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성황제 - 생애 (3)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1849년(헌종 15) 4월부터 안색이 좋지 않고 수척하였으며 붓기가 있는 등 몸이 편치 않았음에도, 태묘(太廟)에 전기(展機)하는 일과 기예를 시험하고 선비를 시험하는 일 등을 친림하여 행하였다. 6월 6일 병환이 더욱 위독하여져 마침내 오시(午時)에 창덕궁의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춘추 23세로 재위 15년이다. <원헌집(元軒集)> 5권을 남겼다.
 가족으로는 헌종의 생부모인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 그리고 두명의 정비와 3명의 후궁을 두었다. 효현왕후 김씨와 계비인 효정왕후 홍씨, 숙의 김씨 · 경빈 김씨 · 정빈 윤씨이다. 슬하에는 숙의 김씨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으나 탄생일에 사망하였다.

 효명세자(1809∼1830)는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구현과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대리청정 4년만인 1830년 2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고종년간인 1899년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이다.

 신정황후 조씨(1808∼1890)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808년 12월 6일 출생하였다. 1819년 12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827년(순조 27)에 세손인 헌종을 낳았다. 1830년 5월 6일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급환으로 서거하자 22세의 빈궁으로 청상이 되었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면서 27세로 왕대비에 봉해졌다. 그 아들인 헌종이 1849년 6월 6일 23세의 젊은 나이에 폐질환으로 후사없이 승하하고 1857년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철종의 후사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잇도록 하였으며 고종을 익종의 대통을 잇는 것으로 하여 고종초기 수렴청정을 행하기도 하였다. 1890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광무 3년인 1899년 익종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면서 익황후로 추존되었다. 조선역대 후비 가운데 가장 많은 존호 · 휘호를 받았는데 56자로,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원성 숙렬 명수 협천 융목 수녕 희강 현정 휘안 흠륜 홍경 태운 창복 희상 의모 예헌 돈장 계지 경훈 철범 (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이다. 신위는 종묘 정전 제15실에 배향되었으며, 능호는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문조의 능에 합장되었다.

 효현황후 김씨(1828∼1843)는 영돈녕부사 김조근(金祖根)의 딸로서 1828년(순조 28) 3월 14일 인시에 관광방(觀光坊) 안국동에 있는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837년(헌종 3) 10세에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인 1841년(헌종 7) 가례를 올렸다. 아버지 김조근은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어머니 이씨(李氏)는 한성부부인(漢城府夫人)에 봉해졌다. 왕후가 된 지 2년만인 1843년(헌종 9) 8월 25일 16세로 후손없이 병으로 승하하였다. 효현(孝顯)은 시호이고, 1851년(철종 2)에 경혜 정순(敬惠靖順)의 휘호가 추상되고, 다시 단성 수원(端聖粹元)의 존호가 더해졌다. 신위는 종묘 정전 제16실에 배향되었고,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헌종과 더불어 안장되어 있다.
헌종성황제 - 생애 (4)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효정왕후 남양홍씨(1831∼1903)는 영돈녕부사 홍재룡(洪在龍)의 딸로서 1831년(순조 31) 1월 22일 출생하였다. 1844년(헌종 10) 9월 14세로 왕비에 간택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며, 5년만인 1849년 헌종이 승하함에 따라 19세로 후손없이 청상이 되었다. 아버지 홍재룡은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에, 어머니 안씨(安氏)는 연창부부인(延昌府夫人)에 봉해졌다.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순원왕후의 승하에 따라 왕대비로 진봉되었다. 1903년(광무 7) 11월 15일 73세로 승하하였다. 효정성황후는 시호이고, 명헌 숙경 예인 정목 홍성 장순 정휘 장소 단희 수현 의헌 강수 유녕 자온 공안 (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徽莊昭端禧粹顯懿獻康綏裕寧慈溫恭安)의 존호를 받았다. 신위는 종묘 정전 제16실에 봉안되었고, 능은 경릉이다.

