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왕 - 생애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생애

 숙종대왕(이하 숙종이라 함)의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며 효종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효종이 일찍이 꿈에 명성 왕후의 침실(寢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니, 바로 용(龍)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몹시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원손(元孫)을 얻을 좋은 징조이다\' 하고 미리 소자(小字)를 용상(龍祥)이라고 지어 기다렸는데, 과연 1661년(현종 2) 8월 15일 신유(辛酉)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숙종을 낳았다. 숙종의 효심을 행장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다섯 살 때 명성왕후(모후) 김씨가 산병(産病)이 있자, 왕이 매양 꿇어앉아 미음을 올리며 근심하는 빛이 안색에 드러나니, 명성왕후가 억지로 드시며 말하기를,
“네가 권하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내국(內局)에서 우락(牛酪) 즉 우유를 취하는데, 그 송아지가 비명을 지르자, 왕이 듣고 불쌍히 여겨 우락을 들지 않았으니, 그 인효(仁孝)한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현종이 몹시 사랑하여 특별히 조신(朝臣) 중에서 선발하여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김좌명(金佐明) · 김수항(金壽恒) 등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삼았다. 현종이 송준길을 인견(引見)하고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원자를 불러 나오게 하니, 원자는 송준길을 향하여 재배(再拜)하였다. 송준길이 현종 에게 절하며 하례하기를,
“원자의 읍양(揖讓)과 궤배가 정확하게 법도에 맞으니 만약 하늘 이 낸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숙종을 1667년(7세) 정월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숙종은 1669년(9세) 정월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에 참배하고 8월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여 선성(先聖)을 전알(奠謁)하였다. 이어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는데, 예를 차린 용모가 씩씩하고 엄숙하며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에 둘러서서 보고 듣 는 자가 모두 기뻐하였다.

 숙종은 1670년(10세) 3월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1671년(11세) 4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이었다. 이 때 숙종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였는데 궁료(宮僚)를 자주 접견(接見)하며 부지런히 강마(講磨)하 여 문리(文理)가 크게 통달(通達)하고 예덕(睿德)이 날로 향상되었으며, 빈사(賓師)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다. 왕비는 현종 2년 9월 3일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671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행하고 1674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74년(14세)에 현종이 병환이 나자 숙종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애태우며 옷을 입은 채 띠를 풀지 않았고, 병세가 위독하게되자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경건히 기도하게 하였다. 8월 18일 기유(己酉)에 현종이 승하하자, 우수(憂愁) 속에 상주(喪主) 노릇을 하며 수장(水醬)조차 들지 않고 반호(攀號)하 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니, 모시는 자가 차마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 못하였다.

숙종대왕 - 생애 (2)
숙종대왕 - 생애 (3)
숙종대왕 - 생애 (4)
숙종대왕 - 생애 (5)
숙종대왕 - 생애 (6)
숙종대왕 - 생애 (7)
숙종대왕 - 생애 (8)
숙종대왕 - 생애 (9)
숙종대왕 - 생애 (10)