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원긍(源兢) 1849∼1919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공리(公履), 호는 취당(取堂). 노저 양원의 10대손이고 증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 두진(斗鎭)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에 진사, 1889년(고종 26) 음성현감 · 춘천판관을 지냈다. 1891년(고종 28) 문과 증광병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승정원 부승지 · 이조참의로 있다가 8월에 북청부사(北靑府使), 1906년(광무 10) 의정부 토지 소관법 기초위원 · 경상북도 관찰사 · 경북재판소 판사 · 비서감승 · 법부협판 · 특별법원 판사 · 평리원 재판장 · 형법 교정관 · 봉상사장(奉常司長) · 내각부동산법 조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융희 1) 12월 종2품 가선대부에 승계, 조선조 고관양반으로서 이상재 · 리승만 · 유성준 · 김린 · 안기선 등과 같이 기독교에 최초로 집단 귀의했다.
 묘동교회(廟洞 : 妙洞敎會)를 창건하였으며 장남 능화(能和)는 유명한 학자이며 차남 중화(重和)는 공의 뒤를 따라 묘동교회 장로였다.
 3부자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 산 64 선성군 산소 국내(局內)에 있다. 한말 여자교과서 · 중등지리지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최초로 마태복음을 국역했다.
원류(源流) 1819∼1878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자연(自淵), 호는 죽사(竹史). 선성군의 14대손이고 명진(命鎭)의 아들이다. 총명했으며 고적(古籍)을 많이 읽어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죽사유고> 2책을 남겼다.
원상(源商) 1833∼1897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군여(君汝), 호는 춘사(春史)이다. 선성군의 14대손이고 해석(海錫)의 차남이다.
 1883년(고종 20)에 첫벼슬로 감역관에 오르고 이후 선공감, 공릉 · 광릉 · 참봉, 통위영군(統衛營軍)의 사마문안(司馬文案) · 의원(衣院), 새원(璽院) · 기사용주(機司用主) · 사직령 · 익릉령을 역임했다. 양구 · 안산 · 천안 · 죽산 등지에서 외직을 보냈다.
 1901년(광무 5) 선원전에서 태조고황제의 영정을 4차례 대수리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로 올랐다. 1902년(광무 6) 고종태황제의 망육(望六 : 51세)에 영수각(靈壽閣) 기사(耆社)의 조관(朝官)으로서 종2품 가선대부에 재차 올랐다.
원익(源益) 1836∼1917    파명:선성군(宣城君)
  선성군의 14대손이며 충신 시경의 증손인 우춘의 6대손이고 아버지는 후진(厚鎭)이다.
 통정대부 돈녕부도정에 올랐다. 아들은 배화(培和)와 일화(一和) 둘을 두었다.
위방(衛邦) 1606∼?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사폐(士閉), 선성군의 현손이며 극검의 셋째 아들 창주(昌胄 : 1567∼1648)의 둘째 아들이다. 공은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다.
유(유) 1675∼175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중구(仲久), 호는 소와(笑窩)이다. 선성군의 9대손이며 준도의 5대손이고 명운의 증손자이자 희안(希顔)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에 생원이 되고 세마익위수(洗馬翊衛率)에 연거푸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32년(영조 8) 백씨 강(?)의 말을 듣고 장릉(莊陵) 참봉에 나아갔으며 금부도사 ·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734년(영조 10)에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제수받았고 1737년(영조 13)에 관직에서 물러나자 그 곳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공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성리학은 한층 더 조예가 깊었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 1681∼1767),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 1682∼1751)과 함께 토론하여 인간과 동물의 심성(心性)이 서로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에 대한 논변을 벌였다.
 파릉(巴陵)은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소악양(小岳陽)인데 공이 그 곳 악양루(岳陽樓) 제도를 그대로 모방해 현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누각을 만들어 이름을 `소악루(小岳樓)\'라고 칭하고 그 속에서 시주(詩酒)와 금가(琴歌)로 한가하게 지냈다. 그간에도 회헌(悔軒) 조관빈(趙觀彬 : 1691∼1757), 포암(圃巖) 윤봉조(尹鳳朝 : 1680∼1761),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 1671∼1751) 등과 가끔 서로 만나 시를 읊었다.
 저서로 <소와문집(笑窩文集)> 10권과 시조(時調) 몇 수가 전해지고 있다.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 자규야 우지마라, 울어도 속절없다.
    울거든 너만 울지 날은 어이 울리는가.
    아마도 네 소리 들을제면 가슴 아파 하노라.
  2) 어여쁜 네 임금을 생각하고 절로 우니,
    하늘이 시켰거든 어이 울었으리.
    날없는 상천설월(霜天雪月)에는 눌로
  하여 우니던가.
  3) 술로 취케 먹고 거문고를 희롱하니
    창전에 섰는 학이 절로 우줄하는고야.
    저희도 봉래산 학임에 자연 지음(知音)
  하노라.
  4) 산중에 폐호하고 한가히 앉아 있어
    만권서로 생애하니 즐거움이 그지 없다.
    행여나 날 볼 임 오시거든 날 없다고 사
  뢰어라.
  5) 도산곡 청계상(陶山曲淸溪上)에 초려 삼
  간 지어내니
    계변엔 어약하고 집앞 논에는 백구로다.
    아마도 이 두 재미를 세상 알까 하노라.
  6) 불여귀 불여귀(不如歸 不如歸)하니 돌아
  감만 못하거든
    어여쁜 우리 임금 무삼일로 못가신고
    지금에 매죽루(梅竹樓) 달빛이 어제런듯
  하여라.
