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건석(建奭) 1852∼1906 파명:선성군(宣城君)
  보명은 필화(弼和), 자는 한경(漢卿 또는 漢京), 호는 성석(醒石)이다. 선성군의 15대손이며 생부는 상영(象榮)이나 황간면 용암리의 상일(象一)에게 입계했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계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절의가 높고 글과 글씨에 뛰어났다. 약관에 큰 뜻을 품고 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에서 30여 년을 지냈다. 한때 궁내부주사 통훈대부에 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로 나라 안이 뒤숭숭해지고 5흉7적이 조정을 활보했으며 잔악한 왜인들은 1895년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태황후 민씨를 시해했다. 또한 왜구는 더욱 기승을 부려 청 · 일전쟁의 승리의 여세로 대륙침략 야욕은 더욱 거세어져 또다시 러 · 일전쟁을 일으키니 이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이에 공은 비분강개하여 매국노를 참수하고 국권을 회복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다.
1898년(광무 2) 고종태황제의 양위를 모의했던 안경수(安?壽)가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오자 이를 엄중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나자 하루 속히 호국대책을 세울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 유생의 소수(疏首)가 되어 궁궐 앞까지 나가 조약취소를 상소하였다. 또 역적을 토벌코자 통문을 경향사림에게 긴급 발송하였다. 이로써 민족정기를 고무시키고 항쟁을 직언하고 부월(斧鉞)로써 궐내에 복소(伏疏)를 무려 14차례나 하였다.
1905년 10월 11일 잠시 고향에 들렀다가 20일에 평안도의 자객 20여 명과 함께 역도를 처단할 약속을 하고 이를 결행하기 위해 급거 상경하려고 했으나 도착 전날 이 사실이 폭로되어 소유(疏儒)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날 공은 비서원에 봉장을 올리고 대안문을 빠져나오는 도중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자 별실 천씨가 정성껏 사식을 넣었건만 일체 거절하고 물 한 방울 목을 적시는 정도였다. 감시하는 일본헌병은 갖은 유혹과 협박 및 추태를 부렸지만 “나는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일본 헌병을 심히 꾸짖었다.
공은 감금된 지 6개월만에 토혈하고 기절하곤 했다. 이때마다 일본헌병은 공을 소생시켜 놓았다.
1906년 5월 9일, 아들 응수(應洙)가 면회 와 눈물을 흘리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살기를 꾀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바로 돌아가 노모를 잘 모시고 선조에 대한 봉사에 각별하라.”하고 고향에 돌려보냈다.
다음 날 공이 또다시 토혈, 기절하니 일본헌병은 소생시켜 놓고 주사와 시약을 투여하려 했지만 공은 한사코 불응하고서 목을 졸라 자진했다. 향년 55세로 일본헌병사령부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일본헌병이 문 밖으로 내다버린 시체를 별실 천씨와 공의 동지 이학래(李鶴來) · 윤상필(尹相弼)이 협력하여 노량진 전록(前麓) 이문화(李文和) 소유 산하에 임시 권폄하였다. 권폄한 공의 묘 앞에 친구 안병찬(安秉瓚 : 1854∼1921)은 “관작은 1품을 받았으나 `의사\' 두 자만은 못하다.”라고 하고 `대한의사 전주리공건석지묘(大韓義士 全州李公建奭之墓)\'라고 손수 쓴 목비(木碑)를 세웠다.
다음 해 1907년 이곳 노량진에서 황간 고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풍운의 반세기가 지난 1963년 10월 10일 의사의 공적이 재조명되어 경부선 황간역 광장에 `대한의사 리건석선생기념비\'가 세워졌다. 옥중에서 순국한 의사의 버선목에서 발견된 `계자유서(戒子遺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애국애족의 명문이다.
