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대군파 약사

함양대군


휘는 전이고, 익조대왕의 제7남이다. 어머니는 정숙왕후 등주최씨이다.

1872년(고종 9)에 대군 영종정경부사로 추봉되고, 4세에게도 습봉되어 군으로 봉해졌다.

묘소는 명릉곡(明陵谷)에 있다.

함양대군은 외아들 영창군(靈昌君) 연(延)을 낳고, 영창군은 외아들 밀랑군(密朗君) 신우(神佑)를 낳았으며, 밀랑군도 외아들 화봉군(華峯君) 경(卿)을 낳으니 4대가 독자로 내려왔다.

그러나 함양대군의 후손들은 굉장히 많이 퍼져 익조대왕의 아들 중 가장 많은 종원을 가졌다 할 것이다. <선원속보>에서도 <함양대군파보>는 6권이나 된다.

함양대군 후손들의 분포지역을 보면 함경북도 경성(鏡城)을 중심으로 부령(富寧) · 회령(會寧) · 길주(吉州) · 명천(明川) · 단천(端川) · 주을(朱乙) 등지에 퍼져 있고, 일부는 영흥(永興)을 비롯한 함경남도 지방에도 산재해 있다.

함양대군 후손들은 각계에서 활동했는데 그 현조(顯祖)들의 자취는 이러하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1등공신에 국수(國壽)와 3등공신 국봉(國鳳 : 1554∼1638) 형제가 있고, 이괄의 난을 평정한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책정된 경상(景祥 : 1578∼1649)은 국봉의 아들이다.

문과 급제자로는 사우(士瑀 : 1595∼?)가 있어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고, 소과(小科)로는 진사에 기복(基腹) · 재희(在禧)가 있고, 생원에 헌일(憲一)이 있다. 최고 품계로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경춘(景春 : 1709∼1803)이 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석(錫)을 비롯하여 25명,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희성(希聖)을 비롯하여 23명,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지화(枝化) 가 있다.

기타 공조참의 복성(福星)과 한성부좌윤 원담(元談) 부자, 도정(都正) 대식(大植), 승지(承旨) 흥빈(興彬), 감찰(監察) 교준(敎俊) 등 다양한 관직을 지낸 분이 많고 참봉(參奉)만도 19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 함양대군파는 무과 집안이라 할 수 있어 무과 출신과 무과 관직에 종사한 현조가 많다.

무과 급제자가 68명이나 되는데, 그 외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이 14명, 어모장군(禦侮將軍)이 5명이나 된다. 두드러진 관직으로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응오(應梧), 첨절제사(僉節制使)에 매(枚)와 기현(箕鉉), 오위장(五衛將)에 경엽(慶燁)과 현무(顯茂)가 있다. 문무겸전으 로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절충장군 부사(府使)를 지낸 우현(右鉉)이 있다. 기타 별장(別將) · 만호(万戶) · 선전관(宣傳官) · 사과(司果) · 수문장(守門將) 등 여러 직책을 지낸 이가 많다.

<선원속보>를 만들 때의 파종 임원은 다음과 같다. 종손(宗孫)은 인규(仁奎), 문장(門長)은 승준(承俊), 도유사(都有司)는 병훈(炳薰), 교정유사(校正有司)는 병익(炳翊) · 상규(祥奎), 선서유사(繕書有司)는 민규(旻奎) · 희석(禧碩) · 창우(昌禹)이다.


종원 분포 상황

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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