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파 약사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대왕과 인렬왕후(仁烈王后) 한씨의 제3남으로 1622년(광해군 14)에 태어났으며 휘는 요(홏),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鷄),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대군은 시, 서, 화에 뛰어났으며 작품으로는 산수도,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고백도(古栢圖)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송계집>,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 등이 남아 있다.

1630년(인조 8) 인평대군에 봉해지고 수차례에 걸쳐 부왕을 도와 외교 사명을 받들고 심양과 연경 등을 오가며 세운 공로가 매우 크며, 병자호란 때에는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대군은 1658년(효종 9)에 별세하였으며 형인 효종대왕은 제례에 따라 광주(廣州) 고읍(古邑)에 장사 지냈고, 1693년(숙종 19) 8월에 국왕이 하사한 포천(抱川) 왕방산(旺方山) 이록(二폍)에 이장(移葬)하고 유거(柳車) · 석회(石灰) · 현훈(玄텛) 등을 하사하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친히 제문을 지어 손수 쓰고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고,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옛 석물(石物)을 신산(神山)에 옮기도록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에 있다.

묘소 옆에는 효종 · 숙종 · 영조 · 정조대왕의 어제 어필로 된 비석이 묘각 안에 있으며 복천부부인 오씨와 합장하였다.

또한 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건립되었으며 1990년에 새로운 재실을 건축하였다.

대군은 복녕군(福寧君) · 복창군(福昌君) · 복선군(福善君) · 복평군(福平君) 네 아들을 두었으나 복평군은 1872년(고종 9) 7월에 특명으로 인조대왕의 4남인 용성대군(龍城大君)의 계자로 입적되어 분파되었다.

대군의 장남인 복녕군은 양원군(陽原君)과 의원군(義原君)을 두었으며 양원군은 여흥군(驪興君)과 여릉군(驪陵君) · 여천군(驪川君)을 두었고 의원군은 안흥군(安興君)과 안계군(安溪君)을 두었다.

차남인 복창군(福昌君)은 완원군(完原君)을 두었으며 완원군은 무림군(茂林君)과 무춘군(茂春君)을 두었다.

3남인 복선군(福善君)은 완릉군(完陵君)을 두었고 완릉군은 하흥군(河興君), 하청군(河淸君), 하운수(河雲守), 하은군(河恩君)을 두었다.

무진년에 선무원종1등공신록에 올랐으며 1646년(인조 24)에 영국1등공신에 정해졌고 배위는 복천부부인이고 감사 증 우의정 오단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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