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대왕 - 생애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생애

 새로운 세기, 세대가 열리면서 왕실은 연산군대의 실정(失政)을 극복함과 동시에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왕위계승에 있어서 중종의 왕통은 추대에 의해 즉위한 관계로 자연 제약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즉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따라서 반정의 중심세력인 박원종 등의 공신세력은 왕권을 능가한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중종은 왕권과 신권이라는 축이 무너짐을 결코 용납지 않았다. 중종은 공신세력을 제어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국정을 이끌기 위해, 그 동안 연산군 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축출되다시피한 사림세력들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즉위 초의 왕권이 미약했던 상황을 역전시 키면서 중종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왕실 내부의 갈등은 오히려 증폭되었다. 중종의 잠저 시 부인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후에 단경왕후(端敬王后)로 추증된 신씨(愼氏)가 반정세력에 의해 폐비되어 사저로 물러나면서 왕실의 안주인이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과 연계를 가지려는 공신세력들은 그들의 딸들을 중종에게로 보내었으나 오히려 그들간의 관계가 균형을 가지면 서 새로운 왕비를 맞았다. 그녀가 바로 인종대왕(이하 인종이라 함)의 모후(母后)이자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이다. 하지만 그녀가 인종을 출산한 뒤 곧바로 죽음을 맞이하자, 또다시 왕실은 혼란을 맞게 된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일파만파(一波萬波)로 확대되면서 외척세력의 등장이라는 상황과 다시 당쟁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인종은 바로 이러한 폭풍 속에서 태어나 25년이라는 시절을 세자로서 보내게 되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성인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난을 내린 것이라 하겠다.

 인종의 서른 하나의 짧은 생애는 그렇게 시작된다.
 1515년(중종 10) 2월 25일, 경복궁(景福宮)은 하루종일 부산하였는데 바로 중궁전이 둘째 아기씨를 출산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중궁전은 숙의(淑儀)로서 왕실에 들어와 있다가 중종 2년 8월에 그 덕스러움과 어짐으로 정비(正妃)로 책봉된 지 벌써 9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그 녀는 타고난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 자애로움과 너그러움을 갖추었으며 널리 여러 책을 열람하였다. 또한 자전(慈殿)을 봉양하기를 지성으로 하여 변함이 없었고 날마다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였다. 비빈(妃嬪)을 사랑으로 보살피되 은혜가 높고 뜻이 후하며, 지서(支庶)를 양육하되 친아들을 사랑하듯 하였다. 집안 다스 리기를 엄명(嚴明)하게 하고, 임금을 보필하기를 혹시라도 힘이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였다. 그녀가 있기 때문에 왕실은 연산군 때의 혼란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큰 분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그녀의 덕과 우애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종대왕 - 생애 (2)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또한 정성으로 중종을 위하는 것이 다음과 같았다. 즉, “첩이 옛글을 보았는데, 비록 어진 부인의 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상의 뜻에 불순하다는 이름을 얻지 않으려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첩이 잘못함이 있으면 성교(聖敎)를 아끼지 마시어,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외가(外家)의 성패는 후비(后妃)가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있습니다. 외척(外戚)의 관작을 첩이 어찌 구하리까? 어질면 자연 공론(公論)이 있어서 쓸 것이요 어질지 못하면 자연 공론이 있어서 버릴 것이니, 죄를 입는 자 있더라도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리까? 나는 한하지 않겠습니다.” 하여, 왕비의 지위에 있은 지 9년 동안에 한 사람도 임금에게 청하여 벼슬을 준 일이 없으며 또 청하여 죄를 면한 자가 없었다.

