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군파 약사

신성군


선조대왕의 4남으로 임진왜란 때 15세로 조졸하여 후사가 없었다. 후에 인조대왕이 신성군의 아우 경창군(慶昌君)의 3남 구(?)로 하여금 신성군의 뒤를 잇게 하고 평운군(平雲君)으로 봉했다.

그러나 신성군은 중종대왕의 1남 복성군(福城君 : ?∼1533)에 입계(入繼)되었으니 그 사정은 이러하다.

복성군은 중종반정의 3대 공신인 박원종(朴元宗 : 1467∼1510)의 딸 경빈(敬嬪) 박씨 소생이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후의 仁宗)를 낳고 승하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경빈 박씨는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야망을 보여 궁중의 사태가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1527년(중종 22) 작서(灼鼠)의 변으로 박씨 모자는 혐의를 받아 서인(庶人)이 되어 귀양갔다. 복성군은 평소에도 행동이 기괴하였다. 복성군이 입궐하여 주안상을 받았을 때 술잔을 올리면 술을 마신 다음 술잔을 도포자락에 넣어 버리므로 다시 다른 술잔을 가져다 따라 바치곤 했다. 작서의 변에 복성군이 충청도 태안(泰安)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자숙하지 않고 솔개 수십 마리를 잡아다가 다리에 헝겊을 붙들어 매었는데, 거기에는 `이 솔개는 날아다니는 곳은 모두 내 땅이며 그곳 백성은 모두 나의 백성이다.' 라고 써서 날리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충청도 이남에서 오는 상납물자를 모두 압수하곤 하였다. 그래서 김안로(金安老 : 1481∼1537) 무리에게 모함을 입어 모자가 함께 경상도 상주로 이배되었다. 1533년(중종 28) 5월 27일 사사되었다. 그래서 서산에서 태안까지 50리 좌우의 땅을 복성군의 뒤를 이은 신성군에게 사패지(賜牌地)로 내린 것이다.

그래서 1604년(선조 37) 신성군이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될 때 공신들이 사패지를 주는데, 신성군은 이미 재물이 너무 많으니 더 이상 주지 않아야 한다고 신하들이 간했다. 그러나 선조대왕은 “그렇다면 내 태(胎)를 주리라.”하고 충청도 부여 충화(忠化)에 있는 태봉산(胎奉山)과 그 산에 속해 있는 오덕사(五德寺)까지 40정보나 되는 땅을 하사했다. 이곳은 선조대왕의 태를 묻었던 곳이다. 선조대왕의 태는 1929년 일제가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겨 놓았고, 일제가 작성한 토지조사 명부에 신성군파 종손 근용(瑾鎔)의 소유로 기재되었다. 그러나 종손의 관리 소홀로 국유재산이 되고 말았다. 다만 신성군 6대손 유명(惟命)이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5만평을 오덕사에 불답(佛畓)으로 기증하여 오덕사의 재산이 된 것은 불행중 다행한 일이다.

처음에는 복성군의 후사로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河城君 : 후의 선조대왕)을 세웠었다. 그런데 하성군이 명종대왕의 뒤를 이어 왕통을 계승하여 선조대왕이 되자, 다시 복성군의 후사로 신성군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신성군파를 과거에는 복성군파라 불렀다.

복성군의 뒤를 신성군이 이었고, 신성군도 무사하여 경창군의 3남 평운군을 계자로 삼으니, 평운군은 외아들 진평군(晋平君)을 두었다. 이 진평군이 함릉군(咸陵君)과 함계군(咸溪君) 두 아들을 두어 신성군 자손들이 퍼져나갔다.

이 신성군파에서는 문과급제자 6명을 배출하여 파의 명예를 높였고, 현대에도 체신부장관 ·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재설(載卨) 이하 각계에서 중진으로 활동하는 종원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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