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고성군(固城君) 1488∼1519    파명:밀성군(密城君)
  고성군(固城君) [1488(성종 19)∼1519(중종 14)]
 휘는 강(鋼), 자는 원경(元卿). 운산군의 2남이며 춘성군(春城君)에 입후(入後)되었다. 초수 부정에서 1440년(세종 22) 군으로 봉해지고 1446년(세종 28)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승계되었다. 1459년(세조 5)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선영하 건좌이며 묘표는 판서 신상(申?)이 찬하고 봉례 이문건(李文楗)이 썼다.
 배위는 전의현부인 여흥민씨로 직장 은(?)의 딸과 여산송씨 자강(自剛)의 딸이다.
광성정(匡城正) 1493∼1545    파명:밀성군(密城君)
  광성정(匡城正) [1493(성종 24)∼1545(인종 1)]
 휘는 전(銓), 자는 호중(乎仲). 운산군의 3남이며 1499년(연산군 5)에 초수가 부정이었다가 1513년(중종 8) 창선대부에 승계되었다.
 1545년(인종 1)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선영하 자좌이다.
 배위는 신부인 강릉김씨로 첨정 유악(由岳)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에 별세하였으며 묘는 합부이다.
광원군(廣原君) 1514∼1567    파명:밀성군(密城君)
  광원군(廣原君) [1514(중종 9)∼1567(명종 22)]
 휘는 구수(耉壽), 자는 학수(鶴첤). 광성정의 차남이며 초수 수에서 후에 정으로 창선대부에 올랐다. 별세한 후에 승헌대부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내리 쌍곡 주금산 진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동래정씨로 현감 구년(龜年)의 딸이다. 1569년(선조 2)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합폄이다.
덕평군(德平君) 1506∼1560    파명:밀성군(密城君)
  덕평군(德平君) [1506(중종 1)∼1560(명종 5)]
 휘는 항(沆), 자는 항지(沆之). 고성군의 장남으로 초수 수에서 1522년(중종 17) 정으로, 가정대부로, 다시 1545년(인종 1) 정의군(正義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선영하 건좌이고 묘비는 판돈녕 강녕군 홍섬(洪暹)이 찬하고 예성위 송인(宋寅)이 쓰고, 판교 박병(朴言秉)이 전(篆)하였다.
 배위는 신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부마 위성위 치원(致元)의 딸과 신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로 현감 증 참판 서양군 자(慈)의 딸이다.
밀성군(密城君) 1430∼1479    파명:밀성군(密城君)
  밀성군(密城君) [1430(세종 12)∼1479(성종 10)]
 휘는 침(琛), 자는 문지(文之), 초시(初諡)는 장효(章孝), 개시(改諡)는 효희(孝僖).
 세종대왕의 5남이며 어머니 신빈(愼嬪) 청주김씨의 3남이다. 신빈은 1406년(태종 6)에 태어났으며 첨지 중추원사 원(元)의 딸이며, 밀성군을 비롯하여 계양군(桂陽君) 증(?) · 의창군(義昌君) 강(?) · 익현군(翼峴君) 연(璉) · 영해군(寧海君) 당(쩪) · 담양군(譚陽君) 거(?) 등 6남을 두었다.
 공은 원래 총명하고 지혜가 출중하여 세종대왕은 다른 아들과 달리 사랑하였으며 나이 7세에 밀성군에 봉해졌다. 세조대왕이 등극하기 전에는 공과의 사이에 우애가 특히 독실하였으며, 1455년(세조 1)에 세조대왕이 즉위하자, 정체(政體)에 관한 모든 사안을 공에게 자문하였으며, 군정에 유의하자 종실 중신 중에서 공이 수위로 발탁되어 도총관이 되었고, 또 왕명을 받아 문소전(文昭殿) 사옹원(司饔院) 종부시(宗簿寺)의 도제조(都提調)를 역임하였다. 또한 1458년(세조 4)에 상정국(詳定局) 개설 임무를 맡았으며 1467년(세조 13)에 의금부 도위관(都委官)을 맡았다. 1469년(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길 때 도총관의 명을 받았으나 간곡히 사양하니 예종대왕은 특명으로 공의 3남 수안도정(遂安都正) 상(言賞)과 4남 석양도정(石陽都正) 학(?)에게 군(君)을 봉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성종대왕이 즉위하자 공의 공(功)이 많던 중 특히 호위의 공이 책훈되어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을 하사받았다.
 1479년(성종 10) 정월 초하루에 향년 50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319-4 기자산 동록 유좌 묘향지원에 있다. 신도비는 이조판서 달성군(達城君) 문충공(文忠公) 서거정(徐居正)이 찬하고, 예문관 응교(應敎) 안침(安琛)이 쓰고 아울러 전(篆)도 써서 1600년(선조 33)에 비를 세웠다.
 공의 초시(初諡)는 장효(章孝)이었는데 1781년(정조 5)에 원종대왕 장릉의 존호가 장효대왕(章孝大王)이어서, 이를 피하기 위하여 9대손 우의정 휘지(徽之)가 아뢰어 효희(孝僖)로 개시(改諡)되었다.
