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숙황제 - 생애 (2)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순조는 6월 기묘일에 정조가 승하(昇遐)하자 7월 갑신일에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재위 34년간은 국내외의 변화가 심각했던 시기였는데 순조는 세도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내역사의 모순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의 종묘와 사직을 지켜야 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802년(순조 2) 10월 갑인일(甲寅日)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는 안동김씨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증 영의정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간택(揀擇)하는 예(禮)는 이미 정조가 승하하던 해 봄부터 행하였다. 이 때부터 안동김씨의 세도기가 시작된다.

 1809년(순조 9) 정월 임오일에 혜경궁(惠慶宮)에게 치사(致詞) · 전문(箋文) · 표리(表裏)를 올리고 이어 진찬(進饌)을 행하였다. 이는 관례(冠禮)의 회갑(回甲)이 이 해 이 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 19년(을묘년)에 연희당(延禧堂)에서 진찬한 예(禮)를 계승해서 했는데 이는 옛날의 효사(孝思)를 본받은 것이다.
 가을 8월 정묘일에 효명세자가 탄생하였다. 6일 지난 계묘일(癸卯日)에 백관을 거느리고 직접 왕대비 · 혜경궁 · 가순궁(嘉順宮 : 순조의 생모의 수빈 박씨)에 치사(致詞) · 전문(箋文) · 표리(表裏)를 올렸으며 이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하례를 받았다. 가순궁에 전문을 올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에 명하여 모든 거행(擧行)을 한결같이 혜경궁에 행한 예(禮)에 따라서 하게 하였다.

 1812년 가을 7월 병자일에 원자(元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정축년에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았다. 1813년(순조 13)에 왕대비의 주갑(周甲)의 경사가 있어 직접 치사(致詞) · 전문(箋文) · 표리(表裏)를 올렸고 하례를 받은 다음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을축일에 혜경궁(惠慶宮)이 승하하였다. 대신들이 복제(服制) 때문에 의심을 하자, 왕이
“본생 부모(本生父母)에 대해 강등하는 것은 상하가 공통으로 같은 것이다. 비록 예절(禮節)에 없다고 해도 나 소자(小子)가 오늘날의 망극한 정리와 옛날 추모하던 마음에 의거하여 의당 의리에 근거하여 복제(服制)를 만들어야 하는데, 더구나 정자(程子) · 주자(朱子)의 정론(正論)이 있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대신과 관각(館閣)의 의논이 또 이와 같으니 다시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본생 부모는 강등하는 것으로 마련하여 들이라.”
고 하고, 드디어 대공(大功) 9월로 확정하였다. 조신(朝臣)에게는 복제가 없으나 임금을 따른다는 의리에 의하여 진현(進見) 때는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면서 9개월의 상기(喪期)를 끝마치기로 하였다. 혜경궁의 시호(諡號)를 헌경(獻敬)이라고 올리고 예절에 따라 현륭원(顯隆園)에 부장(附葬)하였다.

 1817년 2월 갑자일에 태묘(太廟) ·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세자의 알묘례(謁廟禮)를 행하였다. 3월 갑인일에는 세자의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1819년 3월 임자일에 왕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올렸다.
순조숙황제 - 생애 (3)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8월에 세자빈의 간택례(揀擇禮)를 행하였는데 풍양조씨가 선발되었다. 부사직(副司直) 조만영(趙萬永)의 딸이다. 10월 임인일에 왕세자가 친영례(親迎禮)를 행하였으며, 왕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군신(群臣)의 하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1821년(순조 21) 3월 기미일에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 김씨가 승하하니, 의논하여 휘호(徽號)를 예경 자수(睿敬慈粹)라고 올리고 시호(諡號)를 효의(孝懿)라고 올렸다.

 1821년(순조 21) 12월 병신일에 수빈 박씨(綏嬪朴氏)가 서거하였는데, 왕이 애통해 하는 것이 예법에 지나칠 정도였다. 은자(銀子) 1만 6천 냥을 내려 주면서 하교하기를,
“자궁(慈宮)께서 평일 임종의 일을 유념하시어 별도로 조치하여 두었던 것을 호조에 출급(出給)하는 것이니, 사의를 헤아려 보태 쓰도록 하라.”
고 하였다. 대신과 제신(諸臣)들의 의논을 적용하여 시마(쳠麻) 3월복을 입었다. 시호를 의논하여 현목(顯穆)이라고 올리고 궁(宮)은 경우(景祐), 원(園)은 휘경(徽慶)이라고 하였다.