 중전은 1511년(중종 6) 5월 정묘일에 딸을 낳았는데 별탈없이 잘 자랐다. 나이가 어리어 아직 비녀를 꽂지 못하였지만 이 아기는 후에 효혜공주(孝惠公主)로서 당대의 권신인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몽룡(夢龍) 즉 김희(金禧)와 혼례를 치르게 된다. 그녀는 부군인 연성위(延城尉)를 잘 받들었으며, 시부인 김안로에게도 공주로서보다는 며느리로서의 정성을 다하 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안로와 김희 등은 오히려 중종의 장녀인 그녀를 지나치게 믿고 사치를 행하기도 하였다. 공주는 1531년(중종 26) 4월 병을 앓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었으나 중종의 사랑은 매우 커 3일간 조회를 정지할 것을 명하여 그 슬픔을 표하였다. 같은 해 10월 부군인 연성위도 죽음에 이르니 부부로서의 연을 다하였던 것이다. 공주는 다만 딸 하 나를 두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그의 오라버니 윤원로(尹元老)의 아들 윤백원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하지만 이 후 원자에 대한 소식이 없다가 중종 9년 여름이 지나면서 태기를 느꼈는데, 이 때 다음과 같은 태몽을 겪게 된다. 즉 꿈에 한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할 것을 말하자 그녀는 괴이하다 여겨 깨어나자마자 즉시 벽상에 억명이란 이름을 써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중종 10년 2월 25일 아기씨를 낳은 뒤 산후조리가 잘못되었는지 갑자기 미령(未寧)하게 되었는데, 29일 새벽에 기운이 돌아오자 왕비는 태몽과 관련한 글을 써서 중종에게 올렸다. 중종이 이를 상고하니 사실로 나타나자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중전의 환후는 오히려 더욱 위중해졌고, 이 때 중종은 중전과 원자(元子)의 건강을 위해 곧바로 이들 모자를 교성군(交城君) 노공필의 집으로 옮겨 우거(寓居)하 도록 하였으나 왕후의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그녀를 동궁 별전으로 다시 옮겼다. 3월 초하루 밤 1경이 되자 북방에 불같은 기운이 있었고, 사경에는 동방에서도 그러한 기이한 현상이 벌어져 불길한 징조를 나타냈는데, 이 때 삼경 오점(三更五點)에 중궁(中宮) 윤씨(尹氏)가 승하하였다. 그녀의 나이 25세였다.

 인종의 생모인 그녀의 죽음은 인종 자신뿐만 아니라 왕실 전체에 있어서 큰 슬픔이 되었고, 원자인 인종은 생모의 얼굴도, 사랑도 모른 채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모후의 죽음으로 누나인 효혜공주와 원자인 인종은 궁외에서 자람으로써 그 외로움은 남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별로 인해 인종의 우애와 사랑이 더욱 커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왕실의 공주 · 옹주들의 경우 출합(出閤)하기 전에는 대개 여염(閭閻)에 맡기어 양육 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러한 상례로 왕자나 세자 역시 여염에 맡겨 키웠는데 이는 사실 위험한 면이 있었다. 사리를 탐하는 자들이 왕자나 공주를 끼고 그 이익을 도모하거나 유희나 사도(邪道)에 빠질 염려 등이 항상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원자의 경우 장차 세자로 봉해 져 사왕(嗣王)이 되기 때문에 조금만 소홀하더라도 왕실뿐만 아니라 사직의 존망이 위태로워질 염려가 있었다. 따라서 원자의 보양(輔養)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당연히 진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종대왕 - 생애 (3)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1515년(중종 10) 8월 초하루인 을묘일에 남곤은 조강에서 <예기> 가운데 `세자의 교양을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강하면서 그 중대함을 강조하였다. 즉,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은 세자 교양을 지극히 중히 하고 지극히 삼가하여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이 하였기 때문에 세자가 되었을 때에 이미 임금의 도리를 알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도 원자(元子)는 아직 세자로 봉하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항상 금중(禁中)에 거처하여야 한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언이 있은 뒤로도 원자는 계속해서 궁밖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중종의 배려였다. 원자로 하여금 민간의 질고(疾苦)를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유를 찾는다면 장경왕후의 아버지인 윤여필의 세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박원종, 홍경주 등 반정공신세력이 혹시라도 자신의 핏줄을 위해 어떠한 일을 벌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특히 경빈 박씨가 문제가 되었다. 박씨는 상주(尙州) 정병(正兵) 박수림(朴秀林)의 딸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7살 된 아들 복성군(福城君) 미(嵋)가 있었고, 전 해인 1514년(중종 9) 10월 숙의 나씨(羅氏)가 출산할 즈음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나씨와 아이가 같이 죽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더구나 박씨의 성품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미 박씨가 뽑혀 들어올 적에 정붕(鄭鵬)이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화의 씨다.”라고 할 정도였다. 후에 교만과 사치로 인해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1527년(중종 22) 쥐를 태워 곡란(曲欄)에 걸어 저주를 했다는 작서(灼鼠)의 변으로 폐하여져 사사(賜死)되기에 이른다.

