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순절 4형제(순절) ? - ?    파명:선성군(宣城君)
 순절(殉節) 4형제
 순절 4형제는 첫째 극심(克諶) · 둘째 극성(克誠) · 셋째 극함(克탂) · 넷째 극겸(克謙) 4형제이다. 선성군의 현손이요 명산도정 금정의 증손이며 파성군(坡城君)의 아들들이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순절하여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 옛 송산 터에 함께 묻혔다.
 극심과 극성은 출생 년월일을 알 수 없고 그 후손이 없다. 극함은 1554년(명종 1)에 태어나 1592년(선조 25)에 순절했다. 당시 부인 여흥민씨는 잉태를 하고 있었다. 막내 극겸은 슬하에 7세 된 아들이 있었다.
 순절하던 그 날 4형제는 옛 양주(현 의정부 인근) 송산 선영의 산소(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에서 선고 파성군의 상중이라 여막에 기거하고 있던 중 왜구가 이곳까지 침입해 오게 되었다. 이 날이 1592년 5월 24일이었다. 4형제는 평소에 닦은 무예로써 왜군과 싸웠으나 화살은 떨어지고 형세가 긴박해지자 죽을 결심들을 하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옷깃에 `사필명백(死必明白)\'이라고 혈서를 쓰고 순절하였다.
 극함의 부인 민씨가 송산에 갔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없고 오직 산지기 홍희만이 눈물을 흘리며 참혹했던 묘정의 자결한 곳을 알리며 옷깃에 혈서한 것을 보여주었다. 민부인도 자진하고자 했지만 뱃속의 아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친가인 문의(文義) 땅으로 갔다. 그 유복자가 사주(士胄 : 1592∼?)이다.
 막내 극겸의 부인 신씨(辛氏)는 역시 동서인 민씨부인과 송산에 같이 있을 때 자진코자 했지만 슬하에 7세된 근주(近胄 : 1586∼1614)를 돌볼 사람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으며 청주 옥산 친가로 내려갔다. 순절 4형제 묘전에는 산지기였던 홍희만의 조그마한 추모비가 서 있다.
승묵(承默) 1739∼180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용여(用余), 생부는 택형(宅馨)이고 아버지는 국형(國馨)이다. 선성군의 11대손이고 병산군의 10대손이며 노저 양원의 7대손이다.
 천성이 단아하고 학문에 힘을 썼다. 1768년(영조 44)에 생원이 되고 1790년(정조 14) 처음 벼슬자리에 올랐다. 경상도 개령(금릉) · 충청도 천안군수를 역임했다.
 공은 지금 노량진 본동에 소재하는 현 망해정 즉 노저상공이 살던 집에 살았다. 공이 상공의 후손으로서 이곳에 살고 있을 때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은 융릉에 가기 위하여 한강을 건너자마자 잠시 머무르던 곳으로써 국가소유가 되었다. 정조대왕은 얼마 후 이곳이 노저의 집인 것을 알고 그 후손 승묵을 불러 전과 똑같이 복원하도록 하였지만 공은 굳이 사양하고 충북 괴산으로 옮겨가 살았다.
 이로부터 괴산이 근거가 되고 판서공 이하 묘소도 괴산에 모시게 되었다. 종손 상수(商秀)는 수백년 전의 참판공 · 직강공 · 판서공 이하 군수 승묵의 교지 · 과지 · 교서 등을 보존하고 있다.
시경(蓍慶) 1565∼1597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사길(士吉) 혹은 원명(原明), 호는 약산(藥山). 영상 양원의 셋째 아들로 충신 정려 효행 순국지사이다.
 진사에 합격한 후 세마로 발탁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특히 뛰어난 재질이 있어 8∼9세 때부터 군자의 도(度)를 보였으며 15∼16세 때에는 경전과 백가서에 정통해 당대 문학사들이 공의 집에 방문하여 장차의 경세지기로 추켜 올리는 정도였다. 어렸을 때 한문공(韓文公)의 <장중승전(張中丞傳)>을 읽은 뒤 눈물을 흘리며 지은 시를 보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 1543∼1620)가 “우의(寓意)가 범상치 않으니 후일 반드시 기절지사(氣節之事)가 있으리라.”고 예측하였다.