嗚呼死矣 人誰無死 死雖其所 吾死而不能瞑目者 恨不斬賣國之賊而復我國權者也 嗚呼 應洙汝勿以汝父之死 爲痛而 痛汝父不能誅賣國之賊而死也 嘔血遂死 數字爲訣 我死之復 幸勿以哀爲孝 以禮爲葬 能繼汝父之意眞吾子也
아! 슬프도다. 죽음이여.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겠는가마는 내가 편히 눈을 감고 죽지 못하는 것은 매국노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서이다. 아! 응수야 너는 네 아비의 죽음을 원통해 하지 말고 네 아비가 매국노를 죽이지 못하고 죽는 것을 원통히 생각해라. 피를 토하고 죽더라고 몇 글자로써 나의 원통함을 말하노니 슬픔을 효도로 여기지 말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지 말고 네 아비의 뜻을 잇는 것만이 진정한 나의 자식이니라.”<대한매일신보 광무10년 5월 16일에 게재되었다. 원본은 손자 종신(宗信)이 소장하고 있다.>
196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았으며 배위 벽진이씨와 같이 선열묘역 3호에 안장되었다. 다시 1987년 5월 1일 대한민국은 공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하여 그 공적을 기렸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계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절의가 높고 글과 글씨에 뛰어났다. 약관에 큰 뜻을 품고 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에서 30여 년을 지냈다. 한때 궁내부주사 통훈대부에 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로 나라 안이 뒤숭숭해지고 5흉7적이 조정을 활보했으며 잔악한 왜인들은 1895년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태황후 민씨를 시해했다. 또한 왜구는 더욱 기승을 부려 청 · 일전쟁의 승리의 여세로 대륙침략 야욕은 더욱 거세어져 또다시 러 · 일전쟁을 일으키니 이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이에 공은 비분강개하여 매국노를 참수하고 국권을 회복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다.
1898년(광무 2) 고종태황제의 양위를 모의했던 안경수(安?壽)가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오자 이를 엄중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1904년 러 · 일전쟁이 일어나자 하루 속히 호국대책을 세울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 유생의 소수(疏首)가 되어 궁궐 앞까지 나가 조약취소를 상소하였다. 또 역적을 토벌코자 통문을 경향사림에게 긴급 발송하였다. 이로써 민족정기를 고무시키고 항쟁을 직언하고 부월(斧鉞)로써 궐내에 복소(伏疏)를 무려 14차례나 하였다.
1905년 10월 11일 잠시 고향에 들렀다가 20일에 평안도의 자객 20여 명과 함께 역도를 처단할 약속을 하고 이를 결행하기 위해 급거 상경하려고 했으나 도착 전날 이 사실이 폭로되어 소유(疏儒)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날 공은 비서원에 봉장을 올리고 대안문을 빠져나오는 도중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자 별실 천씨가 정성껏 사식을 넣었건만 일체 거절하고 물 한 방울 목을 적시는 정도였다. 감시하는 일본헌병은 갖은 유혹과 협박 및 추태를 부렸지만 “나는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일본 헌병을 심히 꾸짖었다.
공은 감금된 지 6개월만에 토혈하고 기절하곤 했다. 이때마다 일본헌병은 공을 소생시켜 놓았다.
1906년 5월 9일, 아들 응수(應洙)가 면회 와 눈물을 흘리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살기를 꾀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바로 돌아가 노모를 잘 모시고 선조에 대한 봉사에 각별하라.”하고 고향에 돌려보냈다.
다음 날 공이 또다시 토혈, 기절하니 일본헌병은 소생시켜 놓고 주사와 시약을 투여하려 했지만 공은 한사코 불응하고서 목을 졸라 자진했다. 향년 55세로 일본헌병사령부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일본헌병이 문 밖으로 내다버린 시체를 별실 천씨와 공의 동지 이학래(李鶴來) · 윤상필(尹相弼)이 협력하여 노량진 전록(前麓) 이문화(李文和) 소유 산하에 임시 권폄하였다. 권폄한 공의 묘 앞에 친구 안병찬(安秉瓚 : 1854∼1921)은 “관작은 1품을 받았으나 `의사\' 두 자만은 못하다.”라고 하고 `대한의사 전주리공건석지묘(大韓義士 全州李公建奭之墓)\'라고 손수 쓴 목비(木碑)를 세웠다.
다음 해 1907년 이곳 노량진에서 황간 고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풍운의 반세기가 지난 1963년 10월 10일 의사의 공적이 재조명되어 경부선 황간역 광장에 `대한의사 리건석선생기념비\'가 세워졌다. 옥중에서 순국한 의사의 버선목에서 발견된 `계자유서(戒子遺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애국애족의 명문이다.
