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황제 - 태조고황제의 탄생과 생애(生涯)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태조고황제의 탄생과 생애(生涯)

 태조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 至仁啓運 聖文神武大王)의 휘는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 옛 휘는 성계(成桂), 호는 송헌(松軒)이다.

 태조고황제(이하 태조로 함)는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 10월 11일 화령부(和寧府 : 永興府)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태조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龍顔)을 지녀 신채(神彩)가 영특하고 준수하였으며 지략과 용맹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어릴 때 화령(和寧)과 함주(咸州) 사이에서 놀았는데 북방 사람들이 사냥하는 매를 구할 때 심지어는 “리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구하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태조가 젊었을 적에 정안옹주(定安翁主 : 고려 때 재상의 부인에게 내린 봉작의 하나) 김씨가 담모퉁이의 나무에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태조에게 쏘아 잡으라고 청하자, 태조는 단 한 발의 화살을 쏘아 다섯 마리의 까마귀를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그 광경을 본 김씨가 이상하게 여겨 “남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씨는 환조대왕의 후실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어머니이다.

 태조의 활솜씨는 이처럼 이를 데 없이 신묘하여 남만 북적을 퇴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북호(北胡)의 호발도(胡拔道)와 왜국의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아무리 날쌔어도 태조의 신궁(神弓) 앞에서는 살아 남지를 못하였다.

 1361년(고려 공민왕 10) 9월에 독로강 만호(禿魯江 萬戶) 박의(朴儀)가 배반하여 천호(千戶) 임자부(任子富)와 김천룡(金天龍)을 죽였다. 왕이 형부상서 김진(金璡)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김진이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 때 태조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 상만호(東北面 上萬戶)로 있었는데, 왕이 명령을 내려 김진을 원조하 러 가라 하였다. 명을 받은 태조가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니, 박의는 벌써 그 무리를 거느리고 강계로 들어간 뒤였다. 그러나 결국 그 무리를 다 잡아 죽이고 박의의 목을 베었다.

 또, 홍건적 위평장(僞平章)인 반성(潘誠) · 사류(沙劉) · 관선생(關先生) · 주원수(朱元帥) · 파두반(破頭潘) 등이 20만 군사를 끌고 압록강을 건너 서북 변방에 함부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군사 1백 10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니 속히 항복하라는 글을 우리에게 보내왔다. 이에 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백 여 명의 목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아서 왕에게 바쳤다.
 
그 해 11월에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하였고 적은 서울인 `개성\'을 점거하였다. 이 때 태조가 휘하에 친병 2천 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으로 들어가서 먼저 성에 올라가 적을 크게 쳐부수니 위명(威名)이 더욱 빛났다.

 이는 1362년(고려 공민왕 11) 정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 등 9명의 원수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나와서 서울을 수복하고 적의 괴수인 사류 · 관선생 등의 목을 벨 때의 일이었다.

태조고황제 - 태조고황제의 탄생과 생애(生涯) (2)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2월에 조소생(趙小生)이 원나라 심양행성 승상(瀋陽行省丞相) 나하추(納哈出)를 유인하여 삼살홀면(三撒忽面) 땅에 쳐들어왔는데, 도지휘사(都指揮使) 정휘(鄭暉)가 여러 번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태조를 보내 주기를 청하므로 태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았다.

 7월에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소생 · 탁도경(卓都卿) 등과 함께 홍원(洪原)의 달단동(쩏쩎洞)에 주둔, 합라만호(哈羅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를 보내어 여러 백안보하 지휘(伯顔甫下 指揮)와 함께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으로 삼아 쳐들어왔다. 태조가 그들을 덕산동원(德山洞院)의 들판에서 만나 쳐서 패주시키고 함관령(咸關嶺) · 차유령(車踰嶺) 두 고개를 넘어 쫓아가 거의 다 섬멸시키니 그들이 버린 병기(兵器)가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 싸움에서 나하추를 격퇴시키니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나중에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 화호(和好)를 통하여 왕에게 말을 바치고 또 비고(퓘鼓)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주며 예의를 표했는데, 이는 모두 마음 속으로 복종했기 때문이었다. 나하추의 누이가 군중에 있다가 태조의 뛰어난 무용(武勇)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뻐하면서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장수로구나.” 하였다.

