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5)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6월 초하루, 태조는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주둔하였다. 류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최영이 맞아 싸워 모두 물리쳤다. 태조가 류만수를 보낼 때에 좌우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류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주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그때 태조는 들판에 말을 놓아 두고 있었다. 류만수가 달아나 돌아오자 좌우가 그 사실을 아뢰었는데, 태조는 아무 대꾸도 없이 휘장 속에 굳게 누워 있었다. 좌우가 재삼 아뢴 뒤에야 천천히 일어나 음식을 들고 난 뒤, 말에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출동하려 하는데 앉은뱅이 소나무 한 그루가 백보 밖에 있는 것이 보였다. 태조는 그 소나무를 쏘아 승전할지의 여부를 점쳐서 군중의 마음을 단결하게 하려 하였다. 마침내 한 발의 화살을 쏘니 소나무가 그 자리에서 잘라졌다. 그러자 이르기를,

 “다시 무엇을 바라겠느냐?”
하니, 여러 군사가 모두 하례하였다. 진무(鎭撫) 이언(李彦)이 나와서 꿇어앉아 아뢰기를
 “우리 영공(令公)을 모셨사오니 어느 곳엔들 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숭인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 좌군과 좌우로 협격하면서 전진하니, 도성 안의 남녀가 앞을 다투어 술과 음식을 가지고 환영하며 위로하였고, 군사들이 수레를 끌고 길을 열었다. 노약자들은 산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좋아라 뛰며 환호하였다.

 조민수는 흑대기(黑大旗)를 세웠고 태조는 황대기(黃大旗)를 세웠다. 흑대기는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러 최영의 군사에게 패하여 달아났지만, 황대기는 얼마 후에 선죽교로 해서 남산(南山)에 올라갔다. 최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정병을 거느리고 먼저 웅거하고 있다가 황대기를 바라보고는 무너져 달아났다. 태조가 마침내 암방사(巖房寺)의 북쪽 고개에 올 라가 큰 소라[大螺]를 한 번 불었다.

 그 때에 행군하는 군중이 모두 나각을 불었지만, 태조의 군중에서 소라를 불자, 도성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태조의 병사인 줄을 알았다. 마침내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에워쌌다. 우왕과 영비(靈妃) 및 최영은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다. 곽충보(郭忠輔) 등 서너 명이 곧바로 전각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으니,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 였다. 최영이 우왕에게 재배를 올리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오. 그러나 대의를 거스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이 피로하고 지쳐서 원통하게 여기는 원망의 소리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이었을 뿐이오. 그러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고 서로 대하고 울었다. 마침내 최영은 고봉현(高峰縣)에 유배되었다.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리판삼사(李判三司 : 태조고황제)가 모름지기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오.?br>? 라고 했는데 최영이 그 말을 듣고 매우 노하여 감히 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탄식하기를,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
하였다. 양 도통사 및 36 원수가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謝)하니, 한산군 이색이 도성에 머물러 있던 나이 많은 재상과 함께 태조를 알현하였다. 태조가 이색과 한참 이야기를 하고 군문(軍門) 밖으로 돌아왔다. 전부터 태조 잠저(潛邸) 마을에

 “서경성(西京城) 밖에는 불빛이 나고 안주성(安州城) 밖에는 연기가 나네. 리원수(李元帥)가 그 사이를 오가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 말씀을 하네.”
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회군의 의거가 있었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6)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우왕이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삼고 태조를 우시중으로 삼았다. 전교부령(典校副令)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하여 태조를 뵙기를 청하고 `곽광전(쥦光傳)\'을 품속에 넣고 와서 올렸다. 조인옥(趙仁沃)을 시켜 읽게 하고 들었는데, 조인옥은 왕씨를 다시 세우자는 의논을 극진히 진술하였다.

 우왕이 밤에 환관 80여 인과 더불어 갑옷을 입고 태조와 조민수 · 변안열(邊安烈)의 집을 급습했으나, 모두 군문 밖에 주둔하고 집에 없어 해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우왕은 왕위를 내놓고 강화도로 가게 되었다. 태조가 왕씨의 후예를 가려서 세우고자 하니, 조민수는 우왕의 장인 이림(李琳)의 일가이기 때문에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우자고 해서 이색에게 묻고 마침내 의논을 하여 그를 세웠다.

