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수형(隨亨) 1552∼161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시숙(時叔), 대군의 6대손이며 장양도정의 증손이고 참판 식(拭)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증 승지 수곤(壽崑)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로 곤(쥂)의 딸과 숙부인 고령박씨로 규(珪)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풍덕군수로 재임시 선조대왕이 5월 1일 동파관(東坡館)을 떠나 판문에서 오찬을 할때 길에서 배알하고 약간의 어선(御膳)을 비롯해서 백관과 호종하는 병사의 군량 및 말먹이까지 준비해 주었으며 따로 쌀 5석을 바쳤다. 1595년(선조 28)에는 용강현령을 거쳐 군자감(軍資監) 정(正)이 되었으며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선무원종공신 3등에 입록되어 가자(加資) 통정대부 행 군자감 정이 되었다.
 묘소는 광주군 돌마면 장동 선산하 해좌이다.
순민(舜民) 1569∼162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1569(선조 2)∼1621(광해군 13)
 자는 고여(턅如), 호는 이봉(伊峰), 대군의 9대손으로 교위(校尉) 응시(應時)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인(安人)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세구(世救)의 딸이며 배위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아버지는 도사 영건(都事 永建)이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인으로 성력(星歷)에 통달하고 수리(數理)에 밝으며 시문(詩文)을 잘하였다. 선조 27년(1594년) 2월 29일 별정시문과(別庭試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승정원 가주서(承政院 假注書), 외춘추 기사관(外春秋 記事官) 예조좌랑·시강원 설서(侍講院 說書) 수원판관·예조정랑·울산판관·강원도 경시관(江原道 京試官)·영주군수·수성찰방 등 주요 내직을 역임하고 광해군 9년(1617) 8월 18일 내섬시정에 부임하여 인목대비 서궁 유폐의 어려운 난국을 겪고 광해군 13년(1621) 1월 울산부사에 밀려나 근무중 동년 5월 8일 순직했다.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유저에 이봉집이 있다.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에 있다.
순의(舜儀) 1806∼187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초휘는 장익(章翊), 자는 이백(而百), 호는 백석(白石). 대군의 16대손이며 밀산부수의 13대손으로 동지중추부사 응우(膺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벽진이씨로 정언 현(턁)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진성이씨로 휘련(彙璉)의 딸이다.
 1830년(순조 30) 3월 성균진사에 합격하고 1867년(고종 4) 4월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875년(고종 12) 2월 통정대부 행 홍문관 교리 겸 지제교 · 시독관 · 시강관이 되었다. 경연청에 매일 나가 시강하는데 시 · 서 · 역 등에 매우 밝았다. 고종태황제는 “리시독관은 그야말로 노당익장(老當益壯).”이라 면서 그의 학문을 극찬하였다. 후에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묘소는 경북 영천시 쌍계동 구산 밑 팔랑곡 안산 임좌이다.
승(承) 1552∼159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선술(善述), 호는 청휘당(晴暉堂), 대군의 6대손으로 증 호참 희운(希雲)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도 지극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洸)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경서>와 성리학을 배웠고, 신당촌(新塘村) 동산 아래에 고가(古家)를 개축하여 당호(堂號)를 `청휘당\'이라 하고 동강(東崗) 김우옹(金宇춳) ·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과 교우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588년(선조 21)에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선공감역(膳工監役)에 제수되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 여름 한강 정구 ·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등과 함께 창원 월영대 등 명승지를 유람하고 오는 길에 현풍(玄風) · 송림(松林)에 들러 연꽃을 감상하면서 인근의 김면(金沔) · 박황(朴惶) · 이홍우(李弘宇) · 이홍량(李弘量) 등과 함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를 지어 읊었다. 이 시가 오늘에 전하고 있고 이를 `낙강7현(洛江七賢)\'이라 전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3남지방이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선조대왕이 파천길에 오르자 서책을 덮어놓고 의병을 모아 김면이 주도하는 창의군(倡義軍)과 합세하여 거창 · 고령 · 금산 · 성주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적선 2척을 나포하여 적들이 민가에서 강탈한 재물을 다시 찾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9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관군과 합세하여 30여 차례의 격전을 벌여 지례 · 안음 · 함양 등지를 수복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 계비(繼쯼) 상을 입어 집상을 하는 동안에도 군량미를 모아 군영에 보냈다. 1598년(선조 30) 정유재란에 도체찰사 리원익(李元翼)의 부름을 받고 가던 중에 청주 말리에 이르러 과로로 병을 얻어 순직했다. 장원서 별제, 뒤에 성균관 좨주에 증직되고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 봉암산 말록 임좌이다. 유저로는 <청휘당실기> 1책이 전해오고 있다.
