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계수(桂遂) ? ∼1474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자는 정지(貞之), 호는 쌍죽헌(雙竹軒). 호조참판 호(浩)의 외아들이다.
 1432년(세종 14)에 식년문과에 등제하여 이조정랑 · 금산군수 ·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청렴한 정치를 펴니 임기가 끝나 돌아가는 날 주민이 “이렇게 많은 덕은 이제도 없고 옛날에도 없어 백성을 피 한 방울 뺏은 일이 없네.”라고 하면서 동비(銅碑)를 세워주었다.
 이조참의를 거쳐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계모 노령이 80이라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정성으로 모시다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효로써 소문나 정려문을 받았다.
 배위는 양주주씨(楊州朱氏)와 수원금씨(水原琴氏)이다.
 묘소는 전북 익산시 용안면 오미산에 있다.
돈모(敦模) 1888∼1951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자는 처윤(處胤), 호는 근재(謹齋). 태섭(泰涉)의 장남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지행(知行)을 겸비했다. 증조부의 가묘(家廟)를 자력으로 조성하여 제사지내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화석재(花石齋)와 옥천정사(玉泉精舍)를 지어 학습의 전당으로 만들고 위토를 마련하여 조상들의 향화를 영속케 하고 토지개혁 전에 많은 땅을 경작하여서 쌀을 주기도 했다.
 문집 2권이 있고, 종중에서 전남 담양군 봉산면 당저리 촌전에 송덕비를 세웠다.
보(甫) ? ∼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경양군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현부인 수원금씨(水原琴氏)이다.
 문학으로 이름을 떨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무효라, 공은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하늘에 비니 꿈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사람의 고기를 먹어야 낫는다.”고 하니 두 다리 살을 베어 약을 만들어 드리니 병이 차차 나았다. 효천(孝薦)으로 사헌부 장령 ·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 춘추관 · 예문관 관상감사(觀象監事)를 지냈다. 삼효열비각(三孝烈碑閣)이 있다.
 1872년(고종 9)에 진랑군(晋朗君) 지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는 실전하여 전북 익산시 용안면 화실리 고창 등고령 아버지 묘역내에 설단하고 향사한다.
 배위는 현부인 한양조씨로 환기(煥基)의 딸이다.
삼세오효비(三世五孝碑) 1743∼1808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대군의 12대손 명량(明亮 : 1743∼1808)의 자는 덕진(德振), 호는 광곡(廣谷)인데 정수(廷秀)의 장남이요, 순양군(順陽君)의 7대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위하여 갖은 효성을 다하여 칭찬이 자자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동의(東儀 : 1774∼1842)와 동례(東禮 : 1776∼1846) 형제와, 동의의 아들 유국(有國 : 1808∼?) · 재국(在國 : 1812∼1881)도 대대로 효도를 다하여 그 소문이 퍼져 지방 장관이 여러번 아뢰었으나 정부의 포상은 받지 못하고 지방 유지들이 세운 3세 5효비각이 전남 화순군 동면 동림촌 앞에 세워져 있다.
석공(石公) 1438∼1493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자는 성완(聖完), 호는 송곡(松谷), 만호(晩號)는 퇴일당(退逸堂).
 파성군의 계자로 생부는 경릉군이다. 어머니는 부부인 화순최씨로 찬성 예(睿)의 딸이다.
 천자순수(天姿純粹)하고 덕기굉후(德器宏厚)하며 경학(經學)에 해박하고 <춘추(春秋)><병서(兵書)>에 두루 통했다. 문과로 양주목사를 역임하니 정청덕흡(政淸德洽)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1477년(성종 8)에 왜구가 호남을 침략하니 공이 문무겸전하다 하여 장천(將薦)으로 전라병마절도사를 배명(拜命)받았다. 공은 글로써 회유하고 무술로 진압하니 호남백성이 탐진(耽津 : 현 전남 강진)에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1485년(성종 16)에 벼슬을 버리고 화순에 은거하고 고을 남쪽 세줄기 시냇물이 합치는 곳에 연식당(宴息堂)을 지어 `퇴일당(退逸堂)\'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보내니 `리병사서당유허(李兵使書堂遺墟)\'가 지금까지 전한다. 1872년(고종 9)에 순양군(順陽君) 지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밀암동 종쾌산하 곤좌이니 분장병석(墳墻屛石)으로 치장되어 있고 장군석 · 동자석 · 양석(羊石)이 갖추어져 있으며 묘도비(墓道碑)가 동천(洞天)밖 길가에 있으니 인봉개(쬧鳳盖)와 구부(龜趺)로 수식되어 있는데 덕은(德殷) 송도순(宋道淳)이 비명을 지었다.
 배위는 현부인 동복오씨로 병사 선(픦)의 딸이다. 묘소는 합폄이다.
세영(世英) 1474∼1542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초휘는 금손(金孫), 호는 송포(松圃). 순양군의 차남이다.