 애당초에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포천(抱川) 재벽동(滓쮱洞) 전장(田莊)에 있었고, 신덕왕후 강비(康妃)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다. 태종대왕이 전리정랑(典理正郞)으로 개경(開京)에 있었는데,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가지 않고 즉시 포천으로 말을 달려갔다. 일을 맡은 노복들은 이미 다 도망하여 흩어졌으므로 태종이 신의왕후와 신덕왕후를 모시고 동 북면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말을 타고 내릴 적에 태종이 직접 도왔다.

 창왕이 태조를 동북면 삭방 강릉도 도통사(東北面朔方江陵道都統使)로 삼고 충근양절선무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의 호를 내렸다. 태조가 병으로 사직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창왕이 교시를 내렸는데 그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리성계는 문무의 지략과 장상(將相)의 재능으로, 조정에 들어와 서 정승이 되고 변방에 나가서는 장수가 되었다. 1359년(고려 공민왕 8) 기해년 용병(用兵) 이 있은 뒤로 30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겼다. 전쟁 중에서 컸던 것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 신축년 관선생(關先生 : 홍건적) 등의 도적이 개 경을 침범하여 국가가 피난했을 때였으나, 경이 대상(大相)을 보좌하여 흉칙한 도적을 섬멸 해서 경도를 회복하였다.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가 우리의 동북 변방을 침범하니, 제장 들이 패주하였다. 적병이 승승장구 고주(高州)의 경계를 덮쳐왔을 때에도 경이 갑옷을 걷어 붙이고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서 그들을 물리쳐 국경 밖으로 내쫓았다.

1363년(고려 공민왕 12) 계묘년에 서얼(庶孼) 덕흥군(德興君)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 변방을 침입하였을 적에는 경이 경기(輕騎)를 거느리고 달려가 그의 선봉을 꺾었다. 또한 1377년(고려 우왕 3) 정사년 에 왜구가 해주(海州)로 침략해 왔을 때 여러 재상들이 달아나 무너졌으나 경만은 몸소 사 졸(士卒)보다 먼저 앞장 서서 달려가 왜구들을 거의 다 전멸시켰다. 1380년(고려 우왕 6) 경 신년에는 왜구가 진포(鎭浦)에 들어와 양광(楊廣) · 경상(慶尙) · 전라(全羅) 지역을 횡행 하면서 군읍을 분탕질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하여 3도가 소란하였다. 원수 배언(裵彦) · 박수경(朴修敬) 등이 패전, 전사하였는데, 경이 만번 죽어도 돌아다보지 않을 계획을 내 어, 휘하 군졸을 거느리고 인월역(引月驛)에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남김 없이 잡아 죽임으로 하여 백성들이 경 덕택에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공은 군사들과 행군할 적 에 언제나 기강과 군률을 준수하게 하여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니, 백성이 경의 위엄 을 무서워하고 경의 덕을 생각하고 있다.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경의 풍성한 공과 위대한 덕이 이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에 빛나게 박혀 있는데도 스스로 자 랑하지 않고 부족한 듯이 겸손히 하고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더욱 의지하며 중히 여기고 있 는 바이다.”

 10월에 창왕은 태조를 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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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그 때 문하시중 이색은 창왕에게 직접 천자에 조회하게 하고 또 왕관(王官)으로서 국사를 감독하게 하려는 생각으로 입조(入朝)를 자청하였다. 이에 창왕은 이색과 첨서밀직(僉書密直) 이숭인(李崇仁)을 중국에 하정사(賀正使)로 보냈다. 이색은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이 갈수록 성대하여 온 나라의 인심이 태조에게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고 중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변이 생길까 두려워서 아들 한 명을 딸려 보내기를 청했다. 그러자 태조는 태종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보냈다. 입조하는 길에 여관에서 중국 관리를 한 사람 만났는데 그는 이색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에 최영이 10만 정병을 거느리고 있으니 리성계를 잡는 것은 파리를 잡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그러나 너희 나라 백성들이 리성계의 무한한 은공을 무엇으로 갚겠는가?”
하였다. 이색이 경사(京師)에 들어가 천자에게 조회를 하고,