嗚呼死矣 人誰無死 死雖其所 吾死而不能瞑目者 恨不斬賣國之賊而復我國權者也 嗚呼 應洙汝勿以汝父之死 爲痛而 痛汝父不能誅賣國之賊而死也 嘔血遂死 數字爲訣 我死之復 幸勿以哀爲孝 以禮爲葬 能繼汝父之意眞吾子也
아! 슬프도다. 죽음이여.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겠는가마는 내가 편히 눈을 감고 죽지 못하는 것은 매국노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서이다. 아! 응수야 너는 네 아비의 죽음을 원통해 하지 말고 네 아비가 매국노를 죽이지 못하고 죽는 것을 원통히 생각해라. 피를 토하고 죽더라고 몇 글자로써 나의 원통함을 말하노니 슬픔을 효도로 여기지 말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지 말고 네 아비의 뜻을 잇는 것만이 진정한 나의 자식이니라.”<대한매일신보 광무10년 5월 16일에 게재되었다. 원본은 손자 종신(宗信)이 소장하고 있다.>
196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았으며 배위 벽진이씨와 같이 선열묘역 3호에 안장되었다. 다시 1987년 5월 1일 대한민국은 공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하여 그 공적을 기렸다.
교년(喬年) 1718∼1788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중수(仲壽), 호는 간곡(艮谷). 선성군의 9대손이고 문장(文長)의 증손이다. 교신의 동생이다. 1744년(영조 20)에 생원이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며 문필과 학행이 뛰어나 정종대왕은 1784년(정조 8)에 문과효의 세자익위사부수을 제수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간곡문집(艮谷文集)> 3책이 있다.
교신(喬臣) 1711∼179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국로(國老), 호는 회암(檜菴). 선성군의 9대손이고 성창(星昌 : 1683∼1757)의 차남이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구경(龜慶) 1561∼? 파명:선성군(宣城君)
  공은 영상 노저 양원의 둘째 아들이다.
무과 부사 첨지중추부사이고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다. 임진왜란 때는 공은 형 서경(犀慶)과 아우 시경(蓍慶)과 같이, 유도대장이고 동북도검찰사이며 영상인 아버지 양원을 따라 전투에 참가했으며 강원도 이천에서 부친이 순국할 때 곁에 있었다.
아들로는 기린도찰방을 지낸 참판공 홍광(弘匡 : 1579∼?)이 있다.
공과 그 아들묘소는 선영인 노량진 흑석동에 있었으나 봉사손 11대손 중화에 의하여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 산 61번지의 노저상공 양원의 묘 좌측으로 이장하였다.
무과 부사 첨지중추부사이고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다. 임진왜란 때는 공은 형 서경(犀慶)과 아우 시경(蓍慶)과 같이, 유도대장이고 동북도검찰사이며 영상인 아버지 양원을 따라 전투에 참가했으며 강원도 이천에서 부친이 순국할 때 곁에 있었다.
아들로는 기린도찰방을 지낸 참판공 홍광(弘匡 : 1579∼?)이 있다.
공과 그 아들묘소는 선영인 노량진 흑석동에 있었으나 봉사손 11대손 중화에 의하여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 산 61번지의 노저상공 양원의 묘 좌측으로 이장하였다.
규로(奎老) 1612∼1674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성정(星鼎), 선성군의 7대손이고 충효순국한 시경의 장손이며 증 집의(贈執義) 극광의 아들이다.
생원 · 진사가 되고 1642년(인조 20)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 세자를 교육하는 필선에 이르렀다. 외직으로는 목사를 지냈다. 동생 두로(斗老 : 1626∼1673)는 성균관 진사이고 향년 48세에 별세하였다.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다.
생원 · 진사가 되고 1642년(인조 20)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 세자를 교육하는 필선에 이르렀다. 외직으로는 목사를 지냈다. 동생 두로(斗老 : 1626∼1673)는 성균관 진사이고 향년 48세에 별세하였다.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다.
규석(奎錫) 1826∼1895 파명:선성군(宣城君)
  초휘는 동석(東錫), 자는 문현(文賢), 호는 종정(鍾亭). 선성군의 12대손이고 증 가선대부인 경방(敬邦)의 아들이다. 벼슬이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종정문집(鍾亭文集)> 3책을 남겨 놓았다. 발문은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썼다.
긍민(兢民) 1664∼1755 파명:선성군(宣城君)
  선성군의 현손 극검의 증손인 우백(又白)의 손자이며 양헌(良憲)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들 덕귀(德貴 : 1712∼1744)는 증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였다.
능화(能和) 1869∼194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자현(子賢), 호는 상현(尙玄) · 상현거사(尙玄居士) · 무능(無能) · 무무(無無) · 간정(侃亭).
