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대군파 약사

진안대군( ? ∼1395)


휘는 방우(芳雨), 처음 시호는 경효(敬孝), 나중 시호는 정의(靖懿)이다.

태조고황제와 신의고황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유달리 총명하였고 충효와 우애가 깊었다. 일찍이 사서에 능하여 고려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예의판서(禮儀判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고려사> 열전(列傳) 우왕전(禑王傳)에 보면, 1388년(고려 우왕 14) 5월 정유일에 요동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평안도 성주(成州 : 成川)에 우왕이 있었는데, 마침 태조고황제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했다. 이날 밤에 방과(芳果 : 정종대왕)는 형 방우(진안대군) · 이지란(李之蘭 : 퉁두란 )의 아들 이화상(李和尙) 등과 함께 성주를 빠져나와 회군하는 곳으로 달려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뒤에 숨은 일화가 있다. 이지란의 저서인 <청해백집(靑海伯集)>에 실린 이야기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정종대왕이 태종대왕으로 이화상이 아버지 이지란(청해백)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고려가 요동을 정벌할 때 진안대군 · 정종대왕 · 이지란을 위험인물이라 하여 성천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태조고황제가 출동한 이 후 장마가 계속되자, 감옥에서 태종대왕(고려사에는 정종대왕)이 진안대군에게 “탈옥해서 이 사실을 아버님께 알리십시오.” 하니 대군은 답하기를 “임금의 명을 어김은 도리어 효가 아니다.” 하며 거절하자, 태종대왕이 담을 넘어 탈옥하여 위화도로 달려가 태조고황제에게 아뢰었으므로, 회군할 때 성주에 들러 나머지 사람들을 석방했다는 것이다. 이 때 석방된 진안대군은 곧 태조고황제가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붙들고, “죽으면 죽었지 임금의 명을 어기고 회군하는 것은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태조고황제가 듣지 않자 가족을 이끌고 철원 보개산(寶蓋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한다.

후에 태조고황제는 대군의 굳은 뜻을 알고 고향인 함흥에다 살 곳을 만들어 주어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위 이야기에서는 정종대왕이 태종대왕으로 잘못 기록되었다. <고려사>의 기록대로 정종대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태종대왕은 서울 개성에 머물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지 않고 포천 재벽동과 철현에 계시던 신의고황후와 신덕고황후의 나머지 가족과 함께 급히 철원 이천(伊川) 쪽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태조실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1392년(태조 1) 8월 7일 여러 왕자를 군으로 봉할 때 진안군(鎭安君)에 봉해지고, 1393년(태조 2) 10월 17일 진안군 방우에게 명하여 4대 선조를 제향케 하고, 신주를 효사관(孝思觀)에 임시로 안치케 하였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진안군 방우가 별세하니 소주를 많이 마셔 병이 났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 14일에는 백관들이 진안군을 조위(弔慰)했고, 15일에는 진안군을 장사하는데 백관들이 문밖에서 전송했다.

이로 보면 진안대군은 1395년 12월 13일에 별세하여 15일에 장례를 지냈는데, 처음에는 함흥 북원(北原) 평사(平社) 마내곡(馬內谷)에 장례지냈다가 1408년(태종 8)에 어머니 신의고황후의 능침인 제릉 곁에 모신다는 의미에서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황강리 몽상동으로 이장했다.

진안대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장남이 복근(福根)이요, 차남은 덕근(德根)이다.

복근은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어 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에 책봉되고, 정종대왕 때 친필 교지를 받았으며 `안간(安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복근은 두 아들을 두어 장남은 원윤(元尹) 석(碩)이고, 차남은 동학정(東鶴正) 기(?)이다.

원윤 석은 또 두 아들을 두니 장남이 송현정(松峴正) 견신(堅信)이요, 차남은 가음정(嘉音正) 은생(銀生)이다.

