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낙안군(樂安君) 1417∼147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영(寧), 자는 사안(士安), 시호는 이안(夷安). 대군의 4남으로 어머니는 예성부부인 해주정씨이고, 배위는 양산군부인(梁山郡夫人) 언양김씨 주부 중행(仲行)의 딸이다.
 처음에는 통정대부 원윤이 되고 1433년 (세종 15) 가정대부로 승자되면서 낙안군에 봉해졌다. 1459년(세조 5) 숭헌대부에 오르면서 낙안윤(樂安尹)으로 개수되었고, 다음 해 가덕대부에 오르면서 낙안경(樂安卿)에 개수된 다음 1472년 (성종 3) 낙안군에 환봉되면서 57세로 별세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에 있다.
명원군(明原君) 1491∼156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호(顥), 자는 사연(似淵), 대군의 증손으로 영신군(永新君) 이(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현부인(贈縣夫人) 죽산박씨로 판관 승손(承孫)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힘써 일찍이 <경서(經書)>에 통달하였다. 1517년(중종 12) 11월에 실시된 종친 시예(詩藝)에서 수석을 하여 술과 약 그리고 말 안장 등을 상으로 하사받았다. 또 나라에서 받드는 제사에 제관으로 차출되기도 하였고 혹 병이 나서 제향을 받들지 못할 경우에는 정원(政院)에 청하여 치료받는 특전을 받았다. 1530년(중종 15) 10월 정현왕후(貞顯王后 : 성종대왕의 계비) 장례에 수릉관(守陵官)으로 복무한 공으로 부수(副守)에서 종2품 정의대부 명원군이 되었다. 73세 때 별세하였다.
 중종대왕은 “명원군 호는 근본이 정직하고 일을 대할 때 몸을 사리지 않으며 옷차림이 검소하고 침착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술을 즐기고 집안 살림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일에 50년을 봉직하면서 청백하기가 한사(寒士)와 같다.”고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송천에 있다.
물거군(勿巨君) 1436∼146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철(徹), 대군의 손자로 보성군의 5남이다. 어머니는 청풍군부인 합천이씨로 광록시 소경 무창(茂昌)의 딸이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양성이씨 강실(剛實)의 외손녀이다. 배위는 재양현부인(載陽縣夫人) 남양홍씨로 강녕군(江寧君) 장간공(章簡公) 원주(元周)의 딸이며, 정정공(貞靖公) 파평윤씨 번(풃)의 외손녀이다.
 공은 처음에는 은산부령(銀山副令)에 제수되었다가 1460년(세조 6) 6월 24일 세조대왕의 아종(兒宗 : 궁궐에서 매일 두 사람씩 교대하여 입직(入直)하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2년 후인 1462년(세조 8) 은산령(銀山令)을 거쳐 다음 해 은산부정(銀山副正)으로 올랐다. 1464년(세조 10)에는 거제정(巨濟正)에 오르면서 풍양(豊壤)에서의 강무(講武)에서는 잡류장(雜類將) 겸 대장에 임명되어 연습을 지휘하였고 1465년(세조 11)에는 종2품 정의대부에 승자되면서 `물거윤(勿巨尹)\'으로 작호가 개정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세조대왕이 중궁을 대동하고 강원도 고성 탕정(湯井)과 상원사에 거둥할 때 치중장(輜重將)에 임명되어 수가(隨駕) 호종하는 등 세조대왕의 아종으로 궁중에 머물면서 경호업무를 담당하다가 1467년(세조 13) 2월 11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공은 처음 은산(銀山)이란 읍호(邑號)가 제수되었다가 거제(巨濟)로 개수되고 다시 물거(勿巨)로 고쳐졌다. 공이 술에 취하면 눈동자가 맑지 않게 되었는데 방언에 눈이 맑지 않은 것을 물거(勿巨)라 하기 때문에 세조대왕이 희롱하여 물거로 이름을 붙여서 `물거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진법에 밝고 장기와 바둑을 잘 두었으며 젊어서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을 도모하는 것에 능하여 세조대왕의 눈에 들어 급기야는 상정소의 책임자인 아종에 뽑히는 등 세조대왕의 사랑을 받게 되어 항상 궁중에 거처하였다. 공이 작고하자 세조대왕이 매우 슬퍼하며 공이 소생하기를 바라고 즉시 염빈(殮殯)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사관이 기록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용골) 해좌이다.
