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4)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전교를 내려 조광조 · 김정 · 김식 · 김구 네 사람에게는 사사를 명하고 나머지는 귀양보내라 하였다. 처음에 중종은 조광조 등을 사사하라고 명하였으나, 정광필과 안당 등의 극진한 주청으로 조광조는 능주(능성)로, 김정은 금산, 김구는 개령으로, 김식은 선산, 박세희는 상주, 박훈은 성주로, 윤자임은 온양, 기준은 아산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관학(館學)의 여러 유생들이 거리마다 들끓고 대궐로 달려 오는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광화문 밖에 모여서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유생 신명인(申命仁)이 앞장서서 그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상처를 입어 피가 흘러 얼굴에 가득한 유생들은 망건이 벗겨지고 혹은 머리가 풀어져서 대궐 뜰에서 울부짖어 그 소리가 중종의 귀에까지 들렸다. 중종은 남곤 등이 `조광조가 인심을 얻어 나라가 위태롭다\'고 퍼뜨린 유언비어를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믿어 더욱 노하여 유생을 벌하였다. 또 조광조가 귀양가 있는 한 달 동안에 대간이 조광조의 무리를 마치 물 이 깊어가듯이 나날이 드러내어 참소하였으므로 마침내 중종은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 때 죽은 조광조는 이 후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광조 등이 현직에 있을 때 옛 중국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과거제도의 모순을 시정한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신진사류들이 숙청당하고 훈구파의 전횡이 계속되자 현량과도 폐지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문화발전을 위한 정책은 거의 정지되고 대 소 정변이 계속되는데 모두가 정권 쟁취를 위한 분쟁으로 무고(誣告)와 모함의 점철이었다.

 1519년(중종 14) 11월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남곤 · 심정 · 홍경주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서 조광조 · 김정 · 김식 등 신진사류가 화를 입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 사화는 조선 정치사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파괴된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 장려에 힘썼다.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조광조는 류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 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학자였다. 그는 1515년 성균관 유생 2백 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반정 초기에는 `이과(李顆)의 옥(獄)\'과 같은 파란도 있었으나,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 은 · 주시대)의 왕도정 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서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할 목적으로 인재를 천거, 시험에 의하여 등용하는 제도인 현량과를 설치하고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를 폐지하여 미신타파에 힘쓰고, 향약을 실시하여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二倫行實)>과 <언 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 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5)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이같은 그의 지치주의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는 그 구현과정에서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타인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어 정적(政敵)이 생기고, 또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도리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중종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하여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시대 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 · 이행(李荇) 등의 사장파 유자들과 서로 대립하게 되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그들의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세력을 소인시함으로써 훈구 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불만은 1519년(중종 14)에 있었던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거세게 폭발하였다. 이 사건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건의한 결과,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 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에게 지급된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행위이기도 하였다. 이 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勳籍)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광조 등이 사사되거나 귀양 또는 파직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이 옥사 이 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朴維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중종 10) 왕비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 · 알력을 원인으로 하고,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에 의하여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시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가 조광조에 의한 삭훈사건을 빌미로 하여 폭발한 것이다. 기묘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 치적 음모가 유효하였던 정쟁(政爭)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조광조의 왕도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이념의 진보성과 실현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으나 당시의 정치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 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기묘사화 이 후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계열로 돌아가 있었다. 때문에 중종 이전부터 문제시되어온 정치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시정은 이후에도 기대하기 어려워, 훈구와 사림 두 계열간의 대립이 재현되었다. 1521년(중종 16)에는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안처겸(安處謙) 일파가 처형되는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 현신들이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기묘사화 의 여파로 일어난 이 사건은, 기묘사화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심정 · 남곤 등이 조정을 장악하자,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를 두둔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된 좌의정 안당의 아들 안처겸은 이정숙(李正叔) · 권전(權?) 등과 더불어 심정 · 남곤 등이 사림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다 하여 그들을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여기에 참석하 였던 송사련은 정상(鄭?)과 짜고 안처겸의 모친상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근거로 하여 안처겸 일당이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함으로써 이 무옥사건이 일어났다.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6)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이 결과 안당 · 안처겸 · 안처근 3부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림들이 연루되어 처형되고 송사련은 고변의 공으로 30여 년간 세력을 누렸다. 이 신사무옥 사건은 다른 사화처럼 훈구대신과 신진사류 사이의 반목과 질시가 발단이 된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 투쟁방법이 기묘사화 때의 그것과 같이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이념에서가 아니고 순전히 정적(政敵)을 타도하기 위하여 무고하는 정치적 음모를 동원하였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그렇지만 훈구 · 사림간의 갈등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사림세력이 후퇴한 이 후 훈척세력에 의한 전횡과 그들간의 정권 탈취를 위한 분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자(뒤의 인종)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에서 일어난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이었다.

