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중(敬中) 1542∼1548    파명:담양군(潭陽君)
  경중(敬中) [1542(중종 37)∼1548(선조 17)]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 1568년(선조 1) 사마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들어갔다. 1574년(선조 7)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는데, 이 때에 미암(眉岩) 류희춘(柳希春)은 부제학으로 있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직제학, 회계(懷溪) 오건(吳健)은 전한(典翰), 동강(東岡) 김우현(金宇顯)은 수찬(修撰), 홍적(洪迪)은 저작(著作)으로 있었으니 홍문관에 현인들이 다 모였다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1576년(선조 9)에 수찬을 지내고 이듬해에 교리(校理)로, 또 다음 해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병조좌랑 ·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때 리양(李樑)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주장하였고 또 삼윤(尹斗壽 · 尹根壽 · 尹睍)의 발령을 환수하라고 청하였다.
 1579년(선조 12)에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율곡이 상소를 올리자 삼사에서 논박이 대단하였다. 서애가 공을 보고 말하기를 “공은 삼사를 떠나 이조로 갔으니 젖은 옷을 벗은 것 같겠다.”고 하였다. 1581년(선조 14) 정여립이 이조좌랑으로 천거되자 공이 반대하자 사간원에서 마침내 공에게 죄를 주어 체직시켰다.
 1584년(선조 17) 교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응교로 옮겼고, 얼마 후에 집의(執義)로 있다가 사직하고 그 해 8월에 경상도 추쇄어사가 되었다. 그 때 공은 이미 신병을 얻었지만 명을 받고 민원(民怨)을 수습하고자 출발, 영남 밀양에서 별세하니 43세였다.
 그 해 파평으로 귀장하였는데 충문공 류서애가 공을 위해 제문을 지었다.

 “밝은 마음씨 어두울 수 없고 정성스런 충성은 속일 수 없으며 화기(和氣)한 정의는 흔들릴 수 없다. 공은 평생에 희롱과 아부가 없이 결백하여 벼슬이 높았어도 처자는 항상 빈고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논의가 정직하여 집권자들이 사사로운 뜻을 품었어도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다. 그대의 지기(知己)를 찾는다면 나 아니고 또 누가 있으랴. 그대의 착한 행실 찾으려면 좌우에 모두 마땅하였네. 돈독한 효우(孝友)는 붕우간에 믿음을 받았고 일을 당하면 심력을 다하여 비뚤게 남을 따르지 아니하니 실로 옛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던 바라, 그대는 모두를 갖추어 결함이 없다.”

 또한 공은 백씨인 파곡 성중, 계씨인 승지 양중과 함께 옥당에 들어갔으니 온 세상이 부러워하였다. 또 이소재(履素齋) 리중호와 더불어 김척암(金쾩菴)의 문하에 들어 류서애(柳西厓) · 우추연(禹秋淵) · 김동강(金東岡) 등과 도의(道義)의 친교를 맺었다. 또한 성암(省菴) 김효원(金孝元), 첨정(僉正) 조린(趙폸)과는 동갑이며 한 마을에 살아 서로 우정이 두터웠다. 당시 사람들이 그들에 관하여 말하기를 “리경중은 설월같이 빛나고 김효원은 백옥같이 티가 없으며, 조린은 봄바람처럼 얼음을 녹였다.”라고 하였다. 기축사화가 일어나서 정여립이 패사(敗死)하니 임금이 연신(筵臣)들에게 묻기를 “정여립의 흉모를 알아챈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사람 안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 그러자 류성룡이 대답하기를 “신의 망우(亡友) 중에 리경중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정여립을 등용하면 안된다고 말하였다가 도리어 배척을 받아 고생만 하다가 죽었나이다.”하였다. 임금이 “리경중을 배척한 사람은 누구인고?”라고 물었다. 류성룡이 대답하되 “세월이 오래 되어 신은 잊었습니다. 사관에게 물으시면 알 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사관을 통해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임을 알게 되고 즉석에서 이들의 관작을 삭탈하라 명하고 공에게는 특별히 이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평소에 삼정(三鄭)과 사귀지 못한다는 비평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그들을 용납치 못하였음이라, 그 때 정(鄭)이 보기 싫어 한쪽 눈은 감은 채 한눈만 뜨고 보았다는 말이 있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배천조씨는 충청도 병마우후(兵馬虞候) 언공(彦公)의 딸로 지성스러운 덕행이 있었다. 공이 별세하자 3년 동안 한결같이 초상 때와 같이 곡을 하였고 6년간이나 머리를 빗질하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이 지나서 벼슬을 추봉하고 제사를 지낼 때에야 비로소 머리 감고 재계를 올렸다 한다.
