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 생애 (10)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즉, 시법(諡法)이 주(周)나라에서 비롯하여 한(漢) · 당(唐)을 지나도록 인(仁)으로 시호를 칭한 적은 없었다. 송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인종(仁宗)이라 칭하고 있다는 점에는 무언가 뜻이 있다는 것이며, 또 글자 뜻으로 논하면, 인(仁)은 사덕(四德)의 하나요, 성(成)은 모든 착한 것을 모아 말한 것이니, 공자의 집대성(集大成)과 뜻이 통하고 `인(仁)\'의 경우 중국에서 `인종(仁宗)\'이라 정한 것이 이미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야 한다는데 그 정당성이 있어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연산군은 그대로 받아들여 인종이 아닌 성종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종의 인덕은 시호 `인문 헌무 흠성 공효(仁文憲武欽聖恭孝)\'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나 성종대를 정리한 실록이 완성이 되는 것은 연산군 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는데, 그간 실록의 편찬과 관련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는 다음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겠다.

 다음으로는 군주가 신료들을 조회 등의 정사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대소신료들의 고충 및 간언 등을 청문할 수 있는 기회로서 윤대(輪對)를 행하도록 하였다는 점인데, 연산군은 5일마다 한번씩 윤대할 것을 전교하고 있다(연산군 원년 9월 3일). 또 연산군 2년 9월의 내용으로서 주목되는 것이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재시행이다. 즉 그 동안 해이해져 시행되지 못했던 사가독서를 재시행함으로써 학문을 권장하고 신진(新進)을 양성하도록 하였던 것이다(연산군 2년 9월 4일). 더불어 연산군 3년에는 재위 중 가장 많은 경연횟수를 기록하고 있어 150여 차례나 되고 있다. 1498년(연산군 4) 2월에는 세조 이래 편찬되지 않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세조 이하 덕종 · 예종 · 성종조의 내용을 첨부하여 다시 편집하여 찬진하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연산군은 재위 3년까지는 나름대로 문풍을 진작하고, 치도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대간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류의 세력과 원로대신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특히 성리학의 명분론을 받드는 이들은 권도(權道)로써 때에 맞으면서 대의를 잃지 않는 방법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였다. 또한 왕실을 중심으로 한 불교 숭봉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하였다. 사기(士氣)를 진작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연산군은 이들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써 연산군-원로대신-대간세력이라는 세 축이 형성되었으나 점차 대간세력이 탈락하고 임사홍과 같은 이들이 들어서면서 연산군-신료라는 상하관계가 이루지게 된다. 즉, 비판 및 견제세력이 모두 그 힘을 잃었던 것이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통해서였다.

 본래 실록의 편찬은 왕의 사후에 재위기간 중 사관들이 쓴 사초(史草)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자료를 종합하여 편찬되도록 되어 있으며, 그 사초에는 사관의 이름이나 관직 등이 기재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더불어 이러한 사초에 대해서는 왕이나 권력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종종 이러한 원칙은 무시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역모 혹은 왕실의 존엄성 혹은 정통성의 훼철과 관련될 때 등이 그러한 경우가 된다. 실록의 편찬은 왕의 재위를 시대단위로 하는 왕조시대에 있어 한 세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연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연산군 - 생애 (11)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이러한 내용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1498년(연산군 4) 7월 11일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단이 된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사건(史草事件)\'이다. 그 계기는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면서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즉 중국 진(秦)나라 때 항우가 초(楚)의 의제(義帝)를 폐한 것을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의한 내용의 글과 당대의 권신으로 있던 이극돈(李克墩)의 실행에 대한 기록이 직접적인 것이었다.

 류자광(柳子光)의 김종직 등에 대한 오랜원한 이극돈과의 연합을 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성종의 승하와 함께 실록의 사초가 모아지게 되자, 여기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으로 이극돈이 임명되었다. 이에 이극돈 등은 `조의제문\'을 대역무도한 행위라 규정하고, 노사신(盧思愼) · 윤필상(尹弼商) 등과 함께 상계(上啓)하여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 등을 잡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선대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라 하더라도 사화(士禍)로까지 번지기에는 미흡한 것이었고, 또 사초(史草)가 갖고 있는 비밀보장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오사화로까지 비화된 것은 이극돈과 류자광 · 노사신 · 윤필상 등의 역할이 컸고, 더불어 당시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데 있어 김일손(金馹孫) · 권오복(權五福) · 권경유(權景裕) 등과 같은 신진사류들의 반대와 상소, 간쟁 등으로 연산군은 이들을 매우 싫어하는 때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삼사(三司 : 司憲府 · 司諫院 · 弘文館)의 관원으로 진출하여 간쟁의 일을 맡고 그 직분으로 관리의 감찰과 임금에 대한 간언을 굽히지 않고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권신들과 연산군으로서도 이들에 대해 껄끄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또 연산군의 폐비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폐비와 관련하여서는 다시 한차례의 피의 숙청이 기다리게 된다.