 1527년(중종 22) 3월에 동궁에서 작서의 변이 일어나, 세자의 이복형 복성군 미와 그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사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쥐를 잡아 당시 13세이던 세자를 저주한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 해 2월 26일에 누군가가 동궁 해방(亥方)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 · 귀 · 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를 동궁의 북쪽 뜰[北庭]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생나무조각으로 방서(榜書)를 만들어 걸어두었다. 이 때 세자는 동궁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는 해생(亥生)이요, 2월 29일이 생일인 데다가 `해(亥)\'는 돼지에 속하고 쥐도 돼지와 비슷하므로 당시의 조정 신료들은 세자를 저주한 것이라 하였다.

 이어 3월 초하루에도 이런 사건이 대전(大殿) 침실의 책장[典欄]에서 다시 일어나자, 우의정 심정이 이를 듣고 이유청(李惟淸)과 함께 왕에게 아뢰어 범인을 잡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의혹만 커가서 당시 지목당하고 있던 경빈 박씨의 소행이라 하여 그녀의 시녀와 사위인 홍려(洪礪)의 종들이 심문 중 매를 많이 맞아 죽었고, 또한 형벌에 못이겨 거짓자백한 자도 있었다. 이에 경빈 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은 함께 서인이 되어 쫓겨났다. 그뒤에 다시 세자의 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망측스런 글을 쓴 일이 생겨, 서인이 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사사되었고, 두 옹주를 폐서인으로 만들었으며, 홍려도 매를 맞아 죽었다. 그리고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밖으로 내쫓겼으며, 좌 의정 심정도 경빈 박씨와 결탁하였다 하여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5년이 지난 1532년(중종 27)에 이종익(李宗翼)의 상소에 의해서야 비로소 진범이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안로는 심정 · 류자광 등에게 원한을 품어오던 중 아들 희를 시켜 작서의 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들이 부 마 즉 중종의 맏사위(김희는 인종의 누이인 효혜공주와 혼인함)로 있음을 계기로 정권을 농단(壟斷)하다가 권세를 잃게 되자 그 권세를 만회하고자 한 것으로, 당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동궁에서 세자의 안위에 관련된 사건이 발발하자 조신들은 그것을 정치투쟁에 이용하게 되었다. 세자 보호를 명분으로 하여 김안로가 유배지인 경기도 풍덕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복귀하자 그는 처음에 사류를 옹호하는가 싶더니 뒤에는 태도를 바꾸어 모함과 탄압으로 이들을 배제하고 자신의 정권유지에만 급급하였다. 그 뒤에는 또 세자와 이복 아 우 경원대군, 즉 뒷날의 명종을 둘러싸고 그 외척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의 대립이 이른바 대윤(大尹) · 소윤(小尹)의 정쟁인데, 명종 초의 을사사화를 빚게 된 발단이 되었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자   인종의 외숙은 윤임이며, 경원대군의 외숙은 윤원로 . 윤원형인데, 조급히 출세하려는 무리들이 부추겨 편당하여 서로 배척하였으니 정국이 혼미할 수 밖에 없었다.
중종대왕 - 왕비.후궁과 자녀들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왕비 · 후궁과 자녀들

 연산군의 폭정은 반정의 소용돌이를 불러오는 한편 왕실 내부의 슬픈 이야기도 만든다. 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중종의 대군 시절에 혼인하여 중종과 천생의 인연을 맺은 신씨는 반정이 성공하여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인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한 이튿날부터 반정공신 류순 · 김수동 등이 여러 공신과 6조 참판 이 상의 관리를 거느리고 중종에게 아뢰기를,
 “의거하던 때 먼저 신수근을 죽인 것은 큰 일에 성공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딸이 궁중에 들어와 있는데, 만일 그를 왕비로 정하게 되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이 있을 터이오니 은정을 끊고 내보내소서.” 라고 하였다.