 “왕(고려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중국말로 아뢰니, 천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이색이 조회에서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줏대가 없는 임금이다. 내 생각에는 황제가 이번 일에 대해 물을 줄 알았는데 묻지 않았고, 또 황제가 물은 것은 모두 내가 생각하던 것들이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당시 여론이 기롱하기를
 “대성인(大聖人)의 도량(度量)을 속유(俗儒)가 논의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1389년(고려 창왕 1) 기사년에는 전제(田制)가 크게 허물어졌다. 겸병(兼倂)하는 권력가들이 인민의 전토(田土)를 강탈하여 산과 들을 모두 차지해서 백성을 병들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였다. 태조가 대사헌 조준(趙浚)과 더불어 의논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해서 겸병을 막고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하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였고 민심이 더욱 따랐다.

 창왕은 태조에게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궁전에 올라오도록 하고, 조현할 때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은 50냥, 채단 10필, 말 1필을 하사하고 하교하여 권장하였다. 11월에 김저(金佇)가 몰래 우왕을 황려부(黃驪府)에서 알현하였는데, 우왕이 울면서 말했다.

 “내가 본래 곽충보(郭忠輔)와 친하다. 네가 그에게로 가서 함께 도모하여 리성계를 제거하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김저가 곽충보에게 가서 그 말을 전하니, 곽충보는 거짓으로 응락하고 태조에게 달려가 이를 고하여 김저와 정득후(鄭得厚)를 체포하였다. 정득후는 김저와 공모하여 밤에 태조의 집에 잠입했다가 문객에게 잡혔는데, 정득후는 자살하고 김저는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일이 변안열 등에게도 연결되었으므로 대간이 변안열을 주살하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힘 써 구원을 했지만 창왕은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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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한편 청친조사(請親朝使) 윤승순(尹承順) 등이 경사에서 돌아왔다. 예부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이자(移咨)하여, 이성(異姓)으로 왕씨(王氏)를 삼은 것에 대해 책망하고 후에는 친조(親朝)함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태조가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 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 · 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첁長壽), 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趙浚), 판자덕부사(判慈德府事) 박위(朴츂),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병위(兵衛)를 크게 벌리고 논의하기를
 
“우(禑)와 창(昌)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봉사할 수가 없고, 또 천자의 명이 있으니 마땅히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왕(神王)의 7대손이자 족속(族屬)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워야 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민왕 정비궁(定妃宮)에 가서, 비(妃)의 교서를 받들어 우를 강릉으로 보내고 창을 강화로 내쫓아 왕을 폐하고 서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요를 맞아 세우니 그가 바로 공양왕이다.

 태조가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을 구경하고 안변의 학포교(鶴浦橋)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졸다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지게 되었다. 태조는 즉시 내려서서 두 손으로 말의 귀와 말갈기를 잡아 말이 공중에 매달리게 하였다. 끝내 놓지 않고 사람을 시켜 차고 있는 칼을 빼어 안구(鞍具)를 끊어버리게 한 뒤에야 귀와 갈기를 놓으니, 말이 다리에서 떨 어져 물에 잠겼다가 다시 떠올라 헤엄쳐서 나갔다.

 공양왕이 태조를 시중(侍中)을 삼았으나 태조가 사양하였다. 그러자 수시중(守侍中) 심덕부(沈德符)를 시중으로 삼았다.

