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파 약사

담양군


세종대왕의 10남으로 신빈(愼嬪) 김씨 소생이다. 공의 휘는 거(王+渠)이고 시호는 이애(夷哀)이며 초시(初諡)는 회간(懷簡)이다. 1450년(세종 32)에 세종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 공이 몸부림치며 애통해 함이 성인에 못지 않더니 너무 슬퍼해서 몸을 상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종대왕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장지(葬地)를 명하여 내려주었고 세조 때에는 형인 계양군(桂陽君)의 차남 강양군(江陽君)으로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파평산(坡平山) 서쪽 기슭 을좌이다. 비갈이 있고 전면에 부조묘(不祧廟)가 있으며 태봉(胎封)은 경북 성주 선석산(禪石山)에 있다. 공의 계자인 강양군의 휘는 숙(潚)이며 초휘는 융(瀜)이고 시호는 양도(良悼)이며 호는 쌍송(雙松)이다. 세조 때에 특별히 금헌(琴軒)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초수는 정(正)이었으며 흥록대부이다.

강양군의 휘는 숙(潚)이며 세종대왕의 손자이다. 생부 계양군은 세종대왕의 아들이며 세조대왕의 아우이다. 담양군이 일찍 세상을 떠나니 세조대왕이 계양군의 차남인 공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였다. 3세 때 명선대부를 제수받고 네 임금을 섬기는 동안 열성들의 총애가 깊어 흥록대부로 품계가 1품에 이르렀다. 1499년(연산군 5) 11월 계미일에 별세하니 향년 47세였다.

장남은 영평정(鈴平正) 보(輔)이며 가선대부이다. 차남은 희안군(喜安君) 집(輯)으로 초수는 창선대부였으나 현록대부로 증직되었다. 3남은 예안군(禮安君) 헌(軒)이요 호는 월정(月汀)이며 정의대부이다. 또 한분의 배위께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양평부수(陽平副守) 굉(車+弘)이고 차남은 함창부수(咸昌副守) 함(車+監)이다. 공의 자손 중 문무과에 등제(登第)하고 혹은 음관(蔭官)으로 절의성명(節義性命)을 바친 자손은 다음과 같다.

공의 4세손 순천군(順川君) 관(琯)은 호가 혼계(渾溪)이며 초수는 창선대부 정(正)이었다. 종반공자(宗班公子)로 충효정려를 받았으며 그의 행적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올라 있고 문집이 있다.

5세손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 성중(誠中)은 호가 파곡(坡谷)이며 임진왜란 때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호성선무원종1등공신(扈聖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 영의정 완창부원군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문집을 남겼다. 또한 5세손인 경중(敬中)은 파곡의 동생으로 호가 단애(丹崖)이다. 퇴계의 문하이며 증 이조참판 추쇄어사(推刷御史)에 올랐다. 시중(時中)은 초휘가 집중(執中)이며 한성부 서윤(庶尹)을 지냈고 호성원종1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증 이조참판이다. 지각(智覺)은 절충장군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6세손 유징(幼澄)은 갑진년에 2등에 책훈(策勳)되어 철권(鐵卷)을 받았고 증 호성공신 이조판서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유수(幼洙)는 호가 오주(梧洲)이며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증 이조참판이며 그 아우 유사(幼泗)는 호가 사빈(泗濱)이며 호종공신이다.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고 효종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7세손 명필(命弼)의 배위 광주노씨는 병자호란에 강도(江都)로 피난하여 정축년에 그 자녀와 더불어 함께 분사(焚死)하였고 임금이 특별히 정려효문을 내렸다. 7세손 명웅(命雄)의 호는 송사(松沙)이고 병자년에 응교(應敎)로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보덕(輔德)으로 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이어 이조참의 · 대사간 · 부제학 · 경상감사를 역임하였다. 경상감사 증 이조판서 완양군(完陽君)이며 문집이 있다.

11세손 헌경(獻慶)의 호는 간옹(艮翁)인데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동국문장(東國文章)'이라 불렸으며 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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