일(金誠一)은 서로 상반된 의견을 보였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하였으므로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극적인 대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달 후 일본에서는 `가도입명(假道入明)\'을 통고하여 왔다. 조정은 이에 크게 놀라 이 사실을 명에 알리고 경상 ·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드디어 왜선 700여 척이 부산에 상륙하였고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여,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하게 된다.
 이 때까지 세자를 결정하지 못하였으므로 빨리 세자를 결정해야만 하였다. 원래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으니 장자인 임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여 인심을 잃었기에 세자로 책봉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4월 27일 신하들이
“저사(儲嗣)를 세워서 위의(危疑)스런 인심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하니, 선조는
“뒷일을 부탁하는 것은 본디 예속되어 있는 데가 있으나 단지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광해군은 총명하고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나이도 이미 장성하였으니, 백성들의 기대에 따라 저사로 정한다.”
고 하여, 28일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 때 왜적의 침입을 받았으므로 명에 직접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세웠음을 알리지 못하고 요동에 알려 명 조정에 대신 전달하게 하였다.

 4월 30일 선조는 일부 문관에게 도성방어 임무를 맡기고 1백여 명의 수행원과 세자를 데리고 피난길에 오르며 임해군을 함경도로, 순화군을 강원도로 보내 근왕병을 모집하게 한다. 5월 1일 개성에 도착한 후 선조는 다시 신성군과 정원군을 평양으로 보내 평양사수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 때 선조는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궁궐이 불탔다는 비보를 듣 게 된다. 이에 선조는 5월 7일 개성을 떠나 평양까지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서 다시 피난길에 올라 의주로 향하던 중 6월 11일 박천에서 선조는 스스로 정사의 잘못을 뉘우치고 대권을 세자인 광해군에게 처리토록 하였다. 22일에는 의주에 이르게 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패전소식에 선조는 이제 명나라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근 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떠났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회령에 머물러 있었는데, 회령부사 국경인(鞠景仁)은 왜군이 들어 닥치자 두 왕자를 잡아 7월 22일 왜에게 항복하였다. 두 아들이 적에 포로가 된 것에 대해 가슴 태우고 있는 가운데 11월에는 아들인 신성군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선조는 모든 것에 대해 낙담할 뿐이었다.

 이 때 이순신이 옥포에서의 승리 이 후 계속 승전보를 보내왔고, 의병이 각 지역에서 봉기함에 따라 다시 용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어 12월에는 명의 원군이 도착했고 이듬해 정월에는 평양수복 소식을, 2월에는 행주대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 난이 일어나자 혼란스러웠던 선조도 정신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승려들에게 선과첩(禪科帖)을 제수하여 호국불교로서의 위상을 떨치게 할 기회를 주었다. 각지의 의병장들을 포상하여 의병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특히 전사한 의병의 식구들에게는 특별한 은전을 베풀었다.
선조대왕 - 시대상 (6)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한편 일본군은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보급로가 길어져 군수 보급의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특히 이순신 등의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물자 수송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일본군의 활동을 제압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일본군은 강화를 통해 대동강 이남의 조선을 지배한다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려 하였다. 1593년(선조 26) 4월 일본군은 강화를 조건으로 드디어 한성(漢城)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이 남으로 물러가자 선조는 1593년(선조 26) 10월에 환도하게 된다. 하지만 궁궐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없었다. 결국 선조는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월산대군(月山大君)댁에 행궁(行宮)을 두게 된다.
 환도 이 후 선조는 종친들에게도 무예를 익히게 하고, 군량미 확보를 위해 둔전을 개간케 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594년(선조 27) 4월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항복한 일본군을 통해 조총 쏘는 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또 `군공사목\'을 규정하여 군공에 따 라 상을 주었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오래 머물게 되면서 군량미 문제가 심각해지자 납속(納贖)을 실시하고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하였고, 은을 바치는 자에게는 면역 · 면천을 시켜주었다.

 한편 이 때 명과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채 강화회담을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1594년(선조 27) 12월에는 허욱(許頊)을 명에 보내, 강화가명과 조선 모두에게 무익함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선조는 일본의 재침에 대한 방어 준비를 강화해 갔다. 재침이 있기 한달 전인 1596년(선조 29) 12월에는 한강의 사수, 적이 바다를 건너올 때 공격할 것, 자객을 이용하여 적의 장수를 살해하는 방안을 대신들과 의논했다. 아울러 군량의 확보와 민심의 안정, 그리고 승병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선조의 바람대로 5년간의 강화회담은 결렬되었다. 그 과정과 회담 결렬의 사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명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의 왕으로 입공을 허락한다는 선에서 회담을 해결 지으려 하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①명의 황녀로서 일본의 후비로 삼고,
②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하고,
③감합인(勘合印)을 복구하고,
④조선의 왕자 및 대신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沈惟敬)은 이러한 요구는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거짓으로 명에 보고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지만, 일본이 사실을 알게 되어 결국 화의는 깨지게 된다.

