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안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5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익번(益蕃) ? ∼ ?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대군의 4대손이며 천읍군(川邑君)의 독자이다. 어모장군 행 충좌위 부호군에 올랐고 음 금부도사(蔭禁府都事)에 이르렀다. 3남 1녀를 두었다.
익수(益洙) 1816∼1865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자는 중겸(仲謙), 대군의 11대손이며 세병(世柄)의 장남이다.
 건공장군(建功將軍) 창선대부(彰善大夫) 행 의정부 우참찬(行議政府右參?) 겸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으며 1남을 두었다.
입(입) 1562∼1632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자는 자정(子靜), 대군의 7대손이며 언유(彦愉)의 차남이다.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다.
 우계(牛溪)의 문인으로 `절의(節義)와 의기(義氣)에 넘치는 선비\'라고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송상현(宋象賢 : 1551∼1592)과 친구였는데, 동백부사 송상현이 임진왜란 때 죽자 공이 크게 부끄러워 하면서 “내 맹세컨대 충신의 시체를 타향에 내버려 둘 순 없다”하고 적진으로 달려가 시신을 거두어 고향 산천에 묻어 준 일화가 있다.
장(璋) 1510∼1552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자는 군헌(君?), 대군의 5대손이며 익번(益蕃)의 차남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고 23세 때인 1532년(중종 27)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봉훈랑 행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였으며 2남을 두었다. 참소를 받아 동래(東萊)로 귀양갔다가 사면되어 돌아오다가 상주(尙州)에서 병이 나서 별세하였다.
재(?) ? ∼ ?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대군의 7대손이며 능서(能瑞)의 독자이다.
 가선대부 행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절의(節義)와 문학을 숭상하였으며 2남을 두었다.
정곤(貞坤) 1772∼1833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자는 계영(季永), 호는 근송(根松), 대군의 14대손이며 환(煥)의 3남이다.
 1792년(정조 16)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행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으며 무남 1녀이다.
정보(廷輔) 1666∼1724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초휘는 정필(廷弼), 자는 성민(性敏), 호는 신재(愼齋). 대군의 10대손이며 신(?)의 장남이다.
 현종 때 한림 대제학(翰林 大提學) 행 충청관찰사(行忠淸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증 숭정대부 공조참판에 올랐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정철(廷哲) ? ∼ ?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대군의 8대손이며 봉(?)의 차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증 자헌대부(贈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행 가선대부(行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역임하였으며 2남 2녀를 두었다.
중문(重?) ? ∼1735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자는 명휘(明輝), 대군의 12대손이며 산(찵)의 차남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 행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남을 두었다.
중복(重馥) 1808∼1892    파명:익안대군(益安大君)
  자는 치서(致瑞), 대군의 16대손이며 장환(章煥)의 아들로 태어나 문환(文煥)의 양자로 입계되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역임하였으며 4남 2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