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기좌(箕佐) 1656∼1732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군필(君弼), 봉산군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 질(耋)의 차남이다.
 1689년(숙종 15)에 진사가 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과천현감이 되었고 병마절제사를 겸하였다.
 배위 숙부인 파평윤씨(1654∼1718)는 지헌(之憲)의 딸이다.
 비문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기창(箕昌) 1675∼1723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대이(大而), 호는 남곽(南郭). 참판공 야의 차남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신동이라 칭찬받았으나 불행히도 어릴 때부터 고질적인 눈병으로 인하여 어른들이 염려하여 글을 읽지 못하게 하였다.
 평생에 몇 권의 책 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을 옆에서 듣기도 하고, 혹은 병중에도 여가에 쭉 훑어보아 경전(經傳)과 자사서(子史書)를 널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문자 · 어법 · 고문(古文) 중에서 막히는 것이 없었다.
 붓을 잡으면 곧장 글을 짓는데 수천만 마디를 가득한 물 흐르듯이 힘차게 거침없이 술술 나와 궁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간혹 과거보기를 권하면 문득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폐질(癈疾)을 가진 사람이라 세상에 어찌 한권의 책도 읽지 않고서 여러 사람이 시문을 짓는 곳에 나가 놀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공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와 전장(典章)의 연혁에 있어서 모르는 것이 없어 조정 · 정령(政令)의 득실이며, 형법 · 송옥(訟獄)의 곡직(曲直)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여, 시비를 가릴 수 없을 때 공이 문득 한마디를 하면 모두 해결이 되었다.
 공의 부친이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는데,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과 의논하여 처결했고, 해묵은 의옥(疑獄)에 대한 문서가 산더미 같아도 공이 한번 보고 당장 결단을 내리니 그의 부친은 의론에 많이 좇으며 탄식하기를 “너의 재주와 지식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니 아깝다.” 하였다.
 아버지가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갈 때 수행하여 산과 바다를 두루 유람하고 동정장편(東征長篇) 5백여 구의 시를 지었는데, 시직(侍直) 이협(李浹)이 문사(文士)인데, 글을 보고 놀라며 탄복하기를 “웅장하고 세련되고 담박하고 넓고 큰 것이 바로 남산시(南山詩)와 더불어 함께 할 만하다.”하였다.
 뒤에 아버지를 따라 내주(萊州)에 갔을 때 판윤 박내정(朴乃貞)이 접위관(接慰官)으로서 객관(客館)에 유숙하였는데, 역시 시명(詩名)이 있는 사람이라 공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읊기를 주고 받으며 몹시 즐거워 하다가 글귀가 복잡할 정도로 길고 많아져서 미쳐 응수할 겨를이 없게 되자 박공이 붓을 던지며 사양하기를 “힘을 이미 다하였다. 이로써 그만두자.”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공의 조카 시적(蓍迪)은 그가 기록한 가장(家狀)에서 “공은 온갖 사물에 능한 재주를 가진 큰 그릇으로 세상에 비길 사람이 없으니 하늘이 공을 낳은 것은 우연한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에는 병으로 몸을 굽히게 하고 끝내 그 수명에 인색한 것은 어찌된 일인지? 아아! 슬프고 원통하다.”고 끝을 맺었다.
 배위 남양홍씨(1674∼1756)는 도사(都事) 증 이조참판 익녕군(益寧君) 호(灝)의 딸이다.
기추(箕樞) 1727∼ ?    파명:덕양군(德陽君)
 여양군의 손자이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식의 아들이다.
 음직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경주이씨는 수춘(壽春)의 딸이다.
기필(箕弼) 1694∼1760    파명:덕양군(德陽君)
  봉산군의 손자이며, 음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함평이씨는 지기(之箕)의 딸이다.
기항(箕恒) 1672∼1739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구이(久而), 봉산군의 손자이며, 참판공 야(壄)의 장남이다.
 1705년(숙종 31)에 진사가 되고, 1708년(숙종 34)에 벼슬길에 처음 나아가 장성부사에 이르렀다. 손자 정제(定濟)의 추은으로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경주김씨(1670∼1751)는 현감 계진(季珍)의 딸이다.
기홍(箕洪) 1641∼1708    파명:덕양군(德陽君)
 초명은 기주(箕疇), 자는 여구(汝九), 호는 직재(直齋), 시호는 문경(文敬).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봉산군의 손자로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숙(塾)이며, 어머니는 군수 송현(宋鉉)의 딸이다. 치암(恥菴) 이지렴(李之濂)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차츰 자라면서 사서이경(四書二經)을 읽었고, 약관이 되기 전에 자신을 위한 학문 즉 경학(經學)과 정치를 하기 위한 학문에 뜻을 두어 치암(恥菴) 이지렴(李之濂 : 1628∼1691)을 따라 <소학(小學)> · <근사록(近思錄)>등의 글을 읽었다.
