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신성(愼誠) 1552∼159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흠중(欽仲), 대군의 6대손이며 장제부정(長堤副正)의 증손으로 증 이조참의 현감 언사(彦師)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남양홍씨로 감역 희숙(希淑)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원주변씨로 사과 극성(克誠)의 딸과 증 정경부인 광주김씨로 경태(景泰)의 딸이다.
 박주(朴洲)의 문인이며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수업하였다. 이 때 이조판서 이이(李珥)가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자 동료 유생들과 함께 그의 무고함을 상소하고, 탄핵의 주동자인 송응개(宋應慨) · 허봉(許풤) · 박근원(朴謹元) 등의 유배를 청하였다. 그 뒤 천거로 정릉참봉을 거쳐 사옹원 봉사에 전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대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을 때 당시 상원군수(祥原郡守)이던 동생이 봉양하던 어머니가 전란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른 후 함열에 은거했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 선산하 갑좌였는데 1992년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보개산으로 옮겼다. 영의정 김상헌이 짓고 판서 오준(吳竣)이 쓰고 이조참판 김광현이 전자한 신도비와 비석이 있다. 신도비는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심(?) 1568~162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신(子信), 호는 죽봉(竹峰), 대군의 6대손으로 헌납 경률(景썑)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 병과에 급제, 시강원 설서(說書)가 되고 이어 사서 · 문학을 거쳐 홍문관 교리로 승진되었다. 1598년(선조 31) 3월에 암행어사로 제수되어 각 항만 운송선의 적재물을 철저히 점검하고 관리와 선원들이 물품을 숨기고 빼내던 종래의 폐습을 근절시켰다. 1601년(선조 34) 임천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홍문관 교리로 체직이 되고, 다음 해 시독관(侍讀官)으로 있을 때 임금이 별전에 들러 친히 <주역> 이괘(?卦)를 읽고 차례로 해석을 마친 다음 공이 나아가 대과괘(大過卦)를 강론하고 임금의 물음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해석하였다. 1604년(선조 37) 사인(舍人)이 되고 이어 집의(執義) · 보덕(輔德) · 필선 등을 지내고 1615년(광해군 7) 여주목사로 있을 때 치적이 없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파직하라는 상소를 받기도 했다. 1624년(인조 2) 2월에 판결사(判決事)로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8월에 사헌부의 계에 의하여 면직되었다.
 묘소는 광양산(光陽山) 동지곡 선영하에 있다.
양(樑) 1519∼158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공거(公擧), 대군의 5대손이며 현령 전성군 대(팾)의 아들이다. 명종대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의 외숙으로 정사룡(鄭士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식년 갑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고 1555년(명종 10) 정사룡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58년(중종 13)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서 사간원 헌납(獻納) · 홍문관 수찬(修撰) · 교리 ·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 해 홍문관으로 다시 옮겨 부응교(副應敎) · 응교를 지내고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의 횡포를 견제하려는 명종대왕에게 중용되어 승정원 부승지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 1560년(명종 15) 사간원 대사간이 되고 병조참지 · 예조참판 · 동지중추부사 · 이조참판 · 동지성균관사에 올랐다.
 그는 명종대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감(李戡) · 신사헌(愼思獻) · 권신(權信) · 윤백원(尹百源) 등과 결탁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壟斷)하였다. 명종대왕도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냈다. 1562년(명종 17) 다시 공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에 중용되고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 의정부 우참찬 ·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 몇몇 무리들과 모의하여 박소립(朴素立) · 기대승(奇大升) · 허엽(許曄) · 윤두수(尹斗壽) · 이산해(李山海) 등 사림을 제거하려다가 조카 기대항(奇大恒) 등에 의해 탄핵을 받고 무리가 함께 관직이 삭탈되고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서 적소에서 별세하였다. 별세 후 신원이 되면서 관직이 회복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구 원당동 왕릉골에 있다. 신도비문은 정사룡이 지었다.