보성군(寶城君) 1416∼ ?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갑(). 대군의 3남으로 어머니는 예성부부인 해주정씨이고, 배위는 청풍군부인(淸風郡夫人) 합천이씨로 광록시(光祿寺) 소경(少卿) 무창(茂昌)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보성군에 봉해지고 1443년(세종 25) 숭덕대부에 승자되면서 보성윤(寶城尹)에 개수됐다. 1455년(세조 1) <경서대의>에 통달하여 종학 취학이 면제되고,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중 한 사람을 가자받는 특혜를 받았다. 1460년(세조 6) 세조대왕과 중궁이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행할 때 호종했으며 1463년(세조 9)에는 도진무(都鎭撫)가 되고 다음 해에 좌상대장(左廂大將)과 선전관을 역임했다. 1466년(세조 12) 센 활을 당기는 궁사 25명을 이끄는 해청위(海靑衛)가 되어 항상 세조대왕을 호종했으며 1467년(세조 13) 다시 보성군으로 환봉됐다. 1468년(세조 14) 좌상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얻어 한달만에 사임했고, 1489년(성종 20) 특별히 흥록대부에 가자됐다. 1497년(연산군 3) 보성군을 비롯한 83명의 노인에게 베푼 양로연 후 다시 가자되어 종친계의 최고위인 현록대부에 올랐다. 1503년(연산군 9) 노령의 보성군을 위로하기 위하여 손자 견손(堅孫)에게 대가(代加)하여 당상(堂上)을 제수받게 했다.
 보성군은 여덟 임금을 섬겼는데 특히 세조조에 도진무 · 해청위 · 선전관 및 좌상대장 등 금위와 비국(備局) 업무에 공헌했다. 별세한 연도는 미상이나 1503년(연산군 9)까지는 생존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종시 “시호와 예장을 받지 않겠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묘비에는 특명으로 `조선국 왕손 현록대부 보성군지묘(朝鮮國王孫顯祿大夫寶城君之墓)\'라고 새겨졌다. 묘소는 초장이 금천 박달골 오좌였으나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미좌로 옮겨졌다. 재실은 보청재(寶淸齋)이다.
서원군(瑞原君) 1413∼147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친(쐍), 자는 사인(士仁), 시호는 이안(夷安). 대군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예성부부인 해주정씨이다. 배위는 의령군부인(宜寧郡夫人) 경주이씨로 감사 희(?)의 딸이다.
 1427년(세종 9) 통정대부 원윤(元尹)에 봉해진 다음 1429년(세종 11) 가정대부 서원군에 봉군되면서 명나라에 가는 사은정사(謝恩正使)에 발탁되었다. 이 때 부사 대제학 이맹균(李孟畇)과 진헌사(進獻使) 상호군 윤수미(尹須彌)를 대동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명 황제의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와 세종대왕이 친행하는 단오별제에 참반했다. 1435년(세종 17) 정헌대부에 승자되고, 1444년(세종 26) 또 승자하여 숭덕대부 서원윤(瑞原尹)에 개수(改授)됐다. 1459년(세조 5) 가덕대부 서원경(瑞原卿)에 오르고, 1467년(세조 13) 서원군(瑞原君)에 환봉(還封)된 다음 8년 뒤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마음을 편안히 하여 고요함을 좋아한다는 안심호정(安心好靜)과, 다투기 싫어하고 화합함을 좋아한다는 호합부쟁(好合不爭)”이란 뜻의 `이안(夷安)\'이다. 묘소는 초장이 시흥군 동면 상도리 간좌였으나 후에 서울시 확장으로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 산 천마봉 갑좌에 이장됐다가, 다시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이곡리 오좌로 옮겨졌다. 재실은 효안재(孝安齋), 정자는 청온정(淸溫亭)이다.
