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야(壄) 1648∼1719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중선(仲先), 호는 남계산인(南溪散人).
 봉산군의 4남으로 1673년(현종 14)에 생원시에 합격, 1686년(숙종 12)에 벼슬길에 올라 1691년(숙종 17)에 직장(直長)으로 알성문과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1694년(숙종 20)에 통정대부로 승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 1697년(숙종 23)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갔으며 그 후 우부승지로 봉직하였고 1704년(숙종 30)에 동지사(冬至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어 좌부승지 · 충청도 관찰사 · 우승지 · 좌승지 · 동래부사 · 사간원 대사간 ·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712년(숙종 38)에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고 송도유수로 나갔다가 곧 이어서 예조참판으로 들어왔다. 1716년(숙종 42)에 승정원 도승지로 옮기었고, 1718년(숙종 44)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719년(숙종 45)에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그 해 7월 10일에 별세하니 향년 72세이다. 공은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형님을 공경하고 아우를 사랑하니 화음(和音)이 밖으로 넘쳤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불요불굴(不撓不屈)하여 자기의 임무에만 충실히 행하고 절대로 시류에 좇아 아부하는 일이 없었으며 곧은 말로 상소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눈물로 간하니 지론이 엄정하여 시배(時輩)들이 불열(不悅)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공이 당시 소론(少論)의 4대신(四大臣) 중의 한사람인 최석항(崔錫恒 : 1654∼1724) 등 몇 사람과 모반을 꾀한다고 하는가 하면, 싫어하는 무리들은 모함하는 계(啓)를 올려 누차 파직을 주청하였으나 임금은 그 때마다 물리치고, 파직치 못하도록 명을 내리니 이는 본디부터 그 충직한 인품과 비리를 용납치 않는 소행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배위 정부인 함열남궁씨는 군수 섭(燮)의 딸이다.
 신도비 · 묘표(墓表)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산2-1번지이다.
예현(禮鉉) 1803∼1887    파명:덕양군(德陽君)
  장정공 무(堥)의 장남인 평시서령공(平市署令公) 기장(箕章)의 6대손이다.
 음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봉화정씨(1801∼1851)는 치관(致寬)의 딸이다.
우제(遇濟) 1738∼1810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화숙(和叔), 호는 조은(朝隱). 돈녕부 도정 당(堂)의 증손이다.
 1777년(정조 1)에 진사가 되고, 1784년(정조 8)에 정시 병과에 급제, 교리를 거쳐 1786년(정조 10)에 통훈대부 행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 춘추관 기주관 · 강동현감 · 성천 진영 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배위 숙인 함양여씨(1738∼1811)는 현감 선양(善養)의 딸이다.
욱제(彧濟) 1765∼1839    파명:덕양군(德陽君)
  공은 구흥군 섬(睒)의 4남인 오창군(烏昌君) 형극(烱氵亟)의 현손이다.
 무과에 급제, 중시에 합격하고, 가선대부 동지충주부사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진주강씨는 오위장 영준(英俊)의 딸이다.
유겸(維謙) 1795∼1859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지경(持卿), 초휘는 창겸(昶謙). 돈녕부 도정 당(堂)의 5대손이다.
 진사로 1841년(헌종 7) 정시(庭試) 병과에 급제,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전의이씨(1790∼1824) 택배(擇培)의 딸과 숙부인 진주류씨(1800∼1839)이다.
의현(儀鉉) 1806∼1891    파명:덕양군(德陽君)
 귀천군 충숙공의 5남인 봉창수(蓬昌守) 경엄(烱儼)의 8대손이다.
 1889년(고종 26) 9월에 음직으로 자헌대부 행 용양위 대호군이 되었다.
 배위 정부인 경주이씨(1799∼1883)는 집중(集重)의 딸이다.
일제(逸濟) 1718∼1766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사안(士安), 양정공(良靖公) 기익(箕翊)의 손자이다.
 1746년(영조 22)에 무예로 별천(別薦)되어, 1747년(영조 23)에 내승(內乘)으로서 무과에 올라 훈련원 정(正)을 역임, 1752년(영조 28)에 통정대부로 승진, 경상 우병사가 되었다. 아들 참판공 동엽(東曄)의 추은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의 증직을 받았으며, 용력(勇力)이 절인(絶人)하여 그 이름이 이역에까지 떨치어 `비호장군(飛虎將軍)\'이라 일컬었다.
 배위 정부인 해평윤씨(1716∼1785)는 첨정 철(澈)의 딸이다.
재림(在林) 1817∼1878    파명:덕양군(德陽君)
  귀천군 충숙공의 9남인 봉흥도정 형좌(烱佐)의 10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외제(巍濟)의 7대손이다.
 음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배위 정부인 봉화정씨(1817∼1865)는 동인(東仁)의 딸이다.
정현(定鉉) 1796∼1858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공직(公直).
 양정공 기익(箕翊)의 6대손으로 1818년(순조 18)에 선전관으로 무과에 합격, 포도대장이 되었다.
 배위 정부인 원주원씨(1796∼?)는 부사 영상(永象)의 딸이다.
종림(鍾林) 1855∼1932    파명:덕양군(德陽君)
  봉래군 형윤(烱胤)의 10대손이며 양성공 지(至)의 9대손이고 좌랑공 기상(箕相)의 3남 시창(蓍昌)의 7대손으로 수사공 주봉(周鳳)의 증손이다.
 무과에 급제, 가선대부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배위 증 정부인 전의이씨(?∼1882)는 경로(敬魯)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여흥민씨(1861∼1904)는 경식(慶植)의 딸이며, 배위 정부인 김해김씨(1869∼1950)는 원실(元實)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