  7) 소선(小船)에 그물 시를 제 주준(酒樽)
  행여 이즐세라
    동령(東嶺)에 달 도닷다 어서 배를 띄어스라.
    아희야 잔(盞)자를 부어라 이백(李白)
  본듯 하여라.
육(堉) 1557∼1614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사후(士厚), 호는 보만당(保晩堂) 또는 취치자(醉癡子). 선성군의 5대손이고 준도의 장남이다. 통정대부이고 시집 1권이 있는데 이의현(李宜顯 : 1669∼1745)이 서문을 썼다.
 1579년(선조 12) 생원, 1588년(선조 21) 알성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 경연 참찬관 · 춘추관 · 수찬관 · 지제교 · 대사성 · 대사간의 벼슬을 역임했다.
 이 때 여주에 의혹사건이 있어 공이 선택되어 임지에 갔으나 도착 2일만에 58세의 나이로 임지에서 별세했다.
윤항(倫沆) 1872∼1908    파명:선성군(宣城君)
 윤항(倫沆) [1872(고종 9)∼1908(순종 2)]
 자는 중현(仲賢), 호는 운남(雲南)이며 선성군의 13대손이다. 통정대부 중추원 의원이며 참봉에 올랐다. 부인은 류씨[柳氏 : 1870(고종 7)∼1930]로 열녀였다.
 전남지역 유림들의 추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양군 다압면 신원리의 열부 전주류씨는 사헌부 감찰 찬옥(贊玉)의 딸로 전주인이며 도정 휘 주회[柱晦 : 1829(순조 29)∼1905(광무 9)]의 아들인 참봉 윤항의 아내이다. 효성스럽고 유순한 행실은 그 칭송이 자자했으며 리씨 가문에 시집와서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으니 부군 외 모든 사람들이 현숙하다고 칭찬하였다. 부군이 병이 들어 10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일심으로 간호하였다. 낮에는 반드시 약을 달이고 미음을 끓이며 밤이 되면 반드시 천신과 산신에게 기도하느라 허리띠를 풀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시종여일하게 있는 힘을 다 기울였다. 병세가 위급해졌을 때는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먹여 소생시켜 이틀 동안 연명하게 하였고 마침내 상을 당해서는 정도가 지나치게 통곡하였다. 예법대로 장례를 치른 뒤에 반찬 없이 끼니를 넘기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미망인의 절개를 잘 지켰다.
 그의 아들 원생(源生 : 1900∼ )은 선성군 종친회 제2대 회장을 지냈고 <기해보> 때 재무를 맡았고 <기미보> 때는 고문으로 있었다.
응수(應洙) 1880∼1950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성원(聖源), 선성군의 16대손이며 의사 건석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옥중 `계자유서\'의 뜻을 받들어 이 나라의 자주독립과 민족자결 원칙을 호소하는 3 · 1운동 당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그 후 독립전사에게 보내기 위한 권총 폭탄 밀수사건 등으로 전후 14년간이나 구금생활을 했으며 가산몰수를 당한 것이 무려 14차례나 된다.
 이런 애국적인 의열(義烈)로 성균관에서도 표창을 받았다. 1990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을 받는 동시에 대전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열녀(烈女) 순천박씨 기순(基順)과의 슬하에 아들 종신(宗信)을 두었다. 열녀 순천박씨 기순[1884(고종 21)∼1967]은 광몽(光夢)의 딸이며 대한 의사 건석의 자부로, 애국지사 응수의 아내로 맺어져 집안에서 평생 독립투쟁을 한 절개가 굳은 여인이었다. 그 일화를 보면어느날 남편 응수가 구속되어 대구에 있는 경상북도 경찰국에서 국장 입회하에 취조한다는 연락을 받고 박씨가 등에 어린 아들 종신을 업은 채 도경찰국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남편이 취조경찰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아들 종신을 취조실 바닥에 내려놓고 느닷없이 취조경찰관의 멱살을 움켜쥐고 뺨을 마구 때렸다. 곧이어 박씨가 “이놈, 부모 잃고 나라도 잃어 원통해서 하는 일인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하고 호령하니 비록 여자의 몸이나 워낙 큰어른이니 국장이라는 자가 달려와 손을 떼어 놓고 아기를 업혀 주었다 한다.

 원래 황간에 살다가 금릉군 봉산면 여지동 내립석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봉산면 신동 502번지로 이사하였다. 지금은 아들 종신이 이곳에 거주한다.
 박씨는 1966년 3월 경상북도 보화원(補化院)으로부터 독행상(篤行賞)이라는 열녀로서의 표창장을 받았다. 이 때가 82세였다.

의천(倚天) 1676∼1753    파명:선성군(宣城君)
  자는 사립(斯立), 호는 박직재(樸直齋). 선성군의 9대손이며 서암 진백의 손자이고 6도 병사 · 통제사 택(澤)의 아들이다.
 공은 매사에 솔직하여 임금의 칭찬을 받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호를 `박직재\'라고 하였다. 1713년(숙종 39) 문과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승지에 이르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는 연거푸 상소하여 신임사화의 역적들을 성토하는 등 임금에게 옳은 일만을 간하는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었다. <박직재 주의(奏議) 건 · 곤>이 전해지고 있으며 간찰도 전해지고 있다.(선성군 16대손 명준 소장)
 아들 일증(日曾 : 1701∼1775)은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이다. 손자는 장철(長喆 : 1733∼1805)이고 가선대부 경상좌병사 도총관외 부사 · 수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