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공파 약사

시조 사공공(司空公) 한(翰)으로부터 17세인 양무장군은 유배생활 등 파란곡절 속에서 천신만고로 성장했다. 이같이 세파를 두루 거치며 자란데다 무예가 뛰어나 장군(將軍 : 고려 때 정4품 무관직)이 되었다. 양무장군은 배위로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을 맞이 하여 안사(安社) · 영필(英弼) · 영밀(英謐) · 영습(英襲) 등 4남을 두었으며 이 후 자손 이 크게 번창하였다.

안사는 목조대왕으로 추존되고 영습은 고려말에 위위주부동정(尉衛主簿同正)이라는 벼슬을 하여 바로 주부동정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


배위가 청주곽씨이며 전주에 살다가 목조대왕을 따라 삼척(三陟)으로 이사하였다.

공은 삼척에 살다가 그곳에서 영면하였다. 그 아들 지(芝)는 목조대왕을 따라 함경도로 이사하였다. 손자인 윤경(允卿)은 중현대부(中顯大夫) 감군문위(監軍門衛) 대호군, 증손자인 세 분(世芬)은 태조조(1392∼1398)에 개국공신으로 자헌대부 예조판서를 지냈다. 현손인 중배(仲倍)는 태종조(1400∼1418)에 이조판서와 수원도호부사를, 5대손인 포(包)는 종사랑 도염서승(都染署丞)을, 6대손 소생(紹生)은 단종조(1452∼1455)에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이들은 모두 나라에 충성하고 효도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6대손인 소생(紹生 : 호 는 우계당)은 조상의 얼과 가통을 이어받아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임천(林泉)에 묻혀 학문과 덕행을 쌓으니 향리에서 처사(處士)라 일컬어 추앙하였고 학덕이 뛰어나 단종대왕 때 은일(隱逸)로 천거되어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강직으로 오직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해 봉직해 왔는데, 수양대군이 한명회(韓明澮) 등과 결탁하여 홍달손(洪達孫) 등 무사를 심복으로 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자 공은 수양대군에게 눈물로 충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좇아 성왕(成王)을 안고 보필하던 주공(周公 : 주나라의 정치가로서 성왕을 도와 왕실의 기틀을 잡았음)이 되소서.”하였다. 수양대군이 이를 거절하 고 끝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벼슬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평소에 뜻을 같이 하던 동료들과 눈물로 작별, 향리인 충남 예산군 대흥면 우정촌(현 교천리)에 은 거하였다.

그 후 성종대왕 때 누차 불렀으나 끝내 사양, 임천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며 여생 을 마쳤다.

그의 처남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행장을 찬하고 예산군 신양면 녹문 리에서 1488년에 영면하였다. 배위는 대구서씨 목사 미성(彌性)의 딸이다.

공의 은덕이 후손에게 미쳐 첫째 아들 열(洌 : 공의 8세손)은 흥덕현감, 둘째 연(演)은 안주목사(安州牧使), 셋째 명은 진사에 급제한 후 현감을 지냈으며, 공의 9세손 맹화(孟華)는 사헌부 감찰, 맹화와 4촌간 불만은 충청수사를 지냈다. 공의 10세손 우(瑀)는 안동 대도호부사, 광철(光哲)은 거창부사, 중상(重尙)은 길주목사를 지냈다.

공의 11세손 귀형(貴亨)은 공조참의, 거충(巨忠)은 의금부도사를, 16세손 운(芸)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후손들 중 태규(泰圭) · 회창(會昌) 등이 나와 주부공파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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