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녕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가은군(加恩君) 1453∼1506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휘는 빈(퓛), 자는 계빈(季彬). 대군의 손자이며 원천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조씨(趙氏)로서 첨지 지당(之唐)의 딸이다.
 효령대군이 특히 사랑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또 효령대군을 따라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뵈올 때도 특별히 대군 곁에 앉기를 허락하여 주위에선 달리 여기었다.
 국법은 종실의 나이가 15세가 되어야 직책이 주어지는데 1465년(세조 11) 공의 나이 13세에 특별히 가은감(加恩監)을 제수하고 품계는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1467년(세조 13) 세조대왕이 명선대부를 하사했고 품계는 가은도정(加恩都正)에 이르렀다. 1476년(성종 7)에 세조대왕비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마침내 대직언(代直言)에 선택되었는데, 공이 그 나이가 어렸는데도 성종대왕은 특별히 연제관(練祭官)을 삼아서 품계를 정의대부로 높이고 가은군(加恩君)으로 봉하였다. 또한 부묘(정희왕후를 종묘에 모심)할 때 중의대부로 올랐다.
 공이 일찍 아버지인 원천군을 여의고 할아버지 효령대군의 따뜻한 가르침을 받아 스승을 구하여 학문을 닦았다. 공은 순후하고 근실하고 말이 적으며 검소했으며 활쏘는 것을 잘하였다. 대군과 함께 활을 쏘아 여러 번 명중하여 상금을 많이 탔다. 효령대군이 90세가 넘음에 공에게 관아에서 제사를 주관할 것을 명하여 공은 명을 받들어 더욱 근신하였다. 1486년(성종 17) 효령대군이 별세하자 공은 매우 슬퍼했으며 1503년(연산군 9)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아버지 때와 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익명옥(匿名獄)이 일어났다. 연산군의 체포령이 있을 때 또한 체포되었으나 말하는 기개가 성실하므로 구금은 면하였으나 병을 얻어 이듬해 2월 19일에 향년 54세로 별세하였다.
 배위는 운봉박씨 선공부정(繕工副正) 귀손(貴孫)의 딸이며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 종우(從愚)의 손녀이다. 1495년(연산군 1) 6월 18일 향년 42세로 별세하였다. 양주의 정좌계향(丁坐癸向)에 장사지냈으며 부인이 8남 3녀를 두었고 측실에서도 3남을 두어 모두 11남 3녀이다.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태종대왕의 4남이며 세종대왕의 동생으로 휘는 종(?), 시호는 소경(昭頃). 8세에 취학하고 1414년(태종 14)에 성녕대군으로 책봉되었으며 1417년(태종 17)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계급에 올랐다. 창녕성씨(1417∼ ?) 좌찬성 희정공(僖靖公) 억(抑)의 딸을 부인으로 맞고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첩지를 받았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다.
 대군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활을 쏠 때 백발백중이므로 태종대왕 양위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418년(태종 18)에 병환이 생겨 태종대왕이 친히 치병하고 어루만지며 쾌유하기를 빌었으나 불행하게도 그 해 2월 5일 14세의 어린 나이로 별세하였다. 태종대왕은 크게 슬퍼하며 2일간 수라를 물리치고 3일간 정사를 쉬었으며 30일 동안 소찬을 하였으며 “대군의 치상을 예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하였다. 태종대왕은 친히 조문(弔文)을 짓고 장지를 고양현 산리동(酸梨洞)에 안장케 하고 변한국소경공(卞韓國昭頃公)에 추봉(追封)하며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자빈객 성균관 대사성 변계량(1369∼1430)이 신도비문을 짓고, 대자암(大慈庵)이라는 절을 세워 대군의 영혼을 위로케 하였으며 산리동을 대자동(大慈洞)이라 개명하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세종대왕은 수호군 30여 명을 두어 대군 묘소를 관리케 하여 형제간 우애 또한 극진하였다. 현재 묘역이 경기도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