 이는 나중에 김안로의 아들 연성군 김희가 자신의 매제인 동궁, 즉 인종을 위해 행한 것으로 밝혀지기는 하였다. 더구나 중종에게는 폐서인 된 신씨와 별세한 장경왕후와 더불어 자식을 생산한 후궁으로 숙의(淑儀) · 숙원(淑媛)으로부터 경빈 박씨까지 7명이나 되었다. 중종으로서는 이러한 내실에 대한 조정과 배려가 필요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내부의 관계와 권력의 연계선 상에서 원자의 보양에 대한 관심은 안팎으로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장경왕후가 서거한 지 얼마 안되어 사림의 박상(朴詳) 등은 이미 폐서인된 신씨를 왕후로 다시 봉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는 당시 권력의 핵심세력이던 반정세력들에게 빨리 중전을 정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10월에 의논된 중전의 간택과 원자의 교육에 대한 문제는 이러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이 때 중전의 물망에 오르내린 인물은 신씨와 경빈 박씨였는데, 신씨의 경우는 반정세력에 의해, 그리고 박씨의 경우는 미천한 출신과 성품이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의논은 새로이 덕이 있는 이를 골라 책봉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이 때 이 의논에 참여한 이는 영의정(領議政) 류순(柳洵) · 좌의정(左議政) 정광필(鄭光弼) · 우의정(右議政) 김응기(金應箕) · 우찬성(右贊成) 김전(金詮) · 우참찬(右參贊) 남곤(南袞) ·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용개(申用漑) · 이조 참판(吏曹參判) 심정(沈貞) · 예 조 참판(禮曹參判) 성몽정(成夢井) 등이었다. 정위(正位), 즉 중전의 자리가 비게 되었을 때 그 해결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즉, 정위가 비게 되면 처녀 여러 사람을 미리 가려 들이되, 새로 숙의(淑儀)가 되었건, 전부터 숙의로 있었건 논하지 않고 그 중에서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3년 뒤에 위(位)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세에서 계립(繼立)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같은 무리에 있던 자를 올려서는 안되고, 새로 가려서 세워야 적처(嫡妻)를 다투는 일이 없고 궁중이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어 체모가 매우 합당하다는 것이 당시 참여한 대신들의 중론이었다. 더불어 원자의 교육문제도 거론하여 궁중에서 양육하여 임금이 공사(公事)를 처결하는 것과 환시(宦寺)를 대하고 궁첩(宮妾)을 대하 고 대신(大臣)을 접하고 대간(臺諫)을 접하는 도리를 보여서 본뜨게 해야 할 것을 아뢰었다.
인종대왕 - 생애 (4)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먼저 원자와 관련해서 1516년(중종 11) 10월 정묘일에 조강(朝講) 중 검토관 조광조가 아뢰고 있는 내용은 후대에 귀감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원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해 준다.

 “원자(元子)는 국가의 근본으로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여 보육(保育)하는 일을 마땅히 어렸을 때부터 삼가야 하는데, 지금 여염(閭閻)에 있으니 미안한 일인 듯합니다. 비록 장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옛적에는 태교(胎敎)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지식이 생기게 되었 으니, 보고 듣기를 반드시 올바르게 하도록 한 다음에야 기초있게 보양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밖에 있도록 하더라도 왕자군(王子君)이나 과부의 집은 안 되고, 모름지기 대신의 집에 있도록 하여 놀음놀이나 언어를 언제나 교도하여 잘못됨이 없도록 한다면 버릇이 모두 올바를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궁중(宮中)에 있으면서 성상의 위의(威儀)와 동작에서 보는 바가 있도록 한다면, 올바른 버릇을 갖게 되기가 이보다 나은 길이 없습니다마는,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수시로 드나들도록 하여 성취되어감을 보살핌이 어떠하리까?”

