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강녕군(江寧君) ? ∼ ?    파명:영해군(寧海君)
  강녕군(江寧君) [ ? ∼ ? ]
 휘는 기(祺), 시호는 문경(文景), 도학명(道學名)은 세(世). 영춘군의 차남이며 초수는 부정(副正).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과 덕행에 힘썼고 한결같이 어진 선비를 거울 삼아 따랐다. 어른이 되자 정암 조광조와 도학으로써 친분을 맺고 가까이 사귀었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의 내폐사건으로 남해섬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조광조와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한다.
1521년(중종 16) 10월 안처겸의 고종사촌인 송사련의 고변으로 남곤, 심정등이 모함하여 신사무옥이 일어나고 종신고폐의 고통을 당했다. 1784년(정조 8) 강녕군으로 복직되었다.
 묘소가 실전되어 1768년(영조 44) 9대손 익헌공이 제단을 영해군 묘소 아래쪽에 쌓았다.
 배위는 전성현부인 전의이씨와 창화현부인 양주조씨이며 1남 3녀를 두었다.
구성수(龜城守) 1527∼1575    파명:영해군(寧海君)
  구성수(龜城守) [1527(중종 22)∼1575(선조 8)]
 휘는 성(惺), 자는 경중(敬仲). 청화수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신인 진주류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 사건 여파로 이력과 관직의 승계 등이 실전되었다.
 배위는 신인 영월신씨이고 1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서울 도봉산 무수동이었으나 실전되어서 1991년에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거무들(蛛野)에 단을 쌓에 양위 배향한다.
길안도정(吉安都正) 1461∼1520    파명:영해군(寧海君)
  길안도정(吉安都正) [1461(세조 7)∼1520(중종 15)]
 휘는 의(義), 영해군의 차남이며 품계는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올랐다.
 배위는 현부인 여산송씨로 부사 자강(自剛)의 딸과 현부인 청주한씨로 상당부원군 명회(明澮)의 딸이다. 6남 4녀를 두었다.
 행적은 실전되어 상고할 길이 없고 다만 충암(퀖菴) 김정(金淨)의 만장(輓章)의 구절을 보면,

勝日芳郊獵馬嘶 : 좋은날 방초 들에 사냥하는 말 음소리,
王孫風態孰能齊 : 왕손의 풍태 누가 능히 따를까.
眼前玉樹憐渠秀 : 눈앞에 자손 저렇게 준수한데,
身後名?任許題 : 사후 명정은 마음대로 쓰게 했네
漆炬頻連幽쫃道 : 횃불 자주 드나든 깊숙한 길,
靑苔蕪沒貴遊磎 : 귀인 놀던 시내 푸른 이끼 끼누나.
人間何處堪쿌? : 인간 어느 곳이 슬프지 않을까.
萬古同歸一즽泥 : 만고에 다 같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네.

라고 한 시는 금지옥엽의 왕손 풍치를 애도함이라 하겠다.
 증직은 명선대부(明善大夫)로 묘소는 서울 도봉구 도봉동 산81의 1에 묘비와 상석 · 망주 · 문관석 · 혼유석이 있다.
낙성부정(洛城副正) ? ∼ ?    파명:영해군(寧海君)
  낙성부정(洛城副正) [ ? ∼ ? ]
 휘는 낭(琅), 송계군의 5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온양방씨이다. 품계는 명선대부에 올랐고 초수는 부령, 뒤에 부정으로 승계되었다.
 선대에서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의 큰 화를 입어 그 여파로 표덕과 생졸연대가 실전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남양홍씨이고 2남을 두었다.
 묘지는 소령원(小嶺院)에 양위 합폄이다.
덕녕부정(德寧副正) ? ∼ ?    파명:영해군(寧海君)
  덕녕부정(德寧副正) [ ? ∼ ? ]
 휘는 위(훸), 자는 무보(茂甫). 영춘군의 4남이며 어머니는 광양현부인 진주류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의 피화로 인하여 생졸연대 및 표명덕행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배위는 신부인 창녕성씨이고 후사가 없어 완천군의 차남 선성수(宣城守)를 후계로 삼았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배양리 산에 양위 쌍폄으로 묘비와 석물이 갖춰져 있다.
문성령(文城令) 1531∼ ?    파명:영해군(寧海君)
  문성령(文城令) [1531(중종 26)∼ ? ]
 휘는 조(<&37894>), 벽계도정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이다. 초수는 영(令), 품계는 통정대부에 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과 덕행에 힘써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은거수도(隱居修道)하고, 내려주는 모든 벼슬을 사양하였다.
 선대에서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의 큰 화를 입어 그 여파로 인하여 별세 연도는 알 수 없다.
 배위는 숙부인 청주경씨이고 5남을 두었다.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90번지에 양위 합폄이고 비문과 석물이 있다.
문원령(文原令) ? ∼ ?    파명:영해군(寧海君)
  문원령(文原令) [ ? ∼ ? ]
 휘는 박(博), 벽계도정의 3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이다. 초수는 영(令)이었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으로 인하여 관직의 승계와 표덕 및 생졸연대와 묘지 등이 모두 실전되었다. 배위는 전의이씨이고 1녀만 두어 무후가 되었다.
문천군(文川君) ? ∼ ?    파명:영해군(寧海君)
  문천군(文川君) [ ? ∼ ? ]
 휘는 순(恂), 벽계도정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이다. 초수는 영(令)이었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으로 인하여 표덕과 생졸연대가 실전되었다. 돌아간 뒤 군(君)으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한산이씨이고 3남을 두었다.
 묘소는 양위 모두 실전되었다.
문현수(文峴守) ? ∼ ?    파명:영해군(寧海君)
  문현수(文峴守) [ ? ∼ ? ]
 휘는 율(慄), 벽계도정의 4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이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의 화로 인하여 관직 승계와 표덕 및 생졸연대가 실전되었다.
 세종대왕의 6남이고 혜빈김씨의 소생인 수춘군파의 후손인 안흥도정(安興都正)에게 입후(入後) 출계하였다.
벽계도정(碧溪都正) 1508∼ ?    파명:영해군(寧海君)
  벽계도정(碧溪都正) [1508(중종 3)∼ ? ]
 휘는 종숙(終叔), 호는 현옹(玄翁). 길안도정의 5남이며 품계는 명선대부에 올랐다.
 젊었을 때부터 절조 있는 행실로 생활해 오며 학문에 독실하였다. 당시의 혼탁한 세상에 분개하여 이를 사물에 빗대어 풍자적인 시가를 읊어 회포를 풀었다.
 중종대왕 때 시산군 · 강녕군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백성을 올바르게 잘 다스리도록 하는 글을 지어 밀봉 상소하였고 또 연명의 글로 억울하게 유배된 박상(朴祥) · 김정(金淨)의 석방을 상소하였다. 그당시 사람들은 중국 전한시대 학자이며 충신이었던 유향(劉向)에 비유하였다.
 12세 때 기묘사화와 14세 때 신사무옥으로 큰 화를 입었다. 1542년(중종 37) 35세 때 행직(行職)으로 관찰사 지방관이 되었다.
 벽계도정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면, 중종대왕 때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시,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 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에서 벽계수는 바로 벽계도정을 가리킨다. 기명이 명월인 황진이는 송도를 찾아 온 벽계수를 애인으로 섬기고 이같은 시조 1수로 사랑을 노래해 벽계수를 도취시켰다는 것이다.
 배위는 정부인 해평윤씨로 4남 2녀를 두었으며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90번지로 묘비와 석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