 중종은 이 말을 듣고
“아뢴 일은 심히 당연하나 조강지처를 어찌하리오.”
라고 하며 매우 곤혹스러워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신들도 이미 짐작한 것이오나 종사의 큰 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쾌히 결단하여 미루지 마소서.”
라고 하면서 다시 강력히 주청하니 중종도 할 수 없이
“종묘 사직이 지중하니 어찌 사정에 얽매이겠는가. 마땅히 중의를 쫓으리라.”
고 하면서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인종의 외숙은 윤임이며, 경원대군의 외숙은 윤원로 · 윤원형인데, 조급히 출세하려는 무리들이 부추겨 편당하여 서로 배척하였으니 정국이 혼미할 수밖에 없었다. 며 눈물로써 허락하고 말았다.

 마침내 중전 신씨는 폐주의 척신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중전에 오른 지 7일만인 9월 10일에 대궐 밖으로 쫓겨나 인왕산(仁旺山) 밑에 있던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폐출되었다. 아버지 좌의정 신수근과 숙부인 형조판서 신수영(愼守英) · 개성유수 신수겸(愼守謙) 등이 바로 며칠 전에 참살당한 뒤였다. 이때 신씨의 나이 20세였는데, 이로부터 한두 번 복위입궐 (復位入闕)의 기회와 의논이 있었으나 일부 신료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70평생을 청상으로 보내면서 이른바 애타는 `치마바위\'의 슬픈 이야기를 남겼다. 일찍부터 애정이 두터운 부부인지라 헤어져 살아도 그 애틋한 사랑을 끊을 수 없어 중종은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는 꼭 신씨의 사저 근처에 머물렀으며, 타고 온 말을 늘 사저에 보냈는데 그때 마다 신씨는 흰 죽을 쑤어 손수 말을 먹여 보냈다. 또 대궐에서 보면 한 눈에 바라보이는 집 뒤 바위 위에 치마를 걸어 두어 자신이 늘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항상 대궐에 계시는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중종대왕 - 왕비.후궁과 자녀들 (2)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1515년(중종 10) 봄에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 인종을 낳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왕비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이 폐출당한 신씨를 다시 복위시켜 부부의 도리를 다하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대신들의 반대로 복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박상은 남원현에, 김정은 보은현으로 귀양을 갔다. 신비는 1557년(명종 12) 12월 7일에 향수 71세로 승하하였는데, 자식은 없었다. 명종은 장생전의 관목을 내려 일등으로 장사지내고 세시에는 상식을 올리게 하였다. 양사언이 지은 신비 만장에 이렇게 적혀 있다.

 “(임금의) 덕을 짝지어 일찍 궁중에 들어올 때 6궁의 종과 북이 일시에 울렸는데, 곤산에 문득 불이 났고 계수나무가 서리를 맞아 풀밭에 쓰러졌네. 봄에는 상림원을 생각하매 꽃이 이슬에 울고 장신궁에 꿈을 깨니 눈물이 슬픔을 보태네. (일편) 단심은 요대의 달이 되어 밤 마다 서릉을 향해 오네.”

 1672년(현종 13)에는 이조참의 이단하의 상소로 신씨의 신주를 신씨 본가 후손의 집으로 옮기고 제수를 내려주었으며, 묘지기 7호를 두었다. 1698년(숙종 24) 신규가 상소로 복위할 것을 주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사당을 지어 별묘에 모시고 묘지기 15명을 두었다.
 폐비 신씨의 복위는 신씨 사후 180여 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에야 수많은 의논 끝에 유생 김태남의 상소가 계기가 되어 복위의 전교가 내려짐으로써 단경(端敬)의 시호와 공소 순렬(恭昭順烈)의 휘호가 올려지고, 외로이 있던 묘소도 온릉(溫陵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으로 승격되어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신위도 종묘의 정전 제 6실에 배향되었다.