1456년(세조 2)에 사육신 등이 주동이 되어 단종대왕 복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호남의 유생들 사이에서 `송현정 견신은 태조고황제의 적손이다' 하여 왕위에 옹립한다는 소문이 일자 송현정의 식구 5명이 몰살을 당하였다. 이 때 이미 작고한 가음정 은생의 아들 3형제는 이 사실을 알고 살아 남기 위해 가속을 데리고 잠적하니 장남 우(瑀)는 괴산군 도락동(道樂洞)으로, 차남 정(玎)은 수원 화성으로, 3남 향(珦)은 월악산(月岳山)으로 달아나 숨어 살았다. 그래서 장남 우의 후손은 종파(宗派), 차남 정의 후손은 수원파(水原派), 3남 향의 후손은 옥천파(沃川派)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군의 묘소는 실전됐고 후손들도 무사(無嗣)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던 중 1758년(영조 34) 인성군(仁城君) 홍(珙)의 증손 낙창군(洛昌君) 탱(?)의 상소로, 대군의 13대손 윤석(胤錫)을 비롯한 후손들이 괴산지방에 살고 있다는 것을 조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14대손 효원(孝源)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이미 작고한 때였다. 그래서 진안대군에게 `정의(靖懿)'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87년(정조 11) 가을 장마 때 대군의 묘소 일대가 물바다가 되고 사태가 나 흔적이 막연한 가운데 장마 후 솟아난 석물에 `太祖大王 第一男 鎭安大君 妻 夫人 池氏'라는 글자에 의하여 그 동안 실전되었던 진안대군의 묘소를 찾게 된 것이다. 이에 대군의 15대손 국주(國柱)가 1789년(정조 13) 2월에 마침 정조선황제가 백부인 진종(眞宗)의 능인 영릉(永陵)을 봉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진정함으로써 정조선황제는 사실을 알게 됐고 경기감사 조정신(趙鼎信)으로 하여금 대군의 묘소를 복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이 영락하여 돌보지 않은 탓에 대군의 산소 일대가 황폐해지고 백성들 무덤이 30여 기나 암장되어 식별이 곤란하였다. 그래서 공사를 관에서 복원하고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에 어제(御製) 비문까지 하사하였다. 그리고 매년 춘추로 풍덕현감(豊德縣監)이 직접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수호하는 사람도 두게 하였다.

그러나 대군의 산소는 휴전선 이북 개성에 있어 봉사조차 못하여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385번지에 있는 대군의 사당인 청덕사(淸德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이 청덕사는 대군의 현손 우(瑀)의 종파들이 이곳에 모여 사는 관계로 1828년(순조 28) 사우를 중건하고 사액(賜額)까지 받게 된 것이다.

대군의 현손 우는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지간(枝幹)은 도락동에 정착하였고, 차남 지당(枝棠)은 충주 덕면(德面)에 정착하여 덕면파(德面派)라 불리우며, 3남 지화(枝和)는 당진에 정착하여 당진파(唐津派)라 불린다.

그리고 장남 지간은 외아들 의종(義宗)을 두었고, 의종은 윤(輪) · 복(輻) · 원(轅) · 진(軫) · 식(軾) 등 5남을 두니, 윤은 괴산군 불정면 목도종파(牧渡宗派), 복은 소이파(蘇伊派), 원은 지장파(芝壯派), 진은 괴산파(槐山派), 식은 충주 지호파(芝湖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대군의 현손 정(玎)은 가음정 은생의 차남으로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팔거도씨이다. 장남 지수(枝壽)는 통훈대부 덕천현감을 지냈고, 지수의 장남 학(鶴)은 어모장군 충좌위 부호군을 지냈고, 학의 장남 숙봉(叔鳳)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으나 위 4대의 묘소가 실전되어 1994년 3월 27일 화성(華城) 선산에 설단(設壇)하였다.

대군의 현손 정(玎)은 수원파(水原派)의 중시조로 화성에 욱(郁) 정략장군
(定略將軍)을 비롯 정조 이후에 대대로 관직(官職)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대군의 셋째 현손 향(珦)의 차남 지흥(枝興)의 후손들은 미원에 살아 미원파(米院派)라 부른다.

한편 대군의 차손(次孫) 동학정(東鶴正) 기는 삼척에 살아 삼척파(三陟派)라 불렸다. 두 아들을 두어 장남 비산도정(緋山都正) 의동(義童)은 외아들 관(瓘)을 두고 8대까지 양주(楊州)에 살았는데 묘소가 실전되고, 비산도정의 동생 죽계령(竹溪令) 함동(咸童)은 거망(巨望)을 비롯 7남을 두었는데 후손의 생사가 불명하다.

또 대군의 차남 순녕군(順寧君) 덕근(德根)의 후손은 함흥파(咸興派)라 부르는데, 순녕군은 아들이 없어 익안대군의 장손 광천군(廣川君) 이인(以仁)을 양자로 들였다. 광천군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풍양수(豊陽守) 유영(有英)과 차남 양천도정(陽川都正) 재영(在英)의 후손들이 대부분 북한에 살고 있어 사정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진안대군은 태조고황제의 장남이면서도 왕위를 싫어하여 숨어 살은 결과, 그 후손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살아오던 중 정조대(正祖代) 이후부터 충북 괴산의 대군의 사당 청덕사(淸德祠)를 중심으로 산재되었던 후손들이 서로 연락하여 오늘의 파종회를 이어 오면서 현재 관(官) · 군(軍) · 교수 · 율사 · 실업인 등 유명인물이 배출되어 사회 각 계에서 활동함으로써 선조를 빛내고 있다.




종원 분포 상황

진안대군파는 주로 괴산과 충주 · 옥천 · 수원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고 강원도 지방에 함흥땅에서 남하한 종친과 삼척에 분포된 종친과 합하여 약 1만 5천여 명에 달한다.
분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도별
세대수
인구수
충북 / 괴산일대
2000
7000
강원도
1000
2000
경기도 수원일대
1000
3000
기타지역
1000
3000
합계
5000
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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