 두 아들의 교육은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 두 아들이 모두 행실을 닦고 이름을 세웠으니, 모두가 다 부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정부인 배천조씨는 1608년(선조 41) 12월 22일,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공과 동원(同原)에 부장하였다. 아들 유혼(幼渾)은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역임하였고, 유순(幼淳)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명웅(命雄) 1590∼1642    파명:담양군(潭陽君)
  명웅(命雄) [1590(선조 23)∼1642(인조 20)]
 자는 정이(挺而), 호는 송사(松沙). 1590년(선조 23) 10월 경성 남부 성명방(誠明坊) 옛집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공은 3세였는데 아버지 정민공(貞敏公)이 용만에서 순직하고 조부 파곡공이 함창현에서 순직하였다.
 15세 되던 해인 1604년 조정에서 정민공의 호성정훈을 책봉하고, 회맹(會盟)할 때 공이 적장(嫡長)으로 참연(參宴)하니 부집(父執) 및 제우(컺友)가 모두 슬퍼하고 귀히 여겼다. 1610년(광해군 2) 12월 21세 때에 부인 류씨(柳氏)를 맞이하였다. 1613년(광해군 5) 8월에 증광시에 급제하였는데 그 해 겨울에 옥사가 크게 일어 영창대군을 죽이고 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일이 생겼다. 이에 공은 탄식하고 “인도가 끊겼도다.”라고 하며 다시는 과거를 보려 하지 않았다.
 공은 3세 때 부친상을 당했고 본래 병이 잦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들은 공이 오래 살기만을 기원하고 공부하는 것은 원치 않았었다. 16세 때부터 비로소 독학하여 수년 내에 문사가 대단하였다. 1615년(광해군 7) 26세 때 할아버지 충간공과 아버지 정민공 묘에 수환(水患)이 있다 하여 모두 이장하였는데, 장지의 상거(相距)가 십여 리였지만 공이 왕래 주선하여 성례를 다하고 유감없이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중부(仲父)가 의흥에서 임기가 차서 할머니를 모시고 원주 관천(寬川)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 가을에 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가니 일가친척의 동거하는 사람이 40여 인이었다. 공은 일찍 부친을 여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조모와 모친을 섬길 때 항상 부족할까 걱정하였고 별다른 연고가 아니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가계가 빈한하여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지 못해 근심하더니 매일 손수 그물을 떠서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았다.
 그 뒤 벼슬이 높아지고, 고령임에도 양친을 섬기는 성의는 대단하였고, 숙부들을 섬길 때도 친자식에 못지 않아 조석 문안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1621년(광해군 13) 32세 7월에 조모 정경부인 조씨가 돌아가니 공이 적손으로 거상하였다. 1627년(인조 5) 4월에 예조좌랑 시강원 설서를 배수받고 7월에 병조좌랑, 8월에 정언에 올랐다.
 1628년(인조 6) 2월 조정에서 고성현령을 무인(武人)으로 임명하였는데 민폐가 심해짐에 따라 문관 중에서 덕망 높은 이를 선택해 보내려 하였는데 공이 선임되었다.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어머니를 비안(比安)에서 모셔왔다. 1629년(인조 7) 4월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그 해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실농할까 근심이 되어 공은 몸소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자 곧 단비가 내리니 백성들이 신태수라 칭송하였다.