 마침내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 · 권오복 · 권경유 · 이목(李穆) · 허반(許磐) 등에게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의 형벌을, 표연말(表沿沫) · 홍한(洪瀚) · 정여창(鄭汝昌) · 정승조(鄭承祖) 등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장(杖) 100에 유(流) 3천리의 형벌을 내렸다. 무오년의 사화는 이렇게 막을 내리지만 이는 역으로 연산군에게 자신이 국정을 처리하는데 있어 자신감을 부여하였다. 견제세력이 없어진 마당에 무엇인들 뜻대로 하지 못하겠는가? 이 후 지속되는 연산군의 실정은 그 결과였던 것이다.
 이러한 억울한 옥사에 대한 하늘의 견책이었던지 1498년(연산군 4) 9월 창경궁(昌慶宮) 대내(大內)에 화재가 나 연소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2월 23일에는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安順王后)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가 마침내 승하하게 된다. 당시 내전으로는 덕종비인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안순왕후 인혜대비, 성종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자순대비(慈順大妃), 그리고 연산군의 비인 중전 신씨(愼氏)가 있었다. 어찌보면 왕대비전인 삼전(三殿)의 존재는 당시 왕실 재정의 운영이라든가, 불교에의 심취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힘있는 종실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존재는 연산군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인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왕실 내부에서조차 연산군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인물이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연산군 - 생애 (12)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연산군은 인혜대비의 승하와 함께 그녀의 상례를 날수로써 달수를 대신하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로 할 것을 의논케 하여 당시 왕실의 상례 자체를 뒤바꾸었다. 자신의 친조모인 소혜왕후의 상에 이일 역원제를 그대로 적용하였다. 먼저 그 의논과정을 보면, 인혜대비가 승하한 뒤 연산군은 대신들에게 그녀의 상제를 논하게 하여 먼저 3년상으로 할 것이냐 기년(朞年 : 1년)으로 할 것이냐를 정하도록 하였다. 예종의 상이 기년이었던 관계로 역시 기년으로 해야 한다는 의논에 따르게 된다. 또 날로써 달로 바꾼다는 역월제(易月制)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의논과정에서 연산군은 상기(喪期)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성이 중요한 것이니 기간은 문제가 안된다고 표현하였다. 결국 인혜대비의 상제는 기년역월제(朞年易月制)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조금 번거롭지만 이와 관련한 1499년(연산군 5) 1월의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그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일 정승들의 의논에도, 어떤 이는, `3년의 복제를 따라 역월(易月)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기년(朞年)의 복제를 따라 역월한다면, 상제(喪制)가 세 번이나 변경되는 것이니 심히 불가한 일입니다. 대저 상제란 근거없이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 등이 고금의 상제를 고찰하옵건대, 송조(宋朝) 때 날로 달을 바꾸기는 하였지만 상복만은 그대로 두었다가 재기(再朞)가 되기를 기다려서 제복(除服)하였으니 3년의 복제는 대략 존속하였습니다. 또 아조(我朝)의 공정(恭靖)의 상제 또한 역월(易月)의 제(制)를 행하여 훙서(薨逝)한 날로부터 열세번째날에 연제(練祭), 스물다섯번째날에 대상(大祥), 스물일곱번째날에 담제(쩘祭)를 지냈지만, 상복만은 두었다가 재기(再朞)가 되어서야 제복하였습니다. 이제 대행 대비의 상제를 만약 3년제로써 역월한다면 장례 후 열세번째날이 연제, 스물다섯번째날이 대상, 스물일곱번째날이 담제이나, 상복은 두었다가 재기가 되기를 기다려 제복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지금은 내상(內喪)이니, 백관은 본복(本服)을 따라 기년으로 감쇄(減殺)되고, 열세번째날에 이르러 길복(吉服)을 입게 되며, 전하께서는 연복(練服)을 면치 못합니다. 길흉이 다르옵니다. 또 기년으로써 역월(易月)하오면, 장례 후 열한번째날이 연제, 열세번째날이 대상, 열다섯번째날이 담제입니다. 그러나 예부터 이러한 제도는 없습니다. 신 등은 이 두 제도에서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하올지 함부로 단정할 수 없으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였다. 참의(參議) 이창신(李昌臣)이 독계(獨啓)하기를,

