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공량(公樑) 1519∼1580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자는 국간(國幹). 대군의 6대손이며 완남군의 5대손이다.
 1558년(명종 13) 통훈대부 행 흥덕현감(興德縣監)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양양에 귀향하여 지금의 완남군 종가터를 좌정한 바로 흥덕댁(興德宅)의 주인이다.
 묘소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수여리 박고마에 있다.
기백(基白) 1856∼190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자는 사유(司維), 호는 지은당(芝隱堂), 일명 사유(士有) · 안사유(安士有) · 지백(之白).
 대군의 18대손으로 전남 장성군 삼계면 좌초리에서 출생하였다.
 좌초리 서재에서 한문과 병서를 이수하고 그 서재의 주석(柱石)으로 훈육에 힘쓰다가 1881년 기우만(奇宇萬) 등과 위정척사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왜적과 항전하다가 조정에서 온 신기선(申箕善)의 권유로 항전을 중지하고 후진양성에 몰두하던 중 1898년 족질(族姪)인 화삼(化三)을 도와 탐학이 극심한 흥덕군수 박용현(朴鏞炫)을 축출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니 봉기하여 화삼과 학당출신 제자들과 함께 250여 명이 대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공을 맹주(盟主)로 하고 화삼을 총대장으로 하여 장성전투 · 발산전투 · 고성산전투 · 만화동전투 · 반월전투 등에서 큰 전공을 세우다가 마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를 보내와 능주 쌍봉사에서 합류하였다. 최익현을 맹주로 하고 이백래(李白來) · 양회일(梁會一) · 백홍인(白弘寅) · 심남일(沈南一) · 임창모(林昌模) · 전해산(全海山) 등 50여 의병장과 함께 능주 · 화순 · 동복을 완전히 탈환하고, 1907년 4월 24일 광주 탈환차 진군 중 광주와 동복 사이에서 왜군 복병대에 의하여 피습, 패전당하고 6명의 의장(義將)이 붙잡혀 유배되었다. 이 때 20여 명이 부상당하고 1명은 순국하여 대전이 불가하게 되자 유격전을 목적으로 6로군의 관하인 장성 · 영광 · 흥덕 · 담양을 책임지고 돌아와 격문을 포고하고 의병진을 재정비하였다.
 이어 의병부대를 정렬한 뒤 고종태황제에게 북방 사배를 올리고 충의를 맹세하였으며 구국 충정을 기원한 후 1907년 2월 삼북지서 습격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100여 회 계속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고산전투에서 많은 장수와 함께 순국하였다.
성(?) 1594∼1653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성(?) [1594(선조 27)∼1653(효종 4)]
 자는 화봉(華封), 호는 매헌(梅軒). 대군의 9대손으로 의병장 응종의 손자이며 왕자의 사부 극부(克扶)의 3남이다.
 아버지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았고, 18세 때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1635년(인조 13) 증광시에 갑과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교예(敎隸)에 임명되고 1637년(인조 15)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1639년(인조 17)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 · 함경도 도사, 1645년(인조 17) 병조 · 형조의 좌랑 정랑, 1647년(인조 25) 울진현령을 역임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동차하정사(冬差賀正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 홍문관 교리 · 이조정랑, 1649년(인조 27) 청도 군수 · 통례원 좌통례를 지냈다.
 특히 청도군수 재직시 청백한 생활과 선정으로 칭송이 높았다.
 그 뒤 여러번 출사를 요청받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독서와 시를 즐기며 지냈다. 병조판서 원경하가 지은 비갈이 있다.
 저서에 <매헌유고(梅軒遺稿)>가 있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노봉산에 있다.
손(蓀) 1465∼150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시호는 정간(靖簡). 대군의 5대손이며 월평군의 손자이다.
 1506년(중종 1)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통정대부 동부승지 찬성사에 오르고 한성군(漢城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담양 용천동면 장자동에 있다
승복(承福) 1425∼1495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자는 백순(百順), 호는 일재(逸齋). 대군의 현손이며 완남군의 증손이다.
 1470년(성종 1) 문과 별시 을과에 등과하여, 통훈대부 행 사간원 정언 · 홍문관 교리 · 이천현감 · 전라도 도사(都事) · 강릉진 병마절제사(江陵鎭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으며, 특히 아버지 세문(世門)의 삼척유배를 상소하여 특별히 용서받아 양양에 양이(量移)케 하여 완남군 자손의 5백년 터전을 잡게 한 공로를 자손들은 칭송하고 있다.
 묘소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학포리에 있다.
승조(承祚) 1419∼1492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대군의 현손이며 완남군의 증손이다.
 어렸을 때부터 무예에 출중하여 성종대왕 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경상도좌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묘소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수여리 시수현에 있다.