 1492년(성종 23)에 문과에 급제하고 의정부 검상(檢詳)을 지내고 사인(舍人)에 승진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경사와 백가서를 두루 섭렵하니 문사(文詞)가 화려하였다. 추계(楸溪) 윤효손(尹孝孫),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용재(容齋) 이행(李荇), 이계(伊溪) 신공제(申公濟)와 도의지교를 맺어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춘추관 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을 찬진하였다.
 좌상 어세겸(魚世謙), 우상 성준(成俊), 좌참찬 홍귀달(洪貴達), 우참찬 노공필(盧公弼), 교리 정광필(鄭光弼) 등과 뜻이 맞아 이루어 놓은 일이 많다.
 연산군의 혼정이 날로 더함을 보고 직간하다가 울산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초에 풀려 환향하였다. 이후로는 벼슬을 단념하고 임하유문(林下儒門 : 초야에 은거하여 학문에 힘쓰는 선비)으로 은둔하며 후진양성을 낙으로 삼았다.
 묘소는 밀암동 고묘하이며 비갈이 있고 방손 진백이 갈명을 지었다.
 배위는 숙인 광산김씨로 경호의 딸이다. 묘는 쌍폄했다.
순(恂) 1428∼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자는 신부(信夫), 호는 강수(江첤). 파천군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군부인 진주류씨로 참판 담룡(潭龍)의 딸이다.
 제천현감 재직시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선정비가 있다. 세조대왕이 보위에 오를 때 누차 사육신의 충절을 상소하다 의주(義州)로 귀양가는 화를 입었으나 1698년(숙종 24)에 신설복관(伸雪復官)되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1872년(고종 9)에 안양군(安陽君) 지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실전되어 성재리(聖才里)에 설단하여 향사하고 소호사(蘇湖祠)에 배향했다.
 배위는 현부인 창녕성씨로 화욱(和旭)의 딸이다. 묘는 합폄이다.
일문육충비(一門六忠碑) 1543∼1634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완창대군의 8대손 사종(嗣宗 : 1543∼1634)의 자는 찬화(贊華), 호는 석주(石洲)로, 사헌부 집의를 지낸 희춘(希春)의 장남인데,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의 금산(錦山)에서의 패보(敗報)를 듣고 아우 소종(紹宗 : 1554∼1622)과 장남 정립(廷立 : 1563∼1651)과 함께 본연히 창의(倡義)하여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충주와 양주에서 왜적 수십명을 죽이고 전전(轉戰)하다가 회령(會寧)으로 가서 적에게 내응하여 성을 들어 투항한 국경인(鞠景仁)을 죽이고 곧장 의주의 행재소로 가서 임금을 잘 모셔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또 사종의 아들 중 3형제인 정추(廷樞 : 1573∼?) · 정기(廷機 : 1596∼?) · 정근(廷根 : 1605∼?)은 병자호란 때 창의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할 때 양천구(楊川口)에서 왜적을 만나 수십명을 죽이고 남태령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3형제가 모두 순국하였다.
 영조 때 호남 유림 임장수(林長洙) 등이 상소하여 정려(旌閭)의 은전이 내리고 또 사종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소종은 호조참의에, 정립은 동지중추부사에, 정추는 동몽교관, 정기는 사헌부 지평, 정근은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현재 전남 화순군 동면 장자촌 앞 석벽에 이 여섯 분의 충성을 기리는 마애비(磨崖碑)가 지금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마애비명은 달성후인 노암(魯庵) 배석면(裵錫冕)이 지었다.
효열부 서씨(孝烈婦 徐氏) ? ∼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대군의 17대손 태섭(泰涉)의 아내 이천서씨(1869∼1920)는 18세에 시집와서 지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는 등 갖은 효행을 다했다. 그러나 10년만에 남편이 병들어 눕자 온갖 수발을 들며 남편의 간병을 했고,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다가 노시부모와 어린 자식들을 위하여 차마 죽지 못하고 더욱 효도하고 자애해서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되니 고을에서 전남 광양군 봉당면 당지리 마을 앞에 기적비(紀績碑)를 세웠다.
효열부 조씨(孝烈婦 趙氏) ? ∼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대군의 9대손 덕지(德智)의 아내 조씨는 본관이 풍양으로 참봉 신규(信圭)의 딸이다. 남편이 종성부사(鍾城府使)로 부임한 이듬해 6월에 임지에서 작고하자 그 부음을 들은 조씨는 여러 번 기절했다. 깨어나자 장례를 치르기 이틀 전에 자녀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나도 너희들의 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말하였다. 장례 날 종성에서 시신이 와 상여를 매고 가는 해로가(?露歌)를 듣고 다시 기절하더니 끝내는 남편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묻혔다.
 그리하여 대군의 현손 진랑군 보(甫)의 효도와 대군의 6대손 계수(桂遂)의 효도와 이 풍양조씨의 정열을 합쳐 후인들이 3세효열정려(三世孝烈旌閭)를 사창산(社倉山) 기슭에 세웠었다. 그 후 여러번 이 비각을 개수하다가 1680년(숙종 6)에 전북 익산시 용동면 화실리 고창 부락에 옮겨 세웠다. 그리고 당시 용안현(龍安縣)에서는 그 행적을 병풍으로 만들어 보관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