 “3년의 복제는 천하의 통례이며, 상고 삼대(三代)로부터 삼년상이면 열세번째달이 연제, 스물다섯번째달이 대상, 스물일곱번째달이 담제며 기년상이면 열한번째달이 연제, 열세번째달이 대상, 열다섯번째달이 담제였을 뿐 당시에는 달을 날로 바꾸는 제도가 없었습니다. 한 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서 달을 날로 바꾸라 하였으며, 그 뒤부터 이 역월제도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본복에 겨누어 역월했을 뿐입니다. 이제 본복인 삼년상을 이미 기년상으로 하였으니 그 예가 이미 강쇄(降殺)한 것이온데 또 역월제를 좇는다면 대상과 담제의 기간이 더욱 촉박합니다. 성조(聖朝)가 이러한 대례를 정함에 있어 경솔하게 하였다가 뒤에 웃음거리를 남겨서는 아니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기년역월제는 대신이 이미 의논하여 정한 것이니, 고칠 이유가 조금도 없다.”  하였다.[『연산군일기』권32 5년 1월 계해(3)]
연산군 - 생애 (13)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1499년(연산군 5), 보령 24세가 되던 해에 마침내 수많은 희생을 딛고 <성종실록(成宗實錄)>이 완성되었다. <성종실록>의 완성과 함께 비로소 연산군의 시대도 열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이 폭정일변도의 행위를 보였다는 것은 아니다. 군주로서의 치도를 논하는 경연에 있어 그 횟수 등은 줄었지만 그대로 시행되었다. 또 연산군 1500년(연산군 6) 9월에는 홍문관원 권장절목을 마련하고, 11월에는 과부의 재가를 금하였으며, 편찬사업으로 1499년(연산군 5) <동국명가집(東國名家集)>을, 6년에는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 <농사언해(農事諺解)> · <잠서언해(蠶書諺解)> · <여사서내훈언해(女四書內訓諺解)>가, 7년에는 성준(成俊)과 이극균(李克均)이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 · <서북지도(西北地圖)> 등을 찬진하였다. 이와 함께 1501년(연산군 7) 10월에는 성현 · 임사홍이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마치기도 하였다. 이듬해 1월과 3월에는 각각 중국에 사람을 보내어 염직을 배워오게 하였고, 김익경(金益慶)이 제작한 수차를 충청도 · 경기도 등에 보급하는 한편, 6월에는 혼인이 사치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면서도 연산군은 후사를 정하여, 8년 9월에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일기>에서는 중종의 등극과 관련이 있는만큼 책봉에 관한 자세한 사항이 빠져 있다. 즉, 명(明)에 `조선국왕\'으로 책봉을 받는데 있어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책봉을 청하는 서장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연산군이 병이 있고 그 후사가 병이 있음을 들어 자신이 군주의 위를 승계하였다고 했던 바, 당연히 세자와 관련된 부분이 자세하게 들어가면 곤란했던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당시 세자의 위에 오른 원자는 성종 25년에 태어난 원손(태어난 그해 사망)이 아니고 연산군 3년 12월에 태어난 아기씨였다. 원손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태어난 뒤 얼마 후 죽은 것으로 보인다. 세자에 책봉된 원자의 휘는 로(?)이고, 부왕이 폐위되자 그 역시 폐위되어 정선(旌善)으로 귀양가게 된다. 세자에 대한 평은 연산군과 달리 일찍부터 덕이 있음이 논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군주로서의 자질은 훌륭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의 생애가 연산군의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포부를 펴지 못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겠다.

 이후에 일어나는 연산군의 행적은 연산군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시켜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으므로 군주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중종이 반정으로 즉위한 뒤 사신(史臣)이 연산군의 죄상을 논한 부분에서 상세히 알 수 있다.