 1390년(고려 공양왕 1) 12월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소를 올려 우왕과 창왕을 뵐 것을 청했다. 공양왕이 여러 재상에게 물었으나 모두 말을 하지 않았는데 태조가 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하고 중국에 보고하였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신 등이 있사온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이에 공양왕이 이르기를

 “우왕이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의당 자신도 그 벌을 받아야 한다.?br>? 라고 하며 마침내 주살하였다. 공양왕이 하교했던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민왕이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훙서하시자 이인임이 정권을 유지하려고 거짓으로 신우 (辛禑)를 왕씨라고 칭하여 왕으로 삼으니, 신우 어리석고 흉악하며 미치고 패악스러워서 요 동을 능멸하려 하였다. 그러자 시중 리성계 등이 사직의 대계를 생각하여 군중을 타일러 회 군하였으며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씨를 세웠다. 조민수는 이인임의 무리로서 여러 사람 의 의견을 저지하고 우의 아들 창을 세워 왕씨의 제사를 끊은 것이 16년간이나 되었다. 리 성계가 차오르는 충심으로 의(義)에 앞장 서서 심덕부 · 정몽주 등과 책략을 세워 위로 천 자의 밝은 명을 받들고 종친 · 기로(耆老) · 문무 신료들과 도모하여 공민왕 정비(定妃) 의 명령을 받들어 우와 창 부자를 폐하였다.

그리고 내가 왕씨 중에 가장 가까운 종친이라 고 하여 조종(祖宗)의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으나 나의 덕이 부족하여 이처럼 막중한 책임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리성계가 명분을 바로잡고 다시 나라를 일으켜 왕실을 재건하였으니 그 공로는 실로 태조의 개국을 도운 공신들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하겠다. 이는 황하가 말라 띠처럼 흐르게 되고 태산의 돌이 닳아 숫돌처럼 된다 하더라도 잊기 어려운 공훈이니, 그 화상을 벽 위에 그려 표창하고 부모와 처를 봉작해 주며 자손에게 음직을 주되 10세(世) 토록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공양왕이 효사관(孝思觀)에 고하고 아홉 공신에게 녹권을 내렸는데, 태조를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으로 삼고, 화령군개국충의백(和寧郡開國忠義伯)이라는 작위를 내려 주었으며, 식읍 1천 호에 식실봉(食實封) 3백 호, 전(田) 2백 결, 노비 20구(口)를 주었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9)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태조가 병으로 사직하니, 공양왕이 중사(中使 : 내시)를 보내어 문병하고, 아홉 공신에게 교서를 내려 아름다움을 포장, 내구마(內廐馬) 1필, 백금 50냥, 비단(帛絹) 5단(端), 금대(金帶) 1요(腰)를 하사, 내전(內殿)에서 위로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또한 태조에게 교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비상한 변고를 제거하는 자는 반드시 세상에 뛰어난 인재를 기다리는 것이며, 만세토록 전할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한량 없는 보답을 받는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 裵玄慶)가 태조대왕을 도와 삼한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실(太室 : 太廟)의 배향에 참여하여 지금까지 5백년에 이르고 있다. 지난 번에 이인임이 현릉(玄陵)에게 영전(影殿) 짓는 일을 몰 래 인도해서 상상(上相)을 차지하여 원망이 임금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374년(고려 공민왕 23) 갑인년의 변을 불러오게 되었는데, 공민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이인임은 여불위(呂不韋)가 진(秦) 나라를 도둑질하던 계획을 사용하여, 공민왕 때의 요승 신돈이 낳은 자식인 우를 공민왕의 궁인이 낳은 아들이라고 사칭하여 그를 세웠다.

 현릉의 모후가 안 된다고 하였으며, 재상 이수산(李壽山)은 종친을 세우자고 청하였으나, 이인임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고,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으며, 태양의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가 주상(主喪)이 되어 현릉을 장사 지낼 때에는 무지개가 태양을 에워쌌으며, 그가 증제(烝祭 : 겨울 제사)를 주관할 때에는 올빼미가 태실에서 울고 천둥이 치며 지진이 일어났다. 또한 그가 현릉의 아버지 의릉(毅陵 : 충숙왕)의 기일에 재계할 때에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으며 천둥번개가 치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가 관작을 물려받을 때에는 바람이 불어 조묘(?廟 : 遠祖를 합사하는 곳) · 침원(寢園 : 임금의 산소)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뽑혔고, 태실의 맹새(鷲頭)가 부러졌으며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쬎)이 불에 탔다. 이는 모두 조종의 신령이 위엄을 나타내어 우(禑)를 끊은 것이다. 우의 어머니 반야(般若)를 죽여 그의 증언을 없애자, 사평(司平)의 새문(新門)이 저절로 무너졌고, 어느 마른 뼈(枯骨)를 장사 지내면서 우의 어미라고 하자 널(柩)을 안치한 장막이 하루에 두 번이나 불에 탔으니, 이는 하늘이 만세토록 우가 반야의 자식임을 내보여 준 것이다.

