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병정(秉鼎) 1742∼1804    파명:영해군(寧海君)
  병정(秉鼎) [1742(영조 18)∼1804(순조 4)]
 초휘는 병정(秉正), 자는 이중(耳仲), 호는 이암(츺菴). 문헌공 창수(昌壽)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달성서씨이고 친어머니는 정경부인 진주류씨이며, 영해군 12대손이다.
 1762년(영조 38) 생원시에 급제하고, 1766년(영조 42)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 ·이조판서 ·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내면서 문무 양면으로 두루 치적을 쌓았다. <이암집(彛菴集)> 3권이 있다.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 산31의 6에 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영조 35)∼1824(    파명:영해군(寧海君)
 영해군파 12대 손녀 빙허각이씨(憑虛閣李氏)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실학자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순수 우리말 한글로 된 규합총서라는 백과사전을 저술하였다.

빙허각 이씨는 이조판서 문헌공 창수(昌壽)의 딸로서 어머니 류씨는 언문지(諺文誌) 저자 류회(柳僖)의 고모이다. 시재(詩才)가 있었으며, 친가와 시가의 학문적인 환경속에서 영향을 받아 많은 한시(漢詩)를 남겼고, 당시의 부인들의 식생활에 관련된 서적을 한글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저서는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 「1부 규합총서(閨閤叢書), 2부 청규박물지(淸閨博物誌), 3부 빙허각고략(憑虛閣稿略)」으로서 1809년 당시 부인들의 실생활에 관련된 순수 우리 한글로 저술한 서적이며 조선어 연구에도 공헌이 막대했다고 한다.

출생지는 서울이며 남편은 문집 좌소산인집(文集 左蘇山人集)등을 저술한 서유본(徐有本)이다.
석기(奭器) 1879∼1932    파명:영해군(寧海君)
  석기(奭器) [1879(고종 16)∼1932]
 자는 양오(陽五), 호는 매호(梅湖). 시산군의 13대손이며 교협(敎協)의 3남이다.
 성품이 곧고 몸가짐이 올바랐으며 항상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처신하였다. 남원군 덕과면 면장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면민이 힘을 모아 송덕비를 세워 기린 바 있다.
 1919년 3월, 서울 탑골 공원에서 3 · 1운동에 온 겨레가 궐기하였다는 보도를 접하고 조카 광수(光壽)를 서울에 보내 오세창(吳世昌) · 송팔용(宋八傭) 등과 연락하여 전국 상황을 판단하고 호남의 독립운동 선봉이 되기로 다짐하였다. 군내 17개 면은 물론 가까운 둔남(屯南) · 지사(只沙) · 산서(山西) 각 면장에게 편지형식의 격문을 인편으로 전하고 대중 앞에 살포할 격문 · 태극기 등을 20여 명의 동지들과 같이 며칠 동안 만들며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4월 3일 덕과면 도화동에서는 사방사업을 위장하고 사매 말달리기에서는 도로보수로 가장하여 작업하다가, 갑자기 만세함성은 터지고, 1천여 군중의 대행진이 삽시간에 사매 헌병주재소를 점령하였다. 여세로 읍내 진출을 꾀하였으나 기마헌병대의 총부리 앞에 공과 주도인물들이 체포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이튿날 4월 4일 남원읍내에서 온 군민이 일어나 남원골을 뒤흔든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는 공이 사력을 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이 내용은 남원시 남원역전 3 · 1기념탑 한국역사편찬위원회 사료판결문 등에 기록되어 있다)
 3년간의 옥살이에도 한사코 굴하지 않고 출옥 후 출옥동지들의 비밀조직인 영춘계를 만들어 평생 항일운동으로 일관하였다.
 국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묘앞에 공적비를 세웠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방축내 선영에 있다.
석팔(錫八) 1900∼1997    파명:영해군(寧海君)
  석팔(錫八) [1900∼1997]
 호는 오당(五堂), 영해군의 17대손이며 승수(承壽)의 차남이다. 봉산 초대 민선 면장을 역임했으며 영해군파 기해보 편찬 고문을 지냈다. <이가세고(李家世稿)>, <오당만필(五堂漫筆)>을 편찬하였다. 묘소는 김포 장릉공원묘원에 있다.