 중종의 제1계비 선소 의숙 장경왕후 파평 윤씨는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 정헌공 여필의 딸이다. 1491년(성종 22) 7월 6일에 호현방 사제에서 탄생하였으며, 1506년(중종 원년) 중궁에 들어와 처음에는 숙의로 있다가 1507년(중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원자를 낳고 산후가 나빠서 3월 2일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하여, 숙신 명혜라는 휘호를 받았다. 1547년(명종 2)에 선소 의숙으로 휘호를 가상했으며, 1남 1녀를 낳았다. 능호는 희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 있는데 김안로가 지문을 지었으며, 처음에 경기 광주 헌릉(태종대왕릉) 오른편 산에 예장했다가 1527년(중종 32)에 이장하였다.

 대왕의 제2계비 성렬 인명 문정왕후 파평 윤씨는 영돈녕부사 파산부원군 정평공 지임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 10월 22일에 탄생하여 1517년(중종 12)에 왕비로 책봉되어 태평관에서 가례를 올렸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장성하도록 아들이 없고, 명종은 어려서 대군이 되었는데 조정은 인종과 명종의 편으로 갈려 싸움이 치열하자 문정왕후는 어린 아들 명 종이 위태롭다고 생각하여 외신에게 의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견고히 할 생각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어린 명종이 즉위하여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명종 2년(1547)에 존호를 성렬로 올리고 9월에 다시 인명이라고 가상하였으며, 명종 20년(1565) 4월 7일에 창경 궁 소덕당에서 향수 65세로 승하하였다. 소생으로는 1남 1녀가 있으며, 서울 도봉구 공릉동의 태릉에 안장되어 있다.
중종대왕 - 왕비.후궁과 자녀들 (3)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중종은 2명의 계비와 6명의 후궁에게서 모두 9남 1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인종대왕으로 장경왕후 윤씨 소생이다. 둘째 아들은 명종대왕으로 문정왕후 소생이다.
 후궁 소생으로 7남이 있는데, 1남은 복성군(福城君) 미(嵋)로 경빈 박씨 소생이다. 파평 윤씨 현감 증 찬성 인범(仁範)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527년(중종 22)에 김안로가 일으킨 작서의 변에 생모가 혐의를 받아 그와 함께 작호를 빼앗기고 상주로 축출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사사되었는데, 1541년(중종 36)에 인종이 동궁으로서 상소를 올려 설원되었으며, 관작이 회복되고 선조의 4남 신성군(信城君)을 계후로 삼아 봉사(奉祀)케 하였다. 고종 때 정민(貞愍)으로 시호가 내려졌으며, 묘소는 양주 접동면 궁동리 봉화현에 있다.

 2남은 해안군(海安君) 희인데 1511년(중종 6) 6월 15일에 출생하였으며, 숙의 홍씨 소생이다. 1549년(명종 4)에 현록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랐고, 문소전 · 사옹원종부시 도제조에 이르렀다. 1573년(선조 6) 8월 6일에 향년 63세로 별세하였으며, 그 해 9월 29일에 장사지냈는데 비명(碑銘)은 영의정 홍섬이 찬했고, 시장(諡狀)은 우의정 이휘지가 찬했으며, 행장(行狀)은 이관운이 찬하였다. 1788년(정조 12) 정희(靖僖)로 시호가 내렸다. 부인은 진주 류씨(柳氏) 진산군 증 찬성 홍(泓)의 딸과 거창 신씨 참봉 증 찬성 홍유(弘猷)의 딸이다.

 3남은 금원군(錦原君) 영으로 희빈 남양 홍씨 소생이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며, 묘소는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영산 자좌인데 비명은 여성군 송인이 지었다. 부인은 군부인 해주 정씨(鄭氏)로 도사 증 찬성 승휴(承休)의 딸인데 자식이 없어 덕흥대원군의 아들 인(?)을 입 양했다.