우가 즉위한 초년에 그 어미의 성명을 정하지 못하자 재상 김속명(金續命)이 `천하에 그 아비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는 혹 있으나, 그 어미를 분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듣지 못했다\'라고 했다가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현릉의 모후가 힘써 구제해서 죽임을 면했다. 그러나 김유(金庾)는 우가 왕씨가 아니라고 중국 황제에게 말하고, 돌아와 죽임을 당했는데 이런 일을 당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한심하여 아무 말을 못하고 있었다.

 우의 아내는 이인임의 질녀로서 창을 낳았는데, 이에 이르자 왕씨가 흥성하여 회복할 희망은 이미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인임이 나라를 제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을 병들게 한 지가 15년이나 되었는데, 우가 또 미치고 패악스러워 요동을 정벌할 모의를 하니, 그야말로 삼한의 백만 생령을 징발하여 모두 죽이려 하는 것이었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10)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그런데 경(卿 : 태조고황제를 지칭함)과 부장(副將) 조민수가 행군하여 압록강을 지나갔다가 경이 제장(諸將)들에게 사직의 존망을 생각해야 한다고 타일러 군사를 되돌려 돌아왔다. 이는 이미 백골이 된 백성들에게 경이 살을 붙여 준 셈이니, 사직이 폐허로 되지 않은 것은 오직 경의 충성에 힘입은 것이다.

 경의 용맹은 삼군의 으뜸이며, 벼슬 또한 양부(兩府 : 門下府 · 樞密府)에서 제일 높아 공명이 세상을 덮었으나 자랑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과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열심히 읽고, 유후(留侯) 장량(張良), 강후(絳侯) 주발(周勃),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 양공(梁公) 적인걸(狄仁傑)의 충성에 감동하여 회군을 한 것이다. 그 때에 왕씨의 부흥을 논의했는데 조민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자기의 일가인 이인임 · 이림(李琳)과 한패가 되어 경의 논의를 저지하였고, 오히려 창을 세워 자기가 총재(?宰)가 되니 왕씨의 부흥은 큰 기회를 잃고 말았다.
 경은 속으로 참고 견디면서 관직에 나와 공변된 의리로 조민수를 설득하고 타이르며, 한편으로는 대간(臺諫)을 엄선, 기강을 진작하였다. 그제서야 헌사(憲司)는 조민수가 탐욕을 부리고 법을 문란케 하였다고 공격하여 그를 제거하였다.

 경은 잠을 자지 못하고 앉아 아침을 기다리면서, 어진 사람 찾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하였고, 악한 사람 미워하기를 원수 미워하듯 하였다. 무릇 백성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운 것이라면 반드시 하고자 했으며, 조금이라도 해로운 것이면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였다. 언로를 열어 백성의 의견이 위로 통하게 하였고, 은일하는 사람을 천거하여 공변된 도리를 펴게 하였다. 그러자 뇌물을 가지고 관직을 팔고 사던 풍토와 죄수를 돈으로 풀어 주던 습 관이 하루 아침에 변하여, 초야에는 버려진 어진 사람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벼슬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부월(斧鉞)을 주니, 관찰사를 출척함에 변방에서는 도절제사가 감히 구적(寇賊)을 버려 두지 못하였고, 목사와 수령이 감히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를 못하였다. 소인배들의 간사한 말들을 배격하고 여러 지방에서 사전을 혁파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건져 내어 부귀와 장수를 누릴 수 있을 만큼 해 놓았다.
 그리고 규전(圭田)과 채전(采田)의 제도를 사용하여, 경전(京甸)에서 벼슬하는 자의 농토로 주어서, 군자를 우대하고 수위(守衛)를 엄히 하였다. 벼슬을 시키되 사심을 쓰지 않았고, 벌을 주되 노여운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 경의 성심(誠心)은 광명 정대하기가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아서 어리석은 사내와 여인들이라도 다 함께 본 것으로 경이 영위한 것은 모두 왕씨를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창의 외조 이림이 총재로서 성지(聖旨)를 비밀에 붙이고 발표하지 않아 예측할 수 없는 흉칙한 꾀를 내었으니, 신씨(辛氏)의 변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있을 터였으며, 왕씨는 이미 솥속에 든 물고기같이 존망이 호흡지경에 달려 있었는데, 경이 죽음을 무릅쓰고 대의(大義)를 세워 우리 왕씨의 만세계 책을 정해 주었고…”