 1635년(인조 13) 무장현감을 지내고 1637년(인조 15)에 예조참의에 올랐다. 50세 때인 1639년(인조 17) 정월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8월에 성주 · 대구 · 공산 등지를 편답, 새로 팔공산 서쪽 가산(架山)을 선택하였다. 산형이 준급하고 정상은 평탄하며 천수(泉水)와 수목이 많아 선산(善山)의 금오산성(金烏山城)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립하니 동래(東萊) 양로(兩路)의 요충으로서 지리가 모든 성중에 으뜸이었다. 그리하여 장계를 올려 축성을 청하였고 그 해 9월에 군병과 장정을 동원하여 성을 쌓기 시작하여 다음 해 4월 드디어 성이 완성되었다.
 1642년(인조 20) 병환이 위중해 지자 홍주(洪州) 관아에서 별세하니 향년 53세였다. 평남 관찰사 임당이 영루를 돌아보고 그 기이한 재주에 탄복하였으며 또 성 쌓은 계획을 올려 작위와 상을 추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여 공을 이조판서 완양군(完陽君)에 봉했다.
명필(命弼) 1601∼1627    파명:담양군(潭陽君)
  명필(命弼) [1601(선조 34)∼1627(인조 5)]
 담양군의 6대손이며 증 이조참판 경중의 손자이고 의금부도사 유순(幼淳)의 차남이다. 담양군 원손 엄(촑)이 무후해서 공이 입승(入承)하였다. 배위 광주노씨를 맞아 남매를 두었다. 노씨부인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살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호군(胡軍)이 강화도까지 쳐들어 오자 노씨는 젊은 여자의 몸으로 호군들에게 능욕을 당해 가문을 욕보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나뭇가지에 불을 당겨 그 꼭대기에 올라 앉았다. 자녀가 그 광경을 보고 어머니를 부르며 불더미 속으로 뛰어들어 세 사람 모두 분사했다. 조정에 이 이야기가 전해져 열효정려(烈孝旌閭)가 내렸다.
성중(誠中) 1539∼1593    파명:담양군(潭陽君)
  성중(誠中) [1539(중종 34)∼1593(선조 26)]
 자는 공저(公著)이며 호는 파곡(坡谷). 담양군의 현손이며 강양군의 증손이고 금천군의 아들이다.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의정부 좌찬성 완창군(完昌君)에 추증되고 또한 호성(扈聖)과 선무(宣武) 두 공훈으로 증 영의정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어릴 때부터 다정하고 중후하였고 재주가 비상하였으며 자라면서 배움에 힘썼다. 1558년(명종 13) 20세 때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3) 32세 때 정시(庭試)에 장원하고 같은 해 전시(殿試)에서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사국(史局)으로 추천되었다. 1571년(선조 4) 검열로 주서(注書)가 되고 1573년(선조 6) 계유년에 호조 · 예조 ·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 · 수찬에 올라 이조좌랑 지제교가 되었는데 여가를 얻어 호당(湖堂)에서 공부하니 사원(詞苑)에 명망이 높았다.
 1581년(선조 14)에 모친상을 당하고 1584년(선조 17)에 직제학으로 동부승지에 발탁, 우승지가 되었으며 대사간 부제학 · 이조참의 · 공조 참의 · 중추부 첨지를 지냈다. 1589년(선조 22) 이조참판이 되고 1590년(선조 23) 옥당(玉堂)의 장이 되어 도헌(都憲)을 역임하였으며 곧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연달아 홍문관 · 예문관의 제학을 지내니 사한에 명망이 더욱 높았다.
 1591년(선조 24) 세자책봉을 위해 새로 정승이 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좌의정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의논하여 세자를 세우기로 하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에게 연락하니 이산해 또한 그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뜻이 다른 데 있음을 알고 홍여순(洪汝淳) · 이홍로(李泓老) 등이 모의하여 공의 충직함을 지탄하고 궁중에 참소를 퍼뜨리니 임금은 의심하였다.
