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학수(學洙) 1892∼1980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시열(時說), 법명(法名)은 운허(耘虛). 대군의 22대손이며 동남군의 19대손이고 종빈(鍾彬)의 장남이다.
 철학박사이며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불교 대학자로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불교경전의 번역과 불교대사전을 발간했다.
 1910년 평양 대성중학교 2학년 때 105인 독립운동사건이 발생하여 학교 교직원과 학생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하고 1913년 봉천(奉天)의 비밀 독립 조직인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고 1919년에는 교포 기관지 `한족신보(韓族新報)\'를 발행하여 한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하였고, 1920년에 중국 상해로 가서 흥사단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금강산 봉일사에서 온천선사에게 사비계를 받고 불문에 출가하여 불교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이 크며, 그의 저서와 역서는 <한국독립운동사>를 비롯하여 수십 종에 달한다.
형주(衡柱) 1775∼1851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성서(聲瑞). 대군의 18대손이며 동남군의 15대손이다. 창린(昌麟)의 장남이고 석곤(錫坤)의 장손이다. 1810년(순조 10) 경오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연안김씨 명해(命海)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덕언면 이언(伊彦) 당하 해좌이다.
홍제(弘齊) 1680∼1762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4대손이며 요성군의 11대손이다. 부사과를 지낸 정민의 둘째 손자이며 시윤(時尹)의 차남이다.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을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내다가 수직(壽職) 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수원백씨로 운삼(雲三)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서리 황토산 자좌에 합폄되어 있다.
화문(華門) 1617∼1685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윤조(潤祖). 대군의 10대손이며 동남군의 7대손이다. 사복시정을 지낸 희백(希白)의 장남이며 용걸의 손자이다. 공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무안방씨 진충(振忠)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마산면 백미산 선영 유좌이다.
휘규(徽圭) 1831∼1880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재경(在卿). 대군의 20대손이며 동남군의 17대손이다. 경엽(景燁)의 장남이고 지주(之柱)의 손자이다. 1867년(고종 4) 정묘 식년 전시 병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배위는 연안김씨 재량(在良)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일신동 괴원산(魁元山) 북록 오좌이다.
희규(熙圭) 1848∼1899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중즙(中楫). 대군의 20대손이며 동남군의 17대손이다. 예엽(禮燁)의 장남이고 굉주(宏柱)의 손자이다. 1867년(고종 4) 정묘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배위는 수원백씨 통덕랑 시용(時用)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일신동 묵현 자좌이다.
희백(希白) 1581∼ ?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계련(季蓮), 대군의 9대손. 군자감 주부를 지낸 용걸의 아들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배위는 경주고씨 봉(鳳)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마산면 백미산(百美山) 유좌(酉坐)이다.
희백(希白) 1647 ∼ ?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4대손이며 요성군의 11대손이고 부사과를 지낸 철(轍)의 아들이다.
 종3품 병절교위(秉節校尉)를 거쳐 용양위 벼슬을 하였으며 부사과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한씨(韓氏)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윤희동(尹希洞) 유좌이며 합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