 1823년(순조 23)에 장례를 치르고 상복을 벗은 다음 시사(視事)할 적에도 오히려 흰 의관(衣冠)을 착용하자, 대신(大臣)들이 법제에 어긋난다고 아뢰었다. 순조는
“편의에 따라 입는 것은 법복(法服)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 흰 옷을 입는 그런 뜻이다. 내가 고루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법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라면 상복(喪服)을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하고, 3년 동안 그렇게 하였다.

 혼궁(魂宮)을 창경궁(昌慶宮) 안에다 받들어 모시고 원관(園官)을 참봉(參奉)으로 개칭(改稱)하였다. 그 때마다 수경(守經)에 대한 의논이 있어 예법에 의거 간쟁하니, 왕이 말하기를,
“친상(親喪)에 대해서 진실로 스스로 극진히 해야 하는 것은 상하가 똑같은 것이다. 나도 또한 어떻게 인정과 예법을 똑같이 둘 다 사의에 맞도록 절충하지 않아서 종사(終事)에 유감이 있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이제 내가 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한다면 내가 의당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에 의거 이를 받아들여 허물로 삼고 감히 피하지 않겠다.”
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생시를 본받는 뜻을 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요, 감히 법제를 어긴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1827년(순조 27) 봄 2월에 왕세자에게 청정(聽政)할 것을 명하고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는 스스로 재결(裁決)하게 하였다. 세자가 소장을 진달하여 간절히 사양하니,
“오늘의 일은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나의 노고에 대해 네가 나눌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한두 번 뿐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우리 왕가(王家)의 예(禮)가 곧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사양을 한단 말인가? 아! 효우 공검(孝友恭儉)하여 경천 애민(敬天愛民)하는 것은 곧 열성(列聖)께서 서로 전한 심법(心法)인 것이니, 공경하고 조심하여 혹여 태만하거나 소홀이 함이 없이 내가 부탁하는 지극한 뜻을 잘 본받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달 갑자일(甲子日)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청정(聽政)에 대한 하례를 받고 묘 · 사 · 궁(廟社宮)에 고한 다음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세자빈의 산실(産室)을 만들고 5월을 기다려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신유일에 원손이 태어났고, 7일 정묘일에 인정전에서 원손(元孫)이 탄생한 데 대한 하례를 받았다.
순조숙황제 - 생애 (4)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세자가 순조의 존호(尊號)를 연덕 현도 경인 순희(淵德顯道景仁純禧)라고 올리고 왕비의 존호는 명경(明敬)이라고 올렸다. 9월 신해일에 자경전(慈慶殿)에서 보책(寶冊)을 받았고 명정전(明政殿)에서 하례를 받았다. 다음날 세자가 자경전에서 양전(兩殿)에게 진작례(進爵禮)를 행하였다.
 
겨울에 세자가 왕의 성수(聖壽)가 40세이고 즉위한 지 30년이 되는 두 가지 경사가 내년에 겹친다는 일로써 선조 · 숙종 · 영조의 고사(故事)를 원용(援用)하여 축하하고 진찬(進饌)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써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가 두 번째 이르고 더욱 간절하니,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저 굶주린 백성들을 생각하면 실로 불안한 마음이 더욱 깊다. 너는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모든 의물(儀物)을 한결같이 간략히 하는 쪽으로 따른 후에야 더욱 뜻을 봉양하는 효도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1829년(순조 29) 원일(元日)에 인정전에서 하례를 받았다. 2월 정축일에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찬(進饌)하니 명정전에 나아가서 받았는데, 구작(九爵)의 예(禮)를 행하였다. 3일이 지난 뒤 또 자경전(慈慶殿)에서 소작(小酌)을 올렸고, 이어 내연(內宴)을 행하였다. 11월에 명하여 원손(元孫)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삼았다.
 1830년에 어진(御眞)을 모사(模寫)하고 세자가 표제(標題)를 써서 규장각(奎章閣)의 주합루(宙合樓)에 봉안(奉安)하였다. 5월 임술일(壬戌日)에 세자가 별세하였다. 참최 3년의 복제를 행하게 하고, 시호를 효명(孝明), 묘호(廟號)를 문호(文祜), 묘호(墓號)를 연경(延慶)이라고 하였다. 8월 기축일에 양주(楊州)의 천장산(天藏山)에 장사지냈는데, 지금의 수릉(綏陵)이다.