 임금과 입대할 때 송강이 발설하자 임금은 진노하여 대신들은 아무말도 못하였다. 그 때 공이 대사간 이약포 · 이해수(李海壽)와 함께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대신의 뜻만이 아니라 신 등이 같이 상의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대답치 않고 물러가자 또다시 동료들과 시폐(時弊)를 의론하고 세자 세우기를 건의하기로 결정하고서 다음 날 아침에 상소를 올리려 하였는데 그 날 밤에 갑자기 공을 충청감사로 보낸다는 특명이 내려졌다.
 이해수는 여주목사로 보내졌고 송강은 정승자리를 파직당하고 귀양가게 되니, 일시에 동지들이 모두 귀양가고 혹은 삭탈되어 이를 면한 사람이 없었다.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서 장계를 올려 공의 직위를 파면하라 하였고 사류(士類)에서는 정철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니 죄를 물어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불러 통어사를 맡기고 팔도 징병을 하라 하였다.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날 때가 되어도 군사들이 오지 않으니 공이 필마로 따라 평양 행재소로 갔고 선조대왕은 공에게 동지중추 예조참판을 배수하였다. 대가를 모시고 용만(龍灣)에 이르니 특별히 호조판서로 발탁되었다.
 1593년(선조 26) 중국의 명나라 병사가 평양의 왜적과 대적해 싸울 때에 조정에서 차관을 보급관으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것은 나의 직분이라 어찌 다른 동료에게 맡기리요.” 하고 몸소 가기를 청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행군하였는데 삼경(三京)을 수복하고 영남으로 내려가니 그 때는 국내가 적병에 짓밟힌 뒤라 공사가 탕잔하고 초토의 잿더미 뿐이었다. 그러나 이여송의 병마는 8만이 넘는지라 공이 극력 주선하고 다방면으로 접촉하여 민중의 충의를 선동, 부상한 병졸과 주린 백성들이었지만 모두가 협조하여 대군이 한번도 보급 부족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두 해 동안을 서에서 남으로 수천 리를 산행 노숙하며 마음으로 설계하고 입으로 호흡하여 정력을 다하더니 1593년(선조 26) 7월 7일에 함창현에서 순직하였다. 그 때의 춘추 55세였다. 10여 일 전에 공의 장남 완흥군(完興君)이 용만 임소에서 순국하였으나 공은 미리 알지 못하였다. 10월에 파주 파평산 선영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그 후 12년 뒤인 1604년(선조 37) 아들 완흥군이 호성(扈聖)한 공훈으로 증 순충적덕보조공신 의정부 좌찬성 완창군으로 봉해졌고 또한 공의 호성과 선무 양종훈으로 증직, 영의정 완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중(時中) 1553∼1631    파명:담양군(潭陽君)
  시중(時中) [1553(명종 8)∼1631(인조 9)]
 초휘는 집중(執中), 자는 공윤(公允). 어렸을 적에 종형인 판서 성중 형제와 함께 아버지 혼계에게 수학하였는데 여러 제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예를 아는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10세 때 이웃집의 상사(喪事)를 처리하였는데 한결같이 고의(古儀)를 준용(遵用)하여 절차와 제도를 지켰다.