 숙의 김씨는 1848년(헌종 14) 10월 8일 옹주를 출산했으나 해산 당일 영아로 사망하였다. 숙의 김씨는 1895년(고종 32) 11월 12일 별세하여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숙의묘에 안장되었다.
 경빈 김씨는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로 1831년(순조 31) 태어났으며 헌종 13년 10월 경빈(慶嬪)으로 책봉되었다. 후손없이 융희 1년(1907) 4월 21일 77세로 별세하여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경빈묘에 안장되었다.
 정빈 윤씨는 대사성 윤치수(尹致秀)의 딸로 순조 33년(1833)에 태어났다.
헌종성황제 - 시대상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시대상

 헌종은 4세 때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원손에 봉해졌으며, 1834년 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헌종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유로 즉위 후 6년까지 순조의 비이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헌종이 15세가 되는 7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다.

 헌종 초 순조로부터 헌종의 보도를 위임받은 헌종의 외조부인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과 그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이 고위직에 임명되기 시작하면서, 안동김씨 문중이 독점했던 정계에 풍양조씨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한편 안동김씨 문중은 김조근(金祖根)의 딸을 헌종의 왕비로 책봉함으로써 정치 권력상의 위치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헌종 6년 7월, 대왕대비는 효명세자(익종, 추존)의 대리청정에 대해 논했다는 죄명(罪名)으로 순조 30년 이미 처벌이 끝난 윤상도(尹尙度)에 대해 대사헌 김홍근(金弘根)의 상소에 따라 대역부도로 능지처사 하였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 세력재편 노력으로 인해 효명세자의 사후 발생했던 정쟁사건에서 순조에 의해 이미 처리가 끝난 윤상도(尹尙度)에 대한 재조사와 처벌 뿐만 아니라, 윤상도에게 소(疏)를 하도록 뜻을 알려주었다는 죄명으로 김양순(金陽淳)의 무고를 받은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한 헌종 6년 9월 조만영 · 조인영과 이중의 사돈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판부사 이지연(李止淵)과 이조판서 이기연(李紀淵) 형제가 대사간 이재학(李在學)과 수찬 심승택(沈承澤)의 공격을 받고 향리로 겨나기도 하였다. 이는 김조순 가문에 대해 경쟁 또는 견제의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헌종의 시대에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 의해 일종의 권력분립 시대가 이루어졌다. 1841년(헌종 7) 헌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조인영은 영의정이 되고 안동김씨 세도의 대표자격인 김홍근이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 두 사람을 정점으로 풍양조씨 쪽은 조병구(趙秉龜) · 조병현(趙秉鉉) · 조병준(趙秉駿) · 조영하(趙寧夏) · 조경하(趙敬夏) · 조구하(趙龜夏)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안동김씨쪽은 김좌근(金左根) · 김수근(金洙根) · 김흥근(金興根) 등이 세력을 형성하여 각급 관직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헌종시대 풍양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권력분립상태가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양축 중 하나인 풍양조씨의 세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즉 헌종 11년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아들인 조병구(趙秉龜)가 사망하고, 헌종 12년에는 조만영(趙萬永)이 사망한 것이다. 헌종 13년 10월 전 정언 윤행복(尹行福)이 조병현(趙秉鉉)을 권간(權奸)으로 지목하여 공격한 것을 계기로 삼사와 빈청의 탄핵이 빗발쳐 끝내 조병현은 유배되었는데, 이 때의 죄목은 그 개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풍양조씨는 세력을 점점 잃어가게 된다.