선성군의 15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11대손이며 법부협판 종2품 가선대부 원긍(源兢)의 장남이다.
공은 충북 영풍군 아차골(현 충북 괴산군 감물면 배전리)에서 8세 때 가숙(家塾)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다.
15세에 장가 들고 망건을 쓰기 싫어 정자관(程子冠)만 쓰고 있어서 별명이 `리탈망(李脫網)\'이었다.
20세에 서울에 상경하여 1889년(고종 26) 정동(貞洞)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고종 31) 한어학교(漢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관립 법어(法語)학교에서 공부, 이 후 세계에 나가고자 일어 · 중국어 · 영어 · 불어 등 외국어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897년(광무 1)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교관으로 근무, 1904년(광무 8) 정3품으로 승진하였으며 1907년 관립 한성법어학교 교장과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학감(學監), 1910년 한일병탄 후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12년 사립 능인(能仁)보통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15년 불교진흥월보와 1917년 조선불교총보를 발간하였다.
공이 불교에 심취한 동기는 이렇다고 기술하고 있다.
1900년 중국에 권비(拳匪)가 창궐하여 외국인을 배척 · 살해할 때 각국 연합군은 북경(北京)을 공격했다. 이 때 프랑스는 우리 나라 서울 · 인천 등지에서 인부 수백명을 고용하여 천진(天津)으로 간 일이 있다. 여기에 공의 프랑스어과 동창생인 임운(任運)이 이 인부들의 감독 겸 통역으로 프랑스인에게 고빙(雇聘)되었었다. 임운은 중국 프랑스 진지(陣地)에 있으면서도 망건을 쓰고 있어 조선인의 면목을 유지시켰다고 한다.
임운이 일을 다 마치고 국내로 돌아왔을 때 공은 그 집을 찾았다. 이날 공은 임운으로부터 북경 유리창(瑠璃廠)에서 샀다는 <당판 화엄경(唐板華嚴經)> 1부를 선물받았다. 어느날 집에서 무료하여 서가에 꽂혀있던 <화엄경>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 “수호광명품(隨好光明品)이라 그 가운데에 유파이경(有頗梨鏡)한데 명왈능조(名曰能照)니 무량무변제국토중(無量無邊諸國土中)에 일체산천(一切山川)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실어중현(悉於中現)이라.”고 한 글이 씌어진 것을 읽은 후 느낌이 있어 외국어 연구, 세계 진출 등의 일체의 욕망을 버리고 불교연구에 전념했다고 한다.
1921년 조선사 편찬위원회 편수관으로 있으면서 일인침략학자들 틈에서 단군시조를 역사속에 넣을 것을 강력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상 · 중 · 하, <조선기독교사 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史及外交史)>,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조선관기고(朝鮮官妓考)>, <조선사회사(朝鮮社會史)>, <조선유교 급 유교사상사(朝鮮儒敎 及 儒敎思想史)>, <조선의약발달사(朝鮮醫藥發達史)>,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 <조선 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백교회통(百敎會通)>, <조선 잡고합편(朝鮮雜考合編)>, <조선십란록(朝鮮十亂錄)>, <노저유사(鷺渚遺事)>, <불교계>, <진단학회>, <별건곤> 등 다수가 있고 소설 2편에는 <목우가(牧牛歌)> 조선불교 총보 (1917. 3.20 발행), <수월연(水月緣)> 조선불교계 (1917. 6. 5 발행)이 있다.
유사(遺事)로 공의 친필 <천자문(千字文)>, 묵화난(墨턛蘭) 1폭, 그 외 상기 저서, 각종 불교잡지 등 노저 자손인 명준(明埈)이 대부분 소장. 묘소는 하남시 선성군 묘역 내에 있다.
선성군의 15대손이고 노저 양원의 11대손이며 법부협판 종2품 가선대부 원긍(源兢)의 장남이다.
공은 충북 영풍군 아차골(현 충북 괴산군 감물면 배전리)에서 8세 때 가숙(家塾)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다.
15세에 장가 들고 망건을 쓰기 싫어 정자관(程子冠)만 쓰고 있어서 별명이 `리탈망(李脫網)\'이었다.