라고 하였고, 이러한 의논들로 인해 원자는 우의정 김응기(金應箕)의 집으로 피접 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 같은 달 기해일에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옛 글을 고찰하여, 원자 교양에 가장 적당한 것을 뽑아 서계(書啓)하도록 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에 따라 12년 1월 을미일에 홍문관 부제학 한효원(韓效元) 등이 8개 조목으로 나누어 원자를 교양하는 글을 올리게 된다. 그 내용은
1. 적서(嫡庶)의 구분을 마땅히 엄격하게 해야 할 것,
2. 교유(敎諭)하는 방법을 마땅히 일찍부터 서두를 것,
3. 평상시의 교양하는 체례를 마땅히 바르게 할 것,
4. 궁료(宮僚)의 선택을 마땅히 신중하게 할 것,
5. 사부(師傅)에 대한 예의를 마땅히 융숭하게 할 것,
6. 학문하는 방법을 마땅히 독실하게 할 것,
7. 덕성(德性) 육성하는 방법을 마땅히 넓게 할 것,
8. 배필 가리기를 마땅히 신중하게 할 것 등이었는 데, 경서와 사서 등을 고찰하여 매우 상세하게 글을 올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심 속에서 원자는 날로 준수해져, 나이 겨우 2∼3세가 되자 언어와 거동이 이미 성인(成人)과 같으므로 보모(保母)와 시아(侍兒)가 감히 모롱(侮弄)하지 못하였다. 이 때 원자인 인종은 당시 모든 유아라면 반드시 거치는 마마를 앓게 되어 주위의 걱정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무사하였다. 의료시설이 지금과 같이 발달해 있지 않은 당시로서 마마는 어 떠한 병보다도 유아사망율을 높게 하여 가장 무서운 병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 걱정은 컸던 것이다. 원자는 무사하였고, 4월 초열흘에 입알(入謁)하고 대비전(大妃殿)에 머물다가 이날 하성위(河城尉) 집으로 도로 나가는데, 기질이 침중하여 경솔하게 말을 하지 않고, <천자문(千字文)>과 <유합(類合)>을 모두 환하게 익혔었다. 4세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원자는 중종이 책을 들고 묻자 따라 외되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가상히 여겨 감탄하기를 마지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중전 간택의 문제를 보면, 12년 3월 경인일 원자에게는 계모가, 중종에게는 계비(繼妃)가 정해지게 된다. 바로 여러 가지 시험 즉, 가문이나 사주(四柱) · 자태 · 품성 등을 보아 중전을 간택하게 하였는데, 궁궐에 들어와 있다가 대내의 선택을 받은 숙의 윤씨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 분이 즉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는 것이다. 당시 그녀는 17살이었으며, 윤지임(尹之任)의 딸이었다. 이렇게 중전이 정해짐으로써 원자는 이제 궁궐로 들어오게 된다. 즉 중전이 이미 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모자관계가 성립되어 친친(親親)을 하여야 하므로 마땅히 대궐로 들어와 날마다 모시게 하여 친친하는 일을 도탑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종대왕 - 생애 (5)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점차 원자가 커가고 그 체모나 영특함이 널리 알려지자 대신들은 원자의 보양과 교육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을 거론하였고, 중종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신들과 의논하여 김전(金詮) · 이계맹(李繼孟) · 남곤(南袞) · 안당(安쩪) · 김응기(金應箕) 등이 정해졌고, 이외에 당시 학문으로 명망이 높았던 이자(李칢) · 김정(金淨) · 조광조(趙光祖) 등도 보양관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가르치는 학문을 원자는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습득하였다. 하지만 원자는 여전히 궐밖에 거하여 몸이 좋지 않았다. 남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원자의 학문적인 자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518년(중종 13) 1월 병오 원자가 4세 되던 해의 일이다.

 “신이 12월부터 원자를 여러 번 뵈었습니다. 김응기가 초략(抄略)한 <소학> 대문(大文)을 크게 써서 가르치는데, 하루 읽는 양이 거의 2∼3대문에 이르고 쓴 글씨도 자체(字體)를 이루니 비록 6∼7세 된 아이라 하더라도 이를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거하는 곳이 누추한 듯합니다. 지금 원자는 덕기(德器)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때에 보도(輔導)해야 하니 일찌감치 궁중에 들게 해서 미리 보양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당시 경빈 박씨의 아들 복성군은 벌써 10살이 되었고, 박씨는 중종에게서 총애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주위의 우려를 사게 된다. 즉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대신들은 미천한 자를 왕궁에서 맞아들일 경우 실덕함이 매우 심해 나라가 어려워진다는 옛일들을 들어 자주 상언하였던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원자는 1월 병진일에 하성위의 집에서 대궐로 돌아와 동궁에서 거처하게 된다. 며칠간 가까이에서 원자를 살펴볼 수 있었던 중종은 아들에 대해 일찍이 읽었던 것은 환하게 알지 못함이 없고 다른 책에서 뽑아낸 문자도 또한 잘 해독(解讀)한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는 보양대신(輔養大臣)들로 하여금 <소학> 가운데 요긴한 말을 뽑아내서 3일에 한번씩 가르치도록 하여 혹 원자가 마음이 흩어질 것을 단속하게 하였다.

