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기계부정(杞溪副正) ? ∼ ?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효전(孝全), 대군의 3대손이며 창선대부(彰善大夫)에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이르렀으며 단종대왕에 대한 충절로써 생애를 마쳤다. 슬하에는 2남 1녀를 두었다.
문양군(文陽君) 1431∼1489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계윤(季胤), 대군의 증손이고 영천군의 손자이며 문양군(文陽君)으로 봉군되었다. 현령을 지냈다. 묘소가 경기도 성남시 율동에 있었는데 분당 지역 도시 개발로 수용되어 충남 부여군 조촌면 추앙리 당산 아래에 이장하였다. 성남시 율동 영천군 및 그 자손들의 묘역은 사패지로 5백여 년 산지기를 두어 세일사(歲一祀)를 모시던 곳이었다. 이장시 묘를 헤쳐보니 석회를 5겹으로 싸고 8척 깊이를 내려가니 내외분의 내관과 외관이 동시제품으로 사방 귀퉁이 먹물선이 뚜렷하고 현령공의 외관 천판(天板)을 열어보니 한지에 연꽃이 사방에 그려져 있고 중심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보이는 글이 흑서되어 있었다. 명주필과 명정(銘旌) 순으로 놓아져 있는데 한지의 내용을 옮겨 쓰는 동안 종이가 삭아버려 내용 파악을 할 수 없었으나 다행히 사진으로 찍어 그 자료에서 보면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명주 한 필이 접혀져 있고 또 명주 한 필 접은 속에 `통훈대부 금구현령 리공지구(通訓大夫金溝縣令李公之柩)\'라 또렷하게 먹글씨로 적혀 있었다. 명정 밑에는 이불로 덮인 채 염습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시신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윤기가 도는 검은 머리카락으로 틀어진 상투와 수염 등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시신도 탄력감을 느낄 정도의 피부 상태가 유지되어 있었다. 염습의를 모두 벗기고 한지와 마포로 다시 개렴하여 이장했다.
 훗날 문화재관리국에 알렸더니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연락이 되어 민속박물관 연구실 박성실 박사와 고분자 연구원이 성남시 율동 광중에서 나온 염의를 거두어 연구에 필요하다 하여 종중에 보관하고 있는 명주 · 명정 · 조선통보 · 염주 등을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 관장 석주선 박사와 박성실 연구원 등은 이를 토대로 연구한 결과 현존하는 조선조 최고의 의상으로 밝혀졌으며 1993년 5월 2일 개관 12주년 기념 연구논문 발표회를 성황리에 가졌다.
문평군(文平君) 1428∼1497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종윤(從胤), 자는 가계(可繼). 대군의 종손이며 문평군(文平君)으로 봉군되었다. 1449년(세종 31)에 문음으로 충의위에 예속되었다가 사과(司果) 호군(護軍)이 되었다. 1462년(세조 8)에 군기주부와 안주판관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12월에 별세했다. 37년 후인 1535년(중종 30)에 충청병마절도사인 아들 형순(亨順)이 귀하게 됨으로써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 조부 영천군 산소 경내에 있었으나 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충남 부여군 조촌면 추앙리 당산하에 천묘하여 모셨다.
순창군(順昌君) ?∼145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승로(承老), 시호는 소민(昭愍). 대군의 증손이며 완천군의 차남인 하릉군의 장남이고 하령군의 조카이다. 일찍이 사마 양시에 급제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함께 화를 당하여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순창군(順昌君)으로 봉해졌다. 1900년(광무 4)에 왕명으로 14대 족손 재익(在翼)으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했다.
 순흥군(順興君) [ ? ∼ ? ]
 휘는 수로(守老), 대군의 증손(曾孫)이며 하릉군의 2남이다. 1877년(고종 9)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되었다.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며 대군의 종손(宗孫)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배천조씨(白川趙氏)이다.
순천군(順川君) ?∼1419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대군의 장남이며, 휘는 지숭(之崇)이고 시호는 정소(靖昭)이다. 1401년(태종 1)에 완성군(完城君)으로 봉해졌다가 1878년(고종 15)에 순천군(順川君)으로 재봉군 되었다. 1409년(태종 9) 5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1년(태종 11) 5월 장생전(長生殿)을 수리하고 평양에 있는 태조고황제의 진영(眞影)을 봉영해 와 광연루에 봉안하고 태조고황제의 진영과 개국공신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1413년(태종 13) 4월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이어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를 제수받았다. 1414년(태종 14) 1월 지돈녕부사, 1415년(태종 15) 12월 판좌군도총제사, 1416년(태종 16) 판돈녕부사, 1418년(태종 18) 6월에 판우군도총제사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2월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 황제를 배알하였다. 6월에 하성절사로 다녀와 임금을 배알하고 중국 황제가 하사한 선물을 전달한 후 며칠 뒤 갑자기 세상을 뜨니 조정에서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장례를 후히 치러 주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안계군(安溪君) ?∼145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보인(保仁), 시호는 충장(忠莊). 대군의 6남인 흥천군의 장남으로 곧 의안대군의 손자이며 안계군(安溪君)으로 봉군되었다. 일찍이 목사를 지냈으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4촌인 하령군과 단종대왕을 옹호하다가 아들 7형제 중 막내만 빼놓고 6인의 아들과 함께 화를 당했다. 1698년(숙종 24)에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다.