 1665년(현종 6)에 회덕(懷德)으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찾으니 선생이 `진실심지 각고공부(眞實心地 刻苦工夫)' 여덟 글자를 써 주면서 권면(勸勉)하였다. 또 우암선생을 찾아 학문을 청하자 `거경궁리(居敬窮理)'의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이에 공은 학문에 힘써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버이의 명령으로 억지로 과거를 보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과거응시에 대하여 우암선생에게 물어서 그 답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두려워하고 감회가 있더니, 당시 사풍(士風)의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고 드디어 뜻을 결단하고 과거보기를 포기했다.
 숙종대왕 초에 우암이 소인배들의 모함을 심하게 받으므로 동문 여러 사람들과 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호소하였고, 그가 북관(北關)으로 떠날 때도 이와 같이 하였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우암이 용서를 받자 공은 즉시 예방하였다.
 1684년(숙종 10) 효릉참봉을 제수하니 종척의 후예로서 편안히 있을 수 없다 생각하여 즉시 나아갔다. 이 때 나양좌(羅良佐 : 1638∼1710) 등이 우암을 욕했다 하므로 급히 수천언(數千言)으로 소의 초를 잡아 변명하려 했으나 말리는 자가 있어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인심과 사풍이 크게 무너지자 공은 이를 슬프게 여기고 병으로 인해 직책을 그만두었다.
 1689년(숙종 15)에 사포서 별검(別檢)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우암이 제주에 위리안치되고 심지어 또 국문하자고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공은 비분하여 의리에 차마 잠자코 있을 수 없다하여 집안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나, “이제 사문(師門)의 혹화(酷禍)가 이에 이르렀는데 수십 년 동안 가르침을 받은 은혜를 어찌 저버린다는 말이냐.”하고 동문 40여 인을 거느리고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아뢰어 변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함경북도 회령으로 귀양갔다.
 공이 경성에 이르러 우암이 사약을 받고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1691년(숙종 17)에 소가 올라가자 임금은 특별히 공의 이름을 들어 말씀하기를 “이기홍(李箕洪)이 스승을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것이니 죄를 감등하라.” 하여 1694년(숙종 20) 4월에 비로소 방환(放還)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임금이 크게 각오하여 곤위(坤位 : 왕후)를 바르게 회복하고, 또한 명하여 우암의 관작을 회복시키게 하니 조정이 비로소 청명해졌다. 이 때 이조판서가 사류(士流) 중에서 우암을 위하여 소를 올렸다가 죄를 받고 물러난 사람들을 수용하자고 청하자, 임금은 “그것은 이기홍을 말하는 것이냐?”하며 즉시 서용(敍用)하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1688년(숙종 14)에 임금은 연신(筵臣)의 말로 말미암아 조정에 명하여, “경서(經書)에 밝고 행동을 닦는 사람을 천거하여 연석(筵席)을 갖추어 권강(勸講)하라.”고 하였는데 공이 여기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 1631∼1695)가 조정에 있었는데, 유일(遺逸)을 이끌어 쓰고자 하여, 공이 “숙망(宿望)이 있다.”고 말하였고, 또 재신(宰臣)의 천거를 입어 시강원 자의(諮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러 번 소를 올려 감당하지 못할 뜻을 아뢰자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이번의 신명(新命)은 실로 공의(公議)에 따른 것인데 어찌 고사(固辭)함이 이에 이르느냐, 조속히 올라와서 춘궁(春宮)을 보도(補導)하게 하라.”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 번 내 뜻을 말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랴, 마땅히 전후에 한 말의 뜻을 알아서 사양치 말고 올라와 내 뜻을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임금의 대우함이 몹시 두터웠으나 공은 더욱 두려워하여 끝내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1695년(숙종 21)에 종부시 주부에 승진하였으나 사은(謝恩)하고 이내 사퇴, 1696년(숙종 22)에 서연관에 선발되었으나 다시 사양하였다. 얼마 안되어서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하고 이윽고 통천현감으로 나아갔다.
 1697년(숙종 23) 겨울에 방백(方伯 : 관찰사)과의 친척이란 혐의로 사퇴하였다.
 1698년(숙종 24) 승진되어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인주치도(人主治道)에 관하여 여러 번 소만 올리고 사퇴하였다. 1700년(숙종 26)에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후에 청풍부사로 나아갔다.
 1702년(숙종 28)에 장령으로 소명을 받자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겸해서 생각하는 바를 아뢰니, 비답을 내리기를 “근심하고 사랑해서 진언한 것을 내 몹시 가상히 여기니 어찌 본받고 생각하지 않으랴.” 하였다. 그 뒤 연풍(延豊)에 내려가 문산(文山)에 수락정(壽樂亭)을 세워 그곳에 살면서,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가끔 화양동 등 사문(師門)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소일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집의에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자성편(自省編)> · <직재집> 등 10권이 있다.
 유집(遺集) 전후집(前後集) 30여 권 중 5권만이 간행되어 있다.