 특히 1504년(연산군 10) 3월에 일어나는 갑자사화는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3월 23일 연산군은 마침내 친모인 윤씨에 대한 완전한 복위를 시도하게 된다. 이에 따라 폐비 및 사사(賜死)에 관련된 이들의 처벌은 당연한 수순으로 정해진다. 먼저 연산군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회묘(懷墓)께서 선왕께 죄를 얻기는 하였지만, 어머니는 자식으로 하여 귀해지는 것이니, 묘호(墓號)를 고치는 것이 어떠한가? 그 때 일을 내가 친히 보지는 못하였지만, 일찍이 듣건대, 그렇게 한 자가 있으니, 이는 나의 불공 대천(不共戴天)의 원수이다. 백년 안에 처치하지 못한다면, 백년 뒤에 뼈를 가루낸들 어찌 잊겠느냐? 마침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역시 선왕의 후궁으로 그 상사를 지내야 하는가? 그 소생 아들에게 복을 입게 할 것인가? 강등할것인가?
연산군 - 생애 (14)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여기서 회묘는 바로 폐비 윤씨이다. 이러한 연산군의 지시에 따라 바로 그 다음날 윤필상 등이 폐후의 시호를 `제헌(齊獻)\'이라 의논하여 올리고, 회묘(懷墓)를 고쳐 `회릉(懷陵)\'이라 올리니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갑자년의 봄은 이를 시작으로 참혹한 피를 흘리게 된다. 폐비 윤씨를 위한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에서 기술하고 있는 갑자사화에 대한 기록은 그 정황을 잘 보여준다. 특히 할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영향력이 건강의 악화로 줄어들고, 조정의 신료도 연산군의 독주를 견제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수그리니, 이러한 상황이 피의 사화 배경이 되었다. 즉, 왕권견제세력의 부재가 사화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4월에 접어들면서 폐비 윤씨를 위한 신원(伸寃)은 그 묘호나 시호를 복구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성종조에 폐비 윤씨와 관련된 신료와 내인 등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들을 처벌하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따뜻하기만 하던 봄날이 끝나갈 무렵 그렇게 많은 눈물이 산하를 적시게 된 것이다.

 연산군은 모후가 억울하게 비명(非命)에 죽었다하여 분하게 여기는 한편 그 복수를 현실화하였다. 당시의 논의에 참여하여 심부름한 신하를 모두 대역죄로 추죄하되 팔촌까지 연좌시켰으며,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 이세좌(李世佐)의 친족도 연좌되어 화를 입었다. 윤필상(尹弼尙) · 한치형(韓致亨) · 한명회(韓明澮) · 정창손(鄭昌孫) · 어세겸(魚世謙) · 심회(沈澮) · 이파(李坡) · 김승경(金升卿)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 · 이극균(李克均) · 성준(成俊)을 `12간(奸)\'이라 하여 어머니를 폐한 사건에 좌죄시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이 가운데 윤필상 · 이극균 · 이세좌 · 권주 · 성준은 죽음을 당하고 그 나머지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여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보냈으며, 심하게는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는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연좌되어 당연히 사형할 사람으로서 먼저 죽은 자는 아울러 송장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을 집행하고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보내고 또 그들의 집을 헐어 못을 만들고, 비(碑)를 세워 그 죄명을 기록하였다. 또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안뜰에서 함부로 때려 죽이는 한편,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과 봉안군(鳳安君) 봉도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후 죽였다. 그리고 그들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도록 한 것이다.

 소혜왕후는 이러한 연산군의 처사에 대해 병들어 누웠다가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말하길,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자, 연산군은 오히려 왕후의 몸을 머리로 부딪쳐, 얼마 뒤 소혜왕후는 한을 품고 서거하게 된다. 폐비 윤씨는 죽어서 그렇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살아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한풀이를 연산군을 통해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갑자년의 한 해는 그렇게 피와 눈물이 천하에 가득하게 되었으니, 이를 연산군의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원한의 씨를 뿌린 성종에게 돌려야 하는지, 혹은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의 매정함을 탓해야 하는지, 아니면 부군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내침을 당한 폐비 윤씨를 탓해야 할 것인가?
연산군 - 생애 (15)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소혜왕후는 마침내 노령과 건강의 악화, 그리고 연산군에 대한 원망으로 급속히 악화되어 4월 27일 승하한다. 그러나 연산군은 할머니인 소혜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전교하기를,
 “대행 대비(大行大妃)께서 조정에 임하신 지 오래되었지만, 나라에는 별로 이렇다 할 일이 없고, 다만 자친(慈親)으로 섬겼을 뿐이다. 안순왕후(安順王后)에 있어서는 곧 대통(大統)이니 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의경대왕(懿敬大王)보다는 좀 높게 하고, 안순왕후보다는 좀 낮추어 한다면 정리에 매우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그 상제를 달리 정하도록 하였다. 즉 27일의 이일역월(以日易月)의 제도로 상기를 단축하였던 것이다.

