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태황제 - 시대상 (3)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이 시기 편찬사업으로는 <대전통편(大典通編)>을 보충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간행하였고, 그 중 이전(吏典)과 병전(兵典)의 규례만을 모아 <양전편고(兩銓便攷)>라 하였다. 또한 <오례편고(五禮便考)>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이 개간(改刊) · 속간(續刊)되었다. 대원군의 소위 섭정기간의 통치는 최익현의 계유상소에 나타나듯이 만동묘를 포함한 서원의 복구를 요구한 유생층의 불만, 경복궁 중건에 따른 비용충당을 위한 원납전(願納錢)이 아닌 원납전(怨納錢)으로 바뀌어 버린 서민들의 경제적 부담의 가중, 또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경제적 손실 등은 대원군의 하야를 불러왔다. 대원군의 갑작스런 실권은 `대왕대비의 교명\' `왕명\'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 등의 형식을 빌어 권력이 행사되었듯이 왕은 아니었기에 고종의 친정에 따라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 고종 친정기(親政期)

 고종의 친정 후 즉시로는 대원군에 대한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만동묘의 복구, 통행세의 철폐, 청전 사용의 중지 등을 단행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함포강압 요구에 따라 1876년 일본과 수교로 문호개방을 시작하였지만 그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북경까지 함락시켰던 서구열강의 문호개방 요구를 무조건 거부하고 있을 수 없었다. 1830년대 이래 각 국의 선박들이 통상요구를 하였고 북쪽의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인들도 1864년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그에 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고종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후 일본에 파견했던 수신사 김기수를 접견하여서는 전선(電線) 화륜(火輪) 농기(農器)에 관해 들은 바 등을 물으며 서구 과학기술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에 김기수는 <일동기유(日東記遊)> 3권을 편찬하여 바쳤다. 1880년 청(淸)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영중추부사 이유원을 통하여 서양과 통상하여 러시아와 일본에 대비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고종은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을 시찰하도록 하기 위해 1880년 · 1881년 2차에 걸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였고, 청으로는 병기제조와 군사훈련 학습을 할 청년들을 파견키로 결정한 후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였다. 1880년 제1차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가져온 청국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은 청국의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외교적 의도를 담은 책으로 청국과는 친하고 일본 · 미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많은 유생들이 천주교와 <사의조선책략>을 배척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경상도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은 만인소를 올려 `신사척사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척사상소를 중지시키기 위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였고, 1882년 8월에는 2차에 걸친 양요로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시 싸우지 않고 화의를 맺음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전국에 세워졌던 척화비를 모두 철거케 하며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고종태황제 - 시대상 (4)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그리고 청국의 알선을 받아들여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1882), 조영(朝英)수호통상조약 · 조독(朝獨)수호통상조약(1883) · 조이(朝伊)수호통상조약 · 조로(朝露)수호통상조약(1884)도 체결하였다. 1885년 4월 러시아의 남하저지를 내세운 영국의 거문도 불법점령에 조선정부는 영국함대를 방문하여 항의하고, 영국의 불법점령 사실을 열강에게 통고하며 철퇴를 요구하였지만, 1887년에야 영국군은 거문도로부터 철수하였다. 열강간의 견제를 통해 영토를 지키고자 했던 긴박함은 조불(朝佛)수호통상조약(1886)에서 `교회(敎誨)\' 조항을 묵인함으로써 기독교 선교가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기도 하였다. 수호통상조약의 체결에 따라 상대국의 외교관들이 조선에 상주하게 되었으며, 조선에서도 상대국에 주재 외교관을 파견하였는데 1887년 최초로 주미전권공사에 박정양을 파견하였고, 유럽에도 외교관 파견을 결정하였다. 