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안대군파 약사

익안대군


태조고황제의 제3남으로 정종대왕의 동생이며 태종대왕의 형이다. 신의고황후 한씨의 소생으로 1360년(고려 공민왕 11)에 태어나 1404년(태종 4)에 별세하였다.

대군의 휘는 방의(芳毅)이고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성품이 온화순결하고 사리밝은 인덕의 귀공자였다. 고려말 혼란한 때 태조고황제가 정국을 안정시킬 무렵 대군은 모든 일에 조직적으로 계획을 치밀히 세워 도움을 주었다.

그로 말미암아 1392년 태조고황제가 왕위에 오를 때 대군의 공이 높아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또한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태수습의 중심이 되어 태종대왕으로 하여금 간신을 제거하게 하여 초기의 왕실을 튼튼히 바로 잡는데 공이 컸으므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거듭 책록되었다.

대군은 황실의 지친으로서 두 조정에 큰 공적을 세워 개국 · 정사 1등공신에 거듭 책록되었음에도 겸양지덕으로 일생을 깨끗이 마쳤다.

태종대왕은 대군을 중히 여기며 끝까지 신임하였다. 대군이 병중에 있을 때에 태종대왕은 친히 문병하여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곧 이어 주연을 베풀고 즐기다가 태종대왕이 말하기를 “형님이 병환중에 오래 앉아 대화하기가 수고로울 것이 심히 염려됩니다.” 고 하니 대군은 화답하기를 “신이 지금 병이 깊은데 어느날에 나가 뵈올는 지 기약할 수 없습 니다. 원컨대 조금 더 머무르시어 신이 취하여 자리에 눕는 모양을 보소서.” 하였다. 태종대왕은 대군과 같이 즐기다가 밤늦게 환궁하였으니 형제 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였다.

대군의 성품은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고 밖으로는 왕실과 사직을 안정시키는 대의(大義)가 불같아서 크게 공헌하였다.

대군이 쓴 `충효전가(忠孝傳家)'의 유훈을 후손들이 받들어 기리고 있다.

1404년(태종 4) 대군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날 당시 태조고황제는 상왕으로서 부의와 거마(車馬)를 보내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대군의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사곡리 백암동 해좌 언덕에 예장하였고 정종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대군은 삼한국 대부인 정경옹주 철원최씨와 혼인하여 익평부원군(益平府院君) 석근(石根)과 2녀를 두었고, 부부인(府夫人) 이씨와의 사이에 영가정(永可正) 승(昇)을 낳아 모두 2남 2녀를 두었다.

익평부원군은 신의군(愼義君) 인(仁) · 신성군(愼城君) 의(義) · 반남도정(潘南都正) 예(禮) · 종남도정(終南都正) 지(智) · 양진정(楊津正) 신(信) · 대림도정(大林都正) 강(綱) · 백파도정(白波都正) 상(常) 등 7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신의군(改封 : 廣川君 以仁)은 진안대군파로 출계하였다.

영가정은 소리수(小利守) 극문(克文) · 동평수(東平守) 극명(克明) · 다경정(多慶正) 유강(有康)의 3남과 1녀를 두었다.

종남도정 · 양진정은 후사가 없고 반남도정 · 대림도정 · 백파도정의 후손만이 대를 이어 왔다.

또한 영가정의 장남 소리수 · 차남 동평수도 무후해서 3남 다경정 후손이 계승하여 영가정파를 계승하고 있다.

지금 익안대군의 지파로는 신성군파 · 반남도정공파 · 대림도정공파 · 백파도정공파 · 영가정공파 등 5개파로 분파되었다.

익안대군의 후손들 중에는 문과급제 16명, 무과급제 38명, 이조판서 1명, 예조판서 1명, 호조판서 2명, 병조판서 2명 등을 배출하였으며 도승지 4명, 승지 13명, 육조의 참판 24명, 의정부 좌찬성 1명, 참의 6명, 사헌부 대사성 2명, 대사헌 1명, 사헌부 감찰 4명, 관찰사 4명, 한성판윤 4명, 병마절도사 3명, 중추부 판사 1명, 청백리 2명, 공신 7명, 증직 43명, 수직 11명 등을 배출하였으며 무관으로는 절충장군 25명, 어모장군 13명, 상호군 9명, 부호군 10명 선략장군 11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관직품계를 제수받은 것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2명, 숭록대부 1명, 숭정대부 3명, 소덕대부 2명, 가덕대부 1명, 자헌대부 8명, 숭헌대부 1명, 정의대부 2명, 창선대부 12명, 가선대부 66명, 명선대부 4명, 통정대부 74명, 통훈대부 37명, 봉정대부 1명, 조봉대부 3명 등이다.

익안대군 후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은 정계에서 인제(仁濟), 부영(富榮) 등이 있고 의료계에서는 길녀(吉女)가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 많은 후손들이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각 지파별로 직계의 숭조사업에 진력하고 있다.

선원보에 기초하여 익안대군파보는 1798년(정조 22) <무오보>를 비롯하여 1847년(헌종 13)에 <정미보>가 속간되고 1865년(고종 2)<을축�>, 1873년(고종 10)<계유보>, 1902년(광무 6)<임인보>가 모두 선원속보에 속한다.

일제 강점 후에도 <병인보(1926)>·<정축보(1937)>와 광복 후에는 <정유보(1957)>가 누차에 걸쳐 수보가 속간되었다.

그러나 과거 수보과정에서 교통 통신의 불편과 난리 · 사화(士禍) 등을 거친 까닭으로 누보자(漏譜者)가 많아 1983년<계해보>를 증보하여 <익안대군파보>를 발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군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影堂)은 서울에 있었으나 강원도 원성(原城 : 원주)으로 이전, 다시 경기도 여주로 이전하였고 그 후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종손인 내욱(來旭)이 영정을 부대(負戴)하여 전전하던 중 파종회장 경식(敬植)의 권유와 설득으로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 백파도정공 후예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그 곳의 대군 후손들이 기꺼이 맞아 영당을 건축하고 영정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정과 어필은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기신제와 2월, 8월 중정(中丁)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또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삼방리 대군 배위 묘역에는 남북 분단으로 대군의 묘제를 올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설단(設壇)하고 춘추 두 번에 걸쳐 제를 올리고 있다. 1996년에는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를 신축하고 대군의 유훈을 흠모하며 배향하고 있다.






종원 분포 상황

분포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계해보(癸亥譜)>(1983년) 간행을 통해서였다.
익안대군 후손의 집성촌으로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여주 · 이천 · 안양 · 포천, 강원도 춘천 · 원주 · 철원, 충청도의 청주 · 보은 · 영동 · 옥천 · 공주 · 대전 · 논산, 경상도의 대구 · 산청 · 고성 · 사천 · 상주 · 삼랑진, 전라도의 전주 · 군산 · 옥구 · 목포 · 여수 등지이며 북한지역과 해외에도 상당수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집계하여 보면 1만 3천세대에 6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각 지파별로 집계하면 다음과 같다.
파별
세대수
인구수
신성군파
1400
7000
반남도정파
3000
15000
대림도정파
3400
17000
백파도정파
4000
20000
영가정파
1400
7000
합계
13200
6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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