 상기에 대한 연산군의 태도는 당시 유교통념상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이러한 제도를 널리 시행하도록 하였다. 즉 연산군은 폐위되기 전인 12년 5월 2일에 전교를 내려 친상(親喪)에 이미 이일역월(以日易月)의 제도로 상례(喪禮)를 정하여 모든 벼슬아치는 상제(喪制)를 이미 마치면, 아직 장사지내지 않았더라도, 공회(公會)에서 고기를 먹도록 하고, 여타의 복(服)은 본종(本宗)의 당형제 자매(堂兄弟姉妹)와 외친(外親) 구고(舅姑)에 한하되, 모두 복을 낮추어 시마(쳠麻) 3일로 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서도 연산군은 세자의 학문과 배필을 정하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썼다. 즉, 1504년(연산군 10) 6월 29일의 일로 연산군은 세자비의 간택을 위해 처녀 및 양인의 딸을 숨기지 못하게 하였다. 명확하게 기록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때 세자빈으로 정씨(丁氏)가 간택되었음이 후일 중종조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길례를 올리지 않고 다만 납징(納徵)만을 행하였으므로 부부지연(夫婦之緣)까지는 맺지 못하였는데, 이는 세자의 나이가 8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1505년(연산군 11) 7월에는 세자로 하여금 서연(書筵)의 수업을 통해 군주의 덕을 기르도록 하였지만 당시 세자는 부왕의 행실에 대해 못마땅해 하였다. 세자는 성품이 침중하고 굳세며 엄숙하여 오히려 연산군과는 반대의 성격을 보였다. 이 때 연산군은 기녀인 흥청(興淸)과 더불어 주악(奏樂)하곤 하였는데 세자에게 이들을 잘 보살필 것을 부탁하였지만 그가 아무 말도 않자 세자를 꺼리기도 하였다. 점차 세자의 학문이 진전될수록 그 성품과 학문은 성종을 닮아갔다. 부왕인 성종이라면 극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연산군으로서는 매우 못마땅해 하였고, 성종과 관련된 말을 진언하는 자가 있으면 엄한 형벌을 내리거나 직접 몽둥이질을 하였다.

 연산군은 그의 재위 마지막 해인 12년 정월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생애를 뒤돌아보면서 삶의 허망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는 그가 남긴 어제시를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어찌보면 그만큼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꼈던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극단의 비극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그의 삶이 파탄되었지만, 군주로서 갖는 무한한 권력의 행사는 또다른 희열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는 정월 15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공명도 죽은 후엔 다 헛것이니
 평시에 음악과 술 취하며 편히 지냄만 못하여라.
 한 번 청년으로서 황토에 묻힌 손이 되면
 이 세상 돌아오기 어려우니 한한들 무엇하리.”
 하고, 또 그 아래에 쓰기를,
 “군자는 비록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하나 만약 천운(天運)을 당하면 어찌 슬픔이 없으리오!”
연산군 - 생애 (16)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어찌보면 연산군 자신도 자신의 최후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굳이 천운(天運)이라 하여 운명에 돌리기는 하였지만 신료들에 의한 반발이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폐위되고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점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
 고려말의 공민왕이 선정과 업적을 남기다가 말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실이나 혹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폭정이나 폐정을 남긴 후 반정 혹은 반란으로 죽음이나 유배에 처해졌던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예감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로 위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연산군에 대한 반발은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신윤무(辛允武) · 류순정(柳順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치밀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 이들은 연산군을 폐위한 뒤 그 뒤로 정현왕후 윤씨의 장자인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돌린 격서(檄書)에서 연산군의 죄상과 함께 반란에 대한 염려, 그리고 왕실과 왕조를 보위하기 위해 어질고 덕이 있는 진성대군을 추대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506년(연산군 12) 9월 1일 밤 훈련원(訓鍊院)에 군사를 모은 뒤 이들을 나누어 진을 치게 하고 신윤무로 하여금 연산군을 유혹한 신수영(愼守英)을 쳐죽이고, 임사홍(任士洪)과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은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愼守勤)을 죽이도록 하였다. 또 대궐을 포위하고는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 자순대비(慈順大妃)에게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청하니, 대비는 일단 세자를 올릴 것을 말하였으나 류순 등의 재청으로 진성대군으로 정하게 된다. 하룻밤의 역사는 이렇게 그 운명을 달리하면서 날이 밝아왔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로 신료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정(反正)\'이며, 왕실의 권력은 이 후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신권(臣權)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받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고 있다.
 반정세력들은 연산군과 그 가족들에 대한 처우 및 처리 문제를 의논한 끝에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하고 폐비 신씨는 정청궁(貞淸宮)에 나가 있게 하며 폐세자 로(?)와 창녕대군(昌寧大君) 인(仁) · 양평군(陽平君) 성(誠)과 돈수(敦壽) 등은 모두 가마를 타고 귀양가도록 하였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몰려오는 교동에서 연산군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고, 불안함과 지난 일에 대한 회한 등으로 정신적 고통이 밀려왔다. 더불어 역질(疫疾) 등으로 연산군은 건강까지도 악화되면서 12월에 들어 더욱 고통을 받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중종은 의관을 보내어 치료하도록 했으나 이미 명은 연산군에게서 떠나고 있었다. 평생의 일이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줄 누가 처음부터 알았겠는가?