 왕세손을 동궁(東宮)이라 하고, 강서원(講書院) · 위종사(衛從司)를 춘방(春坊) · 계방(桂坊)이라고 개칭(改稱)하였다. 수책(受冊)은 원래 정해 놓은 날을 써서 9월 경오일에 인정전에 나아가서 세손의 책례(冊禮)를 행하였으며, 이어 하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제도(諸道)의 구환(舊還)과 각공(各貢)의 구유재(舊遺在)를 탕감시키고 시전(市廛)의 요역과 군전(軍錢) · 결전(結錢) · 승역세(僧役稅) · 공전(貢錢)을 차등있게 견감시키게 하여 경사를 넓히고 화기(和氣)를 인도하는 뜻을 보였다.

 1831년 5월 8일 경우궁(景祐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작년이 곧 수빈(綏嬪)의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작헌례에 대해서는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나 갑자기 슬프고도 창황한 일을 당한 탓으로 정지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날에 예를 행하였다.
 순조는 1832년(순조 32)에 명온공주(明溫公主)와 복온공주(福溫公主)가 일찍 죽는 비통한 일이 잇따랐고, 우연히 부스럼 증세까지 얻어 11월 13일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왕의 공덕(功德)을 의논하여 문안 무정 헌경 성효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시법(諡法)에 의하면 충신(忠信)하고 예(禮)로서 접대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많은 백성들이 편안히 의지하는 것을 `안(安)\'이라 하며, 크게 보전하여 공을 세운 것을 `무(武)\'라 하고, 회유하는 덕으로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 또한 널리 알고 재능이 많은 것을 `헌(憲)\'이라 하고 주야로 경계(儆戒)하는 것을 경(敬)이라 하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정치를 확립시킨 것을 `성(成)\'이라 하고, 선조의 뜻을 계승하여 일을 성공시킨 것을 `효(孝)\'라고 하였다.
순조숙황제 - 생애 (5)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은 말하기를,
“왕은 덕업이 융성하였으니 의당 백세(百世)토록 제사하여야 합니다.”
라고 하여 여러 신료들과 의논하여 세실(世室)로 높였다. 다음 해 여름 4월 19일에 인릉(仁陵)에 장사지내니, 곧 교하군(交河郡)의 구치(舊治) 뒷산 등성이 을좌(乙坐)의 언덕이다.  어제 시문(御製詩文) 12권은 내각(內閣)에서 교인(校印)하여 열성 어제(列聖御製)에 편입(編入)한 다음, 이를 봉모당(奉謨堂)과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독후(篤厚)하며 침중하고도 깊은 도량을 지니고 있어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두려워하였고, 세세히 살피지 않고서도 환히 알았다. 정사를 처리할 때는 과묵(寡默)하였으며 의용(儀容)이 엄숙하고도 화목하였다. 안색이나 말을 일부러 부드럽게 하지 않아도 응접하는 즈음에 온수(溫粹)하고 겸화(謙和)하여 자만(自滿)하거나 긍장(矜莊)하는 마음이 없었다. 유현(儒賢)을 높여 숭상하고 낭묘(廊廟)에 위임하는 것을 다스림의 근본이자 정치의 요체로 삼았다. 대저 크고 작은 진언(進言)들은 번번이 흡연(翕然)히 받아들이기를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며, 그 가운데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있어도 또한 갑자기 꺾어누르지 않았다.

 순조는 명경왕비(明敬王妃)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장남은 곧 효명세자(孝明世子)인데, 순조를 잇는 헌종은 효명세자의 아들이다. 이에 헌종은 즉위하여 아버지 세자를 익종대왕(翼宗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차남은 조졸(早卒)하였다. 장녀는 명온공주(明溫公主)인데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하였다. 차녀는 복온공주(福溫公主)인데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하였다. 둘 다 일찍 졸서하였다. 계녀(季女)는 덕온공주(德溫公主)이다. 영온옹주(永溫翁主)는 숙의 박씨(淑儀朴氏)에게서 얻었는데, 가례를 올리기 전에 별세하였다.
순조숙황제 - 시대상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시대상

 순조조는 이른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안동 김씨의 세도기라고 한다. 그것은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순조의 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게 한 장본인이었다.

