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종열(宗烈) 1739∼181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자는 영숙(永叔), 호는 소헌(疏軒). 대군의 14대손으로 설(楔)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 문과에 급제하여 1786년(정조 10) 이조좌랑으로 시작하여 1802년(순조 2) 사헌부 지평 · 이조정랑, 1814년(순조 14)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전남 영광군 군남면 육왕사(六旺祠)에 모셔졌다.
 유물로 영정이 있고 묘소는 영광군 군남면 창덕리 율곡에 있다.
준(儁) 1859∼1907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준(儁) [1859(철종 10)∼1907(광무 11)]
 호는 일성(一醒). 대군의 17대손이며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성격이 강직 · 호협하여 뜻한 목표는 반드시 관철시키는 인물로 12세 때 고을 유림 선발고시에 급제했다. 공은 17세에 상경하여 그 비범한 활동으로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많은 지사들과 마음을 합쳐 민족재생의 길을 열고자 했다. 일제의 무도한 탄압과 포악한 총검 앞에서 오직 불굴의 순국정신으로 주권회복에 목숨을 다한 열사의 정신이야말로 국가 정의의 표본이었고 민족정기의 사표가 되었다.
 그는 독립협회를 비롯하여 대한보안회 · 국민교육회 · 대한협동회 · 공진회 · 헌정연구회 · 한북흥학회 및 서북흥학회 · 국채보상연합회 등 구국단체를 조직하여 영도하는 한편, 평리원 검사로 당대의 망국 사대부들을 질책하여 법도를 쇄신하였다.
 1904년 황무지대부사건을 환원시킴과 동시에 나라의 전도를 그르치는 무리들의 전감으로 삼게 하였던 일, 또 공의 친구 이상설과 맹약하고 전덕기 목사의 기도와 박상궁을 만나 고종태황제의 친조를 받도록 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경과되었으며, 리용익 · 이도재 외에는 비밀에 부쳤고, 어수당결의의 비밀을 받아 가지고 장도에 오르기 전날밤에야 비로소 리갑 · 리종호 · 김구 · 안창호 등 네 청년을 은밀히 불러 조국의 장래를 부탁하였다. 이 때는 1907년(광무 11)으로 공은 일사보국의 각오로 고종태황제의 밀조를 받아 진충보국할 것을 서약하고 조국광복의 장도에 올랐다. 이 해 만국평화회의는 이름만 정의와 인도를 표방한 허울 좋은 회의였고, 피압박민족의 원정을 호소하기는 커녕 열강들의 이권쟁탈에 약소민족의 주권이 농락되는 웃음거리 장소가 되었다. 이에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깨달은 공은 1907년 4월 20일 이미 작정한 대로 황은을 보답치 못한 채 조국독립을 외치며 이역만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의 선혈을 뿌리고 민족정기의 사표가 되었다.
 공의 유해는 1963년 9월 27일 5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그 해 10월 4일 유해봉환 국민장 의식으로 서울 도봉구 수유동 산127의 1호 산록에 안장되었다.
창덕(昌德) 1883∼1921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대군의 20대손이며 진수(辰洙)의 아들로 북청군 속후면 광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의 준(儁) 열사가 고종태황제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일본의 방해로 주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복자결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조국광복을 염원,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하여 동분서주하며 지하에서 공작활동을 하다가 1920년 3월에 남만주(南滿洲) 통화현(通化縣) 칠도구(七道溝)로 이주하였다. 그 해 통화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입단하였다.
 이 무렵 평안북도 후창군수 계응규(桂膺奎)와 헌병보 한승무(韓承武) 등은 친일파로서 우리의 독립과 군자금 모집을 방해하므로 군정서는 통분하여 공으로 하여금 후창군수 계응규와 헌병보 한승무를 처단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8월 동지 이종식(李宗植)과 같이 후창에 잠입하여 두 사람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루는 이종식이 헌병보 한승무가 집에 있음을 알고 창틈으로 권총을 쏘았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동년 8월 31일 군서기 김영석(金榮錫)으로부터 군수 계응규가 병으로 집에 돌아갔다는 정보를 들은 공은 그날 밤중에 군수관사에 잠입하여 9월 1일 새벽 3시 군수 계응규를 사살하였다.
 그 후 공은 일제의 주구(走狗) 김성진(金成辰)의 밀고로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1921년 2월 26일 상고가 기각되고 동년 4월 22일 평양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필용(弼鏞) 1744∼1812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자는 동보(東輔), 호는 가석(可石).