 그의 마지막 말은 역시 인간 연산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로 부인 신씨가 보고 싶다는 한마디였다. 서른 하나의 생으로 그는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끝내게 되었다. 묘는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 즉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에 모셔졌으며, 단지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석만이 그의 능임을 알게 해 주고 있다.
연산군 - 생애 (17)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성군의 아들로 태어나 항상 그에 비교되고, 더불어 모후의 폐비와 사사라는 가족사의 비극은 연산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그와 평생을 같이 하였다. 또한 연산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인과 세자 및 자식들 역시 그 평생의 한과 업보를 그대로 받게 되었으니, 역사란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요소들이 얽혀지면서 형성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연산군이 이렇게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 안치된 지 얼마 안되어 죽자, 그 가족들 또한 천명(天命)을 이을 수 없었다. 세자와 연산군의 비를 그대로 궁궐에 둘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박원종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반정세력들은 이에 대한 중대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폐비 신씨(愼氏)나 세자 등은 연산군의 성품과 달리 덕이 있어 그들에게로 권력이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또 자신들의 반정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발본색원(拔本塞源)의 작업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9월 5일, 박원종 등은 성밖 가까이에 있던 폐세자 및 창녕대군(昌寧大君) · 양평군(陽平君)에 대해 외진 군읍을 골라 안치토록 하였다. 즉 폐세자는 정선(旌善), 창녕대군 인(仁)은 수안(遂安), 양평군 성(誠)은 제천(堤川), 돈수(敦壽)는 우봉(牛峯)에 보내어 모두 관가 근처에 안치하되, 그 담을 높이 쌓고 항상 문을 잠그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는 보름 후인 24일에 영의정 류순 · 좌의정 김수동 · 우의정 박원종 · 청천부원군 류순정 · 무령부원군 류자광 · 능천부원군 구수영 및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의논하여 폐세자 로 · 창녕대군 인 · 양평군 성 및 돈수 등을 사사(賜死)할 것을 청하였는데, 중종은 이에 대해 재상들의 의견이 그러하고 종사에 관련된 일이므로 따르겠다는 전교를 내리게 된다. 이들의 죽음이 있은 뒤 중종은 그들에 대해 장례만이라도 후히 하려 하였으나 중종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즉 류순 · 박원종은 폐세자 등이 이미 서인(庶人)이므로 관곽(棺槨)으로 매장하고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전(奠)을 드리도록 하면 족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 폐비 신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 즉 정청궁(貞淸宮)에서 성종의 후궁과 함께 거처하는 신씨를 동대문밖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집에 옮겨 안치토록 하였다가 그녀의 아버지인 신승선(愼承善)의 집을 수리해서 옮겨 두도록 한 것이다. 또한 그녀의 위호(位號)를 낮추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하였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이 죽은 뒤 그 신주(神主)를 자신이 모셨다. 그녀의 부도(婦道)는 반정세력들조차 인정하는 바였기 때문에 이후 그녀에 대해서만큼은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종 16년 11월에는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주어 거처케 하는 한편 신주를 모시게 하였다.