 이러한 원자의 보양은 대부분 예(禮)를 따른 것이었고 원자보양관으로 삼공(三公)이 정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14년 8월에는 삼공 및 김전 · 남곤 · 이계맹(李繼孟) 외에도 이장곤(李長坤) ·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 · 이자를 더 선발하여 원자보양관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너무 많아 번거롭다 하여 이장곤과 조광조가 먼저 제배된다.
 이들 원자보양관의 역할이 커서인지 아니면 원자의 자질이 워낙 출중해서인지 이 때 원자는 이미 <소학>을 읽고 이에 대한 훈고를 분명하게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520년(중종 15) 기묘사화의 여진이 채 가라앉기 전 원자의 나이 6세가 되자 조정에서는 본격적으로 원자를 세자로 책봉할 것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 대개 7∼8세가 되어야 세자책봉을 하였는데 인종의 경우는 훨씬 빨리 세자책봉을 받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담겨져 있으리라 생각된다. 첫번째는 전통적으로 왕실의 후계는 일찍 정할수록 안정될 수 있다는 논리로, 국가의 기반을 태산(泰山)과 반석(磐石)처럼 튼튼히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당시의 역학관계상 원자인 인종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후원세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모후지만 장경왕후가 일찍 별세하였기 때문에 그도 힘들었고, 당시의 관례상 권신이 왕실과 연결되는 것 또한 역시 금기시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당시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세력들로부터 후원을 받는다는 것 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중종 15년은 왕권이 안정을 찾고 신권도 역시 서로의 역학관계로 완충지대를 찾아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더구나 성리학적 도학정치론을 따른다면 원자의 경우 성군(聖君)으로서의 자질을 이미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세력들이 원자의 세자 책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셋째는 앞서도 지적되었지만 원자의 자질이다. 원자는 비록 6세에 불과하지만 학문이나 행동거지는 조숙하여 읍양과 예에 합당하였다. 넷째는 왕실내의 복성군의 경우 이미 12살이 되었고, 그외에도 원자의 이복형제로 금원군(錦原君) 영(쫜) · 봉성군(鳳城君) 완(췀) 등이 있었다. 이러한 많은 형제관계 는 자연 원자의 입지를 줄일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빨리 국본을 정함으로써 분란의 소지를 줄이자는 의도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인종대왕 - 생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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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중전의 경우 국정에 간여할 여지가 매우 많았다. 이미 중전으로 정해져 내명부의 하례를 받을 때 군주만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선정전(宣政殿)에서 받아 실례를 하였는데 이 때 사신(史臣)이 이미 여기서 문정왕후가 정사에 간여하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뒤에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은 중종 34년에 태어나고는 있지만 앞일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 관례(冠禮)를 치르게 된다. 물론 나이상으로 볼 때 관례를 거행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세자로 책봉되는 마당에 관례를 거치지 않고 세자 책봉 뒤 관례를 행한다는 것 역시 예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삼공 및 예조는 다른 방도를 찾게 되는데 그것은 전례상 책봉에 관한 것을 들어 그 타당성을 찾게 된다. 즉, 우리 나라의 경우 선왕조(先王朝)로부터 모두 면복(冕服)으로 책봉을 받았는데, <오례의(五禮儀)>에는 그 예(禮)만을 기록하였고, 먼저 책봉하고 뒤 에 관례를 행한 실례는 없다. 따라서 관례를 거행하지 않고 책봉하는 날 갑자기 면복을 입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원자(元子)는 조숙하여 읍양(揖讓)이나 예를 행함에 있어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예문에 따라 먼저 관례를 행하는 것이 이 예에 매우 합당하다 하였다. 이로써 인종의 경우 세자 책봉 전 6세의 나이로 관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원자는 4월 기묘일에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오례의>에 실린 의식절차에 맞춰 세자책봉례를 행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명의 무종황제(武宗皇帝)가 고명(誥命) 을 내려 모든 절차를 끝내고 세자로 정식 인정된다.

 1522년(중종 17) 봄, 8살이 되자 세자로 책봉되기 전 권도(權道)로 치렀던 관례를 다시 행하였으며 이 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세자의 일상을 보면 모두 성인의 생활과 같다 할정도였다. 즉, 일상의 행동은 모두가 예도에 맞고 성품이 학문에 부지런하고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하루에 세 번 진강(進講)하고 또 야강(夜講)을 하였다. 추위나 더위에도 반드시 종일토록 바로 앉아 배운 것을 익혔으며, 아침이 되면 또 한두 번 읽고 나가는 것을 일과로 하니, 이 때문에 잇따라 오래 빛나는 공부가 모르는 사이에 날로 진취되었던 것이다.

