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신성군(信城君) 1578∼1592    파명:신성군(信城君)
  휘는 후(珝), 시호는 충정(忠貞). 선조대왕의 4남이며 어머니는 인빈 김씨이다.
 인빈 김씨가 선조대왕의 총애를 받고 있으면서 선성군을 낳아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1591년(선조 24)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경연(經筵)에서 신성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건의하다 이산해(李山海)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대왕과 함께 평양에 갔다가 다시 정원군(定遠君 : 후의 元宗大王)과 함께 강원도 영월에 다녀온 후 의주(義州)에서 향년 15세로 별세했다.
 1604년(선조 37) 6월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배위는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신임(申臨)의 딸이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인조대왕의 명으로 경창군(慶昌君)의 3남 구(?)를 입계(入繼)하여 평운군(平雲君)으로 봉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산8-17 천점산 해좌에 있다.
진평군(晋平君) 1659∼1717    파명:신성군(信城君)
  휘는 택(澤), 자는 치숙(致淑). 평운군의 장남이다.
 15세에 군으로 봉해져 명의대부가 되고 1680년(숙종 6)에는 회맹(會盟)에 참여했었고 1700년(숙종 26) <선원보>를 교정했고, 1707년(숙종 33) 정사(正使)로 연경에 다녀와 1713년(숙종 39)에 수덕대부(綏德大夫)가 되었다. 1714년(숙종 40)에 또 정사로 연경에 다녀와 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 이때 숙종대왕이 서울에 진평궁(晋平宮), 지금의 서울 명동 충무로 일대 약 3천평을 하사하였는데 일제 초기까지 종손이 그곳에 살았었다. 명동이 개발될 때 종손 근용(瑾鎔)이 일본인에게 매각했다.
 배위는 군부인 함양여씨로 증 참판 증제(曾齊)의 딸이다.
 묘소는 평운군 묘 좌록 인좌에 있다.
평운군(平雲君) 1624∼1662    파명:신성군(信城君)
  휘는 구(?). 신성군의 계자(繼子)로 생부는 경창군이다.
20세대, 기타 150세대 등 640세대 정도다.
 가덕대부 · 의덕대부 · 흥록대부에 차례로 오르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진주강씨로 진사 후(珝)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산 32-7 해좌에 있다.
함계군(咸溪君) 1712∼1769    파명:신성군(信城君)
  휘는 춘(木熏), 자는 여직(汝直). 진평군의 아들이다.
 처음에 부수(副守)를 받았다가 이어 군에 봉해져 현록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군부인 청주한씨로 두표(斗杓)의 딸이다.
 묘소는 신성군 묘 왼쪽 언덕 임좌이다.
 
함릉군(咸陵君) 1681∼1729    파명:신성군(信城君)
  휘는 직(?), 초휘는 극(極), 자는 여일(汝一). 진평군의 계자이며 생부는 양원군파 유석(儒碩)이다.
 1728년(영조 4) 역적을 토벌하는 회맹(會盟)에 참여 중의대부가 되고, 효장세자(孝章世子) 최복(衰服)에 대전관(代典官)이 되었다. 1729년(영조 5) 숭헌대부에 오르고 이윽고 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
 배위는 현부인 고령박씨로 군수 선(銑)의 딸과 현부인 양주최씨로 상정(象靖)의 딸이다.
 묘소는 신성군 묘 좌록 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