외교관의 파견결정에는 임오군란 이 후 조선에 내정간섭을 심화시키던 청국에게 독립국가임을 주장하고 열강과 동등한 입장에 서있음을 밝히기 위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밖으로 외교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내적 개혁도 필수적이었다. 이에 고종은 1880년 말 삼군부를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서구의 과학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하였으며, 또한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새로운 군대양성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면서 구식군대에 대한 급료체불과 급여양곡의 변질 및 정량부족에 격분한 군인들과 도시빈민들이 가세하여 일으킨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은 제도개혁으로 인해 생활상에 타격을 직접 받게된 층들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폭동군인들은 물러나있던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대원군은 재집권의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청국에 원조를 요청하여 청군에 의해 진압되고 대원군이 청국으로 잡혀가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이 후 조선이 청과 체결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은 청상(淸商)의 조선내에서의 거주 · 영업 ·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낮은 관세율을 적용하여 청상의 국내시장 잠식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선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는 청국군이 주둔하고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직함의 원세개(袁世凱)의 내정간섭에 조선정부는 반청(反淸)정책을 주도되었으며, 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청이 이를 이용하여 내정간섭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조작하였거나 등의 이유로 2차에 걸쳐 `조로밀약설(朝露密約說)\'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갑오개혁시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던 것도 바로 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의미했다. 한편 폭동군의 공격에 임하여 일본공사는 스스로 공사관을 불지르고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귀환도중 일부 군인이 다쳤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군대주둔의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1882년 고종은 청의 이홍장에게 `선후사의육조(善後事宜六條)\'를 작성하여 보내 조언을 구했는데, 그 내용은 인재의 기용, 군제의 정비, 재정확충을 위한 상국(商局)의 설립과 금은화폐의 사용 및 광산개발, 공사의복(公私衣服)의 변통, 상국(商局)을 설치 자유로운 상행위 보장 및 해관설치 등을 담고 있다. 이것은 고종이 추구하는 개혁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종이 개화자강 시무(時務)에 대한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리자 개화상소는 이 선후사의육조와 부합하는 내용의 많은 상소가 올려졌다. 고종은 감생청(減生廳)을 설치하여 관제개혁을 실행에 옮겼으며, 이홍장이 추천해 준 독일인 묄렌도르프(P.G. Von Moellendorf, 穆麟德)를 조선해관총세무사로 임명하여 조선해관을 설치하고 관세업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교섭통상사무 협판 및 전환국 총판에 임명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는데 일하도록 하였다.
고종태황제 - 시대상 (5)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고종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근대화 개혁의 추진자들은 이미 1870년대부터 청국을 통한 서구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젊은 신진관료 및 역관 · 의관 등 지지층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김옥균 · 홍영식 · 박영효 · 오경석 · 유홍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흔히 `개화파\'라 불리고 있다. 주로 일본에 수신사와 함께 파견되어 일본이 받아들인 신문물을 접하여 보았으며, 미국 보빙사로 파견되는 민영환을 따라 미국을 다녀온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박문국 설치 · 우정국의 설립 등에 관여하였으며, 개혁작업에 필요한 재정적 수단을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를 주축으로 하는 정치세력측은 당오전의 발행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개화정책의 구현을 위한 방법상의 차이는 급진개화파가 추진하던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들이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화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1880년대 이후는 온건파에 개화정책이 구현되어 나갔다고 하겠다.