 1801년(순조 원년)에 궁시(宮寺) 노비들의 세공법(世貢法)을 파기시키고 그 적안(籍案)을 가져다가 큰 거리에서 불에 태워버림으로써 소민(小民)들의 누적된 억울함을 제거하였다.
 여름에는 화성부(華城府)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고 선조(先祖)의 어진(御眞)을 유여택(維與宅)에서 옮기었다. 이것은 우러러 의지하고 싶다는 정조의 유의(遺意)를 따른 것이다.

이 때에 서양교(西洋敎)라는 기독교가 북쪽에서 들어왔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몰래 서로 전습(傳習)하여 하늘을 속이고 귀신을 무시하고 임금을 버리고 부모를 등짐으로써 강상의 윤리를 파괴시키고 백성들까지 유혹하였으므로, 이들 가운데 깊이 빠져든 자는 목을 베고 그 나머지 참여자는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이를 두고 신유사옥(辛酉事獄)이라 한다.

 벽파인 정순대비는 1802년(순조 2)에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시키고, 영의 재용(財用)을 모두 내탕(內帑)에 예속시키게 하였다. 순조가
“장용영을 이미 혁파하였으니 그 창고의 저축은 절로 출급(出給)할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내부(內府)에 유치시킬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대비(大妃)는 속히 처음에 내린 명을 정지시키게 하고 비축된 것은 모두 대농(大農)으로 귀속시키게 하였다.

 1803년(순조 3)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철회하니 왕이 직접 서정(庶政)을 총괄하였다.
 1804년(순조 4) 봄에 정순왕후에게 광헌(光獻)이라는 존호(尊號)를 더 올리고 군신(群臣)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평양성 안에 불이 나서 5천여 가호가 연소되자 부호군 이상황(李相璜)을 보내어 위로하고 세금을 덜어주게 하였다.
 1805년 정월 정유일(丁酉日)에 정순대비가 승하하였다. 이해는 바로 대비가 회갑을 맞는 때였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 지난 겨울부터 있었으므로 존호를 융인(隆仁)이라고 올리고 나서 책보(冊寶)가 완성되자 예의를 갖추어 빈전(殯殿)에 올렸으니, 이는 생시를 본뜬 것이다. 휘호(徽號)는 소숙 정헌(昭肅靖憲)이라고 올리고, 시호(諡號)는 정순(貞純)이라고 하였다.

 1806년에 김달순(金達淳)을 처음 상직(相職)에 임명하였는데, 박치원(朴致遠) · 윤재겸(尹在謙)을 포장(褒裝)하도록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세초(洗草) 대상에 넣게 한 것은 선조(先祖 : 정조)께서 앙청(仰請)하여 영조께서 특별히 허락한 것으로, 이는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는 일에 관한 문적(文蹟)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 아버지 · 손자는 본래 한몸인 것인데 영조와 선조(先祖)께서 차마 볼 수도 거론할 수도 없었던 일에 대해 오늘날에 와서 포증(褒贈)을 시행한다면 죄를 얻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양조(兩朝)의 성의(聖意)를 저버리는 것이 될까 염려스럽다.” 라고 하였다. 김달순이 또 소장을 진달하니, 왕이 경연에 참여하였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전편(全篇)의 내용이 음참(陰慘)스러운데다 간언을 꺼린다고 한 말은 그것이 의당 어디에 속해야 하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1807년(순조 7)에는 홍낙임(洪樂任)의 관작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홍낙임은 곧 혜경궁(惠慶宮)의 아우이다. 일찍이 신유사옥 때 해당 관리가 이를 빙자하여 죄에 얽어 넣어 죽였고, 아울러 종실에서 폐하여진 된 은언군 인과 그의 처 및 아들의 처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는데 이는 왕의 뜻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자전(慈殿)의 춘추가 80을 바라보고 환후(患候)도 위중하였으므로 이에 특별히 사유하여 자심(慈心)을 위열(慰悅)시켰다.