 세자의 성장은 중종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감탄하였다. 세자의 학문은 범인의 습득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종 18년 겨울로 접어들면서 경연에서 세자가 이미 숙성하니 세자빈을 간택하여 미리 양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게 되자 중종은 이를 의논케 하였는데, 중종 역시 일을 서둔 것은 자전(慈殿), 즉 정현왕후가 큰 병을 앓은 뒤 기후가 편 안치 못하고 또 정현왕후가 이듬해 세자의 길례(吉禮)를 치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정현왕후는 1524년(중종 19) 세자가 10세가 되자 박용(朴墉)의 딸을 간택하였고, 대신들도 그 가문으로 보아 하자가 없기 때문에 이를 모두 따르게 된다.
인종대왕 - 생애 (7)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이로 인해 세자빈으로 박씨가 정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세자보다 한 살 위였다. 후에 왕비로 책봉된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가 바로 이분이다. 그런데 3월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3개월 뒤 아버지인 박용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세자 인종은 장인을 잃게 되었다. 어찌보면 인종은 혈연적으로 매우 불우한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지적하였지만 인종이 형제간을 매우 아꼈다는 것은 그러한 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장인을 잃었으니 그것 또한 인종이 세자로서의 지위를 튼튼히 하지 못한 연유가 될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세자로서의 예와 치도 및 학문을 닦은 인종이 처음으로 조정에 참여하는 것은 보령 13세가 되는 1527년(중종 22) 2월 조하(朝賀)를 받을 때이다.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고 비로소 반열(班列)에 나갔는데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이 세자의 거동이 자연스럽고 기상이 웅위(雄偉)한 것을 보고 모두 희색이 만면하였다. 그리고 이 때 세자는 이미 경서를 몸소 체득하 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궁료(宮僚)를 시켜 정자(程子)의 사잠(四箴)과 범준(范浚)의 심잠(心箴) 및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과 <시경(詩經)>의 칠월편(七月篇)을 써서 바치게 하고, 또 손수 선성(先聖) · 선현(先賢)의 격언과 빈사(賓師)의 훈계를 써서 가까이 벌여두고, 행동하면 반드시 준행(遵行)하였다. 더욱이 <대학연의(大學衍義)> · <근사록(近思錄)> · <자경편(自警編)> 등의 글에 유념하여 손에서 놓은 적이 없고 반우(盤盂) · 궤장(?杖)에까지 모두 새겼으니 그 실천이 독실한 것은 착한 성품에 근본한 것이다.

 그리고 세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부왕(父王)께서 이것을 나에게 가르치셨는데,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하여 중종을 섬기는 데에는 그 성경(誠敬)을 극진히 하였고 장경왕후(章敬王后)를 섬기지 못한 일에 스스로 상심하여 문정왕후에게 더욱 그 효도를 다하였다. 인종은 일찍이 문안하고 찬선(饌膳)을 보살 피는 외에는 오직 강학(講學)하고 존성(存省)하는 것만을 알아서, 침착하고 고요하고 말이 적으며 공손하고 검약하여 욕심이 없었다. 일찍이 시녀(侍女) 중에 고운 옷을 입은 자가 있는 것을 보면 곧 내보내게 하였으므로 궁정(宮庭) 안은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도 숙연(肅然)하였으니, 그 조심하고, 힘쓰며, 효제한 것이 이와 같았다. 역대 제왕의 아들로 누가 이리도 몸소 실천할 수 있었겠는가?

 반열에 서서 조하를 받은 뒤 세자는 예문의 절차에 따라 가장 먼저 태묘(太廟)와 영경전(永慶殿)에 배알하게 된다. 이로써 세자로서 행해야 할 절차는 일단락지어졌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세자수업을 받고 군도를 닦아야 하였는데 이점에 있어서 전혀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마치 세종이 학문을 너무 열심히 하여 안질이 생긴 것처럼 세자인 인종 역시 건강을 해 칠정도로 학문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계모인 문정왕후와 중종의 후궁, 그리고 문정왕후의 외척세력 및 인종을 지지하는 정치세력간의 갈등에 있어 정점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때 세자인 인종이 더욱 굳건하고 분명하게 선을 긋고 시비를 가렸더라면 훗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나 혹은 자신과 관련하여서도 항상 배우고 닦았던 학문의 내용을 실천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 것은 역시 인종의 성품이 효와 덕으로 충만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인종대왕 - 생애 (8)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그 가장 큰 예가 바로 중종 22년에 벌어졌던 작서(灼鼠)의 변이다. 중종은 세자인 인종의 청에 따라 중종 22년 `작서의 변\'으로 폐서인된 이복동생 복성군의 관작을 회복시켰는데 이 일은 밖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인종은 하나뿐인 누이 효혜공주가 별세하였을 때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이 날뻔 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들을 놓고 볼 때 왜 그토록 자질과 품성이 뛰어난 인종이 그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을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자의 지위는 누구보다도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인종의 경우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미 원죄라면 원죄라 할 수 있는 고통을 짊어져야만 했다. 그것은 사실 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고 단경왕후 신씨가 폐서인된 데서 비롯된다. 곤위가 비었다는 것은 그만큼 국본이 혼란해졌다는 것을 뜻하며 당연하게도 여기에 정치세력이 개입할 여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미약한 왕실로서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를 비롯한 많은 후궁은 이를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였 다. 여기에 중종 재위 39년 중 후반으로 접어들면 점차 윤임(尹任)이나 윤원로(尹元老) · 윤원형(尹元衡) 등 외척세력이 등장하여 그들간에 갈등을 벌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는 사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사림의 기세가 약화된 것도 한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외척이나 남곤 · 김안로와 같은 권간들을 막을 수 있는 대안세력이 그들의 쇠퇴와 더불어 무너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정치적 역관계는 중종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증폭 · 심화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중종의 뒤를 누가 이을 것이냐는 점이었다. 마침 중종 28년 문정왕후가 아기씨를 임신하고부터 이 문제는 더욱 첨예화되었고, 이듬해 5월 22일 훗날 명종이 되는 아기씨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세자의 나이 19살로 장성했지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빈 박씨 등이 왕실 세력에서 물러나고 문정왕후와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만이 그 후사를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인종은 오히려 문정왕후에 대한 효심을 더욱 분발하여 자신의 모자람만을 탓할 뿐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사실 문정왕후와 그 형제인 윤안로 · 윤원형과 김안로, 그리고 인종의 외숙인 윤임 간으로 압축되었고, 처음에는 김안로가 득세하여 윤안로 · 윤원형을 외직으로 내쫓았다. 그 배경을 보면 김안로는 인종의 누이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로서 인종과의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에서 김안로는 문정왕후 등으로부터 동궁인 세자를 보 호한다는 명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대 · 소윤의 구별을 만들어 윤임과 문정왕후와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계책을 써 윤임이 문정왕후를 폐하고자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반면 김안로의 이러한 계책은 그 외의 사람들에게 대응심리와 더불어 집단심리를 만들게 되었고, 중종 역시 비대해진 그의 권력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김안 로의 아들 김지가 장가드는 날 선전관에게 명하여 군사를 보내 김안로를 잡아 귀양을 보내고 이어 사사하게 된 것이다.