여양군(礪陽君) ?∼145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승윤(承胤), 자는 장지(長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대군의 증손이며 6종영 중 하령군 양의 장남이다. 1453년(단종 1)에 증광시 정과(丁科)에 급제했다. 헌납 · 직강을 지냈으나 아버지 하령군과 동생 여평군과 세 아들이 함께 화를 당했다. 1698년(숙종 24)에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1872년(고종 9)에 여양군(礪陽君)으로 봉해졌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아들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계조(繼祖) · 차남 소조(紹祖) · 삼남 장군(將軍) 3형제가 모두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했다. 이들 3형제도 모두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있다.
여평군(礪平君) ?∼1453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휘는 승효(承孝), 시호는 충숙(忠肅). 대군의 증손이요 하령군의 차남이며 여양군의 동생이다. 여평군(礪平君)으로 봉군되었다. 계유정난 때 아버지, 형, 조카들과 함께 화를 당했다.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1872년(고종 9)에 시호를 받았다. 1900년(광무 4)에 9대손 경림(慶林)으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왕명이 내려졌다.
영천군(寧川君) 1379∼1431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대군의 4남이며 휘는 담(湛)이고 영천군(寧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문과에 급제했고 1417년(태종 17) 우군총제, 1418년(태종 18) 동지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 때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라는 특명을 받아 임금께 올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군을 수창궁으로 불러 행차시나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반드시 수행토록 하였으므로 늘 가까이서 임금을 모셨다. 1419년(세종 1) 지돈녕부사로 좌금위삼번절제사(左禁衛三番節制使)로, 4월에는 중군도총제로 승진했다. 10월에는 하정사(賀正使)의 임무를 받아 북경을 다녀와서 이듬해 9월에 도총제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평양선위사 지돈녕이 되어 선온(宣춠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하는 것)을 받들고 떠났다. 1430년(세종 12) 세종대왕은 6월에 4도감을 설치하여 빈전도감(賓殿都監)의 제조로 임명했다.
 1431년(세종 13) 12월에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애석해 하며 예조에 명하여 치제케 하고 제문을 내렸다. 또한 부의로 쌀 · 콩 각 20석을 내렸다.
 묘지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 신일사 앞산에 있었다. 개국1등공신인 의안대군의 아들이므로 나라에서 공의 묘소를 하사했는데, 이 묘소 경내를 한 유생이 범장(犯葬)한 일이 있었다. 이를 처리하는 산송진정(山訟陳情)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충효사상과 위선사업을 알기 위하여 간략하게 기록하여 둔다.
 “영천군 묘앞에다 범장한 산송에 대한 진정서.
부여 거주 유학(幼學) 리대려(李大呂 : 大容) 등은 유수(留守) 합하에게 말씀드립니다. 저희들 14대조 지돈녕부사공은 개국공신 의안대군의 아들로서 분묘가 광주군 돌마면에 있사온데 산직(山直)을 두어 금호(禁護)하여 내려온 지 근 4백년이 되었습니다. 자손들이 매년 세일사에 성묘의 예를 병행하고 있사온데 뜻하지 않게 지난 신축년(1841 : 헌종 7)에 한 무덤이 소생의 선묘 앞에 생겨나 탐문한 즉 이는 서울에 사는 남지구 처의 무덤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대대로 지나온 내력으로 충고하고 사리로써 깨우치니 남지구가 사과하며 이장할 뜻으로 사정하더니 다시 옮기어 지돈녕공의 분묘 계하에다 이장하였습니다. 이 어찌 사대부의 도리라 하겠습니까? 지난 병오년(1846 : 헌종 12)에 두 차례나 진정하여 즉시 옮기라 하였습니다만 지금까지 이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각기 먼 시골에 흩어져 천리길에 있사오나 가슴 속에 가득 찬 일념은 오직 위선(爲先)에 있사옵니다. 금년 3월 15일 주상께서 행차하실 때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원통함을 알리었습니다. 마침 천지 부모 같은 큰 은혜를 특별히 입사와 봉심(奉審) 거행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첩보를 내리시어 속히 이장하도록 하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병오년에 두 번 진정했을 때 즉시 이장한다 하였는데 지금까지 6년이 지나도록 파내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으니 믿지 못하겠습니다. 감영과 고을에 올렸던 도형을 연명소장에 동봉하여 유수 합하께 올리옵니다. 원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원통한 울부짖음에 지체없이 선처하여 주시옵기 비나이다.
신해년(1851 : 철종 2) 4월, 유학 리대여 등 23명 올림”
 지금은 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1987년 충남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당산봉하에 천묘하여 신도비와 사우를 세워 봉제사하고 있다. 이장 작업 중 광중(壙中)에서 조선통보 8엽이 출토되어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완천군(完川君) 1373∼1406    파명:의안대군(義安大君)
  대군의 차남이며 휘는 숙(淑), 시호는 제의(齊懿)이다. 1401년(태종 1)에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해졌다. 완천군은 부친 의안대군과 함께 태조고황제를 도와 개국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숙종대왕은 이런 부자의 높은 공을 기려 `양세원훈(兩世元勳)\'이라 친필을 내렸다.
 1398년(태조 7) 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로 임명되고, 1401년(태종 1) 좌명1등공신 녹권을 받고 완천군으로 책봉되었다. 1405년(태종 5) 의정부 찬성사에 제수되었다. 1406년(태종 6) 10월에 별세했으며, 이 때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제문을 내려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
 묘지는 광주군 노우개 일안인데 장남 하령군 양(穰)이 계유정난에 3상신(相臣)과 함께 순절하여 실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