안강도정(安康都正) 1430∼ ?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간(?), 대군의 7남이며 어머니는 평해손씨(平海孫氏)로서 낭장(郞將) 증 병조판서 유례(有禮)의 증손녀이고 군수 증 찬성 밀(密)의 손녀이며 인효(仁孝)의 딸이다.
 1444년(세종 26) 창선대부 안강정(安康正)에 제수된 후 1476년(성종 7) 3월 9일, 1478년(성종 9) 3월 19일, 1479년(성종 10)에 성종대왕이 효령대군 저택에 거둥하여 위로잔치를 베푼 자리에 입시하였다.
 1489년(성종 20) 12월 16일 문소전(文昭殿)에 입직할 때 수복노(守僕奴)끼리 싸우고 또 지의(地衣 : 제사때 쓰는 돗자리)를 태운 일을 계달(啓達 : 보고)치 않은 책임으로 직첩(職牒)이 회수되었으나 곧 환급(還級)되고 명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배위는 진주류씨(晋州柳氏)와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으며, 아들 습계군(習溪君) 효의(孝議)는 1493년(성종 24) 윤 5월 9일에 실시된 종친시예(宗親試藝)에서 차석을 차지하였고, 손자 종성령(鍾城令) 구(球)는 주기학파(主氣學派)의 선구자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주창한 그 학설을 계승하여 체계화 하였으며 증손 정랑(正郞) 해구(海龜)는 1559년(명종 14)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합격했다. 현손 완흥군(完興君) 원영(元榮)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에, 현손 전풍군(全豊君) 신(愼)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각각 녹훈되었다.
 묘는 실전되었고 1981년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광덕산 을좌에 설단하였다가 1989년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방성리 산192번지 을좌에 천단(遷壇)하였고 단비(壇碑) · 상석 · 석등 및 문인석이 있다.
영천군(永川君) 1422∼ ?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정(定), 자는 안지(安之), 시호는 호안(胡安). 대군의 5남으로 어머니는 예성부부인 해주정씨이고,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예천권씨로 직장 광(光)의 딸이다.
 1440년(세종 22) 정의대부 영천군에 봉해지고 4년 뒤 중의대부로 오르면서 영천윤(永川尹)으로 개수되었다. 그 후 1460년(세조 6) 영천경(永川卿)으로 개수되었다가 1468년(세조 14) 영천군으로 환봉됐다. 1484년(성종 15) 종1품 소덕대부에 오른 후 1489년에는 종친계의 최고위인 흥록대부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호탕하고 구애됨이 없으며 성품이 또한 순진하고 근엄하여 무슨 일이든지 곧게 행하였다. 시상이 참신하고 그림의 풍격이 또한 기이하며, 문인을 몹시 사랑하여 사귀는 사람이 모두 명경(名卿) · 거유(巨儒)였다. 별세한 연도는 미상이나 1497년(연산군 3) 1월까지 생존했다는 기록이 있다. 묘소는 초장이 삼초리 선산 국내 미좌였으나 서울시 확장으로 1970년 3월 5일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신흥리 왕림동 축좌로 옮겨졌다. 은진송씨 좌빈(佐彬)이 지은 비명의 신도비가 있다.
율원군(栗元君) 1432∼147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종(?), 자는 유안(幼安), 시호는 양경(襄頃). 대군의 손자로 보성군 갑()의 차남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말타고 활쏘기를 즐겨하여 종실의 촉망을 받아 품계가 높았다. 1460년(세조 6) 종친 중에 학식과 무예가 출중한 사람을 뽑아 진종(陳宗)과 사종(射宗)을 삼을 때 입선하고, 늘 무예를 연마하며 사열할 때는 대장으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평안도 지역에 자주 침범하여 백성들의 인명을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야인(野人) 무리를 무찌르라는 어명을 받고, 요충지인 방산진(方山鎭)에 나가 지략과 용력을 다하여 야인을 근절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1467년(세조 13) 5월에 장용대장 대호군이 되었다. 이 때 마침 이시애가 모반을 일으키자, 그 해 7월 임금은 경회루 아래에 모든 재상과 승지들을 불러 병사(兵事)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공에게 총통도장(銃筒都將)을 배명하였다. 공은 민발(閔發), 정종(鄭種), 우공(禹貢), 류흥무(柳興茂), 정준(鄭浚) 등을 부장으로 삼아 총통군 1,350명을 거느리고 출정, 도총사 구성군(龜城君) 준(浚)의 휘하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율원군(栗元君)에 봉해지고 함길도 병마수군 절도사가 되었으며 단서철권(丹書鐵券)이 내려졌다.