 4남은 영양군(永陽君) 거(?)로 창빈 안산 안씨 소생이다. 중종 1519년(중종 14) 4월 24일에 출생하여, 1551년(명종 16) 7월 27일에 향년 41세로 별세하였다. 시호는 성도(成悼)이고,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동작리(銅雀里) 사좌에 표석이 있다. 부인은 경양군부인(景陽郡夫人) 순흥 안씨인데 문음으로 사포서(司圃署) 사포를 역임한 증 좌찬성 세형(世亨)의 딸이며 1남을 낳았는데 흥녕군(興寧君) 수전(秀全)이다.

 5남은 덕양군(德陽君) 기(岐)인데 숙원(淑媛) 경주 이씨 소생이다. 숙원 이씨가 출산 후 닷새만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숙의 김씨 손에서 자랐는데, 중종은 물론 인종 · 명종과도 우애가 깊었으며 선조도 대접이 극진했다. 종친부 종부시에 종사하고 문소전 · 연은전 양전의 일을 보았다. 덕양군은 성격이 어질고 겸손하였으며, 음악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 어 친구들과 자연 속에서 사냥과 낚시로 지내다가 1581년(선조 14) 6월 22일 향수 57세로 별세하였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며,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동남현 둔덕에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또 묘소 아래 궁내동 366번지에는 덕양군의 사당 정희사(靖僖祠)가 자리잡고 있다. 부인은 호조 판서 권찬(權纘)의 딸로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봉해졌으며 현록 대부 풍산군(豊山君) 종린(宗麟)을 낳았다. 그외의 소생으로 풍성군(豊城君) 희린(希麟), 풍천도정(豊川都正) 명린(命麟), 풍해수(豊海守) 계린(季麟)이 있다.
중종대왕 - 왕비.후궁과 자녀들 (4)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6남은 봉성군(鳳城君) 완(?)인데, 희빈 홍씨 소생이다. 1528년(중종 23) 4월 9일에 출생하여 1605년(선조 38) 평창에 유배되었다가 1607년(선조 40) 9월 25일에 사사되었다. 선조 때 문성공 이이, 좌의정 이준경, 우의정 이이명, 오성부원군 이항복 등이 신원을 상소로 청원하였다. 1630년(인조 8) 에 특명으로 신설(伸雪) 복작되었으며, 1732년(영조 8)에 시호 의민(懿愍)이 추증되었고, 시장은 풍릉부원군 조문명이 찬하였다. 부인은 군부인 동래 정씨로 봉정 증 영의정 유인(唯仁)의 딸이며, 자식이 없어 안남군(安南君)의 아들 문성군(文城君)을 계자로 삼아 후사를 이었다.

 7남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로 창빈 안씨 소생이다. 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판중추부사증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딸이다. 아들에 하원군(河原君) · 하릉군(河陵君) · 하성군(河城君)이 있는데 3남 하성군이 제 14대 국왕 선조로 즉위하였다. 덕흥대원군은 왕자이면서도 사가에서 빈한하게 살다가 세 아들을 남기고 30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어린 세 아들을 키우며 근근히 어렵게 살아오다 하성군이 등극하기 45일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명종의 후사로 대통을 잇게 된 하성군은 생모인 하동부대부인의 장례도 참석하지 못하고 입궐하여 명종의 아들로서 상주가 되었다. 예장이 정리되자 생부인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생모인 군부인을 하동부대부인으로 각각 추봉하였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소생의 1녀 효혜공주(孝惠公主)는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 희(禧)에게 출가하였다.
 2녀 의혜공주(懿惠公主)는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 소생으로 청주 한씨 첨지중추부사 승권(承權)의 아들 청원위(淸原尉) 경록(景祿)에게 출가하였다. 3녀 효순공주(孝順公主)도 문정왕후 소생인데, 능성 구씨(具氏) 현감 순(淳)의 아들 능원군(綾原君) 사안(思顔)에게 출가했다. 4녀 경현공주(敬顯公主)도 문정왕후 소생이다. 고령 신씨(申氏) 목사 수경(秀涇)의 아들 영천위(靈川尉) 의(훳)에게 출가했다. 5녀 인순공주(仁順公主)도 문정왕후 소생인데 일찍 별세했다.