 많은 일들을 지켜보고 직접 겪기도 하였던 그녀는 오히려 고즈넉하다 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무소유(無所有)의 초탈함이 그녀에게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벌써 그녀의 머리를 희게 하였고 그녀의 몸에서 자연스레 우러난 우아함은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자상함으로 변하였다. 연산군이 살아서는 부인의 도와 덕으로 행하고 연산군이 죽어서는 정절로서 조용히 거처하다가, 그녀는 중종 32년 4월 마침내 죽음을 맞았다. 그녀는 망우리(忘憂里) 폐비 윤씨 묘의 국내에 안치되었고, 제사는 외손 구엄(具헪)에게 전해졌다가 다시 그의 외손 이안눌(李安訥)에게 이어졌는데, 이렇게 죽어서도 편안치 못하였으니 안타까움이 남는다.

연산군과 그녀와의 사이에는 5남 1녀가 있었는데, 성종 25년 낳자마자 곧 졸한 원손과, 폐세자 · 영수(榮壽) 아기 · 총수(聰壽) 아기 및 창녕대군 인 그리고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에게 시집간 휘신공주(徽愼公主)이다. 다음 후궁의 소생으로 양평군 성과 돈수, 신거홍(愼居弘)에게 후취(後娶)로 시집간 서녀(庶女)가 있었다. 또한 후궁인 장녹수(張綠水)에게서 태어난 딸로 영수(靈壽)와 정금(鄭今)에게서 태어난 함금(咸今)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자세한 생애뿐만 아니라 생몰년 역시 알 수 없으므로 아쉬움이 남는다.
연산군 - 시대상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시대상

 연산군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적 전환기에 군주 및 신권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은 중종에게로 전가되어 중종은 왕권의 의미를 다시금 정립하게 되었다. 그 작업은 연산군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로 시작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되는 사관의 연산군에 대한 평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이는 중종이 즉위하던 날인 9월 2일에 사신(史臣)이 논한 내용이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연산은 성품이 포악하고 살피기를 좋아하여 정치를 가혹하게 하였다. 주색(酒色)에 빠져 사사(祀事)를 폐하고 쫓겨난 어미[出母]를 추숭(追崇)하면서 대신(大臣)을 많이 죽였으며, 규간(規諫)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였으며, 서모(庶母)를 장살(杖殺)하고 여러 아우들을 내쳐 죽였다. 날마다 창기(娼妓)와 더불어 음희(淫?)하여 법도가 없었고, 남의 처첩을 거리낌없이 간통하였다. 상제(喪制)를 고쳐 날로 달을 바꾸어[以日易月] 강상(綱常)이 전혀 없었고 죄악이 하늘에 넘쳐서 귀신과 사람이 분해하고 원망하였으므로 마침내 이렇게 된 것이다.

 연산군은 성종(成宗)의 후궁 엄씨(嚴氏)와 정씨(鄭氏)가 일찍이 부왕에게 총애를 얻어 폐비(廢妃)의 일에 참여했다 하여 내정(內庭)에서 타살(打殺)하고, 소생 아들 안양군 항(安陽君 쐪) · 봉안군 봉 및 족친을 절도(絶島)에 나누어 유배하였다가, 얼마 뒤에 모두 죽였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항과 봉은 이미 의리가 끊겼다\' 하였다.