 1364년(고려 공민왕 13) 여러 기씨(奇氏 : 奇轍등 일가)가 참형을 당하자 원나라의 기황후가 공민왕에게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본국의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장작동지(將作同知)가 되었다. 그는 불량배들과 기황후를 꼬여 왕을 모함해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인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세워 왕으로 삼으려고 요양성의 군사를 내어 정월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왕이 찬성사(贊成事) 안우경(安遇慶)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으나 패전하였다. 안우경은 후퇴하여 안주(安州)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왕은 찬성사 최영에게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로 가서 대군을 지휘하게 하고 태조고황제에게는 동북면에서 날쌘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가라고 명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이구수(李龜壽) ·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지용수(智龍壽) · 판도판서(版圖判書) 나세(羅世)와 안우경은 좌익이 되고, 판개성(判開城) 이순(李珣) · 삼사좌사(三司左使) 우제(禹?) · 밀직사 박춘(朴椿)과 태조는 우익이 되었으며 최영은 중군이 되어 행군, 마침내 정주(定州)에 다다랐다. 태조는 여러 장수가 패퇴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겁약 해서 진력으로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그들은 태조를 꺼렸다. 그 때 적병은 이미 수주(隨州)의 달천(達川)에 주둔하고 있던 터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내일 싸움은 그대 혼자 맡으시오.”
라고 하였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시기한다는 것을 알고 근심의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병은 3대(隊)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태조가 탄 말이 수렁에 빠져 매우 다급했는데 말이 힘을 내어 뛰쳐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 태조가 적장 두세 명을 쏘아 넘어뜨리니 적이 크게 패하였다. 태조가 두 늙은 장수를 바라보니 두 장수가 칼을 빼 어 적을 사뭇 공격하고 있었다. 적이 이미 패하여 무너졌는데 먼지만 공중에 가득하였다.

태조고황제 - 태조고황제의 탄생과 생애(生涯) (3)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도조대왕(度祖大王)의 사위는 다루가치(達魯花赤) 김방괘(金方卦)로 아들 삼선(三善) · 삼개(三介) 형제를 두었다. 태조에게는 내외종형제인데 그들은 여진 땅에서 태어나 자랐다. 팔의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그들은 불량한 소년들을 모아 북쪽 변방에 횡행하였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태조는 대대로 함주(咸州)에서 성장하여 은혜와 위력이 본디부터 쌓여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태조를 부모처럼 우러러보고 있었으며, 여진족들도 그 위력을 두려워하고 은정(恩情)을 사모하여 스스로 조심들을 하던 터였다. 그런데 태조가 안우경을 도우러 서북면으로 갔다는 말을 들은 삼선과 삼개가 마침내 여진을 꼬여 침략해 와서 함주를 함락시켰다. 그곳을 수비하던 장수 전이도(全以道)와 이희(李熙) 등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해 왔고 도지휘사 한방신(韓方信), 병마사 김귀(金貴)가 화주(和州)에 진군했으나 함몰당했다. 관군이 번번이 패하자 장수와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태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관(鐵關)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사기가 저절로 배가되었다. 한방신 · 김귀와 함께 진격하여 황주와 함주 등의 고을을 수복하니, 삼산과 삼개가 여진 땅으로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태조를 승진시켜 밀직부사로 삼고 봉익대부(奉翊大夫)의 관계를 더하여, 단성양절 익대공신(端誠亮節 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렸으며, 금대(金帶)를 내리는 등 태조를 깊이 신뢰하였다.

 1370년(고려 공민왕 19) 정월, 태조는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을 넘어 6백여 리를 행진해서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고, 또 7백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밤 서울에서 서북방을 보니,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 차고, 그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쳐 있었는데, 서운관(書雲觀)이 말하기를, “용감한 장군의 기상입니다.”라고 하 였다. 그러자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리성계를 북방에 보냈으니 반드시 그 감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원나라의 추밀부사(樞密副使) 배주(拜住)와 동녕부(東寧府)의 이원경(李原景) · 이백안(李伯顔) · 이장수(李長壽) · 리천우(李天祐) · 현다사(玄多士) · 김아(金阿) · 노정(魯丁) 등 3백여 호를 왕에게 바쳤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 7월 태조를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삼았고, 이색(李穡)을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았다.

