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원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세보(世輔) 1832∼1895    파명:능원대군(陵原大君)
  본명은 인응(寅應), 자는 좌보(左輔). 대군의 8대손이며 안풍군의 현손이다.
 공은 19세 때 은언군(恩彦君)의 장남 상계군(常溪君) 담(湛 : 1770∼1786)의 양자로 들어가 호라 개명하고 경평군(景平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철종의 종제(從弟)가 되었다. 그는 종2품의 소의대부(昭義大夫)가 되었다가 같은해에 중의대부(中義大夫)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정2품이 되고 또 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되었다. 다음 해 20세 때 의덕대부(宜德大夫) 종1품이 되었고 1853년(철종 4) 21세 때 현록대부 정1품이 되어 철종대왕의 수라상을 감선하는 직책을 맡았었다.
 1860년(철종 11)에 아우 세익(世翊 : 寶應으로 改名 : 1839∼1896)이 문과에 급제하자 철종은 한림(翰林)에 제수하니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 측에서 반대했다. 이에 공은 판중추부사 김좌근(金左根 : 1797∼1869)과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 : 1801∼1863)의 횡포를 논하니 자연히 안동김씨들에게 밉게 보여 파양(破養)되어 신지도로 귀양가게 된 것이다. 1860년(철종 11) 신지도로 귀양가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민간의 서러움을 시조로 읊으니 오늘날 우리 나라 4천년 역사상 459수라는 제일 많은 시조를 남긴 작가로 유명하게 된 것이다.
 1863년(철종 14) 공을 사사하라는 왕명이 내려 금부도사가 신지도에 가 공을 체포하여 오는 도중에 천안에 이르렀다. 한편 철종대왕이 승하하기 직전이고 안동김씨들이 공을 남겨두면 안되겠다 싶어 서울에서 황급히 사약을 내려 보냈다. 천안에 도착한 세보 일행은 마침 갈래 길에 노루가 나타났으므로 그 노루 쪽으로 쫓아가는 사이에 약사발은 국도로 스쳐 내려갔다. 그날 밤 공은 과천에 왔는데 병이나 운신을 못했다. 할 수 없이 과천에서 자고 이튿날 서울에 돌아가니 엊저녁에 철종장황제가 승하하였다  고 했다. 그래서 공은 죽음을 면하였고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출세하여 한성판윤 2회, 공조판서 5회, 형조판서 2회, 판의금부사 6회를 지내는 등 특히 경복궁 중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