 선조대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전시(殿試) 때 본관 주소를 잘못 기록한 이유로 낙방하고 그 뒤로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전연사(典涓司) 별검(別檢)에 제수되었다. 임금이 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을 접견할 때, 집사로 입시(入侍)하였는데 공의 풍채가 옥과 같으니 중국 사신이 기이하게 여겨 임금에게 공을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공에게 중국 사신과 서로 접촉해 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났었는데 중국 사신이 공의 초서와 예서를 보고는 여러 벌을 써 달라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서는 보물이라 칭하고서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성부 참군으로 어가를 호종하여 서쪽으로 간 공덕으로 호조좌랑에올랐고 얼마되지 않아 화순현감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흉년이 들자 공은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구제하여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의복이나 안장 · 말까지 모두 나누어 주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감읍하였다. 익위사(翊衛司) 위수(衛率)를 거쳐 공조좌랑으로 전근되었고 함열현감으로 나아갔다가 들어와서는 사복시(司僕寺)와 익위사의 일을 도왔다. 그리고 다시 가평 · 진산군수로 나아갔다가 1626년(인조 4) 한성부 서윤에 임명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이 후에는 충주 숭선장(崇善莊)에 우거하였는데 1631년(인조 9) 정월, 향년 79세로 별세하였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파평산 진좌태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1631년(인조 9) 좌승지에 추증되었는데 원종공신의 예를 따른 것이다. 또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아들 유수(幼洙)가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책훈되었기 때문에 은혜가 공에게 미친 것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온양정씨로 판관 대림(大霖)의 딸이다. 어질고 지혜로워 부녀자의 법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공이 진산군수로 있을 때 공보다 앞서 진산군 내위(內衛)에서 향년 62세로 별세하였다. 공과 같은 언덕에 부장하였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렴(幼濂)은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고 차남은 유락(幼洛)이고, 3남 유수(幼洙)는 공조좌랑을 지냈고 4남 유사(幼泗)는 삭녕군수를 지냈다. 장녀는 전부(典簿) 증 좌찬성 오사겸(吳士謙)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감찰 송석몽(宋錫夢)에게 출가하였다.
유수(幼洙) 1591∼1656    파명:담양군(潭陽君)
  유수(幼洙) [1591(선조 24)∼1656(효종 7)]
 자는 수원(洙源), 호는 오주(梧洲). 강양군 숙(潚)의 현손이며 희안군 집(輯)의 증손이다. 조부는 순천군 관(琯)인데 학문을 좋아하고 어진 덕이 있었다.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시중(時中)이다. 일찍이 과거에 올랐으나 사당(邪黨)과 의견대립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가정의 학통을 이어 경술(經術)로 이름이 났다.
 공은 1591년(선조 24) 4월에 한양 남부 주자동(鑄字洞)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으며 버릇없이 희롱하는 일은 하지 않았고 자라서는 학문에 뜻이 있어 송목옹(宋木翁) 선생에게 수학, 허미수(許眉첤)와 동문의 벗이 되었고 또 권석당(權石塘) · 정약원(鄭藥횁)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목옹 · 석당 · 약원 모두 혼계의 뛰어난 제자들이었으며 대개 가학에 연원을 두어 선인의 뜻을 계술(繼述)하는데 뜻을 두었다. 날마다 새벽이면 반드시 일어나서 단정히 앉아 <근사록(近思錄)><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읽었다.
 부친이 가평군수로 나아가자 공도 따라가서 아침 저녁으로 어버이를 보살폈다. 그밖에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써서 매일 두 자루의 초를 태우면서 밤을 새웠다. 1613년(광해군 5)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애통해 하는 심정으로 의식 절차를 지극히 하였다.
 공은 광해군 때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행실을 닦았다. 그 후 1624년(인조 2)에 이르러 비로소 성균관에 들어가서 아우 서흥공(瑞興公)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듬해 소현세자가 입학할 때에는 공이 성균관 장의(掌議)에서 집책(執冊)으로 선발되어 특별히 <중용(中庸)>을 하사받았다. 1631년(인조 9) 부친이 별세하자 공은 모친상 때와 똑같이 거상(居喪)하여 3년 동안 여차(廬次)를 떠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수춘(壽春 : 지금의 춘천)에 우거할 때였다.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공은 장차 난리가 심해질 것으로 짐작하고 시골로 들어가 농사짓고 저축하며 난리에 대비하였다. 그 해 겨울에 과연 청나라가 쳐들어오니 사람들은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이듬해,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와서 우수강(牛首江)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학행에 정진하였다. 1646년(인조 24) 사재감(司宰監) 직장(直長)을 제수받고, 1648년(인조 26) 사도시 주부에 올랐으며 이내 공조좌랑으로 옮겨졌고 겨울에는 정읍현감을 제수받았다. 정읍에 부임하여서는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교화를 밝히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사민(士民)들이 서로 경하하였다.