 강릉(江陵)에서 삼(蔘)을 공상(貢上)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공상의 3분의 1을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 때 이경신(李敬臣)의 옥사가 있었는데 김종수(金鍾秀)가 거기에 귀결되었다. 이에 김종수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고 정향(庭享)에서 축출시키도록 하였다.
순조숙황제 - 시대상 (2)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1808년에 내탕(內帑)의 면포가 부족하여 병조에서 50동(同)을 들여오게 하도록 명하였다. 해조(該曹)의 판서(判書)가 소장을 올려 고법(古法)이 아니라고 아뢰니, 왕은 비답을 내려 은혜롭게 포장(褒奬)하고 즉시 도로 내려보내도록 명하고는 한 필의 면포도 남겨두지 않도록 하였다.
 서양학문의 수용에 대한 갈등의 일면도 있었다. 당시 조선에선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이라 하여 북경(北京)에서 서책을 구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는데, 유사(儒士)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기자 경사(經史)와 순유(醇儒 : 결백하고 정직한 유교의 선비)의 문집(文集)은 구입을 허락하였고, 기문(奇紋)의 필단(疋緞 : 필로 된 비단)을 금하는 것에 대해선 거듭 엄중히 신칙하였다.

 1809년에 지진으로 함흥(咸興)의 민가(民家)중 화재를 당한 것이 수천 호에 이르렀으므로 승지 박종훈(朴鍾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게 하고 녹용(鹿茸)을 견감시키고 단목(丹木)을 반하하는 것을 1803년(순조 3)과 같게 하였다.
 팔도(八道) · 사도(四都)의 도신(道臣)과 수신(守臣)들에게 하유하기를,
“백성은 제왕에게는 하늘처럼 소중한 것이고, 곡식은 백성에게 하늘처럼 소중한 것이다.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곡식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춥고 배고픔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힘들고 괴로움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으며, 걱정과 탄식이 여리(閭吏)에서 많이 들리고 세금의 징수가 가난한 민가에 날로 가중되며, 뼈를 깎는 폐단을 지니고 있는데도 위에서는 이를 들을 길이 없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는데도 위로 통달될 수가 없다면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더라도 또한 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사형수 가운데 오래도록 판결되지 않은 60여 옥안(獄案)을 심리하였는데 목숨을 살려준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다.
 1810년(순조 10)에는 영선(營繕)하는 공역(工役)과 해마다 으레하는 연경에서의 무역을 모두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1811년(순조 11)에 경연에서 강의할때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위사(衛士)들이 먼 고장에서 가산(家産)을 기울여 발을 싸매고 올라와서 수위(守衛)하느라 춥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고통을 생각하여, 묘당(廟堂)에 명하기를 향민(鄕民) 가운데 위사에 편입 예속되어 온 사람들을 큰 거리에 모두 모아 놓고서 일일이 위로하면서 그들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겨울 12월 관서(關西)지방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반란을 일으킨 정상을 급히 알렸다. 적도(賊徒)들이 가산(嘉山)에서 일어났는데 군수(郡守) 정시(鄭蓍)가 사절(死節)하였다. 이 때 백성들이 전쟁을 몰랐었고 거듭 흉년이 들었으므로 적들이 이런 틈을 타고 창궐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덟 고을이 무너져 버렸다. 이요헌(李堯憲)을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부서(府署)를 설치하여 절제(節制)하게 하고, 중군(中軍)을 보내어 경영병(京營兵)을 이끌고 가서 진압토록 하였다.

 1812년 여름 4월에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었다. 처음 관군이 송림(松林)에서 적병을 격파시키자, 적병은 도주하여 정주(定州)로 들어가서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스스로 지켰는데 성벽이 견고하여 즉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순무 중군(巡撫中軍) 류효원(柳孝源)이 화공(火攻)으로 격파하여 홍경래 등을 베어 그 수급을 바쳤다.
순조숙황제 - 시대상 (3)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순조는 하교하기를,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민읍(民邑)을 복구시키는 정사와 공을 논하여 상을 시행하는 거조에 대해 강구하여 시행토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이어 진헌(進獻) 가운데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정지하거나 견감시키게 하였고, 환곡(還穀) 가운데 정퇴(停退)하였거나 포흠(逋欠)된 것도 또한 탕감시키라고 명하였다. 진곡(賑穀)을 주어 가난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요역을 면제시킴으로써 향군(鄕軍)을 위로하였으며, 장사(將士)들 가운데 충성을 다 바쳐 공을 세운 사람은 장사(葬事)지내는 것을 도와주고 그 아들을 관리에 임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서 사람들 가운데 의리에 분발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친 사람은 특별히 포장(褒奬)하여 기용하였으므로 현직(顯職)에 이른 사람이 많았다.

