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견성군(甄城君) 1482∼1507    파명:견성군(甄城君)
 견성군(甄城君) [1482(성종 13)∼1507(중종 2)]
 휘는 돈(惇), 자는 근지(謹之), 시호는 경민(景愍).
 성종대왕의 7남으로 어머니는 숙의(淑儀) 홍씨이며, 9세 때인 1491년(성종 22) 견성군에 봉해졌다. 1507년(중종 2) 26세 때 무고를 당해 강원도 간성으로 귀양갔다가 같은 해 10월 22일 적소 간성에서 사약을 받고 별세하였다.
 배위는 증 좌찬성 우호(友灝)의 딸인 영양군부인(永陽郡夫人) 평산신씨이다. 슬하에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은 완산군(完山君) 수함(壽탂)이고, 차남은 계산군(桂山君) 수계(壽誡)인데 회산군(檜山君)에게 후사로 출계하였다.
 공의 집은 이현(梨峴)으로 창경궁 홍화문의 동남쪽에 있었다. 공이 사약을 받은 이유는 1507년(중종 2) 9월에 노영손(盧永孫)이 고하기를 “대사간 이과가 견성군을 추대하고자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그 해 10월에 강원도 간성으로 귀양갔다가 같은 달 22일에 사약을 받았으나 이듬해인 1508년(중종 3) 역모에 가담한 사실이 없음이 밝혀져 신원(伸寃)되었다.
 또한 현손의 저술인 <둔암유고(遁巖遺稿)>와 견성군 유사(遺事)에는 그 사정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507년(중종 2)에 불궤(不軌)를 꾀하던 자가 잡혀서 심문을 받을 때, 중종대왕이 묻기를 “너희들은 누구를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견성군을 추대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자, 중종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견성군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견성군은 덕이 있으며 겸양한 왕자이므로 사전에 말할 경우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기에 일이 성사된 후에 추대하고자 하여 계책이 이미 정해졌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대궐 뜰에 도착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기를 “소신은 임금님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불충스런 무리들에게 추대되었는 바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가서 대죄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관을 벗고 머리로 땅을 치며 통곡하니 피눈물이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임금이 견성군에게 전교하기를 “저 불충한 무뢰배들이 그들끼리 서로 떠들어 댄 것이다. 견성군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겠는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간당배들이 재삼 상소하여 견성군에게 죄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여러 사람들의 의론에 몰려 견성군을 간성으로 귀양보냈으며 뒤이어 사약을 내렸다.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모든 사람들이 원통해 하였다.
 그 뒤 1519년(중종 14) 조광조 · 김정 · 박상 · 이홍관 등 여러 사람들이 상소하여 견성군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임금은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경민(景愍)이란 시호를 내리고 특별히 국사(國師)에게 명하여 포천 기흘에다 묘자리를 잡게 한 뒤 장례도감을 설치하여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또 하교하기를 “서울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였다. 이에 80여 리쯤 된다고 답하자 즉시 전교하기를 “그의 아들들이 있으나 모두 나이가 어려 밤을 새워 오가는 것이 실로 염려가 되니 속히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산으로 묘자리를 다시 잡아서 그들로 하여금 오가는 데 편리하게 하라.” 하였다. 양주군 줄을동 중촌에 묘자리를 잡게 된 연유는 이런데서 기인한다.
 예장(禮葬)과 치부(致賻)를 모두 왕자군의 규례에 따라 하였고,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고서 전교하기를 “천륜은 몹시 중한 것인데 한 때의 애매한 일로 하여서 형제간에 서로 보전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 뒤 임금은 공의 부인 평산신씨에게 봄 가을로 쌀 20석씩 내려주게 하고 가묘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지내니 조야가 이 소식을 듣고는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152의 1 신좌에 있고 배위 영양군부인 평산신씨는 부우(쯊右)에 합폄으로 모셨다. 공의 사우인 경민사(景愍祠)와 신도비 및 묘비가 있다.
덕림군(德林君) 1549∼1592    파명:견성군(甄城君)
  덕림군(德林君) [1549(명종 4)∼1592(선조 25)]
 휘는 낙(洛), 자는 거원(巨源). 선성군의 장남이다. 처음에 명선대부에 오르고 후에 군으로 추증됐다. 부인은 계림현부인(鷄林縣夫人) 경주이씨이며 1남 건(楗)을 두었다.
