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이근(?根) 1668∼173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암(華菴), 대군의 10대손이며 춘성정의 7대손으로 진사 성진(聖眞)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부안김씨 군수 지성(之聲)의 딸이다. 배위는 창녕조씨 하현(夏賢)의 딸이다.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면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 1641∼1721)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경술(經術)에 뛰어나서 1706년(숙종 32) 비국(備局)에서, 학술이 정심하고 행의(行誼)가 순고(純固)하며 재식(才識)이 통련(通練)한 세 가지 조항으로 명목을 삼아, 대신 · 육경 · 3사장관(三司長官)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을 때,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천거를 받았고, 1717년(숙종 43)에는 스승인 찬선(贊善) 권상하의 천거로 세자시강원 자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학덕이 높은 초야의 선비로서 중망이 있어 1721년(경종 1)에도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학자인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 1682∼1751) 등과 함께 강문8학사(江門八學士)로 지칭되었다.
 묘소는 대전시 유성구 학산동 유좌이다. 유고로 <화암유고> 5권이 가장(家藏)되어 있다.
익빈(翼賓) 1556∼163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응원(應遠), 대군 증손인 여양군의 손자로 증 영의정 충훈부도사 노(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소(?)의 딸이다. 배위는 반남박씨 영호(英豪)의 딸과 증 정경부인 여주이씨로 첨지 우(遇)의 딸과 증 정경부인 경주최씨로 감찰 경천(敬天)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596년(선조 29) 8월 역적 이몽학(李夢鶴)과 결탁한 역적괴수 김팽종(金彭從)을 사살하여 홍주토역공신(洪州討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벼슬은 봉사 · 직장 · 주부를 역임한 다음, 1600년(선조 33) 내섬시정에 올랐고, 그 후 외직인 금산군수를 비롯해서 부평 · 철산 등 6개 지방 수령직을 맡았다. 1605년(선조 38) 4월 5일에는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에, 동년 4월 16일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과 청난원종공신(淸難原從功臣) 1등훈에 각각 책록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양주목사에 부임하여 맹수를 잡아 목민의 안전을 도모하고 쌀 2백석을 비축하여 상가(賞加)하는 교서를 받았으며 1628년(인조 6)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635년(인조 13) 가선대부에 가자된 다음 1637년(인조 15) 숭정대부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장곡면 옥계리 영정동 유좌이다. 묘갈 · 상석과 신도비가 있고 9대손 면우(勉宇)가 지은 가장(家狀)이 있다.
익수(益壽) 1653∼170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구이(久而), 호는 백묵당(白默堂), 시호는 충간(忠簡). 대군의 10대손이며 장제부정의 7대손이고 증 좌찬성 원구(元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성주이씨로 참판 준구(俊耉)의 딸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파평윤씨로 판관 담(譚)의 딸이다.
 1682년(숙종 8)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에 등용되어 국가 문서를 맡아 처리하였으며 그 뒤 사헌부로 전직하여 누차 승진, 1687년(숙종 13) 지평이 되었다. 그 해 붕당으로 인하여 죄없이 몰리는 나양좌(羅良佐)를 변호하다가 삭직되었으나 다음 해 정언으로 복직되었다. 1689년 다시 지평이 되었을 당시 위세를 떨치던 장희빈(張禧嬪)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궁궐문 밖에 온 것을 보고 이를 가로막다가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사간에 복직되었다. 1697년(숙종 23) 승지가 되고 이어서 대사간 · 이조참판 ·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성 · 동지경연사 ·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후 1702년(숙종 28) 2월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곧 형조판서로 특승되었다. 1704년(숙종 30) 우참찬이 되고 이어 형조판서 · 한성판윤 ·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옥정리 묘좌이다.
익한(翊漢) 1659∼173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여익(汝翊), 대군의 10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인 전성군의 6대손이고 증 이조판서 상연(尙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원주김씨로 숭문(崇文)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대구서씨로 증 이조참의 탄리(坦履)의 딸이다.
 생 · 진(生進) 양과에 합격한 후 1700년(숙종 26) 춘당대(春塘臺) 문과에서 갑과로 장원 급제하였다. 그 뒤 1704년(숙종 30) 사헌부 장령에 취임하여 관기 확립의 역량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중임하였으며, 1709년(숙종 35) 임양군 환(桓)이 진하사(陳賀使)로 중국에 갔을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 이듬해 사간원 헌납을 거쳐 다시 장령이 되었고, 같은 해 다시 헌납과 필선을 거쳐 장령을 지낸 다음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후 가자되어 1713년(숙종 39) 제주목사로 나갔다. 다음 해에는 좌부승지와 나주목사를 거쳐 1722년(경종 2)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2년 뒤 경기수사로 옮겨 양역(良役)의 고통과 백성의 부담을 줄이도록 상소하였으며 1727년(영조 3) 병조참판이 되었다. 1732년 한성부 우윤을 지낸 다음 2년 뒤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묘소는 장단군 정좌포 임좌이다.
인달(仁達) 1763∼183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여수(汝壽), 대군의 13대손으로 증 병참 현철(顯喆)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 여러 요직을 거쳐 세 고을의 군수 · 목사를 지내고 세 곳의 외장을 지내기도 했다. 1833년(순조 33) 경상우병사로 재직 때 불의의 화재를 당하여 병영이 소실되고 그 화염 속에서 질식, 순직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에 있다.