 신교육기관으로 동문학(同文學, 1883), 육영공원(育英公院, 1886) 등을 설립하여 외국어와 서양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연무공원(鍊武公院)이 창설되고,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 · 이화학당에는 교명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고종 1년(1864) 대군방(大君房) 및 각궁방(各宮房)의 잔존 노비안(奴婢案) 소각으로 천인의 지위향상을 위한 단초를 열었으며, 1882년 7월에는 서북인 · 송도인 · 서얼 · 의관(醫官) · 역관(譯官) · 이서(吏胥) · 군오(軍伍) 등도 모두 높은 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같은해 12월에는 양반 천민 구별없이 상행위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하였고, 농상공민의 아들이라도 학교에 입학할 것을 허락하는 윤음을 내렸다. 신분에서 오는 차별적 요소들을 점차 줄여나간 것이다. 또한 1886년에는 노비의 세전을 금지토록 하여 자신 일대에 한하도록 하였으며, 갑오개혁으로 노비신분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갑오개혁에서 신분제의 제한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과거제가 폐지되고 능력본위의 인재등용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관리로 나아갈 수 길이 열리는 사민평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개항이래 전개된 일본과의 무역에서 흔히 `미면교환체제(米綿交換體制)\'라고 불리는 무역구조가 전개되었다. 일본은 면포 무역에 있어 초기에는 영국제 면사의 중개무역을 하였지만 1890년대 들어와서는 자국산 면포의 수출대상지화하였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쌀 · 콩 등의 부족분을 조선으로부터 수입하면서 조선농민들은 일본상인들의 고리대금적 수탈대상으로 삼았고, 국내의 식량부족은 함경도 `방곡령사건\'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과의 미곡무역에 대한 불만은 갑오년에 이르러 동학의 이름을 빌어 시작되었지만 농민들이 `척양척외(斥洋斥倭)\'를 부르짖으면서 항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농민들의 진압에 청국군을 불러들이고, 이를 구실삼아 일본군이 출병하여 농민항쟁을 진압하게 되면서 일본은 조선에 내정간섭을 심화하였다.
고종태황제 - 시대상 (6)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농민들의 항쟁이 발생함에 따라 조선정부 내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개혁작업에 들어섰다. 고종은 1894년 7월 갑오개혁 윤음을 발표하였으며, 12월에는 홍범 14조와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을 종묘에 고하며 개혁의지를 다졌다. 갑오 · 을미년간에 진행되었던 각종 개혁적인 조치들은 왕실과 정부의 재정분리, 신분제 · 과거제 철폐 및 탁지부로의 재정의 일원화, 각종 부세(賦稅)의 금납화(金納化), 은본위제 실시 등 각종 제도 및 기구의 변화가 근대제도로의 개혁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행경위와 추진세력의 소재가 일본에 있었음으로해서 일반 민중은 물론 정부관리들 중에서도 많은 반발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종은 개혁과정에서 가해진 일본의 압력을 피하고자 친러시아적인 경향을 보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자, 일본으로 하여금 청국에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삼국간섭\'에 주도적 역할을 한 러시아쪽으로 경사한 것이다.

 위와 같은 조선정부의 태도에 일본은 주한일본공사관 근무원과 낭인들을 궁궐로 침입시켜 그 근원이었다고 보이는 왕후 민씨를 무참히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을미사변 : 乙未事變) 왕비를 서인으로 폐하며 개각을 단행하도록 강요하여 친일정권(親日政權)을 강화했다. 특히 개혁안 중 전통적 유교정신에 배치되는 단발령의 강제적 실시와 왕비시해 사건은 많은 유생들과 일반민중들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나의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髮不可斷)”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國母復讐)”의 기치를 내걸고 일본을 축출하고자하는 의병항쟁을 각지에서 일으켰다. 왕비 시해 후 점증되는 일본의 압력에 큰 위험을 느끼고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어하였다(아관파천).

 아관파천 이전에도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어시키려던 신하들의 움직임은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를 `춘생문사건\'이라고도 부른다. 고종의 피어는 관료들과 상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여 일본을 물러나게 한 것이다. 흔히 서재필이나 독립신문에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가 있는 것은 나라위신의 손상이기 때문에 환궁을 요구하였다는 사실은 그릇된 것이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영향력 아래 진행되었던 갑오 · 을미개혁은 중단되었고, 갑오 · 을미개혁의 추진자였던 대표대신 김홍집 · 어윤중 등은 분격한 시민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으며 개혁사업도 자연 포기되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무르는 동안 러시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국내 내정개혁에 이용하려 하였다. 때문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특사로 민영환을 파견하면서 러시아측에 3백만원의 차관과 재정고문 · 군사교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물러나게 된 일본이 러시아와 1896년 6월에 맺은 제2차의 협정 중 조선의 재정문제에 양국 중 어느 한 국가만 개입할 수 없다는 조항은 러시아가 쉽게 차관대여를 할 수 없어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1년 여를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무르다 환궁한 후 개혁을 위한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였다
고종태황제 - 시대상 (7)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다. 대한제국기