 이상과 같이 공양왕이 태조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고 신씨(辛氏)의 축출과 왕씨(王氏)의 부흥을 도모한 데 대해 치하하여 마지 않았다. 이는 공양왕은 우왕이 신돈의 애첩 반야의 소생인데도 불구하고 궁인의 소생이라 기만하여, 이인임이 국민을 속이고 공민왕의 후사로 삼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11)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390년(고려 공양왕 1) 5월,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쮐)이 경사(京師 : 북경)에서 와서 아뢰기를

 “예부(禮部)에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 사람으로서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사람이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고려의 리시중(태조고황제)이 왕요(王瑤 : 공양왕)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는데, 왕요는 종실이 아니고 바로 시중의 인척입니다. 왕요가 리성계와 모의하여 병마를 움직여 상국(上國)을 범하려 하므로 재상 이 색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자, 곧 이색 · 조민수 · 이림 · 변안열 · 권중화(權仲和) · 장하(張夏) · 이숭인 · 권근 · 이종학(李種學) · 이귀생(李貴生)을 잡아서 살해하려 하고, 우현보(禹玄寶) · 우인열(禹仁烈) · 정지(鄭地) · 김종연(金宗衍) · 윤유린(尹有麟) · 홍인계(洪仁桂) · 진을서(陳乙瑞) · 경보(慶補) · 이인민(李仁敏) 등을 잡아서 먼 곳 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내쫓긴 재상 등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하게 하였으며,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와서 정벌하게 하시오\'라고 한다면서,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 · 조민수 등의 성명을 내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반이 윤이와 대변(對辨)하기를, `본국(고려)이 대국을 지성으로 섬기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윤이에게 `그대는 벼슬이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니 자못 나를 알 것인데?\' 하니, 윤이가 깜짝 놀라면서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우보현 · 권중화 · 경보 · 장하 · 홍인계 · 윤유린과 최공철(崔公哲) 등을 순군옥에 내려 가두고, 이색 · 이임 · 우인열 · 이인민 · 정지 · 이숭인 · 권근 · 이종학 · 이귀생 등은 청주(淸州)의 감옥에 가두고 국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6월에 청주에 수재가 났다. 공양왕이 태조와 심덕부(沈德符)를 불러 죄수를 놓아줄 것을 의논하며, 이조판서 조온(趙溫)을 청주에 보내어 교지를 내렸는데 그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윤이(尹彛) 등이 말한 바와 같이 그 교령(敎令)의 사람이 죄가 반역에 관계되어 추문(推問)해서 죄상을 밝혀야 될 사람은 유사(有司)에 명하여 심문하였다. 윤이의 친족 윤유린(尹有麟)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아 먹지 않고 죽었으며, 공모한 최공철(崔公哲)은 죄를 자복하였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정상이 명백하지 않으니 고 문을 더한다면 잘못에 빠질 염려가 있다. 위의 사람들 중 이미 공초에 자백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각처에 안치하라.”

 11월, 태조가 윤이 · 이초의 옥사(獄事)로 인하여 글을 올려 사직하니, 태조를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삼았다.
 12월, 태조를 문하시중도총중외제군사(門下侍中都摠中外諸軍事)로 삼으니, 태조가 다음과 같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였다.

