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녕군파 약사

온녕군


1407년(태조 7)에 태종대왕의 3남으로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별세하였다. 신빈(信嬪) 영월신씨 소생이다. 배위는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순천박씨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근녕군(謹寧君)의 차남 우산군(牛山君)을 계자로 삼았다. 우산군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를 맞이하여 6남을 둠으로써 후손이 번창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산군과 그 아들 6형제가 함께 참화를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우산군의 차남 무풍군(茂豊君) 총(摠)은 안평대군과 쌍벽을 이루는 종친 학자이며 예술가로 그의 <지환부(指環賦)>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해 내려온다. 무풍군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제자인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종친이 사류(士類)와 어울려 정치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단천역(端川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또다시 장(杖) 백대를 맞고 거제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아버지 우산군과 형인 용성군, 네 아우 한산군 · 화원군 · 금천군 · 청양군도 모두 먼 섬으로 귀양가고 가족들은 종적(宗籍)에서 삭제되어 모두 서인이 되었다.

이들 7인을 칠공자(七公子)라 한다. 이렇게 7부자가 무풍군 사건으로 모두 귀양을 갔는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6년 후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무풍군은 죽음을 당하고, 그 후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 아버지 우산군과 공의 형제들이 일시에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7부자가 비명에 감으로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나 다행히 그 해 9월 2일 중종반정 때 신원(伸췦)되었다. 그때 우산군에게는 가덕대부에 추증되고 정민(貞愍)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장남에게는 승헌대부 용성군, 차남은 명선대부 무풍도정, 3남은 명선대부 한산도정, 4남은 명선대부 화원도정, 5남에게는 명선대부 금천도정, 6남에게는 명선대부 청양도정에 추증되고, 모두에게 묘지(墓地)가 하사되었다. 그후 1705년(숙종 31)에 7공자에게 각각 정려문이 내리고, 1735년(영조 11)에는 무풍군으로 명의대부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고, 1796년(정조 20)에는 무풍군에게 소민(昭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900년(광무 4)에 4남부터 6남까지를 자헌대부 군으로 추증되고, 1910년(순종 4)에는 6형제에게 정민(貞愍) · 충의(忠毅) · 민절(愍節) · 혜정(惠貞) · 효의(孝懿) · 정헌(貞憲)이란 시호가 각각 내려졌다.

우산군 아들 6형제가 모두 후손을 두어 자손이 번창하여 문과급제 5명을 배출했다. 기타 군수 · 현감 · 부사 · 도정 등 중위 급의 관직을 지낸 이가 많고 문집을 남긴 학자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온녕군 후손 중에는 교육자가 비교적 많고 그 중에서 박사학위 소지자와 대학 교수가 많다.




종원 분포 상황

지역별
세대수
서울 / 경기
1311
충북
361
충남
2014
전북
228
전남
323
강원
95
경북
1064
경남
95
합계
5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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