 조선정부는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시점인 1896년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하고 태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여 중국이 인정한 조선이란 국호를 바꿈으로써 독립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고종은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후, 독립국가로서의 면모 일신을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갑오개혁에서 `대군주\'라 하였던 국왕의 칭호를 `황제\'로 고쳤다. 조선정부가 당면한 자주독립의 보존과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적 위상을 일신하며 타열강들과 대등한 면모를 갖추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1899년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 반포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을 현실화하였다. 이 `대한국국제\'로 황제는 무한불가침의 군권(君權)을 향유하며, 입법 · 사법 · 행정 · 사전(赦典) · 강화 · 계엄 · 해엄에 관한 권한을 규정하였다. 왕권이 갑오개혁 이전으로 복고되었을 뿐 아니라, 여기에 근대 제국의 절대왕정체제를 도입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법제적으로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고종은 자신이 중심이 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그 개혁추진을 지지하여 주는 집단으로 유교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소위 넓은 의미의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라고 할 수 있는 세력으로 이들은 구본신참 논리와 연결되면서 대한제국 유지의 지지기반으로 작용하였으며, 이 밖에 1880년대 이래 새로운 교육기관에서 성장한 지식인 사회세력들이 개혁사업에 참여했다고 본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요청되던 내정개혁이다. 근대화 작업의 추진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구규(舊規)로 본을 삼고 신식을 참조한다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언뜻 복고주의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다. 광무개혁에서의 복고주의적 경향은 왕권의 강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왕실재정과도 관련되어 있다. 갑오 · 을미개혁 당시에는 왕권의 제약 뿐 아니라 왕권을 뒷받침하여 주는 왕실재정까지도 통제를 받아왔고, 그것은 자연 종친의 부양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왕실재정 형편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관파천 이 후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왕실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가지 움직임이 있었다. 고종은 개혁의 중심을 황실직속 부서인 궁내부에 두었다. 그리하여 궁내부를 확장하여 26개 부서를 중심으로 이곳에 재정사업을 집중시켜 추진한 것이다. 각종 잡세를 부활시켰고, 홍삼(紅蔘)의 제조 · 판매권, 농상공부 소관 광산의 궁내부 이관을 통한 광산개발사업, 백동화(白銅貨) 주조의 특허, 수리 · 관개사업 등을 궁내부 소관으로 하여 재정을 증대시켜 갔으며, 심지어는 매관매직을 자행하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왕실 재정형편은 탁지부에 정부관원의 봉급자금을 빌려줄 만큼 호전되어 갔다. 그리고 막대한 재정지출을 요하는 사업은 차관을 도입하여 시행하려 하였다. 1901년에 `운남신디케이트\'와 체결하였던 5백만원의 차관도입 계약의 성립은 그러한 의도의 구현이었다.
고종태황제 - 시대상 (8)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왕권 · 왕실재정 측면에서는 비록 복고적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대한제국기 여러 부면에서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먼저 군사력이 보강되었다. 서울의 친위대(親衛隊)가 개편되어 2개 연대로 증강되고, 2개 연대의 시위대(侍衛隊)가 창설되었으며, 호위군도 호위대(護衛隊)로 개편, 증강되었다. 지방군도 증강되어 을미개혁 당시까지는 평양 · 전주 진위대(鎭衛隊)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 뒤 계속 증설되어 2개 진위대, 14개 지방대대로 늘어났고, 이는 다시 6개 연대의 진위대로 통합 개편되었다.

 갑오개혁 당시부터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던 양전사업(量田事業)도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전국 토지의 약 3분의 2에 달하는 218군에 대한 양전을 마치었다. 양전사업이 시작되면서 지계(地契) 발급 사무도 시작되었다. 이 지계는 입안제도(立案制度)를 근대적 소유권제도로 발전시켰다고 하는데서 주목되는 것이지만, 양전사업이 중단되면서 지계발급도 중단되고 말았다.