 “덕을 헤아려 직위를 주는 것은 바로 임금의 밝음이시고, 총행(寵幸)으로 공을 차지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의리에 합당한 것입니다. 영화를 탐하여 무릅쓰고 나아가는 것은 재앙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공(召公)은 권세가 극성하자 잇기 어려움을 근심했고, 채택(蔡澤 : 전국시대 연나라 사람)은 공이 이루어진 사람은 떠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우 리 시중의 임무는 주(周) 나라 총재(?宰)의 벼슬과 같은 것으로, 나라를 균등하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음양을 조화시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량(局量)과 학술(學術)이 소략(疏略)한 신이 가성(假姓 : 辛氏)이 독을 퍼뜨린 시기에 군사를 발동, 상국을 침범하려 하다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돌이켜서 삼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참위(僭僞 : 신우 · 신창)의 종족은 저절로 멸망하게 되었고 정통의 전승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윤이와 이초가 중국으로 도망하여 남 몰래 천자를 업신여기고 친왕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일으켜 사직을 옮기고자 하였는데, 김종연(金宗衍)이 그 주모자로서 스스로 미혹되어 도망하였으니, 이는 왕실의 안위에 매여 있는 것이며 신의 이해와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숨겨 주고 또 고의적으로 놓아 주어 그와 서로 불궤의 꾀를 도모하고 있으니, 신이 총리(寵利)를 독차지함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오면 지금도 두려운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근자에 우규(右揆)를 면할 수 있어서 속으로 다행하게 여겼사온데 지금 신 을 시중에 제수하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12)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이에 왕이 윤허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반란을 평정하는 일은 실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가 하는 것이며,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일은 반드시 하늘을 대신할 정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의 거취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인데, 경의 뜻은 서릿발같이 날카롭고 기는 번쩍이는 산과 같이 뭉쳐져 있어, 옛날부터 왕실에 공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덕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다. 나씨(納氏 : 納哈出)를 북쪽 변방에서 축출하였고 왜구를 사방에서 섬멸하였다. 선왕(先王 : 공 민왕)이 훙서하시니, 위성(僞姓)이 중간에서 거짓으로 나라를 훔쳐,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고 주색에 빠져서 살육을 일삼았다. 또한 어리석게도 흉모를 부려 군사를 일으켜서 중국을 범하려고까지 하였는데, 경이 순리와 역리의 도를 밝게 알아서 의에 앞장서 회군해 돌아왔다. 그리고 여러 종친과 의논하고 신서(臣庶)와 함께 위성(僞姓)을 폐하여 내쫓고, 과덕한 나를 추대하여 위태로울 뻔하던 나라의 기업을 다시 안정되게 하였고, 이미 끊어졌던 종사를 다시 잇게 하였으니, 그 공과 덕을 헤아려 보면 고금에 빛이 난다. 그런데 어찌 여러 소인배들이 남 몰래 간사한 모의를 할 줄 알았겠는가? 이는 실로 나의 실책이지 경의 잘못이 아니다. 깊이 몸을 책하는 데 뜻을 두고 그들을 형장(刑章)으로 바로잡으려 하는데, 경이 갑자기 전문(箋文)을 올려 직임을 면하려 하고 있으니, 경의 생각은 비록 밝은 것이나 내가 바라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이미 같은 한 몸인데, 산하(山河 : 태산과 황하)가 평지가 되고 띠처럼 된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에서 잊혀지겠는가? 번거롭게 고사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수행하라.”

 태조가 관직을 사양하려 하였으나, 공양왕은 폐립(廢立)의 공과 출위(黜僞) 입진(立眞)의 훈을 높이 평가 · 칭송하면서 종사를 지켜 줄 것을 힘써 바랬다. 이로 보아 수구(守舊) 척신(斥新)들의 세력이 만만치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1391년(공양왕 2) 정월에 오군(五軍)을 줄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로 만들어 중외군사(中外軍事)를 거느리게 하고 태조를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았다. 그러자 태조가 다음과 같이 전(箋)을 올려 사직하였다.

