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대군파 약사

완창대군


도조대왕과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의 제1남이다. 1305년(고려 충렬왕 31)에 출생하여 역동(易東) 우탁(禹倬)에게 수업(受業)하고 원나라의 천호직과 고려 때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조선 태조고황제 등극 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요 부조묘(不 廟)의 은전을 받았다.

현 종손 희규(熙奎)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을 내려오면서 명현과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며 가세가 번창하여 25,000명(북한 거주 종원 제외)에 이르는 후손이 전국 각처에 산재해 각기 일문을 이루고 있다. 공의 아들인 영성대군(永城大君) 천계(天桂 : 1333∼1392)는 고려조에 추밀(樞密)이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도의지교(道義之交)가 면밀하였으며 좌찬성을 추증받고 부조묘의 은전을 받았다.

3세 밀양군(密陽君) 난(蘭)은 정몽주에게 수학하여 별시탁제(別試擢第)로 한주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翰注輔國崇祿大夫 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밀은군(密恩君) 섭(攝)은 문과로 공조판서를 지냈다.

밀춘군(密春君) 척(陟)은 태종대왕과 동갑계원(同甲契員)으로 호조판서를 제수받았다.

밀릉군(密陵君) 실(實)은 호군(護軍)을 지냈다.

밀선군(密善君) 종(種)은 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를 역임했으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4세 파원군(坡原君) 양덕(陽德)은 문과로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했으며 예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파천군(坡川君) 사명(思明)은 문과로 호조판서 및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파성군(坡城君) 사철(思哲 : 1411∼1456)은 1432년(세종 14) 임자식년시에 등제하여 홍문관 제학을 세 번 역임하고 좌익훈(佐翼勳)으로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에 책봉되고 대광보 국숭록대부 좌의정을 지냈다.

경신군(慶信君) 중보(重寶)는 참판, 경의군(慶義君) 수인(守仁)은 충청도감사, 경릉군(慶陵君) 수의(守義)는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하여 문과로 목사(牧使), 경양군(慶陽君) 중방(重芳)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경언군(景彦君) 양수(陽秀)는 증 가선대부이다.

5세 안양군(安陽君) 순(恂)은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순양군(順陽君) 석공(石公)은 일찍 등과하여 양주목사 · 전라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서원군(西原君) 숭례(崇禮)는 증 이조참의요, 진남군(晋南君) 견석(堅石)은 증 숭정대부, 진랑군(晋朗君) 보(甫)는 지극한 효성으로 좌승지에 정려를 받았다.

청릉군(淸陵君) 장손(長孫)은 숭정대부 판의금부사요 청평군(淸坪君) 말손(末孫)은 가선대부이다.

7세 쌍죽헌(雙竹軒) 계수(桂遂)는 1432년(세종 14) 임자식년시에 등과하여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계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여 정려(旌閭)가 있다.

이하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후손이 끊이지 않았으며 1967년에는 종의(宗議)를 수렴(收斂)하여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밀암동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워 완창대군을 주벽(主壁)으로 영성대군 · 밀양군 · 파성군의 신위(神位)를 봉안, 향사하다가 1973년에는 파원군을 추배(追配)하여 매년 양력 4월 12일에 향사하고 있다.

그간 종파간에 단합을 도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지 못하여 아쉬워하던 숙원을 1984년에 뜻있는 분들의 주선으로 완창대군파종회를 창립하고 현재 중근(重根) 회장은 여의도에 종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전종원이 한 마음으로 파보를 발간하는 등 위선사(爲先事)에 진력하고 상호 돈목하면서 선조에서 세운 위업을 흠모하고 있다.



종원 분포 상황

시도별
인구수
서울특별시
9517
인천광역시
1248
부산광역시
454
대구광역시
515
광주광역시
675
대전광역시
332
경기도
797
강원도
36
충북
1159
충남
726
경북
1201
경남
458
전북
1504
전남
6257
제주
20
합계
24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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