 1763년(영조 39) 정효자각(旌孝子閣)이 내려져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持平)이란 편액을 받았다.
 양양 일대에서 이름난 효자로 나라에서 효자홍문(孝子紅門)을 내려 흥덕댁(興德宅) 문전에 세우고 그 효심을 기려왔는데, 애석하게도 남북분단의 비사와 더불어 6·25전쟁 시 소실되었다.
 행장 약기는 파보 완남군편에 있다.
형정(亨楨) 1434∼1506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형정(亨楨) [1434(세종 16)∼1506(중종 1)]
 호는 매당(梅堂). 대군의 현손이며 월평군의 차남이다.
 1482년(성종 13)에 승훈랑(承訓郞)을 비롯하여 병조좌랑 · 통정대부 도승지를 지냈고 1483년(성종 14) 가선대부 종정경에 올랐다.
 1872년(고종 9) 의령군(宜寧君)으로 봉해져, 부조사우(不?祠宇)를 건립하고 10월 10일 제향한다.
 배위는 정부인 청송심씨로 사재(司宰) 유(瑜)의 딸이다.
 단은 전남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 있고, 부조묘는 광양군 광양읍 죽림리에 있다.
홍섭(弘燮) 1911∼1943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홍섭(弘燮) [1911∼1943]
 대군의 18대손이며 문규(文奎)의 아들이다.
 전북 임실군 지사면 안하리에서 태어나, 오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던 중, 당시의 지식인사 동지들과 유대를 가지고 1929년 20세 되던 해부터 동지를 규합, 항일 독립에 대한 토론회를 갖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배우지 못한 인근 청소년들을 규합, 문맹퇴치로 향학심을 앙양시키고, 3·1독립정신에 입각한 애국정신과 항일사상 주입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가 자주독립국가임을 알리는 글을 여러 동지들에게 배포하여 1932년 1월 동지 이갑두(李甲斗)집에서 홍웅아(洪熊兒) · 태동춘(太東春)과 같이 일본경찰에 체포 투옥되어 징역 1년 6개월 선고를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 석방되었다.
 그는 신장이 육척장신에 체구가 건장하고 힘이 장사여서 타 연루자보다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당하여 여러번 실신하였으나 끝까지 연루자를 실토하지 않고 당당하게 항변하여 타 항일 운동가들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혹독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형무소에서 만기 석방된 후 폐인과 다름없이 고생을 계속하다가 광복된 조국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43년 4월 5일 향년 33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1993년 제48주년 광복절에 국내 항일 운동가로서 우리 나라 건국사업에 이바지한 공이 크므로 건국포장(제1581호)을 헌법규정에 의하여 추서받았다.
화삼(化三) 1866∼1910    파명:완풍대군(完豊大君)
  초명은 영신(永信) · 영환(永煥), 대군의 19대손이며 지백(智白)의 장남이다. 전남 장성군 삼계면 좌초리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12월 27일 영학당(靈學黨) 당수로서, 탐학이 극심한 흥덕군수 박용현(朴鏞炫)을 농민 300여 명과 족숙인 사유(司維, 일명 基白)의 지원 아래 축출하고 동월 30일 광주 관찰부 순검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니 각처에서 봉기, 창의할 때 총대장이 되어 동년 10월 장성에서 일군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에 비하여 병기와 훈련이 부족하였으므로 100여 명의 부대를 인솔하고 석태산으로 들어가 병기 주조와 병사 훈련으로 전력을 재정비하였다.
 때마침 면암 최익현의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를 받고 즉시 능주 쌍봉사로 가서 호남 의병진에 참여하여 최익현을 맹주로 하고제6로군에 속해 6로군의 관하 장성 · 영광 · 흥덕 · 담양 등지에서, 4월 18일 무장 고산전, 5월 8일 불갑산전, 9월 12일 고창 석곡전, 10월 20일 영광 백수전, 10월 27일 불갑산전, 11월 4일 무장 장사산전 등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이대극(李大克)부대와도 합류하여 연합전투를 하였으며, 1909년 4월 3일 이대극 대장이 순국하고, 족숙인 사유대장도 순국하자 공은 동부대를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이 때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헌병부대가 9∼10월에 걸쳐 전남지역 토벌작전을 벌여 남도출신 103명의 의병이 순절하였다.
 공은 고군분투하다가 1910년 1월 28일 고성산전투에서 순국하였다.
 1986년 민족의 이름으로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87년 영광 향교가 주관하고 영광 각 사회단체가 후원하여 영광읍에 선생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묘소는 전남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 고성산에 있고, 추모비는 영광읍 공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