 <임진란호종일기(壬辰亂扈從日記)>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4월 30일 비내리는 사경에 덕림군이 덕평수 · 덕천수 두 동생과 더불어 창황히 입시하니, 임금이 돈의문에 나와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종묘의 신주를 받들어 먼저 가게 하고, 세자는 뒤를 따르게 하고, 왕자 신성군(信城君)과 정원군(定遠君)을 데리고 떠날 때 덕림군이 덕평수와 덕천수 두 아우를 데리고 호가하였다. 임금은 융복(戎服)에 붉은 모자 차림으로 말채찍을 친히 잡고 몽진길을 떠났다. 1592년 5월 1일에 임금이 잠시 벽제역에서 휴식할 때 시종하는 관원들이 떨어져서 따라오지 못하였는데 덕림군 삼형제는 힘을 다하여 호가하여 충의를 다하였다. 1592년 5월 2일 어가가 개성을 향하여 떠날 때 이졸(吏卒)이 다 도망가니 덕림군이 통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호가하였다. 그 때 임금이 덕림군에게 말하기를 “서울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찌 하겠느냐?” 하니 덕림군이 말하기를 “이 망극한 때를 당하여 충성을 다하여 호가하오나 가슴이 찢어질 듯 원통한 가운데 하교가 이러하시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여쭐 바를 알지 못하옵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걱정스럽게 말하기를 “너의 가족은 지금 어디 있느냐?” 하였다. 이에 “국사가 황급하여 집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에 가족에게 두어마디 일러 동교 묘하로 가라 하고 신은 창망히 이곳에 와 있사오니 그간의 사생안위는 전연 알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악차탄하고 재삼 말하기를 “지극한 충성이로다. 너희 형제의 충의지심을 내 가상히 여기는 바이거니와 지금 국사가 망극한 때를 당했다고 가솔을 돌보지 않고 임금을 위하여 이같이 하니 실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줄 아노라. 내가 심히 경애하는 바이다. 그러나 수일내로 달려가서 가솔을 잘 조치하고 오면 내 마음에 더욱 위안이 되겠노라.” 하니 덕림군이 감읍하여 말하기를 “임금께서 몽진을 하는 이 때에 어찌 감히 사사로운 생각을 하오리까.”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누차 하교하므로 덕림군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두 동생과 함께 당일 출발하여 묘하로 달려오니 적들이 이미 닥쳐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은 가족과 조상 신주들을 사패전장(賜牌田庄)과 노비가 있는 영남 용궁땅으로 급송하였다. 당일로 돌아서서 다시 행재소를 찾아갈 때는 왜적을 피해 숲 사이와 산골짜기의 험난한 길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 1592년 6월 3일에야 겨우 평안남도 중화부(中和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에서 공교롭게도 적군을 만났다. 공은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들어 활을 쏘고 칼을 휘둘러 왜적 수십 명을 죽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두 동생과 함께 순절했다. 이 때 12명의 종들도 또한 주인을 따라 순사하였다. 그 때 칙설이라는 종이 늙고 병들어 좀 뒤떨어졌다가 뒤늦게 당도하여 보니 참혹한 화가 그 지경인지라 겨우 도망하여 용궁으로 달려가 사실을 알렸다. 그 때 덕림군의 나이는 44세였다.
 나라에서는 덕림군에게 정의대부 덕림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하고 특히 1873년(고종 10) 3월에 고종황제가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중촌 완산군 묘 후 건좌이다. 부인 계림현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덕산수(德山守) 1546∼1626    파명:견성군(甄城君)
  덕산수(德山守) [1546(명종 1)∼1626(인조 4)]
 휘는 순(洵)이고 자는 경윤(景允). 견성군의 증손으로 평성부정의 외아들이다. 품계는 명선대부이다. 부인은 신부인(愼夫人) 양주조씨이며 1남을 두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육예지학(六藝之學)에 매우 박식하였고 중년 이후에는 허약하여 스스로 은인자중하였으며 옆에는 항시 글과 그림을 놓아 두고 감상하였다. 그리고 귀한 것과 화려한 것을 멀리하였으니 그 근검함은 이루 비길 데가 없었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초봉(初封)은 수(守)였으며 그 후 명선대부에 올랐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중촌 평성부정 묘위 신좌로 배위 양주조씨와 합장하였다.
덕원군(德原君) 1573∼?    파명:견성군(甄城君)
  덕원군(德原君) [1573(선조 6)∼? ]
 휘는 혼(渾), 자는 경회(景晦). 견성군의 증손으로 여성군의 5남이다. 덕은수 · 덕진수 · 덕순수 · 덕청수 · 덕해령 등 6형제가 다 어진 이로 유명했는데, 그 중에서도 덕원군이 가장 재명(才名)이 있고 충효대절을 겸유하였다. 공은 1617년(광해군 9) 1월 4일 중종왕자 덕양군의 손자 구천군(龜川君) 등 19인의 종친과 함께 당시 예조판서 이이첨이 사리사욕으로 국권을 마음대로 농간하며 충량한 사람은 몰아내고 아부하는 자는 승진시키는 등 위세와 권력이 날로 성행함을 좌시할 수 없으므로 상소하는 데 동참하였다. 인조반정 후 병자호란 때 종친들이 모두 흩어졌으나 공은 홀로 호가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임금을 끝까지 호위하였다. 인조대왕이 환궁한 후에 그 충절을 높이 사 정의대부의 위계와 군(君)을 봉하고 부모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공은 벼슬로써 영화를 삼지 않아 사직, 귀향하여 국치를 통분히 여기다가 병으로 별세하였다. 그 후 자손이 겨우 3대에서 끊어져 봉사할 사람조차 없게 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현풍곽씨로 1남 2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선영 묘하 유좌이다.