 “용렬한 신이 특별히 남다른 성은을 입어 장상의 지위에 올랐사오나, 조금의 보익(補益) 도 없으니 마땅히 어진 이가 등용되도록 길을 비켜 줘야 합니다. 성상의 명철한 정치를 펴 게 해 드려야겠기에 작은 정성을 다하였사오나 거듭 성상의 총애를 입어 번번히 사직에 대 한 윤허를 받지 못하오니 두려움이 더욱 심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나라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일은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만, 임 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맞게 만나기가 어렵다는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漢) 나라 고조(高祖)는 창업한 군주로서 사람을 알아 잘 임용하였지만, 식견이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가 공신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 불만이 있었습니다. 광무제(光武帝)는 중흥한 군주로서 호걸을 망라하여 한왕조(漢王朝)를 광복하고 공신을 잘 대우하여 그 종말을 보전하였으니, 후세 사 람들이 모두 그 선정을 칭찬하였습니다. 그 공신에 있어서는 한신(韓信)과 주발(周勃)은 끝 내 장량(張良)의 보전(保全)만 못하였고, 구순(寇恂 : 무제의 명신)과 등우(鄧禹 : 광무제의 명신)는 오히려 엄자릉(嚴子陵)의 고절(高節)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신이 비록 배우지 못하 였지만 장량(張良)과 엄자릉(嚴子陵)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전하께서도 광무제를 본받으시길 바랍니다.”

태조고황제 -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창업(創業) (13)
제 1대조   이름(한글):테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그러나 공양왕은 윤허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대신의 한 몸은 국가의 흥함과 쇠함에 관계되고 백성의 기쁨과 근심이 매여 있는 바, 직임이 이처럼 무거우니 거취를 가벼이 할 수가 없다. 소공(召公)이 돌아갈 것을 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공(周公)은 임금을 보존해야 할 의리가 있는 것이다. 경은 산천의 기운을 타고난 불세출의 인물이요, 사직의 으뜸가는 신하이다. 국사를 위하여 사사로운 일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충성이 태양을 꿰뚫었고 의리에 의지하고 신의로 안정케 하여 공업(功業)이 하늘을 떠받쳤다. 그리하여 선왕 때부터 과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 나라를 편안하게 안정시켰다. 엄자릉의 고절에 광무제가 일을 맡기지 않았고 유후(留侯 : 장량)가 떠났으나 한나라가 안정된 것은 예전의 일로서 지금과 비교해 보건대 사정이 다를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그 작위를 편안히 여기고서 나의 마음을 맞춰주기 바란다.”
태조고황제 -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 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정몽주(鄭夢周)의 복구모의(復舊謀議) 와 태조대왕의 등극(登極)

 1391년(공양왕 2) 6월, 대간이 아뢰기를
 “우현보(禹玄寶)는 죄가 이색(李穡)과 같은데, 지금 이색이 이미 폄직되었으니 마땅히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며 세 번이나 상소했으나 모두 전중(殿中)에 그대로 두었다. 그 때 태종대왕이 우대언(右代言)이었는데 공양왕이 태조에게 명하여 대간의 상소를 금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탄식하기를
 
“내가 대간을 사주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전을 올려 사직하였다. 왕은 한 나라의 안위가 관계되어 있는 것이 중대한데 대신이 거취를 가벼이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신으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게 하고 변경에 급함이 있으면 신으로 하여금 막게 하여 주소서. 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지금 신의 임무는 크고 직책이 무거워 이미 감내하지 못하고 있사온데, 게다가 병마저 번갈아 침노하니, 바라건대 의약을 써서 스스로 보양하려 하옵니다.”
하였으나 공양왕이 윤허하지 않고 강제로 일어나게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사양하며 나가지 않고 다시 전문을 올렸다.

 “신이 무진년에 대의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 위성(僞姓)을 폐하고 진성(眞姓)을 세웠으나,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의 시기를 받고 있습니다. 또 왕을 세우고 우왕을 맞이할 때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함께 모의한 것이 증거가 이미 명백한 까닭으로 대간이 자기들끼리 소를 올려 죄 주기를 청하였을 뿐인데 신이 어찌 감히 사주하였겠습니까? 지금 신에게 명하여 대간을 금지하게 하라고 하시니, 이는 신이 대간을 사주하였는가 의심하시는 것입니다.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이므로 큰 임무를 감당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오니 현량을 뽑아 신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