 내각(內閣)에 명하여 국(局)을 열고 정조의 어제 전서(御製全書)를 교인(校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완성되자, 또 시(詩)와 문(文)을 열성 어제(列聖御製)에 합쳐 편찬하였고 계속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예제(睿製)를 인간(印刊)하게 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되자, 이를 받들어 봉모당(奉謨堂) · 화령전(華寧殿)과 다섯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1814년에 기전(畿甸) · 영남 · 호남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방물(方物) · 삭선(朔膳) · 갑주(甲胄) · 절선(節扇)의 공상(貢上)을 정지하게 하고 내탕(內帑)의 은화(銀貨) · 단목(丹木) · 호초(胡椒)를 나누어 주어 진수(賑需)를 돕게 하고 관서(關西)의 곡식을 배로 운송하여 경기 백성들을 먹였다.
 1816년(순조 16)에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왔다는 것으로 충렬사(忠烈祠), 현절사(顯節祠)와 문정공(文正公) 윤황(尹惶),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게 치제(致祭)하였으며,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순절한 제신(諸臣)들에게도 두루 미쳤는데, 이는 영조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1821년(순조 21)가을에는 괴질이 유행하여 서쪽에서부터 들어왔는데 열흘 사이에 도하(都下)에서 발생한 사망자의 수효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왕은 크게 여질(쪵疾)을 우려하여 널리 구휼을 시행하였고 특별히 아경(亞卿)을 보내어 여러 산천에 양재제(禳災祭)를 지내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도 모두 여제(쪵祭)와 위제(慰祭)를 설행하였다.

 이보다 먼저 연경의 서사(書肆)에서 새로 편찬한 <황청문헌통고(皇淸文獻通考)>를 구입하여 왔는데 거기에 기재되어 있는 본조(本朝) 신축년 사대신(四大臣)의 일이 거짓말로 더럽혀 있어서 사실과 어긋나 있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가져다 열람하여 보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급히 사신(使臣)을 보내어 변정(辨正)하고 거짓으로 주달된 구어(句語)를 간거(刊去)시키게 하였다. 1822년(순조 22)에 사신이 돌아왔는데 개정본을 가지고 왔으므로 사건 전말을 종묘에 고하였다.  1823년 서류(庶流)의 한품(限品)을 소통(疏通)시키는 것 때문에 대신과 경재(卿宰)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이어 묘당(廟堂)과 전조(銓曹)로 하여금 강구해서 의정(議定)하게 한 다음 기록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순조숙황제 - 시대상 (4)
제 23대조   이름(한글):순조숙황제   이름(한자):純祖肅皇帝

1826년(순조 26) 봄에 하교하기를,
“가난한 농부들이 춘궁을 겪는 것이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았겠는가마는 이제 지난 가을의 큰 흉년을 당한 끝이니, 불쌍한 나의 기전(畿甸)과 호서(湖西)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들어가 보면 집집마다 텅비어 있고 나가서 보면 마을마다 밥짓는 연기가 끊겼으니, 울부짖으면서 길바닥에 쓰러지고 서로 끌어안은 채 구렁에 죽어 나뒹구는 것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옛사람은 필부가 살 곳을 얻지 못해도 오히려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더구나 나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팔도(八道)의 백성들로 하여금 항상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하고 흉년이 들어 굶주린 해에 수많은 생령(生靈)들에게 유망(流亡)하다가 쓸어져 죽는 환란을 당하게 하고서도 구제할 수가 없으니, 무슨 마음으로 쌀밥과 비단옷이 편안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일반 백성에 대한 왕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본국의 순난(殉難)하고 수훈(樹勳)한 신하들의 충성과 공로에 대해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순절한 곳과 함께 순국한 장사(將士)들을 위하여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주되 제관(祭官)은 본도(本道)의 수령들 가운데 품질(品秩)이 높은 사람을 가려서 차임하게 하였다. 그리고 두 충렬공과 문열공의 집안에서는 지금 벼슬살이하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봉사손(奉祀孫)을 해조(該曺)로 하여금 이름을 물어서 거두어 기용하게 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 충장공(忠壯公) 권율(權慄)의 가묘(家廟)에도 또한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상주(尙州)의 증연(甑淵)에서 세 종사관(從事官)이 순절한 곳에도 또한 똑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신민의 협력을 얻고 왕실의 안정을 기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해에 기전 · 호서 · 해서에 기근이 들었는데 기전이 가장 극심하였다. 이에 무너진 가호(家戶)에 대한 휼전(恤典)은 특별히 더 후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며, 사관(史官)을 나누어 보내 두루 방문하게 한 다음 드러나 있는 유해는 거두어 묻어주고 물에 빠져 죽거나 산사태에 눌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넉넉하게 구휼하게 하였다.
 또 삼도(三道)에서 정조(正朝)에 올리는 방물(方物) · 물선(物膳)을 모두 그치게 하여 진구의 수요를 돕게 하였으며, 도하(都下)에 가호(家戶)를 초출하여 쌀을 팔게 하는 정사를 시행하였다.