성기(成器) 1890∼1978    파명:영해군(寧海君)
  성기(成器) [1890(고종 27)∼1978]
 자는 중옥(重玉), 호는 노은(魯隱), 일명 난기(蘭器). 시산군의 13대손이며 교성(敎性)의 장남이다. 나라를 위하여 충절로써 살피고 의를 위하여 생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재종형 석기(奭器)와 뜻을 같이 하여 4월 3일 일제헌병 사매면 주재소를 점령하였으나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겪고 출옥 후에는 출옥 동지 39인과 영춘계(迎春첇)란 비밀 지하운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항일운동으로 일관하였다.
 국가에서는 형제의 공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묘소에 애국지사 형제로 기념비를 세웠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오신리 선영하 해좌이다.
성린(聖麟) 1631∼1691    파명:영해군(寧海君)
  성린(聖麟) [1631(인조 9)∼1691(숙종 17)]
 자는 문징(文徵), 호는 만계와(晩計窩). 비연재공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경주정씨이다.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와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48년(인조 26) 18세 때 사마시에 급제한 뒤 1661년(현종 2)에는 의금부 도사 · 호조정랑 · 호조좌랑을 거쳐 그 뒤에 여산군수에 이르렀다. 만년에 관직에서 퇴임하고 귀향하여 폐문하고 만계(晩計)라고 자칭하며 독서로서 수양하였다. 사후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이며 3남 4녀를 두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석곡동 산6의1에 양위 합폄으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성제(誠躋) 1672∼1736    파명:영해군(寧海君)
  성제(誠躋) [1672(현종 13)∼1736(영조 12)]
 자는 군실(君實), 유수 언기(彦紀)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이다.
 49세 때 사산감역(四山監役)으로 음직(蔭職)에 오른 뒤 상의원 별제(別提) · 장례원 사평(司評) · 돈녕부 판관을 역임하였으며 창녕현감으로 외직에 나아갔다가 돈녕부 판관으로 복직되었다. 선혜청 선혜랑(宣惠郞) · 광주목사 · 사재감 주부 · 제용감 판관 · 사옹원 첨정 · 인천부사를 거쳐 성주목사로 나아갔다가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구암리 신통골에 배위와 함께 양위 합폄으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시만(時萬) 1601∼1672    파명:영해군(寧海君)
  시만(時萬) [1601(선조 34)∼1672(현종 13)]
 자는 석여(錫汝), 호는 묵전당(默全堂). 사어공(司禦公) 양휴(揚休)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여흥민씨이다.
 1624년(인조 2) 24세 때 사마시에, 1630년(인조 8) 30세 때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사국(史局)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비롯하여 승정원 주서(注書)로 전직되고, 1646년(인조 24)에는 병조 · 예조좌랑으로 승진한 뒤 다시 홍문관에 들어갔고 삼사(三司)를 두루 거쳤다.
 47세 때 의정부 사인(舍人)이 된 뒤 서장관으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온 뒤 통정대부로 승계되고 병조참지 · 부승지 등을 지내다가 1650년(효종 1) 50세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천품이 중후하고 외유내강하여 올바른 주견을 가지고 삼사 재임 10여 년 간 모든 일을 공정히 처사하였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성리학에 전심하였고 효우(孝友)가 극진하여서 세칭 국보라 했다. 잠시 철원부사를 지내다가 향년 72세로 별세하였다.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고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양위 합폄으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문집 <묵전당집(默全堂集)> 6권이 있다.
양정(養鼎) 1739∼1784    파명:영해군(寧海君)
  양정(養鼎) [1739(영조 15)∼1784(정조 88)]
 자는 치화(稚和), 익헌공 창의(昌誼)의 외아들이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관심속에서 학문에 힘써 1762년(영조 38) 사마시에 급제하고, 1770년(영조 4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정랑 · 사간원 대사간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익헌공 묘소 아래이다.
언강(彦綱) 1648∼1716    파명:영해군(寧海君)
  언강(彦綱) [1648(인조 26)∼1716(숙종 42)]
 자는 계심(季心), 호는 노호(鷺湖), 시호는 정효(貞孝). 백린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청송심씨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1678년(숙종 4) 증광시 을과에 급제, 또 다시 1679년(숙종 5)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부친 묘하 왼쪽 산기슭이며 묘비와 석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