 공은 임진왜란 당시 종사관으로 아버지 양원을 수행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왜군이 1597년(선조 30)에 재침했을 때 전투 도중 향년 33세로 순국하였다. 명상 류성룡(柳成龍)의 <서애집(西厓集)>에 공의 죽음에 관한 구절이 기술되어 있다.
 유해는 거두지 못했고 종복이 유의(遺衣)로 초혼하여 현재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의 선고 양원공의 묘 곁에 의관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증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으며 1792년(정조 16) 충신정려를 명하여 포양의 은전을 하사 받았다. 1993년 4월 충남 당진군 지방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군비(郡費)로 정려를 3년에 걸쳐 내삼문까지 완전히 보수했다.
 진주 사림은 임진 · 계사 · 정유재란에 순절한 충렬제사에 대한 초혼제를 매년 7월에 촉석루와 남강에서 지낸다. 진주 백천사 충열록(晉州 白泉寺 忠烈錄)에 상록(詳錄)되어 있다.
시매(時?) 1603∼1667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자화(子和), 호는 육은당(六隱堂). 선성군의 5대손이며 체소재의 셋째 아들이다.
 1629년(인조 7)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다. 관직은 가선대부 예조참판 · 빈객 · 대사성 · 동지돈녕부사 · 양관 제학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의주부윤 · 전라감사 · 경기감사 · 개성유수 · 강화유수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남한산성으로 피난갈 때 왕을 호종하였다. 화친을 반대한 신하들에 대한 책임이 거세게 일었으나 공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그들에게 죄를 지워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여 많은 신하들을 화에서 구하였다. 또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갈 때 형인 시해와 함께 모시고 갔다.
 저서로 <육은당유집(六隱堂遺集)> 천(天) ·지(地) · 인(人) 3권이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산정리에 있다.
시재(時材) 1588∼1661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자산(子産), 호는 일초정(一草亭) 또는 하당(荷塘). 선성군의 5대손이며 체소재의 장남이다.
 문장이 뛰어난 까닭으로 초사(初仕)에 인목왕후 혼전(魂殿) 참봉(參奉) · 선공감역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좌익위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대왕을 호종했고 이듬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를 모시고 청나라 심관(瀋館)에 가 8년 억류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원종훈 영국공신이 되었고 외직으로 금산 · 회양 등 12읍에 나갔다. 통정대부 남원부사 겸 남원진도호병마절제도위 겸 오위장 장례원 판결사에 이르렀다.
시해(時楷) 1600∼1654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자범(子範), 호는 남곡(南谷) 또는 송애(松厓). 체소재의 차남이다.
 1630년(인조 8) 생원과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세마를 지냈고 같은 해 문과 급제하고 호당(湖堂) 한림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남한산성으로 인조대왕을 호종했고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었다. 동벽계 당상 · 이조참의 · 부학반장(부제학, 대사성) · 가의대부 대사성 · 이조참판 겸 빈객 · 양관 제학 · 대사헌 · 동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전라 · 경기의 감사, 개성유수를 했다.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에 볼모로 갈 때 공이 모시고 가 고초를 함께 했다. 옥관자와 금동관을 하사받았고 효종대왕은 공이 와병 때에 인평위(寅平尉)와 흥평위(興平尉) 두 부마(駙馬)를 매일 간호차 보냈다. 공이 별세하자 왕은 조회(朝會)를 일시 중지하고 부의(賻儀)는 남과 달리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봉안역 관상묘좌 쌍폄이다.
신영(쉫英) 1546∼1628    파명:선성군(宣城君)
  선성군의 증손 장흥감의 아들이다. 자는 자윤(子潤), 호는 은암(隱菴)이다. 선조대왕 때 통정대부 좌승지에 이르렀다. 공은 광해군 때 선조대왕의 8남 의창군(義昌君) 광(珖)과 같이 국가대사를 깊이 논의하였고 모후(母后 : 인목대비를 말함)를 구하고자 상소를 올리기를 여러 차례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수차 관에서 공을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영창대군의 생모를 구하고자 했으나 1613년의 계축옥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무렵 공은 남쪽으로 내려가 전라도 영암을 거쳐 화순에 정착했다. 일체 자신의 학식과 재능을 감추고 밭갈이와 김매는 일에 매달리는 한편 시흥(詩興)으로 평생을 마쳤다.