 상공업진흥정책도 당시의 여론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정부 스스로가 제조공장을 설립하거나 민간제조회사의 설립을 지원하는 것,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거나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 민간제조회사의 근대적 기술습득을 장려하거나 기술자 장려책을 강구하는 것 등이 있었다. 왕실도자기소의 설치, 유리공장 · 방직공장 등도 설립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각 부면에 걸쳐 이미 특권적 성격을 벗어난 근대적 회사와 실업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과학기술을 이용한 각종 기계나 윤선(輪船) 등이 제조되었다. 또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제도(度量衡制度)도 새로 제정, 실시되었다.

 각 지역간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통신 · 교통시설도 개선되어 갔다. 특히 아관파천시 러시아파견 특사의 정부와의 교신내용이 일본에 모두 수집되었던 사실은 우리의 독자적인 통신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청국과 일본의 통신망에 의존하고 있던 현실에서 재래된 것이었다. 때문에 통신원을 설치 전국적으로 우편 전보망을 확충하였고, 서울 · 인천 · 평양 · 개성 등지에 전화가 개설되었다.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부설된 경인 · 경부선 철도의 개통에 임하여, 자주적인 유통망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는 서울-의주간 · 서울-원산간 철도부설 계획으로 나타났다. 준공식을 시작하였거나 발기위원회가 준비되는 등 실행에 옮겨졌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자본도입의 차질과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 완전한 실현은 보지 못하였다.

 외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서울에 발전소가 건설되어 전등이 켜지고 전차도 운행되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도 몇가지 주목할 만한 개혁이 있었다. 호적제가 시행되고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으며,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 등이 설립되었다. 또 관원들은 관복으로 양복을 입게 되었으며, 1902년에는 을미개혁을 좌절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단발령이 다시 내려져 관원 · 군인 · 경찰이 상투를 자르게 되었다.

 외교적인 면으로는, 해삼위(海蔘츂) · 간도지방으로 이주한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삼위통상사무 · 간도관리사가 설치되었고, 북간도의 영토편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 1899년에는 오랫동안 종주권을 주장하여 오던 청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공사의 교환이 실현되었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위상정립 방침에 부응하여 총영사나 대리대사급을 파견하던 영국 · 독일 · 프랑스 · 러시아 등이 주재관을 공사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고종태황제 - 시대상 (9)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1903년 일본으로부터 군함 양무호(揚武號)를 구입하였으며, 5월경에는 칙령으로 서양열강들이 징병제를 시행하는 것과 같이 우리 나라도 징병제 시행과 함께 육해군 창설을 준비하도록 모든 관서들이 협조하라고 지시한 것 등은 우리 정부가 군사력 보존을 위한 일정한 인식을 가지고 행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러일전쟁의 발발에 즈음하여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내외에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정부의 국외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진주를 시작으로 2월 16일에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초안을 제시하였다. 한일의정서의 체결에 강력히 반대한 고종이 주도하던 광무개혁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용익은 불법적으로 일본에 압송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강제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조인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한로조약(韓露條約)을 폐지하고 그 동안 러시아인에게 허여된 허가권의 폐기를 선언하였으며, 러시아공사관도 철수를 단행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21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정부 각 부처에 합법적으로 일본인들을 포진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재정고문 맥하다(目賀田太郞)을 시작으로 학부 · 경무청 등 각 부처에 일본인이 재직하게 되었고, 친일외교관인 미국인 스티븐스가 외교고문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강력한 내정간섭에, 1905년 3월 고종은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견제를 호소하는 밀서(密書)를 상해의 러시아 소장(少將) 멧시노에게 전달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윤병구(尹炳求) · 리승만(李承晩)을 밀사로 파견하여 미국 루스벨트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토록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견제역할을 할 수도 없었고, 이미 일본과 필리핀 문제로 한국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밀약한 미국이 우방이 될 수 없었다.