 김안로의 제거는 크게 세축을 이루던 권력의 균형이 무너지고 비로소 외척세력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문정왕후와 윤원로 · 윤원형 형제, 그리고 인종의 외숙인 윤임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중종이 그들 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경원대군, 즉 명종이 성장하고 윤원로 · 윤원형 형제가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오면서 세자의 위치는 매우 흔들렸던 것이다. 당시 대신들이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을 많이 내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인종대왕 - 생애 (9)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중종 33년 무술년으로 접어들면서 중종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면서 세자 인종에게 전위할 뜻을 대신들에게 비쳤다. 그 네가지 기회가 중종자신에게 닥쳐왔음을 설명하였는데 중종 33년 10월 2일 기사에서 보이고 있다. 즉,

 “나에게는 네 가지 기회가 있으니 지금 바로 그때이다. 간신을 물리치고 조정이 화평하니 이것이 한 가지 기회요, 내 나이 태종과 바로 같으니 이것이 두 가지 기회요, 내가 즉위한 햇수가 세종의 33년과 바로 같으니 이것이 세 가지 기회요, 세자가 어질고 또한 장성했으며 학문이 고명하고 기질이 순수하니 이것이 네 가지 기회이다. 이 네 가지 기회는 만나 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조금도 다른 생각이 없고 바로 이 네 가지 기회를 만났으므로 감히 이런 말을 발설하는 것이니 이는 대의(大義)요 대계(大計)인 것이다.”

라고 하여 태종조와 세종을 상고하고, 조정이 화평하며, 세자가 어짐을 들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왕실은 세자와 문정왕후로 축이 나뉘어져 있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자의 품성은 성인과 같았다. 중종이 대신을 시켜 전위하고자 하니 세자는 울면서 사죄하고 사양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신들도 이에 대해 일단 중종의 건강 등이 강녕하며 자신들과 의논하 지 않고 결정한 것 역시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더불어 중종이 정사에 싫증과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신들의 의논과 세자의 적극적인 사양으로 중종 33년에 있었던 전위사건은 우발적인 것으로 끝나게 된다.

 세자위를 둘러싼 갈등과 여러 음모는 결국 왕실의 권위와 왕권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데서 온 것이다. 비록 중종이 즉위한 지가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실제 국정은 권간들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종 역시 노력을 하였지만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는 정국을 모두 이끌기에는 부족하였다. 모든 관원에 대한 인사파악이나 관리임명 등이 실 제 국왕의 손을 거쳐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인사관리를 통해서는 왕의 뜻이 관철되기가 어려웠다. 중종은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공신세력이나 외척 및 인척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조광조 등을 등용하기도 하고 유일(遺逸) 들을 등용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두기로 했지만 이들 사림들은 모두 기묘사화로 몰락하고 말았다. 중종 후반기에 접어들면 외척세력이 서로 갈등을 벌이는 사정은 왕실에서 가장 피해야만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막지 못한 데에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중종 38년 1월이 되면서 명나라에서는 만주 일대의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청병을 하였고, 조선에서는 서정(西征)을 위한 출병을 놓고 의논이 있던 때였다. 그런데 이달 임자일, 밤 삼경(三更) 동궁(東宮)에 불이 나게 된다. 이때의 화재를 놓고 당시 많은 억측과 추측이 나오게 되는데 대부분은 문정왕후와 세자인 인종의 관계 속에서 거론되는 것이었다.

