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계근(季根) ? ∼ ?    파명:석보군(石保君)
  자는 군실(君實), 호는 지족당(知足堂). 석보군의 5대손이다. 명종 때에 출생하고 임진왜란 때 조광정(趙光廷) · 이월천(李月川)과 함께 연성부운량사(延城府運糧使)로 활약하여 많은 공훈을 남기었으나 그 공을 이월천에게 모두 넘기고 공은 조광정과 함께 농사에 힘쓰며 이에 족하다 하여 그의 호를 지족당이라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광정과 함께 강화도 교동으로 들어가 백일기도를 드리고 별세했다. 공의 묘는 연백군 해월면 문산리 율포 미륵당 동편 자좌원이다. 비석이 있다.
광문(光門) 1513∼1575    파명:석보군(石保君)
  석보군의 4대손으로 1513년(중종 8) 정월 8일에 출생하였다. 천성이 영명하고 재능이 많아 학문과 덕망이 출중하였으며 예지와 경륜이 투철하였다. 그런데 선조 때 4색붕당이 극심하여 국난이 일고 한편 외세는 날로 강하여 국가존망의 시기에 종실의 자손으로 방만만 할 수 없어 오로지 신명을 바쳐 국난을 수습할 것을 결심하고 조정에 자진 봉기하였다. 선조대왕은 그의 장한 뜻을 가상히 여기고 어모장군으로 특명하였으며 그 뒤 충좌위(忠佐衛) 부사(副司) 세마(洗馬)를 지냈다. 당시 이황 · 이이 등과 함께 국방충실책을 건의하였으나 반대파의 모함으로 관철되지 못하게 되니 이를 개탄하고 바로 낙향하여 초야에 묻혀 살았다.
 공은 낙향 후 농업과 학문에 전념하는 동시에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며 62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안산 상봉 병좌원이다. 비석과 상석이 있다.
남준(南俊) 1918∼1974    파명:석보군(石保君)
  호는 송암(松岩), 석보군의 18대손이며 진도군 감회면 상갈리에서 1918년 기표(基表)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4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가세가 빈한하여 일본 명치대학을 고학으로 졸업하고 자수성가하여 무역회사를 설립한 바 있다. 1955년부터는 한화 500원 대 1달러의 가격으로 한국의 무역 장래가 위태로운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공은 50여 개 무역회사의 대표로 처음에는 미국당국을 상대로 그 시정을 촉구하고 미국 대통령과 미국 행정부 · 법조계 · 언론계 등을 비롯하여 각계에 30여 회에 달하는 건의서 및 법이론 판단서 등까지 발송하면서 미국 조야에 일대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다음부터는 일방적 환율조정을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4년간 계속된 투쟁으로 미국측의 협조를 받은 일대 쾌거를 달성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물론 재계 · 학계 · 언론계 등에서는 공의 투철한 법이론과 강인한 투쟁신념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외에도 공은 향리 학교의 설립과 투자를 지속적으로 후원, 공립학교로 면목일신하였다. 또한 공은 자유당 정권 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재정분과위 시기에는 한국자본시장의 육성과 국가경제의 견실화를 위해 재무구조의 개선책과 민주화의 기업경영을 강력히 주장하고 기업공개의 도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공은 국회의원 재임 때 농촌경제 육성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진도 일주 도로의 교통망 확충 그리고 간척지 제방공사는 물론 농 · 어촌 전화가설사업을 조성해서 농촌생활에 일대 문화적 생활개혁을 시행했다.
 1979년에는 공의 업적을 기리는 공로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길이 후세에 전하였다. 공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오금리 후산묘 축좌향이다. 비석과 석등이 있다.
 
동무(東茂) 1857∼1914    파명:석보군(石保君)
  자는 사극(士克), 호는 동초(東樵). 석보군의 15대손으로 진도군에서 1857년(철종 8)에 출생하여 1914년 향년 58세로 영면하였다. 공은 가세가 빈곤하여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으나 당숙의 도움으로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공의 심성이 온후 · 강직하였으며 불의에 대하여는 오직 신명을 바쳐 항거하였으므로 명성이 높았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전라도 일대에 약탈과 학살이 극심하자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해 곧바로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의 편대를 조직하고 인도대장으로서 지휘했다. 지금의 나주에 이르러 경군과 합세하여 난동세력을 타파하고 의병대장으로 보무도 당당히 나주에 입성하였다. 공은 얼마 후 동학란이 평정되자 지휘 장졸을 각기 고향으로 귀향시킨 후 자신은 고향 후배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공의 묘는 세방산(細傍山) 77번지이다.
면(勉) 1724∼1798    파명:석보군(石保君)
  자는 자필(子必 · 子弼), 호는 반포재(伴圃齋). 석양부령의 후손이다.