 
덕천수(德川守) 1560∼1592    파명:견성군(甄城君)
  덕천수(德川守) [1560(명종 15)∼1592(선조 25)]
 휘는 택(澤), 자는 심원(深源). 선성군의 3남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두 형 덕림군 · 덕평수와 함께 임금이 파천할 때 노복을 거느리고 호가하던 중 같은 해 6월 3일에 평안도 중화부에서 왜적을 만나 두 형과 함께 순절하였다.
 의관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중촌 선성군의 묘하 건좌에 장사지냈다. 배위 남양홍씨와 합장하였다. 1873년(고종 10) 3월에 고종황제가 정려를 명하였다.
덕평수(德平守) 1551∼1592    파명:견성군(甄城君)
  덕평수(德平守) [1551(명종 6)∼1592(선조 25)]
 휘는 회(淮), 자는 호원(浩源). 선성군의 차남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형 덕림군과 동생 덕천수와 함께 임금이 몽진할 때 노복을 거느리고 호가하던 중 평안남도 중화부에서 왜적을 만나 혈전을 벌이다 동년 6월 3일에 3형제가 함께 순절하였다. 이 때 나이 42세였다.
 의관(衣冠)으로 풍덕 황매동 묘좌에 장사지냈다. 현재 이북 개풍군 중면 덕수리 황매동이다. 배위 평택임씨와 합장하였다. 아들 백(栢) ·관(?) · 락(쫃) 3형제를 두었다. 1873년(고종 10) 3월에 고종황제가 공의 순절을 높이 평가하여 정려를 명하였다. 묘소가 이북에 있으므로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92년에 휴전선 이남인 장단군 군내면 정원리 산96번지에 공의 제단을 건립하고 매년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선성군(宣城君) 1522∼1562    파명:견성군(甄城君)
  선성군(宣城君) [1522(중종 17)∼1562(명종 17)]
 휘는 흠(欽), 자는 중경(仲敬). 견성군의 장손이며 완산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기성군부인 평양이씨이다. 배위 가평현부인(加平縣夫人) 가평이씨는 자손이 없고, 배위 광산현부인(光山縣夫人) 광산김씨는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덕림군(德林君) 낙(洛), 차남은 덕평수(德平守) 회(淮), 3남은 덕천수(德川守) 택(澤)이다. 딸은 영산신씨 혜(?)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15세에 경학에 통달하였으며, 품계는 정의대부까지 올랐다. 41세에 별세하니 명종대왕은 하루 동안 조회를 폐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케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중촌 선영하 건좌이다. 광산현부인 광산김씨와 합장되었다. 가평현부인 가평이씨의 묘소는 견성군 묘소 아래 신좌이다.
여성군(驪城君) 1525∼?    파명:견성군(甄城君)
  여성군(驪城君) [1525(중종 20)∼? ]
 휘는 석(錫), 견성군의 셋째 손자이고 완산군의 3남으로 어머니는 기성군부인 평양이씨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거창신씨로 3남을 두었다. 다른 배위 소생 3남이 있어 모두 6남을 두었다.
 공은 처음에 도정(都正)을 제수받고 위계는 명선대부에 올랐으며, 그 후 군(君)에 봉작되고 정의대부(正義大夫)의 위계를 받았다.
 공은 이모부인 봉사(奉事) 김유(金?)를 친히 시양(侍養)하였고 죽은 후에 가곡리 유좌지원,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천마산 동록에 장사지냈다.
 공은 친척간의 화목을 몸소 수범했을 뿐 아니라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라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완산군(完山君) 1500∼1557    파명:견성군(甄城君)
  완산군(完山君) [1500(연산군 6)∼1557(명종 12)]
 휘는 수함(壽탂), 자는 성이(誠耳). 견성군의 장남이다. 1544년(중종 39) 중종대왕이 승하하였을 때 대전관(代奠官)이 되고 위계가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이르렀다. 부인은 기성군부인(箕城郡夫人) 평양이씨이며 3남 2녀를 두었다.
 견성군의 피화로 인하여 어린 나이에 동생 계산군과 함께 멀리 귀양가 있었으나, 이홍간이 중종에게 진강(進講) 중에 간곡히 간하여 귀양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완산군과 계산군 두 형제가 입시하니 중종이 친히 손을 잡고 위로하며 은휼(恩恤)을 베풀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산 152-1 줄을동 중촌 견성군 묘 우강 건좌지원이고 석물은 상석과 문관석 및 동자석이 있다.
평성부정(枰城副正) 1523∼1548    파명:견성군(甄城君)
  평성부정(枰城副正) [1523(중종 18)∼1548(명종 3)]
 휘는 내(쨴), 자는 인중(仁仲). 견성군의 둘째 손자이며 완산군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기성군부인 평양이씨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평산신씨로 자손이 없고, 배위 신부인 청주경씨는 1남 덕산수 순(洵)을 두었다.
 공은 강직한 성품에 항상 예의범절을 지키며 효와 우애가 깊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 1548년(명종 3) 12월 16일 26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중촌 견성군 묘 우강 신좌이다. 부인 평산신씨와 청주경씨 3위 합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