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조묵(祖默) 1792∼1840    파명:영해군(寧海君)
  조묵(祖默) [1792(정조 16)∼1840(현종 6)]
 자는 사수(士守), 호는 육교(六橋). 이암공 병정(秉鼎)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풍양조씨이며, 영해군파 13대손이다.
 학문이 깊어 시는 당나라 옥계(玉溪) 이상은(李商隱)을, 글씨는 진나라 산음(山陰) 왕희지(王羲之)를, 그림은 원나라 대치(大痴) 황공망(黃公望)을 배웠고 금석학의 고증에도 조예가 깊었다. 청나라 담계(潭溪) 옹방강(翁方綱)을 만났을 때 시서화가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란 평가를 받았다. 소동파(蘇東坡)의 <천제오운도(天際五雲圖)> 그림을 선사받았기 때문에 서재 이름을 보소재(寶蘇齋)라 일컬었으며 당나라 한간(韓幹)의 <단림노옥도(丹林老屋圖)>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귀한 고서화 수집에서도 당대에 으뜸이었다. 평생 고사전(高士傳)의 모범이 되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육교고략(六橋稿略)> 6권이 있다.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 산31의 6에 있다.
창급(昌伋) 1727∼1803    파명:영해군(寧海君)
  창급(昌伋) [1727(영조 3)∼1803(순조 3)]
 자는 성용(聖庸), 호는 일와옹(一臥翁). 판서공 춘제(春躋)의 3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풍양조씨이다.
 1735년(영조 11) 9세 때 외조부 조원명(趙遠命)의 가르침을 받고 경(經) · 사(史) · 시(詩)에 두루 통달했다. 약관에 시문으로 명성을 날렸고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급제, 1761년(영조 37) 왕세손(정조대왕)의 입학집사(入學執事)로 뽑혔으며, 1771년(영조 47)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 승정원 부승지 · 평안도 정주목사를 역임하다가 퇴임하고 학문 탐구에 주력하였다. <와옹유고(臥翁遺稿)> 42권이 전한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구암리 식암산, 천유재공 묘하에 양위 합폄으로 있고 비문과 석물이 있다.
창수(昌壽) 1710∼1777    파명:영해군(寧海君)
  창수(昌壽) [1710(숙종 36)∼1777(정조 1)]
 자는 덕옹(德翁), 시호는 문헌(文獻). 목사 민제(敏躋)의 계자이며 생부는 눌은공 태제(泰躋)이고 생모는 정경부인 여산송씨이며, 영해군 11대손이다.
 형 창의(昌誼)가 등과하던 해인 1735년(영조 11)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5년 뒤 31세 때인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 갑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 · 예문관 검열 · 의금부 판사 · 홍문관 제학 · 예문관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746년(영조 22)에 통정대부가 되고 1759년(영조 35)에 숭정대부에 올랐다. 유고집 2권, 간찰집 3권이 있다.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산31의 4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달성서씨와 정경부인 진주류씨이다.
창유(昌儒) 1713∼1779    파명:영해군(寧海君)
  창유(昌儒) [1713(숙종 39)∼1779(정조 3)]
 자는 이진(爾珍), 호는 눌옹(訥翁). 판서 춘제(春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풍양조씨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 문무의 고관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구암리 식암산, 천유재 언경의 산소 아래이다.
 배위는 정부인 해주오씨이다.
창의(昌誼) 1704∼1772    파명:영해군(寧海君)
  창의(昌誼) [1704(숙종 30)∼1772(영조 48)]
 자는 성방(聖方), 호는 만취헌(晩翠軒), 시호는 익헌(翼獻). 눌은공 태제(泰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여산송씨이다.