엽(曄) 1552∼161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회백(晦伯), 호는 연당(蓮塘), 대군의 9대손이며 춘성정의 6대손이고 증 예조참판 대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밀양박씨로 부사 응종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원주원씨로 생원 호빈(虎彬)의 딸과 정부인 흥덕장씨로 통덕랑 비(備)의 딸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로지 경학(經學)에 힘쓰다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군량과 병기를 모아 여러 부대에 조달하여 독려하였다. 1596년(선조 29)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으나 장사를 치르고는 바로 나와서 모든 군무를 지휘하여 아버지가 생시에 하였던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군졸과 군량이 모아지는 대로 곧 격전지로 보냈고, 병기와 군마도 계속 보충하며, 수비병과 공격병을 교대하였다. 도원수 권율은 감탄하여 말하기를 “리대윤은 이처럼 장한 아들을 두었으니 죽었어도 죽지 아니했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군직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관찰사 박홍로(朴弘老)가 다시 포상을 건의하여 가선대부에 특승(特陞)하고, 부총관(副摠管)을 제수하였으나 또한 사양하고 난이 끝난 뒤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조정에서 제관을 보내 치제(致祭)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곡 병좌이다. 정간공 이직언(李直彦)이 지은 비문과 비가 있고 문익공 이상황(李相璜)이 지은 행장이 있다.
영(?) 1561∼162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영(士瑩), 호는 이환(泥丸), 대군의 6대손으로 언순(彦諄)의 아들이다.
 일찍이 진사가 되고 1583년(선조 1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615년(광해군 7)에 대사헌이 되어 인목대비의 삭호(削號)를 발의했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올랐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완창군(完昌君)에 봉해지고 우참찬으로 승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폐모론의 원흉으로 지탄받아 주살되었다.
영달(英達) 1579∼165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시호는 양정(襄靖), 대군의 7대손이며 강성도정의 현손이고 증 우의정 중기(重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언양김씨로 호련(戶練)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밀양박씨로 판관 숭문(崇文)의 딸이며 호란(胡亂) 때 분사순절(焚死殉節)하여 정려를 받았으며 증 정경부인 해주최씨로 도사(都事) 급(짾)의 딸이다.
 공은 별천(別薦)으로 1618년(광해군 10) 훈국낭청(訓局郞廳)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 폐출에 반대하였다. 1637년(인조 15)에는 최명길(崔鳴吉)과 같이 척화한 홍익한(洪翼漢) · 오달제(吳達濟) · 윤집(尹集)을 청나라에 압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같은 해 6월 18일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재직 중 호남의 추가방비에 쓸 수군을 보내라는 명령에 군사를 움직일 때는 표신(標信)이 있어야 함을 치계(馳啓)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 후 1644년(인조 22)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승자되어 전보되었다. 같은 해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에 공을 세워 영국원종공신이 되고 증 찬성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약산골 신좌이다.
용규(用逵) 1749∼181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13대손으로 현감 현기(顯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평릉군 암(?)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별시 무과에 천거되어 여러 내 · 외직을 역임하고 1806년(순조 6) 6월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808년(순조 8) 7월에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계(啓)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그 뒤 조정에서 그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완양군(完陽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양주 외송산에 있다.
용순(容純) 1801∼185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치구(穉九),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으로 증 참판 만구(晩求)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남양홍씨로 윤승(允升)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문학 상규(庠圭)의 딸과 정부인 광산정씨로 도묵(道默)의 딸이다.
 1825년(순조 25)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그 이후 구성부사를 거쳐 1850년(철종 1)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852년(철종 3) 가선대부에 올라 충청도 병마절도사와 부총관을 지냈다. 저서로 1828년에 편찬한 <선전관청 수교청헌(宣傳官廳 受敎廳憲)>을 남겼다.
 묘소는 전북 전주시 수문동 경좌에 있다.
용의(容儀) 1832∼187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선실(善實), 초휘는 지승(志昇). 대군의 1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3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종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진주류씨로 학순의 딸이다. 증 참판 계순(啓純)에게 입후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풍산홍씨로 학모(學謨)의 딸이다.
 1851년(철종 2) 별천으로 선전관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다음 병사를 거쳐 좌윤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해등면 무수동 경좌이다.
용의(容儀) 1839∼189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준화(俊化). 대군의 16대손이며 주계군의 13대손이고 증 동지중추부사 흥우(興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제주양씨로 정윤(正允)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로 정환(正煥)의 딸이다. 음직에 천거되어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다음 1872년(고종 9) 동지중추부사로 종정경(宗正卿)이 되었다.
 묘소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궁산리 덕산촌 후율 미암고개 유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