 환조대왕(桓祖大王)이 승하하니, 태조가 정안옹주 김씨를 모시고 서울의 제택(第宅)으로 와서,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고 매양 나아가 뵈올 적에는 항상 섬돌 아래에 꿇어 앉았다. 공민왕이 태조를 존경하는 까닭에, 김씨의 아들 리화(李和)를 사랑하고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교방(敎坊 : 고려 때의 기생학교)의 음악을 내려주었다. 태조도 임금 이 내려주심을 영광으로 여겨 가무하는 교방생(敎坊生)에게 전두(纏頭 : 가무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었고, 또 화(和)와 이복형(異腹兄) 원계(元桂)와 항상 같이 거처하며 우애가 더욱 지극하였다.

태조고황제 - 태조고황제의 탄생과 생애(生涯) (4)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377년(고려 우왕 3) 3월 왜적이 강화부에 침략해오니 서울이 크게 동요하였다. 태조와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 등 11원수(元帥)를 시켜 서강(西江)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게 하였다. 5월에 경상도 원수 우인렬(禹仁烈)이 대마도에서 바다를 뒤덮고 건너오는 왜적의 돛대가 바라다보이니 싸울 장수를 보내 달라는 비보(飛報)를 보내왔다. 왕은 태조에게 가서 왜적을 치라고 하였다. 태조의 군대가 이르지 않으니 인심이 흉흉하여지고 백성들이 두려워하였다. 이에 태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해 가서 지리산 밑에서 적과 싸워 이겼다. 왜적은 험지에 의지해서 경계를 단단히 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으나, 비장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바위가 높고 험하여 말이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태조가 차남 방과(芳果 : 定宗)에게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눠 주어 그와 함께 가게 하였으나 상황은 여전히 같았다. 그러자 태조가
 “그렇다면 내가 갈 것이니, 내 말이 먼저 올 라가면 너희들도 뒤따라 올라오라.”
고 휘하 장졸에게 이르고는 마침내 말을 채찍쳐 달려갔다. 태조가 그곳의 지세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렸는데, 때는 한낮이라 칼이 햇빛에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 번에 뛰어오르니 군사들이 밀고 당기면서 기어 올라갔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치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과반수 이상이나 되었고 결국 싸움에서 이겼다. 태조는 평소 에 인심을 얻었던데다가 휘하 장병들이 날쌔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못함이 없었으니, 각 고을에서는 그를 가뭄에 구름 바라보듯, 장마에 무지개 바라보듯 우러러보았다.

 싸움이 한창 어우러졌을 때에 태조를 노리고 달려드는 적을 퉁두란(큤豆蘭)이 쏘아죽여 위험을 면했고, 날아오는 화살에 발목을 맞았으나 화살을 빼내 버리고 더욱 용감히 싸우니, 군졸들은 태조고황제가 화살에 맞았는지도 몰랐다.

 적의 장수 중에 나이 겨우 15, 16세가 된 자가 있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그가 흰 말을 타고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달려들어 격돌하니, 그가 가는 곳마다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아기발도(阿只拔都)라는 적장으로 군사들이 그를 대적하지 못하고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맹과 날램을 아껴 퉁 두란에게 사로잡으라 명하니 퉁두란이 아뢰기를,

 “만약 산 채로 잡으려면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기발도는 목과 얼굴을 감싸는 갑옷과 투구를 썼으므로 활을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두란에게,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는 즉시 쏘아라.”
하고 말을 채찍쳐 달려가 투구 꼭지를 쏘아 맞혔다. 투구의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그가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는데, 태조가 다시 투구를 쏘아 또 꼭지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땅에 떨어졌다. 두란이 즉시 쏘아 죽이니 적군의 기세가 꺾여 패주하였고, 마침내 왜구의 침략은 평정되었다. 태조가 승전을 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을 하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와 채붕(綵棚)과 잡희(雜戱)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줄 을 지어 서서 영접하였다. 태조가 말에서 내려 나아가 재배하니, 최영도 재배하고 앞으로 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공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태조고황제가 머리를 숙여 사례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명을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무슨 저의 공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공 때문에 삼한이 다시 일어난 것이요, 그것은 이번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공이 아니면 앞으로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였다. 우왕이 금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을 수행한 것일 뿐이온데 신이 어찌 감히 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한산군 이색이 시를 지어 치하하니, 전삼사좌사(前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과 성균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이에 화답하였다.