양원(陽元) 1526∼1592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 남파(南坡) · 쌍부(雙阜). 선성군의 현손이고 이원군(利原君) 학정(鶴丁)의 아들이다.
 1555년(명종 10) 생원 · 진사 양시에 입격하였으며 이듬해 알성문과에 등제했다. 한림 · 남상 · 호당 · 전랑 · 사인 · 검상 등을 역임하고 1563년(명종 18) 선계변무(璿系辨誣) 차 서장관으로 연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상사(上使) 김주(金澍 : 1512∼1563)가 병사하자 공이 대신하여 외교 절충한 결과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켜 수백년간 묵었던 국가의 숙원인 선원세계(璿源世系)를 개정할 것을 수락받고 문서를 받아 돌아왔다. 이에 명종대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통정대부로 특별히 승진토록 명하였다. 이조참의 부제학으로 누진되었다.
 후에 경상 · 전라 · 평안도 관찰사 · 송경유수 ·삼조판서 · 대사헌을 역임하고 1589년(선조 22)에는 홍문관 대제학 ·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어 문형(文衡 : 大提學)을 관장했다.
 때마침 조정에는 동서 분당의 의론이 치열하였는데 공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자 선조대왕은 `아로가(鴉鷺歌)\'를 친제 하사하며 공의 진의를 물으니 공은 즉석에서 `주록가(朱綠歌)\'를 갱진 봉답하였다. 당론을 초월함을 알고 특별대우하며 국사의 중임을 맡겼다. 그리고 `아로가\'를 하사받은 이날 이후 자호(自號)를 `노저(鷺渚)\'라고 했다.

   `아로가\'
“까마귀 검다 말고 백로(白鷺)야 희다 말라.
흑백이 분여(紛如)하여 내 알 길이 없노메라.
독수리는 어이 제홀로 검도 희도 않다 하느뇨.”

   `주록가\'
주홍도 내 아니요 초록도 내 아니요,
주록(朱綠)의 현황(眩晃)함이 나의 것이 더욱 아니니,
어찌다 임은 나를 알지 않고 오색(五色)에 물들다 하오리.

 1590년(선조 23) 우찬성에 발탁되고, 이듬해 의정부 우의정을 지내고 수충익모광국공신이 되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니 조정은 매우 당황하였다. 조정은 공을 유도대장 겸 동북면 도관찰사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임명하고 왕은 급거 서행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한 번도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한강 방어선을 버리고 임진강쪽으로 도주하니 공은 비록 유도대장이라고는 하나 수하에 한 명의 군사도 없으며 화살 한 대가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황량한 폐허 공성을 지키느니 본래의 사명이 있는 동북면을 방어함이 타당하다고 여겨 부득이 작전상 양주로 물러나 의용군을 모아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해유령(蟹踰嶺)에서 잠복하여 유인전법으로 왜장 모리요시나리(森吉成) 군대와 격전 끝에 적장과 군사 70여 명의 목을 베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 전승은 왜군이 부산에 4월 상륙한 이래 최초의 대첩이었다. 서행중인 선조대왕은 연속 패보만 받다가 이 승전 첩보를 접하고 공을 영의정에 특별 승진시켰다. 1979년 388년만에 이 전첩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해유령전첩비를 세웠다. 이는 경기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고 재실도 신축되어 매년 5월 19일 제향을 받들고 공과 신각(申恪) 장군을 추모케 되었다. 해유대첩 이 후 대탄 · 철령을 거쳐 대소의 전투를 전개하며 왕세자가 백관을 분솔하고 왕명(王命)을 권섭대리(權攝代理)하는 강원도 이천(伊川) 분조(分朝)에 이르러 본연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 때 선조대왕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내부(內附)한다는 풍설을 듣고 탄식한 나머지 8일간을 식음을 전폐하고 통한을 안은 채 지내다가 군중에서 향년 67세로 순국하였다.