 한편 헌종 14년 대사간 서상교(徐相敎)가 김흥근에 대해 조정을 주무르고 임금의 권한을 억눌렀다는 죄목으로 탄핵하였다. 여기에 대해 다른 신하들의 태도는 1년전 조병현의 탄핵시 적극적이었던데 비해 소극적이었고 헌종은 신하들의 탄핵을 더 기다리지 않고 김흥근을 삭직하였으며 그 논의를 회피한 대사헌 서기순(徐箕淳)과 대사간 권대긍(權大肯)을 파직하여 김홍근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보였다. 나아가 영의정 정원용을 파직하면서까지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흥근을 두둔하는 류의정(柳宜貞)을 처벌하는 등 김조순 가문세력의 기세를 누르려는 명시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왕대비 회갑 등의 경사를 이유로, 그 해 12월에는 조정의 권력싸움의 초점이었던 조병현 · 김흥근 · 김정희를, 이듬해에는 이기연 · 이학수를 모두 왕명으로 내치고 이지연의 죄명을 씻어줄 수밖에 없었다. 헌종 사후, 철종 원년 조인영도 죽음으로써 풍양조씨의 세도는 끝나고 안동김씨의 권력 독점 시대로 환원되었다.

 한편 순원왕후의 수렴통치 기간에는 왕실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헌종 2년, 충청도에 내려가 있던 남응중(南膺中)이 남경중(南慶中) · 남공언 등과 공모하여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도총집, 남경중을 좌총집으로 하여 청주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방 아전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었다. 일이 발각되자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으로 도망해 들어가 흉악하고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내어 투서(投書)하여 두 나라의 틈을 부추겼으나, 왜인들도 이를 믿지 않고 관수(館守)가 즉시 통고하고 압송하여 남응중 · 남경중은 국문끝에 사형에 처해졌고, 천기영(千璣英)은 고변의 공으로 오위장이 되었다. 남응중의 여당인 최겸효(崔謙孝) 등 18인도 압송되어 그 경중에 따라 처리되었으며, 사건을 파악하고 통고와 함께 죄인들을 압송해 준 왜관에 대왕대비는 은자(銀子) 1천냥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헌종성황제 - 시대상 (2)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역모는 1844년(헌종 10) 8월에도 발생하였다. 의원출신 민진용(閔晋鏞)이 자신의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과 그의 아들인 원경(元慶)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李遠德)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인 원경(元慶)을 추대하기로 민진용의 강사(江舍)에 모여 계획한 후, 하급무관들을 규합하여 계획을 관철하려다가 발각되어, 민진용(閔晋鏞) · 민순용(閔純鏞) · 이원덕(李遠德) · 최영희(崔英熙) · 박순수(朴醇壽) 등이 모두 즉시 능지처사(폥遲處死) 당하였다. 여기에 연루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의 첫째 아들인 원경 또한 사사되었다. 한편 민순용(閔純鏞)의 공초시
“세상에 김좌근(金左根) · 김홍근(金弘根)같은 주석(柱石)이 되는 신하가 없다.”
고 하여 김홍근과 김좌근은 한때나마 고향으로 퇴거할 수밖에 없었다.

 1831년에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된 조선교구를 창설한 천주교측은 조선인 교도들의 신부 파견 요청에 응해 1835년(헌종 원년)에 프랑스 신부 모방을 조선에 파견했고, 다음 해에도 조선주재 주교로 임명된 엥베르 · 샤스땅 등이 입국했다. 헌종 즉위년인 1834년에 6천 명이었던 조선 천주교도의 수가 불과 3년 후인 1837년에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세의 증가를 정권에 대한 커다란 위협으로 느낀 정부는, 1839년 기해년(己亥年) 7월 천주교 만연에 대한 박멸책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토록 하고, 8월에는 프랑스인 신부 범세형(范世享 : 앵베르), 나백다록(羅伯多祿 : 모방), 정아각백(鄭牙各伯 : 샤스땅) 등과 역관인 유진길(劉進吉) · 정하상(丁夏祥) 등 천주교 신자 130여 명을 처형하였다(기해박해). 그리고 경외(京外)에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하였다.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조선에 대한 포교 활동은 계속되었다. 1845년(헌종 11)에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이 페레올 · 다블뤼 등 두 외국 신부와 함께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하다가 불과 반년 만에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했다.