 1726년(영조 2)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1735년(영조 11) 증광 문과에 급제, 처음 승문원에 들어간 뒤 찰방 · 옥당 · 병조정랑 · 의금부 사인 · 지제교 등을 역임했고, 41세 때 통정대부 대사간 · 충청도 관찰사로 나아갔다가 45세 때 가선대부 병조참판 · 예조참판 · 도승지에 올랐다. 46세 때 한성부우윤, 청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49세 때 자헌대부 형조판서 · 호조판서, 50세 때 정헌 · 승헌대부, 병조판서 · 한성부 판윤 · 의정부 좌참찬 · 의금부 판사 · 남한부유수로 나아갔다. 54세 때 돈녕부 판사 · 이조판서 · 예조판서 · 시강원 빈객 · 함경도 관찰사를 거친 뒤, 66세 우의정, 69세 때 좌의정을 지냈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연일정씨와 칠원윤씨이다.
창임(昌任) 1730∼1775    파명:영해군(寧海君)
  창임(昌任) [1730(영조 6)∼1775(영조 51)]
 자는 성윤(聖尹), 호는 신천옹(信天翁). 판서 춘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풍양조씨이다.
 4대가 연속 문과에 급제하고 3형제가 모두 문과 출신의 환경에서 1753년(영조 29)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 사헌부 지평 · 이조정랑 · 강령현감, 통정대부로 승계, 승정원 부승지 · 사간원 대사간 · 영광군수 · 안주목사를 역임했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구암리 식암산, 천유재공 산소 아래이다.
창현(昌顯) 1723∼1792    파명:영해군(寧海君)
  창현(昌顯) [1723(경종 3)∼1792(정조 16)]
 자는 회부(晦夫), 참봉 태제(泰躋)의 3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여산송씨이다.
 1750년(영조 26) 사마시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 세마와 돈녕부 도정을 역임한 뒤, 도에 심취한 평소의 깊은 뜻에 따라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연마와 저서로 생을 마쳤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정효공 묘소 아래 왼쪽 기슭이다. 저서로는 <경설(經說)> 15권, <고도(古圖)> 3권, <춘추전(春秋傳)> 4권, <유문(遺文)> 3권이 있다.
춘제(春躋) 1692∼1761    파명:영해군(寧海君)
  춘제(春躋) [1692(숙종 18)∼1761(영조 37)]
 자는 중희(仲熙), 호는 중은재(中隱齋). 천유재 언경(彦經)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1717년(숙종 43)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과거에 급제하고자 5년간 두문불출 공부한 결과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29세 때 율봉찰방으로 나아갔다가 30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고 32세 때 사헌부 감찰 · 형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 · 경기도사를 거쳐 33세 용강현감, 38세 통정대부, 39세 대사간, 40세 때 진향부사(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41세 때 가선대부 도승지, 58세 때 형조 · 공조판서를 거쳐 70세 때 기로소에 들어갔다. 유고집 6권이 있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구암리 식암산, 천유재 언경의 산소 아래에 양위 합폄으로 묘비와 석물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풍양조씨이다.
형기(炯器) 1884∼1936    파명:영해군(寧海君)
  형기(炯器) [1884(고종 21)∼1936]
 자는 명언(明彦), 호는 매은(梅隱). 시산군의 13대손이며 교두(敎斗)의 외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아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비분강개하여 몸을 아까지 않았다. 1919년 삼종형 석기(奭器)와 뜻을 같이 하여, 4월 3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 선봉에서 주도하여 일제헌병 사매면 주재소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기마헌병대에게 매호공과 함께 체포되어 3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국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대전 국립묘지 239호 부인과 합조로 있다.
형렬(亨烈) 1819∼1839    파명:영해군(寧海君)
  형렬(亨烈) [1819(순조 19)∼1839(헌종 5)]
 시산군의 10대손이며 사인 맹권(孟權)의 차남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동몽교관 조봉대부로 증직되었으며 정려의 명이 내렸다. 배위 성주이씨도 효부 열녀라 함께 중례를 받았다. 공이 20세로 요절하자 유복자 의금부도사 원옥(元玉)이 후사를 이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보절면 시묘동 어강 묘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