 이 싸움이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태조고황제 - 태조고황제의 탄생과 생애(生涯) (5)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382년(고려 우왕 8) 가을 7월에 태조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다. 당시 여진 사람 호발도가 동북면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가는 일이 일어났다. 태조가 그 지방에서 대대로 군무를 관장하여 위신이 본래부터 나타났었으므로 태조를 보내어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게 한 것이었다. 태조가 떠날 때 한산군 이색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헌(태조의 호)의 담기가 무신을 덮으니
松軒膽氣蓋戊臣
만리장성을 한 몸으로 맡았네.
萬里長城屬一身
분주하게 몇 번이나 다사한 날을 겪었던가
奔走幾經多故日
돌아와서 우리 함께 태평한 봄을 즐깁시다.
歸來同樂太平春
지금 같은 대세는 종사에 연관된 일인데
如今大勢關宗社
더구나 오랑캐 선봉은 귀신 같은 장수라네.
況是前鋒似鬼神
두 왕조의 임금 함께 섬긴 정 얕지 않은데
聯袂兩朝情不淺
다만 한수 시로써 떠나는 이를 전송하네.
只將詩律送行塵

 1383년(고려 우왕 9) 8월에 호발도가 또다시 단주(端州 : 端川)를 침략하였다. 부만호(副萬戶)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외적과 내통하여 재물을 챙기고 뒤에 빠져 있다가 일부러 적에게 잡혔고, 상만호(上萬戶)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이 때 퉁두란이 모친상을 당해 청주에 있었는데, 태조가 사람을 시켜 부르 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을 입고 집에만 있을 수 없다. 상복을 벗고 나의 뜻을 따르라.”
하였다. 이에 퉁두란이 상복을 벗고 절하고 울면서 하늘에 고하고, 활과 화살을 차고 태조를 따랐다. 그리하여 결국 호발도를 패주시켰다.

태조고황제 - 태조고황제의 탄생과 생애(生涯) (6)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태조는 본디 유학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가문에서 유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없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태종〔芳遠〕에게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태종도 날마다 부지런히 배우고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조는 태종에게 이르기를,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라고 하였고, 배위(配位) 신덕왕후 강씨(康氏)는 태종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기를,

 “어찌 내가 낳은 아들이 되지 않았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태종이 과거에 급제하니 태조는 대궐 뜰에 절하고 매우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최영과 친밀하여 우정이 매우 돈독하였다.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점 성해지자 우왕에게 모함하려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리공(李公)은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만약 하루 아침에 나라가 위급해진다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 빈객에게 연회를 베풀 때면 최영은 언제나 태조에게,

 “면찬(麵饌)은 내가 준비할 것이니 육찬(肉饌)은 공이 준비하시오.”
라고 하였다. 그럴 적마다 태조는 좋다고 허락하고 사냥으로 짐승을 잡아 육찬을 장만하였다. 태조는 승마와 궁술에 뛰어나 당세 최고요 막강의 존재였다. 남만북적 어디에 출전을 해도 모두 승전의 개가를 올려 당시의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해 내곤 하였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당시는 신흥 명나라가 원나라를 멸하고 천하에 기세를 올리고 있었던 때였다. 따라서 명태조는 고려에게 원나라가 지배하던 철령을 위시하여 동북면과 서쪽 지방이 본래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 소속이었으니, 그 지방에 소속된 군민(軍民)인 중국인 · 여진인 · 고려인을 모두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최영이 백관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들 명나라에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우왕은 최영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요동을 치려고 하였다. 그 사실을 안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집으로 가 요동 정벌의 옳지 못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이자송이 임견미(林堅味)의 편당(偏黨)이라 핑계하여 곤장을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그를 죽였다. 우왕 이,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가

“요동의 군사가 강계(江界)에 와서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한다.”
고 보고한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요동을 공격하려 하는데 여러 신하가 나의 계책을 따르지 않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라고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다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어 철령위의 설치를 알렸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2)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388년(고려 우왕 14) 3월 우왕은 최영과 요동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공공연히 말하지 못하고,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해주(海州)에 행차하였다. 4월에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태조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요동을 치고자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이르기를,