 11월에 이르러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 강제로 조인하였다. 고종은 황실고문인 미국인 헐버트에게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만방에 알리도록 지시하였으며, 각지에서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항쟁이 일어났고, 민영환 · 송병선 등 자결로써 을사조약의 체결에 항거하는 유생들도 있었다. 1906년 1월 <런던타임즈>는 을사조약이 강요에 의한 것임을 보도하였고,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가 <국제공법>이라는 잡지에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주한일본공사관과 각지의 영사관을 철폐하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개청하여 주한 일본헌병이 대한제국의 행정 · 사법경찰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영국 · 청국 · 미국 · 독일 공사 등은 차례로 귀국 철수한 후 총영사나 영사만을 잔류시켰다. 통감부는 언론규제를 목적으로 한 보안규칙도 공포하는 등 강압을 강화하자 고종은 밀지(密旨)를 내려 지방 의병운동을 일으키도록 하기도 하였다. 통감부는 1906년 7월에 이르러 경위원(警衛院)을 폐지하고 경운궁(덕수궁)의 경비권을 일본경찰이 강탈하고, 궁중 출입시에는 일인(日人)이 장악한 경무고문부의 출입허가증이 필요한 궁금령(宮禁令)을 공포하여 국왕과의 접촉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통감부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1907년 4월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의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항쟁은 그치지 않았고,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목적의 국채보상연합회의소가 조직되어 전국민적인 국채보상금모집운동이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전국민적 항일운동과는 배치되는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조직되어 일본의 사주에 외교권의 대일위탁(對日委託)을 주장한다거나 국채보상운동을 비난하는 등 매국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고종태황제 - 시대상 (10)
제 26대조   이름(한글):고종태황제   이름(한자):高宗太皇帝

1907년 4월 고종은 이상설(李相卨) · 리준(李儁)에게 친서(親書)를 주어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토록 하였으며, 헐버트에게는 이들을 돕도록 특지를 내렸다. 헐버트는 헤이그에서 이들과 합류하여 을사조약의 체결이 고종의 뜻이 아님을 알렸고, 헤이그특사 파견기사가 미국신문에 게재되면서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에게 헤이그특사파견을 항의하였다. 이상설 · 리준 · 리위종(李瑋鍾)은 만국평화회의 회장에게 본회의 참가를 신청했지만 신청이 거절되자 리위종이 만국기자협회에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고, 분을 이기지 못한 리준은 헤이그에서 사망하였다. 헤이그특사 파견문제에 대해 일본내각은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강경책을 시달함으로써 이완용(李完用)은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였으며, 이토오 히로부미도 고종에게 헤이그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황태자로 하여금 국사를 대리케 한다는 조직을 발표토록 하였다. 그리고 1907년 중화전에서의 황제양위식(皇帝讓位式)이 거행됨으로써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하고 물러났다.

 광무개혁을 주도하였던 고종의 국제정보에 대한 식견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집옥재(集玉齋) 장서인이 찍힌 장서가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 중국본 도서로 4만권이 있다. 이는 고종이 친정 전후부터 중국 상해 서점으로부터 구입한 서적들이다. 이중에는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문물 소개책자들이 많아 일종의 서양정보 수집이라 하겠으며 외국조약문들도 수집되었음은 말할 것이 없겠다.

 고종년간 간행되었던 책들로는 <동문휘고(同文彙考>의 속간(續刊), <통문관지(通文館志)>, <통문관지속편(通文館志續編)>, <삼정도설(三政圖說)>, <법규유편(法規類編> 등의 서적과 각종 사찬의 서적들이 간행되었으며, 외국인들도 많은 기록을 남겼다. 1894년 1월부터는 내각에 관보과를 두고 <관보(官報)>가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민간에서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발간되어 대중매체로서 기능을 시작하였다.

 고종에 관해서는 양극적인 서술이 있다. 고종황제가 신하를 잘 다루고 제도에도 밝았다는 평으로, 조선 26왕 중에서 세조와 영조를 합친 유능한 제왕이라는 언급이 있는 반면에 시사에 어둡고 나약한 사람이라는 표현과 함께 아버지 대원군과 아내 명성왕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우유부단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다.