 이 때는 난리를 겪고 난 뒤여서 백성들이 궁핍해 있는 터였지만 대국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경비의 수요가 매우 많아 응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공은 내수청(內需廳)을 창설하여 마음을 다해 관리하고 재정을 마련하였으며 자신의 녹봉을 내어 장리를 놓아 경비에 충당하였다.
 암행어사 이재(李梓)는 공이 백성을 사랑하는 데 전심하여 치적이 드러난 것을 보고 그를 포장할 것을 상주하였고, 암행어사 민정중(閔鼎重)은 공이 청나라 사신을 여러 번 영접했으나 백성들에게서 추호도 거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포장할 것을 상주하였다. 감사 심택(沈澤)은 공의 치적이 도내에서 으뜸이라는 것으로 포장할 것을 상주하였고, 병사(兵使) 이원로(李元老) · 구인기(具仁?)는 새로 만든 병기가 가장 정밀하다는 것으로 포장할 것을 상주하였는데, 임금은 그 때마다 구마(廐馬)와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1653년(효종 4) 임기가 만료되자 유생 류재신(柳再新) 등이 상소하여 공을 유임시켜주기를 청하였다.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가 마침 그 때 사명을 받들고 무주에 왔다가 그것을 듣고 돌아가 공의 치적이 제일이라는 것을 아뢰었다. 효종대왕이 그를 가상하게 여겨 1년 동안 더 유임하도록 명하고 상을 내려 포장하였다. 1654년(효종 5)에 돌아왔는데 그 고을에 청덕인정비(淸德仁政碑)가 세워졌다. 1655년(효종 6)에는 창평현감을 제수받고는 오로지 덕화를 숭상하여 학교를 크게 열고 스승을 초빙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여러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

난리들지 않은 창평 고을에
(荊蒿不入是昌平)
만고유풍 남아 있어 글 읽는 소리 나네.
(萬古遺風絃誦聲)
둥근 갓 쓴 70인 모두 후학들이고
(七十圓冠皆後學)
방령입은 3천인 다 제생들일세.
(三千方領摠諸生)
포수의 연회 베풀지 못했으니 감히 바라랴
(自콻鮑守射筵設)
문옹의 유화 이루기를 감히 바라노라.
(敢望文翁儒他成)
빛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寄語斐然吾黨子)
부지런히 삭비의 정성 부디 다하소.
(孜孜須盡數飛誠)

 이 시를 통해 공이 인재 육성을 즐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656년(효종 7) 정월, 향년 66세로 창평 관아에서 별세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비통해 하였다. 발인하는 날에는 남녀노소가 길을 가득 메우고 슬퍼하였으며 직지사(直指使) 민희(閔熙)도 와서 조상하였다. 본도 감사 조계원(趙啓遠)과 충청감사 권우(權췖)도 부의로 물품을 보내왔으며 여러 고을 수령들도 모두 조상하여 치전하였다. 그 해 가을에 파주선영인 파평산 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당시의 유명한 공경(公卿)과 어진 사우(師友)들, 생전에 공과 알고 지내던 사람 등 모두가 제문을 지어 가지고 와서 곡을 하였고 만사(輓詞)를 지어 가지고 와서 슬퍼하면서 상여줄을 잡았다. 또한 뒤따라 회장(會葬)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영국원종공신으로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행동이 겸손하여 평소에 태만한 기색이 없었다. 또 현자를 좋아하고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하였으며 일가간에는 돈독하고 화목하였다. 자제들에게는 근본에 힘쓰고 학문에 노력할 것을 가르쳤고, 엄격하되 은혜로움으로 집안의 사람들을 다스렸으며 온화하고 대범함으로 남들을 대하였다. 후진 교육은 반드시 몸소 실천해서 마음으로 체득한 바를 근본으로 삼아 교육했기 때문에 성취를 이룬 사람이 매우 많았다. 구사(龜沙) 오정일(吳挺一) ·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 · 쌍오(雙梧) 민묵(閔默) 등이 모두 공에게 수학해서 일대의 명사가 된 사람들이다. 