 태실이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성천(星川) 담석산(쩘石山) 남방 제4위에 있는데 이곳에 왕자들의 태실과 원손(단종대왕) 태실의 19기가 지방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설치연대는 1438∼1442의 시기로 추정된다.
 밀성군 묘역 및 신도비는 1993년 경기도 하남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에서 1996년에 묘역으로 이전 봉안되었다.
 배위 풍덕군부인(豊德郡夫人) 여흥민씨는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승서(承序)의 딸로, 운산군 · 춘성군 · 수안군 · 석양군의 4남과 2녀를 두었다.
수안군(遂安君) 1455∼1510    파명:밀성군(密城君)
  수안군(遂安君) [1455(세조 1)∼1510(중종 5)]
휘는 상(), 아명은 경태(景泰), 자는 근옹(謹翁), 시호는 양소(襄昭). 초수는 도정, 후에 봉군되고 가덕대부로 승계되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밀성군의 3남이며 수춘군(壽春君)에게 출계하였다. 출계된 사연이 이렇게 전한다. 단종대왕 손위 때 수춘군이 참변을 당하자 밀성군이 불쌍히 여기고 남몰래 제사를 지내왔다. 그 후 1691년(숙종 17) 사육신 등이 신원되면서 수춘군도 신원되어 봉사할 후손을 정하는데 밀성군 집안에서 제사지낸 사연을 말하니 밀성군 후손으로 입계함이 좋을 것 같다 하고 왕명으로 수안군을 수춘군의 후계로 삼았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밀성군 집안에서 의안대군과 수춘군 양위를 봉사한 음덕으로 후손들이 출중하여 6상(六相), 8판(八判), 3대 대제학(三代 大提學)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운산군(雲山君) 1453∼1510    파명:밀성군(密城君)
  운산군(雲山君) [1453(단종 1)∼1510(중종 5)]
 휘는 계(誡), 자는 신옹(愼翁), 시호는 공소(恭昭). 밀성군의 장남으로 총명하고 수려하며 준수하고 밝아 세조대왕이 친히 경서와 사서를 가르쳤다. 초수 정에 이어서 1464년(세조 10) 12세의 나이로 정의대부에, 이 후 승헌대부에 승계되었다. 1480년(성종 11) 가덕대부, 1499년(연산군 5) 흥록대부에 올랐다. 곧 이어 종부시(宗簿寺) 도제조, 문소전(文昭殿) · 사옹원(司饔院) 영사로 있는 동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으며 연산군 때 현록대부를 제수받았다. 하지만 공은 종실의 원로로 연산군을 실정의 이유로 폐위하고 중종대왕을 옹립하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1506년(중종 1)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 2등을 하사받았다.
 1510년(중종 5)에 별세하여 1511년(중종 6)에 광주군 치서면 사락리 대덕원 자좌 오향(현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산4-1)에 장지를 정하였다. 석물을 갖추었고 신도비는 이조판서 남곤(南袞)이 찬하고 종부시 정 김희수(金希壽)가 쓰고 관찰사 이언호(李彦浩)가 전(篆)해서 1518년(중종 13)에 세웠다. 사당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에 아버지 밀성군과 함께 모셨다.
 배위는 신천군부인(信川郡夫人) 현풍곽씨로 주부 득륜(得倫)의 딸과 오천군부인(烏川郡夫人) 연일정씨로 자숙(自淑)의 딸이다.
철성군(鐵城君) ? ∼ ?    파명:밀성군(密城君)
  철성군(鐵城君) [ ? ∼ ? ]
 휘는 갱(죘), 자는 명경(鳴卿), 호는 백화헌(百花軒)이다. 운산군의 장남으로 초수 부정에서 후에 군으로 봉해졌다.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선영하 축좌이다.
 배위는 군부인 문화류씨로 첨정 인유(仁濡)의 딸이며 묘소는 쌍분이다.
춘성군(春城君) 1454∼1485    파명:밀성군(密城君)
  춘성군(春城君) [1454(단종 2)∼1485(성종 16)]
 휘는 당(), 시호는 도효(悼孝)이다. 초수 정, 후에 봉군되고 다시 승헌대부로 승계되었다. 밀성군의 차남이며 의안대군에 출계하였다.
 “춘성군은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의 뒤를 이으라.” 다시 “의안대군 방석의 제사를 받들라.”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의안대군의 후계자가 되었다. 처음 세종대왕의 제6남 금성대군으로 의안대군을 봉사케 했으나 금성대군이 피화(被禍)된 뒤에 춘성군으로서 후사를 잇게 한 것이다.
 1485년(성종 16)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산3번지에 모셨다.
 배위는 첨추 무영(茂英)의 딸로 창녕현부인 평양조씨이며 1520년(중종 15)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합부이다.
평릉정(平陵正) ? ∼?    파명:밀성군(密城君)
  평릉정(平陵正) [ ? ∼? ]
 휘는 호(濠), 자는 중양(中養). 철성군의 장남이며 초수 수에서 명선대부 도정에 올랐다.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선영하 축좌이다.
 배위는 신부인 연일정씨로 현감 형(?)의 딸과 신부인 광주정씨로 유(裕)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