 1747(영조 23) 식년 병과에 급제, 병조정랑 함경도 도사를 지냈다. `덕류백대(德流百代) 경수천억(慶垂千億)\'이란 어필을 받았다.
면수(冕洙) ? ∼ ?    파명:석보군(石保君)
  석보군의 14대손. 본성이 쾌활하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문무에도 능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한일병탄 당시에는 이완용의 불의를 보고 격분하여 이완용 집에 방화하여 그로 말미암아 7년간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강화도에 살다가 별세하였다. 그는 생전에도 종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종원간의 친화와 단결을 도모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박(璞) 1529∼ ?    파명:석보군(石保君)
  자는 문옥(文玉), 호는 효정재(?靖齋). 석보군의 4대손이며 영천군(靈川君) 철수(哲壽)의 장남이다. 1529년(중종 24) 7월 10일에 강화에서 출생할 때 산봉우리에서 서기가 감돌고 정기가 하늘에 닿았으니 귀공자의 성품이요 온화한 인걸이었다. 일찍이 산수와 풍경에 도취하였고 청송 성수침에게 사사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 휴암 백인걸과 더불어 교분하며 유학의 대가로 온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1566년(명종 21)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수렴청정할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관이 되었다. 그러나 공은 여주(女主)가 오랜 세월 수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간한 것이 화근이 되어 불운을 맞게 되어 홀연히 세상을 피하여 황해도 배천땅으로 낙향하여 순리를 따라 두문불출했다. 그 덕행이 사방을 돌아 나중에는 임금까지 알게 되어 부름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오직 독서와 후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과 벽란도(碧瀾渡)를 건너면서 공이 탄식하며 “청산과 녹수만은 욕심도 없고 후와 박도 없을 뿐이로다(惟有靑山綠水不帶欲向人無厚薄耳).” 하였다. 율곡선생은 화답해 가로되 “강산은 서로 싫어하지 않건만 인간세상의 사귐은 무정함만이 있다(江上靑山相不厭, 世間交道在無情).”라고 하였다.
 공은 항시 중봉(重峯) 조헌(趙憲) ·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 성옹(醒翁) 김덕성(金德誠) 등과는 아주 절친하고 교분이 두터웠다. 공의 묘지는 연백군 유곡면 화성리 호두산 오좌행에 있다. 비석이 있다. 숙종때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예득(禮得) 1554∼1607    파명:석보군(石保君)
  시호는 문효(文孝), 율곡 선생의 문인으로 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행 양주어제사 동부승지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대왕이 의주로 몽진할 때 수행하여 대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1604년(선조 37)에 선조대왕은 입조하라고 하교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보국숭록대부로 추증되었다.
우형(宇炯) 1731∼1803    파명:석보군(石保君)
  자는 유평(幼平), 석보군의 11대손으로 1731년(영조 7) 충북 중원군 소태면에서 아버지 진사 명하(明夏), 어머니 진천임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803년(순조 3)에 별세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항상 학문에 전념하여 1765년(영조 41)에 진사시에, 1794년(정조 18)에는 문과에 급제하니 그때 나이가 64세였다. 행 사헌부 감찰로 봉직하면서 임진왜란으로 인해 파시조 석보군의 묘소가 실전되어 향화가 단절됨을 항시 통탄하였다. 그 묘소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도성 일대를 탐색하던 어느날 양주 미아리의 석보골에서 퇴락한 묘소와 그 앞에 쓰러진 비석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묘소를 바로 재봉축하고 그로부터 분향하였다. 또한 공이 집필했거나 보관하던 문간(文簡)의 많은 서적이 종가 서재에 보존되어 오던 중 6 · 25전쟁으로 전부가 소실되었다. 공의 묘는 충북 중원군 소태면 모곡 건좌향이다. 1996년 묘역을 재 봉축하고 석물도 갖추었다.
원성(元城) ? ∼ ?    파명:석보군(石保君)
  호는 청암(淸庵), 석보군의 7대손이며 운흥감의 현손이고 증조부는 선략장군 행 충좌위 부호군 연(璉)이며 조부는 충의위 사과 정근이고 부친은 선략장군 행 용양위 대호군 익이다. 배위는 순흥안씨 진사 덕봉(德鳳)의 딸이다.
 일찍이 문학에 심취하고 도학에 조예가 깊어 향리 사방에서는 도학군자라 불리었으며 병자호란 시에는 홀연히 창의하여 큰 공을 세우고 나라에서는 그 공을 찬양하여 종친부 도정 겸 예문관 대제학으로 증직하였다. 공의 묘소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서당동 중록 묘좌원이다.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