관직을 수행하고 법을 행사할 때에는 반드시 청백으로 자신을 지키니 가는 곳마다 청고(淸高)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현감으로 있을 때 심잠(心箴) 및 사물잠(四勿箴) · 경재잠(警齋箴)을 손수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스스로를 경계하였는데 뒤에 그 고을 선비들이 그 글씨를 판각해 인쇄해서 반포하고는 드디어 판본을 본가로 보내왔다. 공은 필법이 힘차고 시격(詩格)이 청신(淸新)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배위 증 숙인 선산김씨는 병조정랑 증 승정원 도승지 경직(敬直)의 딸이다. 부녀자로서의 의범(儀範)이 순정(順正)하고 길쌈에 부지런하였으며, 효제에 힘쓰도록 자제들을 가르쳤고 인자하고 은혜스러워 집안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공보다 두 살 위이고 공보다 2년 뒤에 별세하였으며 공의 묘 곁에 쌍분(雙墳)으로 장사지냈다. 4남 1녀를 두니 아들은 명룡(命龍) · 명호(命虎) · 명구(命龜) · 명린(命麟)이고 딸은 우진서(禹震瑞)에게 출가했다.
유징(幼澄) 1562∼1593    파명:담양군(潭陽君)
  유징(幼澄) [1562(명종 17)∼1593(선조 26)]
 자는 징원(澄源), 증 금천군의 손자이며 부친은 호조판서 증 영의정 성중의 아들이다. 모친은 정경부인 평양조씨로 의빈부 경력 수(琇)의 딸이다.
 공은 1562년(명종 17) 10월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지성이 있어 효와 우애가 깊었다. 또한 자세가 올바르고 행동에 조심하였으며 의복이 단정하였다. 아침 저녁 문안 뒤에는 종일토록 단좌하여 독서에 힘쓰고 용모와 태도가 의중하며 처사가 민첩했으니 일대에 현사 · 대부들이 사귀기를 원하였다. 1583년(선조 16) 알성병과(謁聖丙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선임되고 다음 해에 한림으로 추천되었다. 1584년(선조 17) 봄에 하지(夏至)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사축(司畜)에 올랐다.
 다시 병조좌랑 겸 지제교로 전임, 다음 해에 정언이 되었고 1591년(선조 24) 봄에 지평(持平)으로 옮겨 여름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3월에 교리가 되었고 북변순무사(北邊巡撫使)의 명을 받았다.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서경으로 행차하니 공이 급히 돌아와 사현(沙峴)에서 알현하고 임금을 따라 서경에 도착하였다. 그 해 5월에 병조정랑이 되었고 이어서 응교 겸 경연(經筵) 시강편수관(侍講編修官)으로 있었다.
 선조대왕이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모든 것이 미비한 때라, 공이 항상 좌우에 시립하며 급할 때에 매사를 대신하였다. 임금은 공의 그 현명함을 알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하였다. 또한 공을 `리사간\'이라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 때 적군이 평양에 다가와 어가(御駕)가 또다시 의주(義州)로 가려할 때 백성들이 대가(大駕)를 에워싸고 심하게 소란을 피웠다. 그 때 공이 “이 지방 관장은 마땅히 그 죄를 받을지어다.”라고 하며 그 죄를 헤아려 군문(軍門)에서 참수하고 소란의 주동자 몇을 벤 뒤에 거가(車駕)가 나갈 수 있었다. 난이 처음 발발했을 때에 공은 어머니에게 결별하고 그 아우들에게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행(西幸)이 급하니 어가보다 먼저 가서 생명만 보존하는 것은 충의가 아니요, 대가보다 너무 늦어서 죽기만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니 조심하고 힘쓰도록 하라.” 그 뒤에 소식이 끊어져 생사조차 알 길이 없어 상소를 올려 찾아보기를 원하였으나 “충과 효는 두 가지 다 온전할 수 없다.”며 불허하였다. 그러던 중 여러 아우 유청(幼淸) · 유돌(幼퍝) · 유침(幼?)이 어머니를 모시고 용만에 이르렀다. 임금이 듣고 심히 반기며 사람을 시켜 충효전문(忠孝全門)이라 정표(旌表)를 내렸으니 듣는 이마다 감탄하였다.