 1597년(선조 30) 정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존의 잔류군을 포함해 14만여 명의 병력으로 재침하였다. 하지만 이 때는 이미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각 도에 산성을 수축하고, 명의 원군 5만 5천여 명도 즉시 출동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을 뿐이다. 해전에서는 이순신이 모함에 의해 하옥되고 원균(元均)이 후임이 되었으나 7월 의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여 수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다시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고, 그는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왜선을 쳐부수는 명량대첩(明梁大捷)의 승전보를 알려왔다. 이로써 제해권마저 조선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선조대왕 - 시대상 (7)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같은 해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이를 계기로 일본군은 총퇴각하였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하여 작전을 세웠다. 그는 명의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노량(露梁)에서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7년간에 걸친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6년 7개월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는 모두 황폐화되었으며 전국에는 질병이 만연하였다. 몇 년째 계속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은 견디기 힘들었고 국가재정도 파산상태였다. 더욱이 명의 원군이 계속 주둔하여야만 하였는데 그들에 대한 군량미 확보도 큰 문제였다.

 특히 선조는 명군이 장기간 주둔하게 됨에 따라 약자(弱者)로서의 슬픔을 맛보아야만 하였다. 1598년(선조 31) 5월 14일에는 명군의 강요에 의해 조선의 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관왕묘(關王廟)에 친제를 지내야만 했다. 또 명군이 성균관 등에서 행패를 부리고, 종묘 · 사직 · 선왕의 능 등지에 함부로 난입하여도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났지만 중전과 여러 공주 · 옹주들을 환도시킬 수 없었다. 이에 선조는 재침의 위험은 있지만 식량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며 1만 5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철수시켜 달라는 글을 명 황제에게 보내게 되며, 1600년(선조 33) 9월에는 남아있던 명군이 모두 철수하게 된다.

 전쟁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웠지만 특히 관리들의 부정도 심하였다. 이에 선조는 미리 작성된 군공 · 납속 · 공명첩을 폐지하여 그 폐단을 없애려 하였다. 또 궁가에 투탁함으로써 역을 피하고 있는 자들을 색출하였다. 전쟁 중 군량미 확보를 위해 실시했던 둔전은 개인이 함부로 착복하고 피역자들의 도피처가 되고 있었다. 이에 1601년(선조 34) 6월 둔전을 혁파 하고 모든 수확을 호조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아울러 사포서(司圃署) · 내사복(內司僕) · 약방(藥房) 등 궁궐과 관련된 관청에서의 태만함을 뿌리뽑으려 노력하였다. 파산된 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1604년(선조 37) 정월에는 각 도에 어사를 보내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실시 하였다.

 선조는 자신을 도와 국난을 극복한 공신들을 녹훈하여 전쟁에 대한 뒷수습을 마무리 지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1604년(선조 37) 6월 공신을 녹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죽은 의인왕후에게는 휘열(徽烈), 새로이 중전이 된 인목왕후에게는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올리게 한다. 다음달인 11월에는 귀인(貴人) 김씨를 인빈(仁嬪)으로, 소용(昭容) 김씨와 숙용(淑容) 한씨를 숙의(淑儀)로 각각 자급을 올려 그들을 위로하였다.

 왜란 중 춘추관(春秋館)이 불타 귀중 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히 여겨 각 처에 있는 책을 모으고, 서책을 새로이 발간하여 운각(芸閣)에 모으게 하였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서책이 손실되어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였다. 1601년(선조 34) 4월에는 <승정원일기>의 수정을 명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홍문관에서 <춘추>를, 1604년에는 <효경대의(孝經大義)>를 발행하였다. 한편 귀중한 책을 바치는 경우에는 선조가 친히 말[馬]을 하사하여 이같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나갔다. 이와 같은 학문에의 관심은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지만, 1605년(선조 38) 11월 <서전> · <상서> · <가례> · <천자문> 등의 언해와, 종학을 세워 종실의 학문열을 북돋우려는 시도로 이어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