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재형(載亨) 1665∼1741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자는 가회(嘉會), 호는 송암(松巖). 대군의 10대손이며 응징(應徵)의 아들이다. 7대손 세량(世樑)의 사건에 연좌되어 함경도 경성에 유배되어 그곳에 눌러 살아 함흥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공은 어려서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을 읽고 의리의 학문이 있는 것을 알고 마음에 이를 기뻐했다. 약관 때 농암 김창협이 평사(評事)가 되어 이곳에 오자 공은 김창협에게 나아가 배웠다. 김창협은 <근사록>과 <퇴계집>을 읽으라고 권했다. 이 때부터 학문에 깊이 빠져 모든 책을 두루 섭렵했다. 곁들여 전례(典禮) 상수(象數)의 학설까지도 익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더욱이 <심경(心經)>과 <근사록>으로써 몸가짐의 바탕을 삼고 또 <주자대전><주자어류(朱子語類)>를 구하여 깊이 탐독했다.
 공이 학문하는 데는 조심스럽게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궁리는 독서를 요체로 삼았다. 그리고 독서는 반드시 심사숙고하여 실천궁행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 수양하는 바가 깊어 장엄한 모습, 근엄한 지조, 동정의 분명함, 예의바름, 솔직담백함이 한 순간이라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래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함경도 지방을 유람할 때 공의 집에 들렀다가 하는 말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진정 지키는 이는 이 사람 뿐이군. 우리 중형(김창협)의 도가 북방에서 행해지네.”하였다.
 공은 이미 효도와 의리로 유명하여 여러 번 조정에 추천되었다가 1716년(숙종 42)에 이르러 김창집(金昌集)이 추천하여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되었다. 김창집은 김창흡의 백형으로 창흡의 말을 듣고 추천했다 한다.
 그 뒤 내시교관(內侍敎官) ·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 비로소 임금을 뵈었다. 그 뒤 장악원 주부(主簿)에 승급했다. 그리고 1740년(영조 16)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향년 77세. 문집 몇 권이 있다. 사후 1855년(철종 6)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873년(고종 10)에 `장간(章簡)\'이란 시호가 내렸다.
 배위는 충주박씨 증 참판 유문(有文)의 딸과 해주오씨 상영(尙英)의 딸이다.
 묘소는 귀덕동 선영 서쪽에 있다.
정(玎) 1457∼1515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대군의 현손이며 가음정 은생의 차남이다. 대호군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팔거도씨(八죥都氏)이다.
 묘소는 실전되어 1994년 3월 27일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하가등리에 설단(設壇)으로 모셔있다.
정영(晶榮) 1878∼1955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자는 내여(乃汝), 호는 송곡(松谷). 대군의 19대손이며 현호의 장남이다. 문학과 행실을 겸비하였고 유고집이 있다. 1899년(광무 3) 나라의 은혜를 입어 통정대부에서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삼척김씨로 석근(碩根)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낙천리 부근 선어곡 산 해좌이다.
진영(震英) 1644∼1710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대군의 10대손. 18세 때 사마시 양과에 급제,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벼슬은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김해김씨이다.
 묘소는 강원도 삼척시 원동에 있다.
진항(震恒) 1644∼1714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대군의 10대손으로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여 1678년(숙종 4)에 관직에 올랐다. 어모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로서 1691년(숙종 17) 전라도 지방에 출몰하는 명나라 화적(火賊) 백일생(白一生) 등 일당 6명을 생포한 공로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 충무위 부사맹이 되었고, 1705년(숙종 31) 7월 29일에 산산진 병마절제사가 되는 등 많은 요직을 역임했다.
 배위는 숙부인 풍산김씨로 시필(時弼)의 딸이다.
춘소(春素) 1624∼1681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자는 정춘(廷春), 호는 송죽재(松竹齋). 대군의 9대손. 첫 벼슬이 계사(計士)로부터 시작하여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649년(인조 27) 간신 김자점이 주권을 희롱하자 가솔을 데리고 삼척으로 내려가 진안대군의 청렴함을 생각하면서 영경묘와 준경묘에 여막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배위는 밀양손씨 강조(康祚)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미로리 상산치 신좌에 있다.
학호(學浩) 1869∼1923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자는 중겸(仲兼), 호는 임호(林?). 대군의 18대손이며 현호의 동생. 1902년(광무 6) 통정대부에서 가선대부 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강릉함씨로 영근(英根)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원동 연작곡 성황당 뒷산 간좌이다.
향(珦) 1459∼1524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대군의 현손이며 가음정 은생의 3남이다. 대호군을 지냈다. 백부 송현정 견신 부자가 단종대왕 양위 때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형과 함께 살기 위하여 서울을 떠나 각각 흩어질 때 월악산으로 내려가 옥천파의 시조가 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충주지씨로 찬성사 맹순(孟順)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 곡평산 묘좌이다.
헌영( 榮) 1879∼1945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헌영(憲榮)이라고도 쓰고, 일명 조영(祖榮)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대군의 17대손이며 수일의 장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담용부위(膽勇副尉)를 거쳐 1902년부터 1910년까지 참위(參
 
현호(顯浩) 1857∼1926    파명:진안대군(鎭安大君)
  자는 중선(仲善), 호는 운기(雲基). 대군의 18대손. 문학과 행실이 고명하여 자주 추천을 받다가 1897년(광무 1)에 특별히 성은을 입어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가선대부 겸 경연 참찬관에 이르렀다. 유고집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밀양손씨로 가선대부 광조(光祖)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원동 산록 집 뒷산 정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