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대왕 - 생애 (2)
제 14대조   이름(한글):선조대왕   이름(한자):宣組大王

선조는 왕좌에 올랐지만 왕자(王者)로서의 수업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자수업을 위한 조처가 뒤따랐다. 이준경(李浚慶) 등의 건의로 인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고, 선조 자신은 오로지 기대승(奇大升) · 이황 · 이이 · 이준경 등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왕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매일 경연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하기도 하였다. 선조는 이미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황에게 정성을 다하여 배우기를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이황은 글을 올려
①계통(繼統)을 중히 여겨 인자함과 효를 다할 것이며,
②간사한 말에 현혹되어 윗 분들과 사이가 멀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며,
③성학(聖學)을 가까이 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고,
④유학(儒學)을 중히 여기고 이단을 멀리할 것이며,
⑤대신들을 신임함으로써 눈과 귀를 밝게 할 것이며,
⑥자신을 스스로 닦고 반성할 것 등의 치도(治道)에 대한 여섯 가지 조항을 올렸으며 또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을 손수 써서 올렸다. 선조는 이것을 모두 병풍으로 만들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경계의 글로 삼았다. 1570년(선조 3) 8월 이황이 죽자 “이황이 남긴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도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집하여 간행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어 당해 유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조는 주로 자신의 왕자수업을 진행하면서 경연에서는 이이 · 기대승 · 김우옹(金宇춳) 등으로부터 두터운 가르침을 받았다.
 선조는 유자들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체현함을 보이고 있다. 경연 중에도
“오늘 추위가 심한데 나는 넓은 집 고운 모피(毛皮) 위에 있으니 어찌 견디지 못할까마는, 염려되는 것은 변방의 수졸(戍卒)들이 밤을 지새며 딱다기를 치는 것이다.”
라며 백성들을 생각하였다. 한번은 선조가 출행했을 때 군사 중에 어린아이가 있음을 보았다. 항상 마음을 백성에게 두고 있던 선조는
“저렇게 어린아이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속을 떠나고 싶지 않을 터인데 힘겨 운 군역을 어떻게 견디어 내겠는가. 나는 그 아이를 보고 나서 안스러운 마음이 들어 밤이 되어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영민하지도 못한 내가 외람되게도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와 같은 일이 있게 하였으니 더욱 한스럽다. 병조는 군사를 점열(點閱)하여 만약 연령이 차지 않은 자가 있으면 모두 돌려보냈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입역(入役)을 하도록 하라. 내가 차라리 수천 명의 병졸을 잃었으면 잃었지 차마 이러한 아이로 하여금 입 역하게는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선조가 항상 백성들을 생각하며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그런 평안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569년(선조 2) 명종의 삼년상이 끝나자, 아버지인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증하고, 자신보다 세 살 아래인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과 가례(嘉禮)를 올렸다. 또 1577년(선조 10)에는 자신의 할머니인 중종의 후궁 소용 안씨(昭容安氏)를 빈으로 추봉하고, 외할아버지인 정세호는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러면서 선조는 소용 안씨를 할머니라 부 르고, 덕흥대원군의 묘를 가묘(家廟)라 하여 그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이는 모두 가계와 정통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왕통을 굳건히 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는 적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또 자신이 특히 사랑하던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후 산고(産苦) 끝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선조는 1580년(선조 13) 2월 하원군이 보낸 역관의 딸을 후궁으로 받아들이고, 5월에는 정순희(鄭純禧) · 홍여겸(洪汝謙) · 민사준(閔士俊)의 딸을 숙의로 뽑아 후손을 기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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