 공의 시조 3수가 전해지고 있다.

 내가슴 스러난 피로 임의 얼굴 그려내어,
 나 자는 방안에 족자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임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네 집이 어디메오. 이 뫼 넘어 긴 강 우희,
 죽림 푸르르고 외사립 다닫는듸,
 그 앞에 백구 떠 있으니 게가 물어 보시오.

 높으나 높은 남게 낱 권하여 올려두고,
 이 보오 벗님네야 흔들지나 말려므나.
 죽기는 섧지 아니하되 임 못볼까 하노라.

 친필 한시 두 수의 유묵을 12대손 명준(明埈)이 소장하고 있다.
 공은 일찍이 양친을 여의었으나 영예절륜(英藝絶倫)하고 천자고량(天資高亮)하며 어렸을 때 이소재(履素齋) 리중호(李仲虎) 선생에게 배우고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문하에 종유하였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등과 더불어 교우하며 도의를 닦았다.
 공이 살던 노량강상의 망해정(望海亭)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설명문에 `선조대왕 때 영상 리양원이 살던 집\'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공이 이 곳에 산 것을 후인이 추모하여 자호 노저의 노(鷺)자를 인용하여 이슬 `노(露)\'자를 해오라기 `노(鷺)\'자로 바꾸어 노량진(鷺梁津)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었던 향단수(香檀樹)는 공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아쉽게도 6·25전쟁 때 잘려졌다. 그러나 그 모습이 왜정 때 발간된 <경성부사> 상 · 중 · 하 3권 중 상권 438쪽에 삽화로 남아 있어 크기를 알아볼 수 있다.
 공의 영정과 문집은 임진왜란 중에 유실되었다. 11대손 능화(能和 : 1869∼1943)가 편집한 <노저유사(鷺渚遺事)>가 있으며 이를 국역하고 유사(遺事) 보충한 국역판 문집을 노저자손이며 회장인 명준의 주선으로 국역 출판케 되었다.
 또한 공의 후손 화진(華鎭)과 관서 사림(士林)은 공의 도덕훈업을 기리기 위하여 평안남도 강서군에 봉명서원(鳳鳴書院)을 창건하고 문충공(文忠公) 오리(梧里) 리원익(李元翼) 선생과 같이 향사하고 있다. 오리정승의 손녀사위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공의 유사를 찬했고, 대제학 권유(權愈)가 신도비명을 찬하고, 이조판서 오시복(吳始復)이 글씨를 썼다. 묘와 신도비는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 산61-23번지 고자천에 있다. 공의 인품과 인격이 <종환록(從宦錄)> 및 <실록>, <연려실기술>에 상술되어 있다. 공이 순국한 지 407년만에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영원토록 향사하게 되었다. 사당 묘호는 문헌묘(文憲廟)이고 공의 3남 충신인 시경 정려(旌閭) 바로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문헌묘의 내삼문은 성인문(成仁門)이라고 민족문화추진회 이우성 선생이 작명하고 사당과 내삼문 현판은 공의 12대손 명준이 썼다.
양진(陽震) 1519∼?    파명:선성군(宣城君)
  선성군의 현손이며 풍안부수 옥석(玉石)의 증손이다. 비홍령(飛鴻令) 난손(蘭孫)의 아들인 창선대부 의성령(義城令) 충정(忠丁)의 아들이다.
 경상좌도 동래수군 절도사를 지냈다.
양형(陽亨) ? ∼1584    파명:선성군(宣城君)
  선성군의 증손 이원군의 둘째 아들이요 영상 노저 양원의 동생이다. 공은 통훈대부 남대 · 장령 · 동복현감을 지냈으며 아들 희경(禧慶)과 손자 덕광(德匡)과 같이 나라 유일의 3대 은일(隱逸)의 가문이다. 희경은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 장령이었고, 덕광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이었다. 특히 덕광은 95세에 세상을 뜰 때 죽는 시(時)까지 예측했으며 자손들에게 과거를 보지 말 것을 유언했다. 후손은 역술가가 많았다. 공 등 3대의 묘는 선성군 묘역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