 왕성(王城) 안의 개천(開川)이 하류가 막혀 장마가 지면 번번이 물이 범람하고 가옥이 잠겼으므로 도민(都民)들이 고통스럽게 여기자, 왕이 토사를 쳐내고 물길을 트도록 명하였다. 이어 1760년(영조 36)에 지평(地平)이 되게 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청계천 수표교에 수표를 세워 장마와 가뭄을 경고케 하고 또 도량형의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헌종성황제 - 생애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생애

 헌종성황제(이하 헌종이라 함)은 순조 27년 7월 18일 신시(申時)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와 세자빈 조씨 사이에서 적사(嫡嗣)로 태어났다. 이름은 환(奐)이요 자(字)는 문응(文應)이다. 세자빈 조씨가 효명세자에게서 옥을 아로 새긴 나무를 담은 갑(匣)을 받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하였으며, 탄생일에는 한 무리의 학(鶴)이 전상(殿上)에서 날아 오래 돌아 다니니 궁중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헌종은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섰다. 겨우 몇 살 안되어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 중에서 1백여 자를 통하였는데, 효명세자가 눈에 익혀진 것이리라고 생각하여 다른 글에서 시험하면 문득 그 전부터 알던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아무자입니다.”
하니, 매우 기특히 여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앞으로 나보다 낫겠다.”
하였다. 효명세자가 4년 동안 순조의 국정을 대리청정하다가 1830년 5월 6일에 세상을 떠났을 때, 헌종의 나이 4세 였다. 헌종은 사람들이 슬프고 황급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아모(阿母)의 품에서 울며
“나도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다.”
하였고, 빈전(殯殿)에서 호읍(號泣)하는 소리를 들으면 유희를 빨리 그치고 자리를 당겨 부복하여
“나도 참반(參班)한다.”하여 슬픈 용모는 남을 감동시켰다.

 1830년(순조 30) 9월 헌종은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832년 9월에는 빈객(賓客)과 상견례를 행하고 이어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었다. 재위중 강(講)에는 <소학(小學)> · <대학(大學)> · <논어(論語)> · <사략(史略)> · <시전(詩傳)>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갱장록(羹墻錄)> ·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읽어 학문연마에 힘썼다. 그러나 헌종은 학문을 그리 즐기지는 않은 것 같다. 헌종 5년 3월,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선조께서는 거둥이나 전좌(殿座)하는 날이라도 조금만 여가가 있으면 반드시 강대(講對)를 명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일이 있으면 문득 정지하도록 명하고, <시전(詩傳)> 강독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으나 3권을 마치지 못했다.”고 하였으며, 우의정 정원용(鄭元容)은 3년에 <시전(詩傳)> 2권을 끝내지 못했다 하여 매일 3강을 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헌종의 검소함은 몸에 배었던 것 같다. 평상시 무명옷을 입었으며, 특히 <갱장록>을 강할 때에는 영조 · 정조 · 순조의 절검에 대해 논하고, 음식 사치는 의복보다 더한 것이라 하였으며, 재변시에는 반찬 가짓수를 줄임으로써 경계의 뜻을 보이었다.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순종이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자, 성복(成服)하고 관례를 치른 후 면복(冕服)을 갖춘 후 빈전에서 대보를 받아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대행대왕의 시호를 문안 무정 헌경 성효(文安武靖憲敬成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순종이라 하였으며, 생부인 효명세자를 추존하여 익종대왕이라 하고 시호를 돈문 현무 인의 효명(敦文顯武仁懿孝明)이라 하였으며 묘호는 수릉(綏陵)이라 하였다. 명경왕비(明敬王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대비라 하고 모빈(母嬪)을 높여 왕대비(王大妃)라 하였다.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垂簾)하고 청정(聽政)을 같이하였는데, 맨 먼저 산림의 선비를 거용(擧用)하되 경연(經筵)의 벼슬을 제수하고 그 정초를 갖추고 대신 · 제신(諸臣)중 성학(聖學)을 진면(陳勉)한 자에게는 반드시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흉금을 비워 들었다. 또한 친히 유사(儒士)들에게 나아가 물었으며, 과시(課試)와 낭관의 일차윤대(日次輪對)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종성황제 - 생애 (2)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1837년(헌종 3) 정월 6일에 순종 · 익종을 태묘에 승부하고, 닷새 지난 10일에 국조의 상전(常典)에 따라 대왕대비께 문인(文仁)이라는 존호추존과 왕대비께 효유(孝裕)라는 존호를 올리고 백관의 진하를 받았다. 같은 해 3월 20일 11세로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는 안동김씨였다. 증 영의정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곧 효현왕후(孝顯王后)이며, 헌종 9년 8월 25일 대조전에서 16세로 승하하였다.