 “지금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에는 네 가지의 불가함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불가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불가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에게 침략의 틈을 주게 될 것이니 세 가지 불가함이요,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이 전염병을 앓게 될 것 이니 네 가지 불가함입니다.”
하니, 우왕이 옳지 않게 여겼다. 태조가 물러나와 최영에게 이르기를,

 “내일 이 말을 다시 아뢰는 것이 마땅할 것이요.”
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밤에 최영은 우왕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마소서.”
하였다. 이튿날 우왕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가 없소.”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대계를 성취하고자 하신다면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출사하소서. 그렇게 하시면 들판에는 벼곡식이 가득하여 대군에게 먹을 것이 넉넉할 것이오니 북을 치면서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출사할 때가 아닙니다. 비록 요동의 한 성을 점령하더라도 비가 한창 오는 시기라서 군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군사는 늙고 양식은 떨어져서 화만 부를 뿐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우왕이 말하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태조가
 “자송은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 등은 비록 살아있으나 이미 계책을 상실했으니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으나 우왕은 여전히 듣지 않았다. 태조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휘하의 군사가 말하기를,
 “공께서는 왜 이렇게도 슬퍼하십니까?”
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백성의 불행이 이 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우왕이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에 독려하여, 군사를 징발해서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고 또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최영에게 도통사(都統使)를 제수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태조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서 보냈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3)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군사의 수는 좌군과 우군을 합하여 5만명이었으나 10만명이라고 선전하였다. 출사하는 날 우왕이 술에 취하여 늦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가 하직하지 못하였다. 술에서 깨자 석포(石浦)에 배를 띄워 놀다가 저녁 때에야 돌아와서 여러 장수에게 술을 먹였다. 군사가 평양을 출발하자 최영이 우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이 출전하는 도중에 있는데, 만약 열흘이나 한 달을 지연한다면 대사를 성취할 수 없사오니 신이 직접 독려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경이 떠나면 누구와 정사를 논하는가?”
하고 최영이 굳이 청하자 우왕은
 “그렇다면 과인도 가겠다.”
하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요즈음 요동의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중에는 한 사람의 지휘관만 있을 뿐입니다. 대군이 만약 일찍 도착한다면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최영이 크게 기뻐하여 그 사람에게 후히 물품을 주었다.
 우왕은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를 폐지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예전처럼 호복(胡服)을 다시 입게 하였다. 또, 대동강에 나가서 호악(胡樂)을 부벽루에 베풀고 직접 호적(胡笛)을 불고 즐기면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우왕이 나가 놀 때에는 언제나 호악을 연주하게 하고, 배우들로 하여금 갖가지 유희를 하게 하였다. 최영도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출입하면서 피리를 부는 등 임금과 신하가 주색에 빠져 있었으며, 사람을 죽임이 날로 심하여져 백성들의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왕은 또한 사자를 보내어 장수들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주기(酒器)를 내려 주었다.

 5월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많았다. 우왕은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목을 베라고 명하였으나 도망치는 군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좌도통사 조민수와 우도통사 태조가 상언(上言)하기를,

 “신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기는 하였사오나, 앞에 큰 냇물이 있어서 큰 비가 내리니, 물이 넘쳐 흘러 첫번째 여울에서 빠져 떠내려간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여울은 더욱 깊어서 건널 수 없으므로 주(洲)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 양식만 허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요동성까지 가는 사이에는 큰 냇물이 많이 있어서 건너기가 어 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불편한 일들의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보고하였사오나 윤 허를 받지 못하와 황공하옵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도 말하지 않으면 이는 불충이오니 어찌 감히 죄받을 것을 피하여 입 다물고 있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나라가 삼국을 통 일한 이래로 큰 나라를 섬기기를 부지런히 해 왔습니다.