 프랑스인 신부가 처형된 데 대해, 프랑스는 7월 동양함대 해군소장 비서이(瑟西爾 : 세실)를 파견하였다. 세실은 1846년(헌종 12) 7월 870명이 승선한 전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나타나, 기해년 프랑스 신부 3명의 죽음에 대한 항의와 이 후 프랑스인을 학대하고 해치는 일이 있을 경우 조선이 재해를 당하게 될 것임을 알리는 글을 보내고, 다음 해 다른 전함이 회답을 받고자 올 것이라 하였다. 정부는 프랑스측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국내 만연된 사학을 금지시키면 해결될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기해년 밀입국해 포교하고 있던 프랑스 신부들을 처형한 사실을 중국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그로 인해 발생한 프랑스 함대의 방문을 국내문제로 국한시킨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인들을 찾아내 처벌함으로써 정부의 금단방침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그 해 5월 잡힌 김대건을 7월 25일 효수하도록 명하였으며, 현석문(玄錫文)도 아울러 처형하였다. 국내 천주교도의 색출과 처벌에 치중한 것이다.
헌종성황제 - 시대상 (3)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1847년(헌종 13) 7월, 만경지방에 프랑스 배 2척이 표류하여 왔는데, 프랑스 배의 수사총병관인 해군대령 납별이(拉別耳 : 피에르)는 세실이 받기로 한 회문(回文)을 받을 목적으로 외연도로 들어오다가 풍랑을 만나 좌초했음과 상해(上海)에 가서 다른 배를 빌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 군함에는 마카오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신부 최양업(崔良業)이 통역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그들이 배를 세내어 상해로 돌아가기까지 양식을 넉넉이 주어 회유토록 하였으며, 이 배는 영국상선의 구조로 한 달만에 돌아갔다. 정부는 차후 방지책으로 기해년 프랑스신부를 처형한 사실과 헌종 12년 · 13년에 걸친 프랑스 선박의 출현사실을 청국에 자문(咨文)하게 하여, 청국황제의 지(旨)로 그들이 다시오는 폐단이 없도록 청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청국을 통하여 세실소장이 보냈던 서한에 대한 답신을 보낸 것이다.

 서세동점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동아시아로 오는 이양선이 조선 연해에 출현한 것은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프랑스 선박의 등장 이전 이미 시작되었다. 영국 배가 1840년(헌종 6) 12월 제주도에 나타나 축우(畜牛)를 약탈한 사실이 있으며, 헌종 11년 6월 영국군함 사마랑호가 호남 흥양(興陽)과 제주(濟州) 앞바다에 나타나 섬에 도착하여 바다의 수심을 재고 방위(方位)를 표시하였다. 제주 통역관이 달려가 배에 관하여 묻자 이름을 적은 종이와 여러 나라의 지도 그리고 종려나무 부채 두 자루 등을 주고 한 달간이나 머물렀던 이양선은 동북쪽으로 갔다. 이에 정부에서는 1832년(순조 32)의 예에 따라 청국을 통해 황지(皇旨)로 광동(廣東)에 있는 서양인들의 정박소에 금단케 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리고 <동문휘고(同文彙考)>에 있는 예에 따라 왜관(倭館)에도 이양선의 출현 사실을 통고하였다.