 2월에 임금이 돌아오다가 영유(永柔)에 주둔하고 용만의 일을 모두 공에게 맡겼다. 그 때 중국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오래도록 서관에 머물면서 진군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또한 임금의 환도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그 실정을 알고 특별히 어사를 보내 살피게 하였는데 공이 국경에 나가 영접하고 위로하였다. 그러자 어사가 “삼경을 수복한 뒤에도 국왕은 어찌 환도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소국이 중국의 협조를 얻어 사직이 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임금님은 서울에 돌아가서 불타버린 종묘에 곡하고 죽은 이를 조문하며 외로운 유족들을 위문할 생각만을 밤낮으로 하고 있을 뿐이요 다른 소원은 없나이다. 그러나 경략(經略)의 군기가 엄중하여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어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하되 “황상이 본래 이면에 깊이 들어가서 실정을 살피라 하였으나 공의 말로 실정을 잘 알았소. 내가 이 길로 돌아가서 보고할 터이니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 대부들이 다 현명하시니 무엇을 근심하리요.” 라고 칭찬하며 돌아갔다.
 3월에 본주목사 병마절제사를 제수받았다. 공이 부로(父老)들과 조약을 정하여 한집에 장정이 세명이면 한 사람만 병력에 복무하고 나머지는 가사에 종사하도록 하니 민중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금이 공을 장성(長城)처럼 신임하였으나 공이 너무 지쳐 병이 나서 5월 그믐날 세상을 떠났다. 춘추 32세라, 백성들은 통곡하며 자모를 잃은 듯 슬퍼하고 중국인도 소복으로 조문하며 부의와 치전을 드렸다.
 임금은 부음을 듣고 애도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좋은 인재를 내어주시어 내 몸을 보필할까 하였더니 여러 경들의 잘못으로 내 곁에 두지 못하고 하늘이 좋은 보좌를 빼앗아갔도다. 끝까지 그 집을 도와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한 한달쯤 지난 뒤 의정공(議政公) 파곡이 명나라 병사를 따라 영남으로 가서 군량 보급을 조달하다가 함창 고을에서 과로로 순직하였다. 부자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하였으니 듣는 이마다 슬퍼하였고 임금은 특별히 공의 집안을 위로하였다.
 10년 후인 1604년(선조 37)에 호성훈을 책봉할 때 공을 충근정량효절협책(忠勤貞亮效節協策) 호성공신 이조판서 완흥군(完興君)에 봉하고 관헌을 보내 치제를 내렸다. 장례는 파주 파평산 금곡에 모셨다.
 배위는 정부인 양주조씨로 예문관 검열 확(擴)의 딸이고 정간공(貞簡公) 언수(彦秀)의 손녀이다. 1644년(인조 22)에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헌경(獻慶) 1719∼1791    파명:담양군(潭陽君)
  헌경(獻慶) [1719(숙종45)∼1791(정조 15)]
 초휘는 성경(星慶), 자는 몽서(夢瑞), 호는 간옹(艮翁). 파곡공(坡谷公) 성중(誠中)의 후손으로 제화(齊華)의 아들이다. 재주가 뛰어나 6, 7세에 벌써 문장을 이루었다. 1743년(영조 19) 진사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51년(영조 27) 정언이 되었고, 그 뒤 사서 · 지평을 지냈으며, 1763년(영조 39)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곧 사헌부 집의에 올랐다. 1766년(영조 42)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교리로 옮겼으며,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다. 1777년(정조 1) 동부승지에 발탁된 뒤 참찬관 등을 거쳐 1784년(정조 8)에 대사간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 연로함을 이유로 은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1790년 한성부 판윤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간옹집(艮翁集)> 2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