 중종의 후궁 소생으로 1녀 혜순옹주(惠順翁主)는 경빈 박씨 소생인데 광주김씨(光州金氏) 참의 헌윤(憲胤)의 아들 광천위(光川尉) 인경(仁慶)에게 출가했다. 2녀 혜정옹주(惠靜翁主)도 경빈 박씨 소생이다. 남양홍씨 관찰사 서주(픊疇)의 아들 당성위(唐城尉) 여(礪)에게 출가하였는데, 동궁의 작서사건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오빠 복성군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유배지 에서 사사된 후 동궁의 상소로 뒤늦게 신원되었다.

 3녀 정순옹주(貞順翁主)는 숙원 이씨 소생으로 여산송씨(宋氏) 첨지중추부사 지한(之翰)의 아들 여성위(礪城尉) 문단공(文端公) 인(寅)에게 출가했다. 4녀 효정옹주(孝靜翁主)도 숙원 이씨 소생이다. 순창조씨(趙氏) 부사 침(琛)의 아들 순원위(淳原尉) 의정(義貞)에게 출가했다.
 5녀 숙정옹주(淑靜翁主)는 숙원 김씨 소생으로 능성구씨 부정 신경(信璟)의 아들 능창위(綾昌尉) 한(澣)에게 출가했다.
 6녀 정신옹주(靜愼翁主)는 창빈 안씨 소생인데 청주한씨 현감 자(慈)의 아들 청천위(淸川尉) 경우(景祐)에게 출가했다. 창빈 안씨는 영양군과 덕흥대원군, 정신옹주를 낳았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승려가 되어 인수사(仁壽寺)에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중종대왕 - 시대상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시대상

 중종은 연산군 시대의 여러가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홍문관을 강화하는 동시에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515년(중종 10)에 신진사류인 조광조를 등용하여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에 근거한 철인군주 정치를 표방하여 기성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를 두어 친히 김식 등 유능한 신진사류 28명을 뽑아 언론 · 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하여 이른바 이들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사회면에서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광조 등을 등용하였던 초기에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였다. 도성 안의 요승 · 무가(巫家)를 적발, 처치하고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면서 유교주의적 향촌질 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향약을 전국화하였다. 한 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그 뒤 유교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 · <이륜행실> · <속삼강행실> 등을 간행하여 교화에 힘쓰고, 중종의 말년에는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을 맞기 위한 영은문(迎恩門)을 세우는 등 유교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그리고 39년이라는 오랜 재위기간 동안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하였다. 1516년(중종 11)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여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을 편찬, 간 행하였다. 즉, 최세진(崔世珍) · 신용개(申用漑) · 이행(李荇)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四聲通解)> · <속동문선> ·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다. 1536년(중종 31)에는 찬집청(撰輯廳)을 설치하여 권선징악을 중심 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하여 역사 · 지리 · 언어 · 문학 · 사회 등 각 방면의 문헌들이 편찬, 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 · <대전속록> 등을 간행하고, 1540년(중종 35)에는 역대의 실록을 등사하여 사고(史庫)에 비치하는 동시에 1542년(중종 37) 근정청(斤正廳)을 설치하여 <대전속록> 이 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이듬해 7월 <대전후속록>을 완성, 반포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종조는 정국의 불안으로 국방정책에 있어서도 많은 혼란을 가져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1510년(중종 5) 4월에 삼포(三浦)의 항거왜추(恒居倭酋)가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한 때 제포와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는 등 (삼포왜란)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이 난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가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 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항거왜의 삼포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계속 됨으로써 왜변이 자주 일어났다.