승우(勝宇) 1841∼191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치경(稚敬), 호는 벽서(碧棲) · 회와(晦窩).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으로 증 규장각 제학 종청(鍾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한양조씨로 광형(光亨)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진주강씨로 좌의정 노(?)의 딸이다.
 진사를 하고 군수로 재직하면서 1882년(고종 19)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수찬을 거쳐 1890년(고종 27) 사간원 대사간에 오르고 1894년(고종 31)에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 후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하기 위한 초토사가 되었으며 1895년 을미개혁으로 홍주부 관찰사로 재보직되었다. 이 때 홍주에는 김복한(金福漢) · 이설(李첁) · 안창식(安昌植) · 안병찬(安炳瓚) · 임한주(林翰周) · 이근주(李根周) 등 전직 관리들이 을미사변 직후부터 기병을 계획하다가 단발령을 계기로 창의(倡義)하여 공주와 임존산성을 점거하는 등 맹위를 떨치자 거짓으로 이들에게 가담한 뒤 정부측에 연락, 일망타진해서 투옥함으로써 의병진을 강제해산했다. 1896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중추원의관을 거쳐 1898년(광무 2)에 봉상사 제조가 됐다. 1900년(광무 4)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고, 1904년(광무 8) 충청북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전라북도 관찰사 겸 선무사로 임명됐다. 1906년 궁내부 특진관에 이어 1907년 봉상사 제조가 되고, 조경단 수개(修改) 때 감동(監董)한 공으로 가자됐으며 1909년에는 8괘장 훈장을 받고, 1910년 정경으로 승진하면서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
 묘소는 시흥군 서면 박달리 인좌이다.
 시우(時宇) [1843(헌종 9)∼1915 ]
 대군의 15대손이며 양록정의 12대손으로 도정 회수(會壽)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한산이씨로 화재(華載)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권씨로 현감 창현(昌鉉)의 딸이다.
 1894년(고종 31) 진잠현감을 비롯한 여러 군읍 수령직을 역임한 다음 1897년(광무 1) 4품관으로 진전궁(眞殿宮)을 세우고, 선희궁을 이건할 때 세운 공으로 가자되고 다음 해 중추원 의장 대변 의관으로 있다가 1907년(순종 1) 3월 6일 종2품관으로 승자됐다.
 묘소는 시흥시 서면 박달리 곤좌이다.
승우(承宇) 1848∼189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윤필(允弼), 호는 송수(松需), 초휘는 승수(承洙).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으로 공조판서 회순(會淳)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남양홍씨로 익신(翼臣)의 딸이며 배위는 정부인 의령남씨로 판서 정익(廷益)의 딸이다.
 1865년(고종 2) 을축년 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0년(고종 7) 전한권(典翰圈)에 선발되어 4개월 후 전한에 임명됐으며 1871년 대종회시 도청(都廳)으로 봉직한 공으로 가자되었다. 그 후 1882년(고종 19)에는 우부승지가 되고 국장시 고부사(告訃使)를 역임한 다음 곧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그 후 참판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가곡 을좌이다.
승원(承元) 1463∼151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선보(善甫). 대군의 4대종손으로 유성군 임(任)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죽성현부인 보주임씨 양양군 자번(自蕃)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로 좌의정 서성부원군 치인(致仁)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21세로 벼슬길에 올라 참상인 6품 선전관과 주부를 지내고 호조 · 형조의 낭관을 역임한 다음, 1488년(성종 19)에는 공조좌랑이 되었다. 1502년(연산군 8)에는 정3품 통정대부에 가자되어 외직인 배천부사에 이어 다음 해인 1503년(연산군 9)에는 인천부사에 제수되고 1505년(연산군 11)에는 진주목사가 되어 목민관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종2품 가선대부에 증자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구 내동면 팔야리) 산81번지 수천동 선산하 계좌이다.