 기해박해 후 헌종 6년 3월, 헌종은 청국에 갔던 사신들을 접견하였고, 서장관 이정이(李正履)의 문견별단(聞見別單)과 수역별단(首譯別單)을 통해 청국내 천주교 전파상황과 서양에서 유입된 아편의 폐해에 대해 파악하였다. 또한 헌종 13년 고군산도에 프랑스 선박이 좌초했을 때에는 전라도에 파견되었던 암행어사를 통해 현지상황을 탐지하기도 하였다.  1848년(헌종 14) 8월에 이르러서는 이양선들이 경상 · 전라 · 황해 · 강원 · 함경지방의 대양(大洋)에 나타나 물을 긷거나 고래를 잡기도 하였는데,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지방에서는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아 선박에 대한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잦은 이양선의 출현으로 주변상황이 변하고 있음은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대처에 있어서는 대신들의 견해에 따라 청국에 자문하고, <동문휘고>를 간행하고 그 예에 따르는 기존의 관습을 답습하며, 천주교를 금지시키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동아시아 정세변화에 따른 새로운 세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위한 이해보다는 청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서적의 금지를 통해 새로운 문물수입을 정지된 상태에 머무르도록 하는데 그쳤다.
헌종성황제 - 시대상 (4)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헌종은 친정 이 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구축하고자 노력하였다. 헌종 8년부터 매년 호구조사를 통하여 백성의 정확한 수를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헌종의 적극적인 노력은 19세되던 해인 헌종 11년부터 나타났다. 국정에 소극적인 관인들을 비난했으며, 국정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전국의 폐단을 모아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명령은 순조가 국정주도를 기도하던 시기에 시행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한편 규장각 초계문신을 뽑을 것을 명령하여 초계문신제도가 정조 사후 처음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헌종은 정조의 뜻을 본받는다고 하였는데, 그 제도를 시행한 정조의 목적은 당대의 인재들을 근신(近臣) 즉 친위세력으로 양성하는데 있었다.

 또한 자신의 세력기반이 될 수 있는 친위세력의 양성에도 커다란 의욕을 보여, 헌종 11년 삼군문(三軍門)과 총융청 외에도 궁중(宮中)에 내영을 설치하여 그 군속을 호위에 동원하는 등 자신의 친위병을 양성하려 하였다. 12년 초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등은 내영의 집사인 이원풍(李源豊)과 무예별감들간의 충돌을 들어, 세 영문(營門)과 총융청(摠戎廳)이 다 헌종의 친병인데 내영을 따로 설치한 것은 내병(內兵)을 기르지 않는다는 가르침에 크게 어긋난다며 내영 철회를 요청하였다. 이에 헌종은 일시 철회하였으나, 8월에 호위가 소홀하다는 이유로 정조의 장용영 설치를 본따 총융청을 총위영(摠衛營)으로 승격하고 번을 나누어 대궐에 당직을 서게 하여 호위를 엄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그 장관인 총위사는 2품 이상 문신으로 새로 그 직에 천망된 인물과 군문대장의 직임을 맡은 이로써 교대로 천망하게 하였다. 이 총위영 하인들의 방자한 폐단신칙에 대한 우의정 박회수의 청에 대해, 이미 예측하고 엄격한 규정을 세워놓았다고 하면서 헌종 자신의 뜻을 관철하였다.

 1847년(헌종 13) 5월에는 수령과 이서들의 탐학행위를 방지할 목적에서 부패행위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개정하려는 정책을 강력한 의지로 표명하며 추진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헌종 14년 11월 경외유생(京外儒生) 이진택(李鎭宅) 등 8천여 인이 서얼의 소통을 청하자 묘당에서 좋은 방법에 따라 품처하라고 명하였으나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

 한편 문헌간행에 있어서는 <순종실록(純宗實錄)> · <동문휘고(同文彙考)>을 간행하였으며, <갱장록(羹墻錄)>을 강(講)하면서는 정조 · 순조 · 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을 명하여 <정종조보감(正宗朝寶鑑)> · <순종조보감(純宗朝寶鑑)> · <익종조보감(翼宗朝寶鑑)>이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문원살(文苑乷)>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가 증보되어 간행되었다.