 즉, 1522년(중종 17) 5월 추자도 왜변과 동래염장의 왜변, 1512년(중종 7) 9월 전라도 왜변 등이 빈발하고,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에 침입하여 인마(人馬)를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기왕의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
중종대왕 - 시대상 (2)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북방 국경지대의 야인(野人)의 침구도 빈번하였는데, 1512년(중종 7) 야인이 갑산 · 창성 등지에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여러차례의 침입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여연 · 무창 등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는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방어에 노력하였다. 1524년(중종 19)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적극적으로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야인들은 생활 여건이 나은 6진 4군 지대로 부단히 침입하여 들어와 때로는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등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남쪽에서의 왜변과 북쪽 오랑캐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자 왕권호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였으며,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특히 비변사는 변방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들이 모여 변방에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방어를 의논하던 임시 합좌회의기관이었다. 그러나 뒤에 영설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화 하였다. 이밖에도 한 때 무학(武學)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편조전 · 벽력포와 같은 무기를 제작하여 외침에 대비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과 함께 방군수포 등으로 군사제도가 차츰 무너지면서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모순들이 하나, 둘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 중종은 지폐[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1522년(중종 17)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하여 악포의 유통을 막고, 두승(斗升)을 새로 만들어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한편 1524년(중종 19)에는 전라도 · 강원도 · 평안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의복 · 음식 · 혼인 등에 대한 사치를 금지하였 으며, 관리들의 신래자(新來者)에 대한 침학을 금지하는 등 경제재건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과 잦은 외침 등으로 실효를 크게 거둘 수는 없었다. 특히 특기할 사실은 1530년(중종 25) 4월에 당시 들어오기 시작하였던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무역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는 지배층의 의생활에 변화를 일으켰 다.

 중종의 시대에는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 또한 발달하였다. 즉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 · 간의혼상(簡儀渾象)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중종 29) 2월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泥豆錫) · 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습득해오게 하였다. 1536년(중종 31)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하여 누각(漏閣)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또한 1538년(중종 33)에는 천문 · 지리 · 명과학(命課學)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1488년(성종 19)에 태어나 19세 때인 1506년(연산군 12)에 반정으로 즉위하여 만 38년 2개월 동안 조선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하였던 중종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다사다난한 일생을 보낸 국왕이었다. 중종의 시대는 크게 보면 조선 왕조가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변화기였다. 중종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살펴 볼 때 그 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아직도 더 많은 연구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연구에서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종대왕 - 시대상 (3)
제 11대조   이름(한글):중종대왕   이름(한자):中宗大王

정치사적인 측면에 국한하여 중종의 시대를 살펴보면, 중종은 제 16대 인조처럼 군사를 이끌고 주도적으로 반정을 수행하지 못하고 박원종 · 성희안을 비롯한 신하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던 까닭에 반정공신세력의 영향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비 거창 신씨를 그들의 요구대로 폐서인하였던 사례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중종대왕은 나름대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여 공신세력에 대한 견제장치로서 사림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언관권(言官權)의 비대화란 현상에 직면하였고, 이를 타파하기 위한 기묘사화의 촉발은 오히려 중종조 정국의 한계를 반증한 것이었다.

 기묘사화 이 후 중종 25년간의 정국은 이러한 군신 권력관계의 변동 속에 `화(禍)를 입은 사람들[被禍人]\'에 대한 처리에 부심했던 시기였고, 권신(權臣)에 의거한 정국운영도 결국 이러한 중종조 왕권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중종조에는 조선의 전기사회가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각종 모순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훈구세력과 신진 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 상호간의 갈등 및 훈구세력과 척신세력간의 세력다툼 등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종조의 정치사는 정치적 혼미에서 대변되는 왕권의 불안정 속에서도, 중종이 주도한 정치 · 사회의 개혁은 그것이 비록 미완으로 혹은 실패한 것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개혁의 요체인 왕도정치의 지향은 그러한 개혁의 과정과 본보기가 사회 저변으로 영향을 미쳐 결국은 유교사회의 지평을 열어가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 다. 때문에 조선왕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반정 가운데 하나인 중종반정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등극하는 계기였던 인조반정과는 반정이란 이름은 동일하였으나 그 성격은 확연히 달랐다(인조편 참조). 중종반정은 유교적 이상주의 정치를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는 조선 왕조에서 그러한 이념적 관행이 유지될 수 있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