 개항 이래 내정개혁을 단행 근대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결과는 고종에 대해 대부분 아주 무능했던 왕으로 평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입각한 한국역사 비판 속에서 더 왜곡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3 · 1운동이 일어난 계기도 고종의 의문의 죽음으로 그 장례식을 기해 일어났다. 일본이 고종에게 일본에 의한 한국통치를 추인하도록 강요하다 이를 거절하자 고종을 독살함으로써 3 · 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점까지 공화제를 주장하는 사람보다는 대한제국의 복벽운동이 국권회복운동의 초점으로 국가의 중심으로 고종을 생각하였음을 상기해 볼 일이다. 3 · 1운동 이 후 상해임시정부로 민국정부 수립을 통해 근대사의 전개가 이루어짐으로써 고종황제의 시대는 끝났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제 27대조   이름(한글):순종효황제   이름(한자):純宗孝皇帝

생애와 시대상

 고종은 왕으로 등극한 지 10년 되는 해부터 시작된 친정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더욱이 외부에서 계속되던 개항의 압력과 안으로 민의 어수선한 움직움, 그리고 또다시 변형된 세도정치의 일환인 민씨 척족의 발호로 개인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고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는 왕실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큰 경사일 수 있는 순종효황제(이하 순종이라 함)의 탄생이 있었다. 그 이전 이미 원자를 얻었으나 일찍 요서(夭逝)한 탓으로 나라가 큰 슬픔을 겪은 바 둘째의 출생은 출생이전부터 남다른 바람 속에 준비되었다. 늙은 궁인이 일찍부터 영험하다고 여겨지는 영변의 묘향산과 연안의 남대지에 나아가 세손의 탄생과 이후의 축복을 기원하였는데 그곳에서 모두 기이한 조짐과 꿈을 얻었고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이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휘는 척이요,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으로 이는 고종이 그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지어준 것이다. 출생 다음 해인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77년 1월에 사부(師傅) 상견례를 시작으로 왕자로서의 수업을 시작하였다.

 과거 고종이 왕자 수업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에서 왕위에 오름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겪은 바 있었기에,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일찍부터 왕자로서의 수업을 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1882년 나이 9세 되던 해, 고종 자신이 직접 아들의 손을 잡고 성균관 문묘에 나아가 배알하고 입학례를 행하였다. 이로서 본격적인 왕자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주 바른 길로 가르쳐 독애로 해치지 않게 조심하였다. 얼마 후에는 민씨(후에 순명효황후)를 맞아 가례를 행하였는데, 그녀는 여은부원군 충문공 민태호의 딸로서 왕실에 들어와 효도로서 양전을 섬기면서 덕행을 쌓았다.

 아버지 고종이 학문에 전념하도록 도왔다면, 어머니 민비는 아들의 행복을 천지신명께 빌기 위해 많은 의식을 행하였다. 이렇게 순종은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과 남다른 총명과 예지로 기대 이상의 훌륭한 성년으로 성장하였다. 고종은 자주 순종의 총명함을 여러 대신 앞에 자랑하였다. 순종은 한가지 행동이나 언행에도 자의로 행동하는 일이 없었고 효를 인의 근본으로 삼았다. 양궁이 병이 나면 근심하는 빛으로 띠도 풀지 않았으며 양궁의 침선이 회복된 뒤에야 평상시처럼 행동하였다. 일상의 반찬도 먼저 드리고 나서 그 나머지를 들었다. 이러한 그에게 1895년 8월의 명성왕후 시해사건은 큰 슬픔이자 충격이었다. 갑작스레 어머니를 잃은 그는 깊은 비탄과 상심에 빠졌으나 슬픔을 억제하며 환한 얼굴과 부드러운 빛으로 오히려 부왕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또한 사사로이 있을때는 웃고 즐기는 일이 없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역대 제왕가의 어진 법률과 아름다운 모범을 따랐으며 우리 나라 전례에도 통달하여 하나의 글귀에도 잘못 앎이 없었다. 성현을 존모하고 정도를 보호하고 이단을 배격하여 고종이 일찍이 자신과 동궁(순종)이 유교를 으뜸으로 삼을 것이라는 조서를 내릴 정도였다. 1897년 9월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왕세자에서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2)
제 27대조   이름(한글):순종효황제   이름(한자):純宗孝皇帝