 먼저 당시 화재규모와 그 과정에 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이날 밤의 화재는 뜻밖에 발 생하였다. 승지와 사관(史官) 등이 정신없이 동궁에 달려가 보니 화세(火勢)가 치성하여 자 선당(資善堂)까지 불탔다. 그러나 입직 군사는 모이지 않았으며 또한 기율도 없어 소란스럽 기만 할 뿐 불을 끌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 승화당(承華堂)은 대내(大內)와 연결되었기 때문 에 먼저 그 집을 철거하여 불길이 번지지 못하게 하니 화세가 차츰 꺾이게 된다. 이렇게 해 서 화재는 더 이상 번지는 것을 막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미 동궁은 모두 잿더미로 변한 뒤 였다. 조사결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차비문(差備門)으로부터 번졌다고 하여 그 범인을 색 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 조사가 전해주는 것은 바로 인위적으로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 그 범인은 잡지 못하였고, 동궁이 더욱 신근(愼謹)할 것과 앞으로 화재예방을 위한 조치 등이 취해진 것으로 끝을 맺게 된다. 당시 세자인 인종이 화재의 일로 손수 쓴 글이 <중종실록>에 남아 있어 그의 인품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인종대왕 - 생애 (10)
제 12대조   이름(한글):인종대왕   이름(한자):仁宗大王

“내가 박덕(薄德)한 자질로 외람되게 동궁(東宮)에 올랐으니 하늘의 굽어살피심은 매우 밝은지라 진실로 재앙을 부르기에 마땅합니다. 조종조부터 1백여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집을 하룻밤 사이에 모두 잿더미를 만들었으니, 하늘이 이런 꾸지람을 내린 것은 실로 내 잘못에 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성심(聖心)을 놀라게 해드렸고 아래로는 여러 관료 들에게 황황함을 끼치게 되었으니, 이와 같은 혹독한 재변은 옛날에는 듣지 못했던 것입니 다. 자신을 반성하고 가혹한 자책을 조금도 용서없이 하고 있으나 스스로의 조처를 어떻게 해야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붕료(朋僚)들은 빈사(賓師)와 함께 자세하고 정확하게 가르 쳐 주고 인도해 주기 바랍니다.”

 이 글은 시강원(侍講院)에 내려진 글이다. 그러나 사실 세자와 중종은 이 화재 사건에 대한 규명을 철저히 해야만 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는 앞서도 말한바 의혹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사정은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동궁에 불이 일어나는 변을 당할 때 세자가 자는 방이 밖으로 잠기어 있어 세자와 세자빈은 간신히 화재를 피했다. (불지른) 사적이 현저하매 궁중 사람들이 모두 간신 윤원로의 소위라고 지목했다.”

 1544년 중종 재위 마지막 해인 39년, 중종의 세수 57세, 세자인 인종은 벌써 30세였으며,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은 11세였다. 나이를 새삼 이렇게 살펴본 이유는 중종이 마지막으로 문정왕후와 인종간의 관계를 나름대로 조정하려고 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9월 을축일에 중종이 좌의정 홍언필, 우의정 윤인경, 우찬성 성세창 및 대사헌 정순붕, 대사 간 임억령 등과 함께 윤원형과 윤임의 일에 대해 의논을 내리고 있음에서 나타난다.

 즉 중종은 당시 두 윤씨와 관련하여
“두 윤(尹)이 저희끼리 무리를 만들었을뿐 아니라, 한편은 세자(世子)를 위하고 한편은 대군(大君)을 위하니 이는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국가를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중대하지 않겠는가.”
라고 파악하였으며 나름대로 그 방안도 생각하였는데, 윤임의 경우 간사한 의논을 맨 먼저 내어서 이제까지도 그치지 않게 하였으므로 외방으로 귀양보내고, 윤원형은 이렇게 진정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파면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처분을 거두어 달라는 대신들의 청에 대해 중종은
“간사한 자들이 두 윤씨를 계제로 지목하고 매양 입에 올리기 때문에 만약 이 사람들을 파직하면 계제가 없어져서 날조한 말이 저절로 없어지고 사림(士林) 사이도 좋게 될 것이다.”
라고 답함으로써 분명히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밝혔으니 중종의 이 뜻은 매우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