공민왕이 1369년(고려 공민왕 17) 명나라에 복종하여 섬기기로 하고 올린 표(表)에, `자손만세토록 영원히 신첩(臣妾)이 되겠 다\'고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가 그 뜻을 이어 해마다 공물을 바 치되 한결같이 조서의 뜻대로 하였으므로,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玄陵)의 시호를 주고 전하의 작위를 책봉한 것이니, 이는 종사의 복이며 전하의 성대한 덕입니다. 지금 명나 라의 류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위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서 밀직제학 박의중 (朴宜中)으로 하여금 표를 올려 품달케 할 계획을 세운 것은 매우 훌륭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나라의 명을 기다려 보지 않고 갑자기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종사와 백성 에 대해 복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은 더운 여름철이며 우기이기 때문에 활을 붙인 아교가 눅어 풀어지고 갑옷이 비에 젖어 무거워서 군사와 말이 모두 지쳐 있는 형편인 데, 그들을 견고한 성 아래로 몰아 달려가게 하고 있으니 싸움에서 꼭 이긴다고 할 수 없고 공격을 해도 꼭 취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때를 만나 양식도 넉넉하지 못하여 진격할 수도 퇴각할 수도 없는 곤란한 지경이온데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엎드 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회군하라 명하시어 삼한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듣지 않고 환관 김완(金完)을 보내어 진병(進兵)할 것을 독촉 하니, 좌우도통사인 조민수와 태조가 김완을 구류해 두고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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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그리고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속히 회군을 허락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최영 역시 들은 척 만 척하였다. 이 때 군중에 말이 와전되기를, 태조가 휘하의 친병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여 떠나려고 이미 말에 올랐다고 하니 군중이 흉흉하였다. 조민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단기로 달려 태조에게로 와서 울며 말하였다.
 
“공이 가시면 우리 무리는 어디로 갑니까?”
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어디를 갑니까? 공은 이러지 마시오.”
 하고 곧 제장에게 유시하기를,
 “만약 명나라의 경계를 침범하면 천자에게 죄를 얻게 되어 백성에게 화가 즉시 닥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순리와 역리를 가지고 글을 올려 군사를 돌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또한 반성하지 못하고 최영도 늙어 노망이 들어 듣지 않고 있다. 그러니 어찌 경들과 더불어 왕을 뵙고 직접 화와 복에 대해 진달하고 임금의 곁에서 악을 조장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백성 들을 편안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제장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사직의 안위는 공의 한 몸에 달려 있는데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군사를 돌려 압록강에 도착하여 백마를 타고 동궁백우전(쪐弓白羽箭)을 메고 강 언덕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렸다. 군중이 태조를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자고 이래로 저 사람 같은 사람이 없었거늘 지금 이후에 어찌 다시 저와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에 장마비가 며칠간 내렸지만 물이 가득 차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자 큰 물이 갑자기 닥쳐 온 섬이 모두 물에 묻혀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때를 얻는다는 동요가 있어 군민이 노소 없이 모두 노래를 불렀다.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敬)이 대군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우왕에게 고하였다. 그날 밤에 정종대왕이 그의 형 방우(芳雨) 및 이두란(李豆蘭:\'퉁\'가 성을 태조께서 \'李\'씨로 고쳐주었다)의 아들 화상(和尙) 등과 성주(成州)의 우왕의 처소에서 군전(軍前)으로 달아났는데 우왕은 한낮이 되도록 모르고 있 었다. 정종대왕 일행은 길에서 지원나온 수령을 만나자 그들의 마필을 모두 빼앗아 타고 갔다. 우왕은 대군이 되돌아 안주(安州)에 도착한 것을 알고 서울로 달려왔다.

 회군하는 제장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자 태조는 이르기를,
 “빨리 행진을 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어 살인을 많이 하게 된다.”
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군사들에게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임금님의 수레를 범하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에게서 한 개의 오이라도 빼앗으면 또한 죄를 짓게 될 것이다.”
하고 길가에서 사냥을 하면서 일부러 군사의 행진을 늦추었다. 서경에서 개성까지 수백리를 오는 사이에 우왕을 따르던 신료와 개경 사람, 그리고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나와 뵙고 대접하였는데, 그런 자들이 줄을 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동북면 백성과 여진족 중에서 종군하지 않은 자들도 태조가 회군했다는 말을 듣고 앞을 다투어 뽐내면서 밤낮 을 가리지 않고 급히 달려오니, 모인 자가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왕이 달아나 다시 화원으로 들어가자, 최영이 막아 싸우려고 하며, 백관에게 무장을 시켜 우왕을 지키라 명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