 배위 증 정부인 반남박씨(1640∼1702)는 세훈(世塤)의 딸로 뛰어난 덕행이 있었다.
 묘갈명(墓碣銘)과 비문이 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엄정면 율능리 560번지이다.
당(堂) 1650∼1728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사긍(士肯).
 봉산군의 5남으로 1673년(현종 14)에 넷째 형인 참판공 야(壄)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공은 문필(文筆)이 드러났고, 사우(士友)들이 알성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자, 공도 과시에 응하여 장원하기를 꿈꾸었으나 셋째 형인 이조판서 돈(墪)이 시관이어서 일부러 피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정릉참봉이 되었고, 사옹원 봉사(奉事) · 종부시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예에 따라 귀후서 별제(別提)에 오르고 의금부 도사로 옮겼다. 그 후 장악원 주부 · 형조좌랑에 올랐고, 이듬해인 1695년(숙종 21)에 태인현감으로 나갔다. 1699년(숙종 25)에 금산군수가 되었다가 사임하고, 1703년(숙종 29)에 예빈시 별제가 되고 호조정랑으로 옮겼다.
 1704년(숙종 30)에 이천부사로 나아갔고, 1709년(숙종 35)에 연안부사로 옮겨, 크게 군비(軍備)를 수리하여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다. 공이 상경(上京)하여 체직(遞職)을 청하여 검전도사(檢田都事)로 나아갔다.
 1715년(숙종 41)에 위수(衛率)가 되었다가 익위(翊衛)로 승진하고, 1719년(숙종 45)에 훈국랑(訓局郞)을 겸하였다.
 숙종대왕이 기사(耆社)에 입사(入社)함에, 모든 조관(朝官)중에서 나이 70세가 되는 4품 이상인 자는 계급을 승진시키니, 공도 이에 참여하여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720년(숙종 46)에 오위장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돈녕부 도정(都正)이 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한산이씨(1652∼1668)는 현령 직(稙)의 딸이며, 배위 숙부인 광주김씨(1654∼1732)는 중형(重亨)의 딸이다.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덕림(悳林) 1846∼1888    파명:덕양군(德陽君)
  봉래군 형윤의 10대손이며, 양성공 지의 9대손이고, 무과 통정대부 승일(承一)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오위장에 올랐다.
 배위 정부인 남양홍씨(1846∼1887)는 시무(時茂)의 딸이다.

 
덕현(德鉉) 1846∼ ?    파명:덕양군(德陽君)
  장정공 무의 차남인 도정공 기명(箕明)의 6대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달성서씨(1853∼?)이다.
돈(墪) 1642∼1713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진오(進吾), 호는 문천(文泉) · 안묵재(安默齋).
 봉산군의 3남으로 1672년(현종 13)에 별시 병과에 합격하여 한림(翰林) · 삼사(三司) · 사검(舍檢)을 두루 거쳐 1688년(숙종 14)에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올랐다. 1695년(숙종 21)에 충청감사로 나갈 때에 임금이 내린 교문(敎文)에 “왕은 말하노라.…(중략) 조정에서 우뚝하게 서서 재상과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하였도다. 석랑(夕郞)의 직책에서 물러나 오화(五花)의 직에 올랐고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는 6판서의 반열에 올랐도다. 그러나 여러 번 상전(桑田)과 창해(滄海)가 바뀜에 따라 귀양살이와 불안한 생활을 겪었고 북쪽 변방의 진영(鎭營)을 한번 지휘하여 풍상에 시달리는 외로움을 모면시켜 주었도다. 예조참판에서 벼슬을 그만 둘 뜻을 비치기도 했으며 비록 대소장단에 알맞지 않는 데가 없었으나, 혹은 안팎의 가볍고 무거운 일로 반대도 있었다. 때문에 수령(守令) 직을 지내기에 감사의 직책을 제수하였노라. 이에 경에게 중직을 주니 경은 그 능력을 다하여 그 직분을 다할지어라.”라 씌어있다. 이로 미루어 공의 험난하였던 편린을 짐작할 수 있다.
 1709년(숙종 35) 10월에 형조판서 11월에 대사헌, 1710년(숙종 36) 3월에 의정부 우참찬, 9월에 예조판서, 1711년(숙종 37) 3월에 이조판서, 7월에 또 예조판서, 9월 3일에 당년 70세로 기로소에 들어가고, 같은 달 다시 우참찬, 10월에 이조판서, 12월에 한성 판윤, 1712년(숙종 38) 1월에 예조판서, 2월에 정시 시관(庭試 試官), 5월에 다시 예조판서로 옮기었고, 12월에 아산으로 유배되어 다음 해인 1713년(숙종 39) 1월 22일에 끝내 파란만장하던 벼슬길을 뒤로 하고 별세하니 향년 72세였다.
 배위 증 정부인 칠원윤씨는 태기(泰基)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순흥안씨(1649∼1717)는 응회(應會)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