 헌종의 치세기간인 1834년에서 1849년은 순조 초년부터 시작된 안동김씨 등 외척세력에 의한 척신정치가 행해지면서 거듭된 재해와 관리들의 탐학에 민중들의 생활이 곤란하였으며, 새로운 사상으로서 천주교가 급속히 전파되었다. 천주교의 확산은 기해박해(己亥迫害)를 발생시키기도 하였으며, 천주교 박해에 따른 프랑스인 선교사의 죽음에 대해 추궁하려는 프랑스 선박의 출현과 서세동점하는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여 국내에 위기감을 진작시켰다. 또한 헌종 3년 남응중(南膺中) · 남경중(南慶中) 등의 역모사건과 헌종 10년의 민진용(閔晋鏞) · 이원덕(李遠德) 등의 역모사건은 왕실의 권위추락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헌종성황제 - 시대상 (5)
제 24대조   이름(한글):헌종성황제   이름(한자):憲宗成皇帝

순조로부터 헌종의 보도를 부탁받은 헌종의 외가인 풍양조씨 가문의 조만영 · 조인영은 헌종의 즉위와 함께 정계의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안동김씨와 함께 정국운영에 참여하였다. 한편 안동김씨 세력은 헌종의 비를 김조순의 딸로 삼아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가는 시점에 있어서는 윤상도 등의 처벌과 이지연 · 이기연 형제의 처벌을 통해 풍양조씨를 견제하였다. 헌종 친정 후 양가문은 정국운영의 중심세력으로 균형을 이루었으며, 외척들의 정국운영 속에서 헌종은 11년부터 나름대로 자신 주도의 정국운영에 힘썼다. 따라서 탐학관리들에 대한 처벌을 신칙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초계문신의 양성과 호위병으로서 총융영의 설치 등 의욕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해 속에서 재정도 충족치 못하고 민중의 생활은 궁핍하였다.

 민중의 고난으로 인해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가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으며, 이양선의 잦은 출몰은 민중을 동요시켰으나, 동아시아 정세변화에 따른 이양선의 출몰에 대해 조선정부 자체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청국을 통한 금단조처를 취하는데 머물렀다. 천주교와 이양선의 출몰에 대해 관심만 가졌을 뿐 이를 금압하는데 족하고 오히려 연경본(燕京本) 책은 금서로 함으로써 새로운 문물수입의 기회를 막고 미래지향적인 계획을 가지지 못하였다.

 헌종도 나름대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초년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에 가리웠으며, 19세인 헌종 11년부터 자신의 측근세력과 친위병을 양성하면서 왕권강화에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고 국내정치의 쇄신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친정 후 8년만인 헌종 15년 22세에 갑자기 병마로 후손없이 세상을 뜸으로써 헌종이 계획했던 외척세력의 제거는 성취할 수 없었으며, 순조년간부터 시작된 외척인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전권이 주어지는 세도정치기를 맞게 되었다.
철종장황제 - 생애
제 25대조   이름(한글):철종장황제   이름(한자):哲宗章皇帝

생애

 1849년 헌종이 후사없이 급서하자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명으로 `강화도령\' 원범(元範)이 즉위하였다. 한때 풍양조씨에게 넘어간 정권은 철종장황제(이하 철종이라 함)가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 인해 다시 안동김씨에게 돌아갔다. 한편 철종의 치세기간에는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아 삼정문란으로 인해 곤란을 겪던 백성들을 극도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철종의 애민정신에 의한 많은 구휼정책에도 불구하고 세도가문에 의해 임명된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탐학만을 일삼았다. 이 시기에 오면 민중들은 19세기 초의 항조(抗租) 투쟁에서 이른바 `민란\'의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1862년 2월에 경상도 진주를 중심으로 관리의 혹심한 수탈에 대항해서 일어난 민란은 곧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세도정권의 수탈로 인해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은 민심은 서학에 대항하여 생긴 동학(東學)에서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1894년 농민전쟁과 관계가 깊은 동학이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도되었다.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이양선이 출몰하는 등 외부세계가 접근하여 오고, 정부의 계속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세를 꾸준히 확대시켜 나가는 천주교 등이 대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이 철종시대는 안동김씨에 의한 수탈적 세도정국의 말기였고, 전국에 걸친 민란의 발생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천주교가 유입되고 민족종교라 할 수 있는 동학이 창도된 격변의 시기였다.

