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양군(景陽君) 1508∼1560    파명:이성군(利城君)
  자는 천기(天機), 이성군의 아들이다. 처음 경양도정에 제수되었다가 승헌대부로 승격 군에 제수되었다. 배위 명원현부인 강릉김씨는 승지 혼(渾)의 딸로 2남 2녀를 두었고 묘소는 이성군 묘역 쌍분이다.
순녕군(順寧君) ? ∼ ?    파명:이성군(利城君)
  휘는 경검(景儉), 이성군의 증손자이고 해풍군의 아들이다. 처음 수에 제수되어 소덕대부에 오르고 선조 때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에 추훈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순천김씨로 판관 장(檣)의 딸이다.
순의군(順義君) 1549∼1613    파명:이성군(利城君)
  휘는 경온(景溫), 자는 무강(武剛). 이성군의 증손자이고 해풍군의 아들이다. 처음 수에 제수 홍록대부에 올랐다. 선조 때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이었고, 별세한 후 현록대부에 증품되다. 배위는 계림군부인 광주정씨로 지평 정득의 딸과 원성군부인 원주변씨로 군수 근의 딸이다. 묘소는 운성군 묘역에 있다.
영평군(寧平君) 1529∼1577    파명:이성군(利城君)
  휘는 구(耉), 자는 태로(?老), 호는 약당(若堂). 이성군의 손자이며 경양군의 아들이다. 처음 영원부정에 제수되었다가 정의대부로 군에 책봉되었다. 배위는 동양현부인 평산신씨로 현감 광미(光美)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고 묘소는 이성군 묘역에 있다.
운성군(雲城君) 1515∼1566    파명:이성군(利城君)
  휘는 수철(壽鐵), 자는 담수(聃첤). 이성군의 아들이다. 처음 정에 제수되었다가 승헌대부 소덕순충적덕보조공신(昭德純忠積德補助功臣)으로 추증되었다.
 배위 정주군부인 풍덕장씨는 인효의 딸로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신림동 난곡에 있다가 이곳이 도시계획으로 인해 개발되면서 인천시 서구 시천동 73으로 이장하였다.
이성군(利城君) 1489∼1552    파명:이성군(利城君)
  휘는 관(慣), 자는 공숙(公肅), 시호는 장평(章平). 성종대왕의 9남이며 어머니는 숙용 청송심씨이다.
 군은 성품이 온후하고 총명하여 여러 왕자들 중에서 부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며 효심이 극진하였다. 1506년(중종 1) 9월 1일 연산군의 폭정에 이조참판 성희안 등이 의병을 일으켜 새 임금을 세울 때, 이성군은 연산군의 병졸을 분산, 무력화시키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은밀한 계획을 진행시키며 연산군을 궐밖으로 내쫓고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1505년(연산군 11) 9월 2일 중종대왕이 등극하자 군을 더욱 보살피어 많은 논과 정국공훈의 녹을 내려주었다. 문소전과 연은전의 2가지 직무를 겸직하였고, 1507년(중종 2) 숙원 윤씨를 책봉할 때 임금은 이성군을 불러 경회루 아래서 연회를 열고 사호(賜號)를 내려 이성군이라 하였다. 1516년(중종 11) 1월 인정전 뜰에서 문무백관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하교하기를 충청도 태안군에 있는 태복지 8리(약 100만평)와 염전 어장 등을 이성군에게 내렸다.
 군은 문소전 · 연은전과 종친부 · 종부시 · 사옹원 등의 도제조를 겸임하면서 한결같은 품행으로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군은 서화(書畵)에도 출중하여 중종대왕이 승하한 후 1545년(인종 1) 2월에 중종대왕의 초상화를 그려서 영정을 소정정에 모시고 사당 축성을 부안현감 채무일에게 엄명하여 짓게 하는 등 그 공로가 혁혁하여 중종과 명종 때에 걸쳐 원종1등공신이었다. 1552년(명종 7) 12월에 병환이 나자 상감이 전의를 보내 거듭 치료하였으나 이 달 29일 별세하니 향년 64세였다. 부음을 들은 임금이 몹시 애도하며 조회와 시장을 철폐하고 조의를 표하며 장평(章平)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제사를 모셨다. 5남 1녀를 두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리곡의 경좌갑향 언덕으로 예를 갖추어 장례를 모시고 표석을 세웠다.
 배위는 곤산군부인 남평문씨로 사의 좌찬성 문간의 딸과 풍산군부인 안동권씨로 군수 증 좌찬성 수중의 딸이다.
해풍군(海豊君) 1532∼1594    파명:이성군(利城君)
  휘는 기(耆), 자는 인경(仁卿). 이성군의 손자이며 운성군의 아들이다. 수에 제수되어 승헌대부에 오르고 도총관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대왕이 의주로 피난갈 때 두 아들과 함께 호가하였으며 다른 신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려고 할 때 크게 통곡하며 끝까지 임금을 호위하였다. 해풍군이 별세하자 부음을 들은 상감은 몹시 슬퍼하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에 추훈하고 현록대부로 증품하였다.
 배위는 죽계군부인 순흥안씨로 상의원 정 순좌의 딸과 학성군부인 울산박씨로 별제 영무의 딸이다. 묘소는 운성군 묘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