1904년 그의 부인 순명후가 3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3년의 상기를 마친 1906년, 황태자비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다는 조종의 의견을 따라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았다.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법도 있는 선비집 규수의 행실을 바르게 배워가며 자란 그녀는 황후의 자리에 올라서도 지위의 존귀함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과시하려는 태도가 없어 왕실 내외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1907년 7월 순종은 고종의 양위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역대 왕이 다음 왕에게 선양하는 것과는 달리 그 시작부터가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 정객의 매국행위로 빚어진 것이었다. 이미 일본은 러일전쟁 이 후 조선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단계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 과정의 하나가 을사조약을 통한 외교권의 장악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이 이 협정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이 협정이 처음부터 형식을 갖추지 않았으며 자신이 이를 인정한 바 없다는 내용으로 각국에 친서를 보내는 한편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리준, 이상설, 리위종 등을 보내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제국 침탈을 저지하려고 하였다(해아밀사사건). 이에 이전부터 계속된 고종의 강력한 저항에 적지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던 일본은, 이 사건을 트집잡아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기회로 포착했다.

 따라서 해아밀사사건 이후 며칠 만인 7월 7일 통감 이등박문은 본국의 총리대신(西園寺)에게 `밀사해아파견에 관하여 한제(韓帝)에게 엄중 경고하고 아울러 대한 정책에 관한 묘의(廟議)의 결정을 품청(稟請)하는 건\'을 전문으로 보내었다. 이를 접수한 일본 정부는 7월 12일자로 `한제의 밀사파견에 관련하여 묘의 결정의 대한 처리방침 통보의 건\'을 하달하였는데 이 전문의 요지는
“한국정부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여야 하며, 이에 필요한 조치권한은 통감에게 일임한다. 이러한 체제는 한제의 조칙이 아니라 양국간의 협약으로 만들어져야 하므로 이를 위해서 곧 외무대신이 한국을 방문하여 설명할 것”
이었다. 더불어 3개의 부기를 첨부하였는데 그 중 고종의 양위와 통감의 법령 결재권 장악 등의 2가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이는 고종의 양위가 7월 안에 강제로 이루어지고, 통감의 부서는 정미조약 2조에 한국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이라는 규정으로 곧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이를 위해 앞서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한 것과 이완용을 중용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대한제국의 황제권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내각 중심으로 변동시키려는 의도의 일환이었다.

 이미 조선의 식민지화를 꾀하고 있던 일본은 해아밀사사건을 통해 아예 고종을 퇴위시키고 통감이 내각을 장악하는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고종이 을사조약의 법적 결함을 잡아 저항하자 각종 법령 및 조약 등에 관한 공문서 처리제도의 장악이 국권침탈의 절대요건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제위에 있는 한 그들의 목적달성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판단으로 그들은 고종의 퇴위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게 되었고, 의정부의 내각으로의 개편 직후 해아밀사사건을 계기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궁내부의 격하는 이 목적 달성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보고, 통감을 대한제국의 부왕(副王), 섭정의 위치에 두는 구상을 제시했다. 즉, 통감이 모든 법령 제정 및 행정처분에 관한 것을 사전 승인하는 권한을 가지고, 내각이 제도적으로 법령 제정사무를 관장하여 이를 뒷받침하는 체제가 바로 그들이 그린 섭정체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꿈꾼 목표달성에 있어 고종은 방해자일뿐이었기에, 고종 대신에 자기들의 뜻에 크게 반항하지 않는 황제의 존재가 필요시 되었다. 그리고 이에 합당한 존재로 황태자(순종)가 지목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