용익(容翊) 1854∼190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자는 공필(公弼), 호는 석현(石峴), 시호는 충숙(忠肅). 대군의 16대손이며 진사 · 참봉 · 고산현감을 지낸 병효(秉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강릉유씨(江陵劉氏) 시권(時權)의 딸이다. 병효의 차남으로 함북 명천군 상가면 석현동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억력이 비범하여 `마천령산맥의 영봉인 상응봉(1,103m)고지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신동\'이라고 불렸다.
 공이 훗날 벼슬길로 나아간 뒤 상응봉에서 번개만 치면 공의 벼슬이 하나씩 올라간 것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이곳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공의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공은 지방관으로부터 국가 최고 지위에 이르기까지 49종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 단천부사 · 북청남병사 · 강계부사 · 함흥부 관찰사 겸 갑산부 관찰사 · 서북도 각 군 금광감리 · 평안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면서 지방민으로부터 덕망있는 관리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공의 업적과 능력은 국왕의 신임을 얻어 마침내 중앙 진출의 계기가 되어 중추원 일 등 의관 전환국장 · 각 도 금은동철 탄광 감독 · 궁내부 소관 각 도 참정 각광 감독 · 서북 철도국 총재 · 시위 제일연대장 · 중앙은행 부총재 · 육군부장 겸 헌병사령관 · 원수부 군무국장 · 회계국총장 · 내장원경 · 탁지부 대신 ·군부대신 등의 최고직까지 맡았다.
 그는 또 선각자로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청소년에게 신학문과 주체성을 교육시키기 위해 보성중고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기도 했다.
 시류에 따라 일본 세력이 고개를 들었을 때 정계에서는 그를 탄핵하였지만, 그는 고종태황제의 비호를 받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것은 열강의 승인을 받아 영세중립국을 세워보자는 계획으로 고종태황제의 칙명을 받고 이루어진 것이다. 공의 영세중립국 운동은 곧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데 있었다. 1907년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받고 1968년 대한민국정부는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윤성(潤聖) 1765∼1831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윤성(潤聖) [1765(영조 41)∼1831(순조 31)]
 자는 맹희(孟希), 호는 칠우(七迂). 대군의 16대손이자 완산부원군의 15대손이며 진사 이집(以鏶)의 아들이다.
 영특한 자질과 인품으로 기정진(奇正鎭) 등 당대 유현(儒賢)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중년에 장성 동쪽에 정사를 짓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의 학행이 인정되어 1822년(순조 22)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는 `박학역행인 숙유(博學力行人 宿儒)\'라 칭하며 조정에 천거한 바 있다. 1827년(순조 27) 뒤늦게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 · 감찰 · 지평을 역임하고, 1829년(순조 29) 정3품으로서 태천군수로 부임하여 오교(五敎)를 선양하고 흥학(興學)한 공적이 뛰어나 관찰사 김학순(金學淳)에 의하여 조정에 포계(褒啓)되었다. 또한 청백과 애민(愛民)으로 백성을 다스려 1831년 공이 별세하자 이민(吏民)이 그를 애모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평소 이기설과 주역을 깊이 연구하였고 홍석주(洪奭周) · 김조순(金祖淳) · 조인영(趙寅永)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성리학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한 것이 문집 및 100여 통의 간찰에 나타나 있다.
 문집으로 <칠우집(七迂集)>이 있고, 유물로 명사와 교유한 간찰이 있으며, 묘소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 물외동에 있다.
윤수(潤壽) 1802∼1871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자는 치오(致五), 호는 오소(吾巢). 대군의 16대손이자 완산부원군의 15대손이며, 이탁(以鐸)의 아들이다.
 1865년(고종 2)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지로 재직 중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이 `호남 제1재상\'이라고 칭송을 내린 바 있다.
 1868년(고종 5) 가선대부 종정원경 형조참판과 경연특진관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동면 상우리 산8번지에 있다.
응종(應鍾) 1522∼1605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응종(應鍾) [1522(중종 17)∼1605(선조 38)]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매당(四梅堂). 대군의 8대손이며 완산부원군의 7대 종손이다.
 귤정(橘亭) 윤구(尹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58년(명종 13) 생원으로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붕당의 조짐을 보고 귀향하였다. 예학(禮學)을 연구하여 <가례부주(家禮附註)>를 저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71세의 고령으로 장성(長城) 남문(南門) 창의(倡義)에 동생 홍종(洪鍾)과 아들 극부(克扶) · 극양(克揚)을 데리고 수창(首倡)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호남 의병 3천여 명을 출전시키며 수천 섬의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조달하여 광주 의진(義陣)과 의주(義州) 행재소에 보내는 데 진력하였다. 한편 그 때 영광군수 남궁현(南宮俔)이 상을 당해 공석 중이라 정희맹 등 48인이 오성관(춐城館)에 모여 공을 영광성 수성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영양리 당산에 있다.
 오산 창의사, 양도공 사우에 배향되고 공적비로 오산사 격문비, 영광수성비, 독립기념관에 창의 격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