자(?) 1579∼166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형원(炯源), 호는 교촌(郊村). 대군의 7대손이며 송산도정의 현손으로 증 호참 사제(思齊)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로 사과 용(鏞)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은진임씨로 현감 경우(景佑)의 딸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틈타 식량을 공급하였고, 연흥부부인(延興府夫人) 노씨(盧氏)가 안치될 때와 반정 후 돌아올 때 수행하였다. 1627년(인조 5) 9월 흥경원 천장(遷葬) 때에는 배설관에 봉무한 공으로 참봉이 되었고, 1633년(인조 11)에는 아마 한 필을 하사받았고 1634년 7월 직장으로 올랐다. 1636년(인조 14) 동부 주부를 거쳐 1637년(인조 15)에는 금천도 찰방에 나갔다가 1641년(인조 19) 포천현감을 역임하였다. 1644년(인조 22) 금성현령이 되었으며 거사(去仕) 때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가 세워졌다. 1659년(효종 10)에는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가자되었다. 1629년(인조 7)에는 별좌로서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1667년(현종 8)에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광주군 돌마면 분당동 주인동산 간좌(현 성남시 분당동)였으나 도시계획으로 충남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만곡 간좌에 이장되었다. 묘비 · 상석 · 망주석 · 충효적문비가 있으며 금성(金城)에 선정거사비(善政去思碑)가 있다.
잠(潛) 1561∼159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증손이고 만호(萬戶) 태빈(台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인(令人) 평강채씨로 감찰 무극(無克)의 딸이다. 배위는 증 숙부인 평강조씨로 좌랑(佐郞) 인(寅)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체찰사의 막료로 있다가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의 요청에 따라 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어려 부하들이 잘 따르지 않았으나 신상필벌을 강화하고 사졸과 고락을 함께 하여 부하들이 점차 복종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 진주성이 위급함을 듣고 군사 300명을 이끌고 나아가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싸우다가 성의 함락과 함께 전사하였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 1등에 서훈되어 병조참의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전남 강진군 운주동 선산하에 있다.
장오(章吾) 1714∼178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명(子明), 호는 연계(蓮溪), 대군의 13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9대손으로 증 좌찬성 중경(重庚)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대구서씨로 증 영의정 정간공 종제(宗悌)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청송심씨로 담(쩕)의 딸과 정부인 광산김씨로 종협(宗協)의 딸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였으며 이듬해에는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 의해 용력이 뛰어나고 병서에 정통하며 사술(射術)이 능통한 장재(將才)로 추천되어 군문의 초관(哨官)으로 제수되었다. 1743년(영조 19) 영조대왕이 사리평의 장대(將臺)에 나가 열무(閱武)한 다음, 부총관 윤광신(尹光莘)의 용력을 시험할 때 내승(內乘)으로서 윤광신을 도와 포위망을 뚫고 철타자(鐵打子) 1개를 빼앗아, 표피(豹皮)를 하사받았다. 1745년(영조 21) 승지가 되고, 1747년(영조 23) 전라좌수사 · 승지 · 충청병사 · 우변포도대장을 역임한 다음 1755년(영조 31) 통제사로 특제되었다. 다음 해 총융사로 재직시에는 어명에 따라 이흥효(李興孝)를 수구문 밖에서 효시하였다. 1761년(영조 37) 금위대장에 특제되었으나 지평 임관주(任觀周)의 근무태만 상소로 파직되어 영종진에 투비(投퓒)된 후 다음 해 특방(特放) 복직되어, 1766년(영조 42) 평안병사가 되었다.
 다음 해 총융사를 거쳐 금위대장이 되었으며 1768년 융무당(隆武堂)에서 실시한 사시에서 과녁에 적중시켜 가자되었다. 그 후 훈련대장 · 형조판서를 거치고 훈련대장을 역임하였으며 정언 이종영(李宗榮)의 독직상소로 교동부에 충군되었다가 집의 김낙수(金樂洙)의 상소로 다시 진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780년(정조 4) 풀려나고, 다음 해 별세하자 탕척(蕩滌)되었다.
 공은 활솜씨가 뛰어나 60대 후반에도 모화관까지 나아가 활을 쏘아 날아가는 고니를 명중시켜 상으로 궁시를 하사 받은 일이 있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우성면 대문리에 있다. 참판 중복이 지은 표석이 있다.
적(캦) 1644∼170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보(盛甫), 대군의 9대손이며 송산도정의 6대손이고 증 봉열대부 종친부 전첨으로 제수된 원철(元哲)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인 원주원씨로 현감 장길(長吉)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로 통덕랑 직(稷)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진사하여 충의위로 1681년(숙종 7)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 대동찰방(大同察訪) · 예조좌랑, 결성 · 금산 · 마전군수와 여산부사를 역임한 다음 통정대부에 승자되고 성균관 좨주(祭酒)를 지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송곡리 하송삼 간좌에 있다.
정(挺) 1512~157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응기(應期), 대군의 5대손이며 장양도정 주(?)의 손자이고 증 이조참판 행 죽산부사 승상(承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여흥민씨로 군수 관(寬)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청주한씨로 사직(司直) 세옹(世雍)의 딸이다.
 1551년(명종 6) 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1556년(명종 11) 함평현감을 시작으로 1567년(명종 22)에 부산첨사에 이어 1569년(선조 2)에는 동래부사를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1571년(선조 4)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가 2년 뒤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병조참판을 지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은 자신의 문집에 당시 병영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