 1844년(헌종 10) 10월 21일에는 영돈녕부사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을 맞아들여 비로 책봉하였다. 후비에게서도 후손이 없자 국조(國祖)의 전례에 따라 사족(士族) 가운데서 처자를 가려 빈어(嬪御)를 둔다면 저사(儲嗣)를 구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라 함에 따라, 헌종 13년 7월 14세부터 19세까지 처자의 금혼령을 내리고, 10월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서 자손이 없었다.

 헌종 6년 12월 25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둠에 따라 7년인 신축년 정월 10일 인정문에서 조참(朝參)을 시작으로 친히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폐단을 금하고자, 궁방(宮房) · 제사(諸司)의 차인이 외읍(外邑)에서 세를 거둘 때 환포(還逋)를 인족(隣族)에게 침징(侵徵) 하는 폐단을 엄하게 금단하도록 명하였으며, 공물을 진헌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6, 7월의 전복 봉진(封進)을 영구히 혁파하도록 하였다. 또한
“나라를 검약으로 다스리는 것은 자신이 먼저 해야 한다.”
하며, 영남의 공삼(貢蔘), 관서 · 관북의 녹용(鹿茸)과 내국(內局) 상방(尙方)에서 매년 연경에서 사오는 것을 줄이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1843년(헌종 9) 10월에는 두후(痘候)를 20여일 앓다가 회복되었는데, 신하들이 사례를 들어 증광과거의 설행을 아뢰었으나
“내가 이번에 두 자성(慈聖)께 근심을 끼친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무슨 일컬을 만한 경사가 있겠는가?”
하며 정시(庭試)로 할 것을 명하였다가 정승의 차자(箚子)에 비로소 윤허하였다.

 익종의 능인 수릉(綏陵)의 풍수(風水)에 대해 형가(形家 : 지리가)의 숨은 의논이 많이 있기 때문에 헌종은 오래 불안해 하였다. 1846년 봄 능에 전알(展謁)하고 나서 지리를 살피는 자들에게 어전에서 말하도록 명하였는데, 모두가
“옮겨 모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고 대신과 재신들에게도 물었는데 모두 가하다 하므로, 양주(陽州)의 용마산(龍馬山) 아래에 땅을 가려 윤5월 20일 수릉을 옮겨 장례를 다시 지냈다. 헌종은 능침을 옮긴 날부터 날마다 미음과 죽을 들고 상선(常膳)을 들지 않았으며, 장구(葬具)를 갖추고 광중(壙中)을 마련하는 등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친히 살펴 처리하였다. 예관(禮官)이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1673년(현종 14) 행한 전례를 인용하여 대왕대비의 복색을 천담(淺淡)으로 의논하여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대왕대비께서 경인년에 장자를 위한 3년복을 입으셨고 예로는 3년복을 입어야 할 자는 개장 때에 시마복을 입는 것이니, 이번에는 계축년과 다르므로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다시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문의하였는데, 모두들 <의례(儀禮)>에
“개장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다.”
한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것이니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것도 같다.”
한 말을 인용하였으므로, 드디어 시마복으로 고쳤다. 헌종이 일에 대하여 밝고 삼가하는 것이 뭇 신하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었다. 대례(大禮)가 잘 이루어졌으므로,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여 양주의 성향(城餉)의 모곡(耗穀)을 감면하고 여사(轝士)로서 힘쓴 것은 시민(市民)만한 자가 없다하여 그 요역을 늦추고 유재(遺在)를 탕감하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