 조선왕조의 제25대 임금인 철종은 초명이 원범(元範)이고 즉위한 후 변(?)으로 개명하였다. 자(字)는 도승(道升)이고,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그는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모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인데 영의정에 추증된 염성화(廉成化)의 딸이다. 

 철종은 1831년(순조 31) 6월 17일 오시(午時)에 경행방(慶幸坊)의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이날 순원왕후의 꿈속에 아버지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 나타나서 한 어린아이를 바치면서 그 아이를 잘 기르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왕비는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 일을 기록하여 두었는데 철종이 즉위할 때 보니 그 모습이 과연 꿈속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거기다가 늙은 궁인(宮人)들이 보니 순조(純祖)의 모습과도 매우 닮았다고 하였다.
 2, 3세 때부터 효우가 뛰어나서 어떤 사람이 과일을 바치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아버지께 올렸고, 남은 것이 있으면 큰 형인 회평군(懷平君)과 둘째 형인 영평군(永平君)에게 올린 뒤에야 먹었다.
철종장황제 - 생애 (2)
제 25대조   이름(한글):철종장황제   이름(한자):哲宗章皇帝

어릴 적에 글을 읽는 여가에 여러 아이들을 따라 나가서 놀다가 길을 잃고 혼자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흥인문(興仁門)에 이르렀는데 이를 본 사람이 그 모습과 행동이 평범한 아이와 다른 것을 이상히 여겨 물어본 결과 그의 집이 양제방(良컻房)에 있다는 것을 알고 돌려보내었다. 이 때 아버지인 전계군이 약간 혼내주었는데, 그 뒤로는 부모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다시는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친어머니의 장례를 당하자 하루종일 슬퍼하였고, 누차 빈실에 들어가려고 했었으나 어른이 금지시켰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11세에 아버지의 장례를 당하였는데, 몹시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위었으며 행동은 예법에 맞게 하였으므로, 이를 본 사람 중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14세(1844년, 헌종 10)에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 모두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 10여 일 후 다시 강화로 옮겼는데, 배가 큰 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하여 얼굴빛이 변했다. 그러나 철종은 가족을 위로하고 보호하면서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조금 뒤에 바람이 자고 물결이 잔잔해지자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기를,
“이곳은 본래 위험한 나루이고 또 사나운 바람을 만났는데도 결국 잘 건너게 되었으니, 배 안에는 반드시 하늘이 돕는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화는 할아버지인 은언군(恩彦君)이 유배와서 여러 해 동안 살았던 곳인데, 집안 식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지난 일에 대해 말이 미치면 그 때마다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1849년(헌종 15) 봄에서 여름 사이에 밤중만 되면 잠저(潛邸)에 광기가 뻗혀 있는 것이 남산의 봉대(烽臺) 위에서 보였었는데 서울서 임금으로 모셔가기 하루 전날에야 그 광기가 비로소 없어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임금이 될 조짐임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양화진(楊花津) 강 언덕에 이르니 양떼가 와서 꿇어앉아 마치 문안하려고 맞이하는 형상을 하였으므로, 이를 본 사람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1849년 6월 초9일에 헌종이 죽고 대를 이을 후사가 없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생존한 영조의 직계후손은 오직 철종뿐이므로 드디어 대통을 잇도록 명령하여 강화에서 농사짓던 농군에서 곧 바로 한 나라의 가장 존귀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궁궐로 들어와 어른이 되었다는 의식인 관례(冠禮)를 치르고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으며 곧 이어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그 곁에 사과가 탐스럽게 달린 사과나무가 있으니, 이를 헌종의 빈전(殯殿)에 천신(薦新)하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바로 선왕(先王)께서 완상하시던 것이니, 비록 그릇에 차지 않더라도 제수로 쓰도록 하라.”
하였으며, 궁궐 뜰의 과일 가운데 새로 익은 것은 모두 빈전에 천신하라고 명하였다.