 당초 전비(田非) · 녹수(綠水)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거기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백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천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말하기를, `사안(謝安)은 인신(人臣)으로도 오히려 동산에서 기생을 데리고 있었는데, 하물며 임금이 그만 못하랴?\' 하였다. 여기(女妓)를 고쳐 운평(運平)이라 하고, 대내(大內)에 들인 자를 흥청(興淸), 혹은 가흥청(假興淸) · 계평(繼平) · 속홍(續紅)이라 했으며,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를 지과(地科) 흥청, 임금의 굄을 받은 자를 천과(天科) 흥청이라 하고, 원(院)과 각(閣)을 분설(分設)하여, 원은 취홍(聚紅) · 뇌영(쬉英) · 진향(?香) · 함방(含芳) · 취춘(翠春), 각은 회사(繪絲) · 청환(淸歡) · 채하(彩霞)라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을 연방원(聯芳院)이라 고치고, 또 열읍(列邑)에 모두 운평을 설치하여 뽑아 올리게 하였다.
연산군 - 시대상 (2)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호화고(護花庫)를 두어 음식을 공급하고, 보염서(補艶署)를 두어 의복과 소장(梳粧)을 공급하고, 시혜청(施惠廳)을 두어 영선(營繕)을 감독하게 하되,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항상 근무하게 했으며, 광혜서(廣惠署)를 두어 제사에 관한 일을 제공하게 하고, 추혜서(追惠署)를 두어 초상에 쓰는 물품을 제공하게 하며,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를 둔 것은 대행(大行)을 위하여서였는데, 뒤에 흥청이 있는 곳에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종신토록 사모하게 하였다. 흥청의 봉족안(奉足案)을 호화첨춘기(護花添春記)라 하고, 가사(家舍) · 민전(民田)을 빼앗아 주되 사패(賜牌)에는 반드시 `영세(永世)토록 전한다\' 하였다. 흥청의 생계는, 1천 인에게는 유기(鍮器)를 주고, 9천 인에게는 잡기(雜器)를 주었는데, 해사(該司)로 하여금 팔도에 나누어 정하여 민간에서 징발하게 하였다. 또 대신(大臣)을 나누어 보내어 채홍준체찰사(採紅駿體察使)라 이름하여, 경외(京外) 사대부의 첩 및 양가(良家)의 아내와 딸, 공사천(公私賤) 창기(娼妓) 등을 샅샅이 수색하게 하여 각(閣) · 원(院)에 나누어 주었다. 내인이 죽으면 여원묘(麗媛墓)라 일컫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기를 선왕(先王)의 능소(陵所)에서와 같이하였다. 효사묘(孝思廟)를 개칭하여 영혜실(永惠室)이라 하고, 내인의 신주(神主)를 두어 봉사(奉祀)하기를 또한 선왕에게와 같이 하였다. 또 `창기는 공물(公物)이라. 사사로이 기를 수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각기 비자(婢子)를 소유하였으니, 금후로 대소 인원은 공천(公賤)으로 첩을 삼을 수 없다. 어기는 자는 중히 논죄하리라\' 하였다. 운평의 통간(通奸)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어서, 아이를 밴 이는 그 남편을 베고, 아이는 생으로 매장하게 하였다. 흥청이 입는 아상복(?祥服)과 홍단장(紅丹裝) 등에 드는 물건들을, 처음에는 옛 남편에게서 징수하였는데, 또 백성에게도 거둬들여서 백성들의 살림이 거의 탕진되었다.

 또 각과 원에는 각각 전비(典備)를 두었는데, 녹봉과 품질(品秩)이 모두 참상(參上)이었으며, 이서(吏胥) 및 공천으로서 글을 아는 사람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일체의 지공(支供)에 관한 일들을 맡아 검찰(檢察)하였는데, 이를 기화로 폐단을 지으며 한없이 긁어들인 나머지 경비가 날로 모자라게 되었다. 유사(有司)들은 어찌 할 수 없어 다만 저자와 민간에서 공공연히 거두어 들였으며, 별례(別例)를 계청(啓請)하여 외방에 배정하였다. 임금의 전지가 담긴 서장(書狀)이 잇달아 끊이지 않고, 기한을 각박하게 독촉하기가 성화(星火)보다 급하니 공사(公私)가 탕갈되어 백성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

 항상 대궐 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士大夫)의 아내로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빼어난 이는 녹수를 시켜 머리 단장이 잘 안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으로 끌어들이게 해서는 곧 간통했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내명(內命)으로 인견(引見)하여 금중(禁中)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성묘(成廟)가 빈전(殯殿)에 있을 적에, 성묘가 길들여 기른 사슴을 손수 쏘아 삶거나 구워서 먹었다.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돌아갔을 때는 상례(喪禮)를 모두 역월제(易月制)로 하고, 신민이 입는 참최(斬衰)의 복제도 모두 27일만에 벗으라 하였다. 또 기일(忌日) 및 재계(齋戒)를 폐지하고, 국기일(國忌日)에 평상시와 같이 풍악을 울리고 고기를 먹었으며, 각 능의 수호(守護)와 향화(香火)도 아울러 폐지하여 거행하지 않았다. 정성근(鄭誠謹) · 이자화(李自華)가 성묘(成廟)를 위하여 3년 동안 상을 행하였다 하여 죽이기까지 하였으며 무릇 정표(旌表)와 문려(門閭)도 모두 철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