20세에 서울에 상경하여 1889년(고종 26) 정동(貞洞)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고종 31) 한어학교(漢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관립 법어(法語)학교에서 공부, 이 후 세계에 나가고자 일어 · 중국어 · 영어 · 불어 등 외국어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897년(광무 1)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교관으로 근무, 1904년(광무 8) 정3품으로 승진하였으며 1907년 관립 한성법어학교 교장과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학감(學監), 1910년 한일병탄 후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12년 사립 능인(能仁)보통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15년 불교진흥월보와 1917년 조선불교총보를 발간하였다.
공이 불교에 심취한 동기는 이렇다고 기술하고 있다.
1900년 중국에 권비(拳匪)가 창궐하여 외국인을 배척 · 살해할 때 각국 연합군은 북경(北京)을 공격했다. 이 때 프랑스는 우리 나라 서울 · 인천 등지에서 인부 수백명을 고용하여 천진(天津)으로 간 일이 있다. 여기에 공의 프랑스어과 동창생인 임운(任運)이 이 인부들의 감독 겸 통역으로 프랑스인에게 고빙(雇聘)되었었다. 임운은 중국 프랑스 진지(陣地)에 있으면서도 망건을 쓰고 있어 조선인의 면목을 유지시켰다고 한다.
임운이 일을 다 마치고 국내로 돌아왔을 때 공은 그 집을 찾았다. 이날 공은 임운으로부터 북경 유리창(瑠璃廠)에서 샀다는 <당판 화엄경(唐板華嚴經)> 1부를 선물받았다. 어느날 집에서 무료하여 서가에 꽂혀있던 <화엄경>을 꺼내 들었다. 여기에 “수호광명품(隨好光明品)이라 그 가운데에 유파이경(有頗梨鏡)한데 명왈능조(名曰能照)니 무량무변제국토중(無量無邊諸國土中)에 일체산천(一切山川)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실어중현(悉於中現)이라.”고 한 글이 씌어진 것을 읽은 후 느낌이 있어 외국어 연구, 세계 진출 등의 일체의 욕망을 버리고 불교연구에 전념했다고 한다.
1921년 조선사 편찬위원회 편수관으로 있으면서 일인침략학자들 틈에서 단군시조를 역사속에 넣을 것을 강력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상 · 중 · 하, <조선기독교사 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史及外交史)>,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조선관기고(朝鮮官妓考)>, <조선사회사(朝鮮社會史)>, <조선유교 급 유교사상사(朝鮮儒敎 及 儒敎思想史)>, <조선의약발달사(朝鮮醫藥發達史)>,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 <조선 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백교회통(百敎會通)>, <조선 잡고합편(朝鮮雜考合編)>, <조선십란록(朝鮮十亂錄)>, <노저유사(鷺渚遺事)>, <불교계>, <진단학회>, <별건곤> 등 다수가 있고 소설 2편에는 <목우가(牧牛歌)> 조선불교 총보 (1917. 3.20 발행), <수월연(水月緣)> 조선불교계 (1917. 6. 5 발행)이 있다.
유사(遺事)로 공의 친필 <천자문(千字文)>, 묵화난(墨턛蘭) 1폭, 그 외 상기 저서, 각종 불교잡지 등 노저 자손인 명준(明埈)이 대부분 소장. 묘소는 하남시 선성군 묘역 내에 있다.
만용(만용) 1804∼186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여성(汝成), 호는 동번(東樊). 선성군의 11대손이고 통정대부 첨정 명오의 아들이다.
1854년(철종 5)에 진사에 올랐으며 1858년(철종 9)에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1860년(철종 11) 우통례가 되고 이어서 병조참의가 되었다. 저서로 <동번문집> 건(乾) · 곤(坤) 2책이 있다. 서문은 특히 교분이 깊었던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썼고 철활자판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청수동 청석암 북편 경좌에 있다.
1854년(철종 5)에 진사에 올랐으며 1858년(철종 9)에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1860년(철종 11) 우통례가 되고 이어서 병조참의가 되었다. 저서로 <동번문집> 건(乾) · 곤(坤) 2책이 있다. 서문은 특히 교분이 깊었던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썼고 철활자판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청수동 청석암 북편 경좌에 있다.
만장(萬長) 1617∼1720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여전(汝全), 호는 정립헌(正立軒). 선성군의 6대손으로 시재(時材)의 여섯째 아들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의금부도사 통정대부 행덕원부사를 지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탕정면 동산리 덕지국사봉 종산에 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탕정면 동산리 덕지국사봉 종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