 강화에 살 때 동네에 몹시 포악한 사람이 살았는데 술에 취해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언사가 오만하기 그지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즉위한 뒤에 하교하기를,
“무식한 부류들에 대해 지금 구태여 문제삼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면서 그 죄를 묻지 않으니 그 관대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또 강화에서 있었는데, 어떤 유수(留守)가 방수(防守)를 위해 조절하는 것이 너무도 가혹하였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임금이 되어 그 사람의 이름이 승지(承旨)의 후보자 명단에 있자, 그를 불러 보고는 고의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국법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러한 것을 알고는, 그를 승지에 임명하여 다른 신하들과 다름없이 대우하기도 하였다.
철종장황제 - 생애 (3)
제 25대조   이름(한글):철종장황제   이름(한자):哲宗章皇帝

 철종은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왕자로서의 익혀야 할 수업을 닦지 못하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철종 2년 12월부터 친히 정사를 수행하였다. 철종은 예전에 배운 것이 없음을 우려하여 공제(公除)하고 나서는 즉시 <소학>을 강하였다. 그리고 <사략> · <통감> · <대학> · <논어> · <갱장록(羹墻錄)> · <시전(詩傳)> · <서전(書傳)> · <속강목(續綱目)> 등의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학습하였다.

 당시 학덕을 갖춘 선비들인 송내희(宋來熙) · 조병덕(趙秉悳) · 이민덕(李敏德) · 김병준(金炳駿) · 임헌회(任憲晦) 등을 경연관으로 명하여 자주 경연을 열어서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하였다. 대신의 건의대로 명나라의 전례에 따라 일강(日講)을 하였는데 이약우 · 조두순 · 서기순 · 조학년 · 김학성 · 이경재 · 김경선 · 이돈영 · 홍종응 · 서유훈을 일강관(日講官)으로 삼으니 자익(資益)됨이 매우 컸다. 일찍이 이르기를
“공부는 실로 나 자신의 입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자신을 경계하는 열 개의 조항을 병풍에 써놓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1851년(철종 2) 6월 헌종을 부묘(쯊廟)한 후 예관(禮官)이 진종(眞宗 : 영조의 아들인 효장세자)의 조묘(?廟)에 대한 헌의(獻議)를 진달하니 진종을 조천(?遷)케 하였다. 그리고 은언군(철종의 조부)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익평군(益平君) 희(曦)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의 사우를 세우고 영평군(永平君) 욱(昱)으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풍계군(豊溪君)을 은전군(恩全君 : 莊祖의 아들로, 은언군의 이복형제)에게 입계시켜 그 후사로 세우고 면세전(免稅田) 300결을 지급하여 제사비용에 쓰도록 하였다.

 같은 해 윤8월 희정당(熙政堂)에서 중전의 초간택(3일) · 재간택(13일) · 삼간택(24일)을 행한 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정하였다. 전 승지 김문근을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 봉작하고 영돈녕부사로 삼았다. 9월 인정전(仁政殿)에서 납징례(納徵禮, 21일) · 고기례(告期禮, 24일) · 책비례(冊妃禮, 25일)를 행하였고, 대조전(大造殿)에서 동뢰연(同牢宴)을 행하였으며(27일), 왕대비전과 대비전이 왕비의 조견례(朝見禮)를 받았으며(29일), 10월 종묘에서 중궁이 묘견례(廟見禮)를 행하였다(15일). 이렇게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혼인한 철종과 철인왕후의 나이는 21세와 15세였다.

 철종은 순원왕후가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주는 뜻을 받들어 효성이 지극하여 거처는 반드시 같은 궁전에서 함께 하였고 음식도 반드시 같은 주방에서 함께 하였으며, 왕후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몸소 약을 달였고 밤부터 아침까지 촛불을 밝혀가며 간병하기도 하였다. 무릇 좋은 진상품이 있으면 왕후의 내장(內藏)에 저장해 두었으며, 강연(講筵)이나 시사(視事)가 있을 때 이외에는 잠시도 자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처럼 지극한 공경과 효성이 있었기에 궁전에는 늘 상서롭고 화락한 기운이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