 1466년(세조 12) 12월 공이 임지에서 병을 얻었다는 주달(奏達)을 접한 임금은 매우 근심하고 내의(內醫) 차득참(車得쾇)을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1468년(세조 14) 병으로 소환되었다. 1476년(성종 7) 1월 18일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치제와 예장을 베풀고 `양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에 있다. 이수원(李壽源)이 찬한 신도비와 사당은 부조묘(不?廟)로 있다. 재실 이름은 충의재(忠義齋)이다.
의성군(誼城君) 1411∼149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채(寀), 자는 자홍(子弘), 시호는 호민(胡敏). 초휘는 용()이고 채(寀)은 세조대왕이 고쳐 내린 이름이다. 대군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 해주정씨(海州鄭氏)로 좌찬성 집현전 대제학 증 영의정부사 정도공(貞度公) 역(易)의 딸이다. 배위는 회인군부인(懷仁郡夫人) 성주이씨로 직장(直長) 차궁(次弓)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일곱살에 <소학(小學)>을 읽었다.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깨닫고 실천하였다. 세종대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책장에 있는 서책을 내려 궁중의 여러 왕자들과 더불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24년(세종 6) 10월 14세가 되면서 가정대부 의성군에 봉해지고, 1431년(세종 13)에 특별히 정헌대부에 올랐으며, 3년 뒤인 1434년(세종 16) 숭록대부에 올랐다. 그 때에 경주 집경전(集慶殿)이 준공되어 1443년(세종 25) 겨울에 어용봉안사(御容奉安使)에 임명되어 태조고황제의 수용을 집경전에 봉안했다. 1444년(세종 26) 소덕대부에 오르고 1450년(세종 32) 세종대왕이 승하하자 대전관(代奠官)이 되었으며 특별히 흥록대부에 제수되었다. 1454년(단종 2) 말 한 필이 하사되고 다음 해에는 <경서대의(經書大義)>에 통달하여 종학 취학(宗學 就學)이 면제되고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중 한 사람을 가자(加資)받는 특혜가 부여됐다. 1489년(성종 20) 특별히 종친의 최고품계인 현록대부에 가자되고 1493년(성종 24) 83세로 별세하였다. 작고하기 3년 전 시독관(侍讀官) 강겸(姜謙)은 공의 검소하고 청렴함을 “여러 종친과 부마들의 저택이 예전보다 매우 사치스러운데 의성군의 집은 본래 효령대군이 사시던 집으로 너무 협착합니다.”라고 성종대왕에게 여쭈었다고 한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 수천동에 있다.
장양도정(長陽都正) 1457∼149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주(?), 자는 자성(子成), 대군의 증손으로 무송군(茂松君) 전(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현부인(縣夫人) 여흥민씨로 정랑 추(퀎)의 딸이다.
 품성이 순수하고 청렴하고 겸손하며 몸가짐이 정중하고 매사에 독실할 뿐만 아니라 재덕이 출중하였다. 주계군과 교우하면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1469년(예종 1) 13세에 병직랑(秉直郞) 장양령(長陽令)에 제수되었고, 5년 뒤에 자신대부(資信大夫) 장양부정에 올랐다. 1484년(성종 15) 종학회강(宗學會講)에 입격하여 명선대부 장양도정으로 특별히 가자되었다. 종실의 촉망을 뒤로 한 채 41세에 세상을 떴다. 그를 매우 아끼던 주계군은 만시(輓詩)를 읊어 그의 요절을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