승재(承宰) 1873∼191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좌경(佐卿), 호는 창주(蒼洲). 대군의 19대손이며 유성군의 16대손으로 창의대장 강년(康秊)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 풍균(豊均)의 딸이며 배위는 연안이씨이다.
 1895년 12월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가담하여 서상업(徐相業) 등과 함께 아버지를 보좌하였다. 1907년(순종 1) 10월 김상한(金商翰)과 기타 100여 명의 의병을 소모하여 김상한을 별진장으로 임명할 것을 아버지에게 권하였다. 그 해 11월 피하리전투에서 부상한 이도악(李道岳)을 이끌고 적진을 벗어났으며 1908년 5월 청풍성전투에서 의진이 크게 패하고 아버지가 잡혔을 때 경성으로 가서 옥문을 부수고 통곡하다가 옥에 갇힌 뒤 다음날 풀려났다. 그 해 9월 19일 아버지가 순국하자 중군장 김상태(金尙台)와 같이 활약하다가 한양리(韓良履) · 이기하(李起夏) · 정희섭(丁喜燮) · 허달(許達) · 이응수(李應洙) · 서상업 등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경성에 잠입하여 왜적 이토(伊藤博文)를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잡혔으나 죄수들의 도움으로 탈옥하였다. 그 뒤 국내에서 재거(再擧)를 꾀하던 중 적정(敵偵) 일진회원 박준호(朴準鎬)의 음독 유인으로 화를 입었다. 그리하여 대전 박용규(朴龍奎)의 집에서 치료하였으나 피를 토하고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묘소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세릉곡 오좌이다.
식(拭) 1522∼158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청지(淸之), 호는 손암(損菴), 대군의 5대손이며 장양도정의 손자이고 증 이조참판 행 죽산부사 승상(承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여흥민씨로 군수 관(寬)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증 승지 수곤(壽昆)의 딸과 정부인 창녕조씨로 증 부제학 언박(彦博)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둘째 형 증(拯), 셋째 형 양(揚)과 함께 생 · 진시에 급제하고 선략장군(宣略將軍) 때인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 · 병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후 승정원 주서 · 홍문관 저작(著作) · 경연청 설경(說經)을 역임하고 1559년(명종 14) 참상(參上)으로 승계되어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에는 홍문관 수찬 · 병조좌랑 · 이조좌랑을 거쳐, 다음 해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 시강원 문학(文學)과 이조정랑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 의정부 검상(檢詳)에 이어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다음 해 사간원 사간과 홍문관 응교를 지낸 다음 가자되어 1565년(명종 20) 당상(堂上)인 홍문관 직제학에 올랐다. 다음 해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우승지 ·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에 기용되었다. 1569년(선조 2) 내직인 우승지와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선조 5)에는 외직인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 7) 대사간에 이어 1585년(선조 18)까지 부제학 2회, 대사간과 대사헌을 9회 역임하였고, 1586년(선조 19) 이조참판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종2품관에게 주는 군직 행 호군(護軍)에 있다가 66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도촌동, 구 광주군 돌마면 뒷산 해좌이다.
신(愼) 1570∼163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근보(謹甫), 대군의 5대손으로 사용(司勇) 증 완양군 의정(義貞)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고 풍채가 출중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대왕이 서울에서 떠났음을 듣고 곧바로 뒤따랐고 영유(永柔)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훈련원 첨정 · 도총부 도사 · 경력 · 사헌부 감찰 등 내직을 두루 지내고, 영월 · 희천 · 대정 · 곽산 · 초계 · 안주 등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바로 평안도 우후로 나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많은 공을 세워 갈성분위진무훈(竭誠奮威振武勳)에 책록되어 가선대부 전풍군(全豊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도총부 부총관이 되고 이어서 경성부사 · 함경도 병마절도사 · 함경도 · 순변사 · 강원도 순변사 · 황해병사 겸 방어사 · 영흥부사 겸 감목관(監牧官)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632년(인조 10) 해주에서 별세하였다.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도덕산에 있다. 묘갈은 이희조(李喜朝)가 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